오늘은 잠실동, 신천동, 풍납동, 천호동을 거치는 한강-탄천 두물머리에서 광나루 건너편, 그러니까 광진교 남단까지 길을 걷는다. 시간과 허리 상태를 살펴 끄트머리 부분은 유연하게 조정한다. 하루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한때 반짝 갠다는 기상정보 이야기를 듣더니 아내는 내게 조그만 삼단 접이 우양산을 건네주면서 말한다: 요즘은 남성도 양산 써요.

 

한강-탄천 두물머리로 다시 가보니 지난주보다 제법 수위가 높아진 게 확인된다. 곳곳에 출입 금지 표시가 있다. 가능하면 지킬 테지만 웬만하면 어길 생각이다, 늘 그래왔듯. 세상 이치가 그렇다. 공무원이 해야 할 일과 시민으로서 내가 선택하는 일 사이에 틈은 언제나 존재한다. 액면대로 납죽 엎드릴 필요도 없고 으레 그렇지 하며 톡탁쳐버릴 일도 아니다.

 

다른 어느 곳보다 탁 트인 느낌을 받으며 나아갈 때 내 눈은 역시 호젓한 길을 더듬는다. 대부분 사람이 다니는 편리한 큰길 아래, 또는 옆으로 난 콘크리트 소로가 지난주보다 더 연속성 있게 놓여 있어서 안정감을 준다. 얼마쯤 가다 보니 제3의 길이 나타난다. 콘크리트 소로 옆 길섶을 걸어서 낸 구불구불한 더 작은 흙길이다. 사뭇 삽상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 구불길은 물과 더 가까울 뿐만 아니라, 끝도 없이 늘어선 버드나무를 계속 마주할 수 있어서 고맙고 고맙다. 그 고마움을 찰나적으로 깨뜨리는 제4의 길이 있다. 한층 더 물 가까이 이끄는 길 아닌 길, 다름 아닌 낚시꾼 길이다. 보행 아닌 탐색 목적으로 걸은 발걸음이 쌓여 제법 도타운 흔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길이 갈 수 없어서 이런 길은 아연 신비롭다.


 

기이하게 생긴 버드나무며 버섯이며 들꽃에 취해 주위를 살피지 못한 채 한참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한강-성내천 두물머리에 닿는다. 그 만나는 풍경을 이리저리 살피며 기리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장소 앞에 우뚝 멈춰 선다. 은빛 철조망으로 둘러막고 적어 놓은 글이 있다: 이 장소는 상수도 취수 지역으로 깨끗한 아리수 생산을 위한 상수원 보호 구역입니다.


 

여기가 취수 지역이라고? 상수도 취수·정수 과정을 잘 알지 못하므로 상식적 판단밖에는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와락 의문이 든다. 아픈 체취를 역력히 풍기는 이곳 물이 내가 먹는 바로 그 물이란 말인데, 정수를 거친다 해도 얼른 수긍하기 어렵다. 수돗물에서 역한 염소(Cl) 냄새가 나는 까닭과 유관하다면 상수원이 팔당 어디쯤이라고 생각한 상식이 몰상식이다.

 

한참 동안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이윽고 묻는다: 물은 내게 무엇인가, 나아가 누구인가? 내가 물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면, 몸속 물 50%가 나갈 때 내가 죽는다면, 그보다 먼저 내 몸 70%가 물이라면, 내가 물 아닌가. 이게 진리고 과학 아닌가. 물은 비생명 물질로서 다만 몸을 구성하는 요소일 뿐이다, 가 맞는가. 물은 물일 뿐이다, 가 옳은가. 목마르다.

 

준비해 간 따스한 물을 삼가 부어드리고 나도 마신다. 제의와 동지 천명, 그리고 치유 행이다. 역한 냄새가 나더라도 서울 수돗물을 먹는 일이 시민 의식 아니다. 그 물을 정화하는 일도 시민 의무 아니다. 무엇보다 물 본성, 그러니까 생명 본성, 더 그러니까 세계 본성에 경의를 표하는 일이 먼저다. 차마 여기를 떠나면서 나는 물로 곧장 나아갈 길을 쟁인다.

 

아이고, 천추가 쑤신다. 허기가 맹렬하다. 불친절한 미로를 헤맨 끝에 천호동으로 나온다. 가도 가도 공구상뿐이다. 가까스로 천호역 근처 뒷골목에서 허름한 음식점을 발견한다. 광진교와 운명을 함께하면서 쇠락해진 이 마을 꼬불거리는 좁은 길 위에 서서 오늘 내 운명을 헤아린다. 이런 서사를 빚어가면서 는적는적 뭉그러지는 반제국주의자, 그 말로는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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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지만 비보다 땡볕 걱정하는 물길 걷기다 보니 일기예보를 꼼꼼히 챙긴다. 오전에는 개어 있다가 오후부터 국지성 소나기를 동반한 흐린 날씨가 이어진다는 소식이다. 달리 방도도 없고 해서 느지막이 잠원역으로 향한다. 거기 진입구로 들어가 한강 둔치를 따라 일단 탄천과 경강(京江)이 두물머리를 이루는 곳까지 가기로 한다.

 

잠원역 밖으로 나오면서 하늘을 보고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일기가 예보를 보지 못했나 보구나. 높이 솟은 파란 하늘에 덩달아 높아진 흰 구름은 일기예보와 말 맞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따금 잿빛 큰 구름이 오지랖을 펼쳐주고 바람이 부채질을 해주어 그나마 중도 포기란 말을 떠올리지 않게 만든다. 그래 한번 가보지 뭐.

 

잠원 변전소와 신반포 아파트 16119동 사이로 나 한강에 이르는 길은 본디 나룻길이었다. 이 나루터는 조선 임금들이 헌인릉, 선정릉 행차 때 이용했고, 도성 사람들은 봉은사 오갈 때 이용했단다. 송파 잠실리와 구분하기 위해 잠실리의 과 신원리의 을 따서 잠원이란 이름이 나중에 생겼으므로, 여기가 본디 잠실나루였다.


 

잠은 누에(). 누에를 길러 그 고치에서 비단을 자아내는 조선 국립양잠소인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이곳에 있었다. 나루로도 잠실로도, 서초구 반포동에서 강남구 개포동에 이르는 이 일대는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와 전혀 다른 이유에서 오늘날도 여기는 대한민국 최고 중요한 곳으로 군림한다. 땅값·집값으로 말이다.

 

반포동, 잠원동, 압구정동, 개포동은 대한민국에서 땅값·집값으로 1~4위를 차지한다. 여기 그런 아파트에 실제로 살거나 소유하는 부자 대부분은 뿌리 깊은 일제 특권층 부역자 후손 아니면 부역 정권 부동산 투기 광란에 편승해 일약 상류층에 합류한 떼거리다. 저들이 열어젖힌 흑역사를 부둥켜안고 누군가 가슴 칠 뒷날일랑 남아 있을까.

 

한남대교를 지나자 곧바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성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특권층 부역자 권력 집단과 토건 집단이 합작해 세운 부동산 왕국은 노회함으로 건재하다. 강 건너 최신 마천루를 쌍것 취급하는 오만이, 한물간 풍광 속에서 오히려 더욱 그 귀기를 증폭해 댄다. 때마침 저들이 사는 곳과 다른 지평선으로 가는 입구를 발견한다.



 

자전거길과 산책로를 붙여 만든 전형적 강변길, 그 아래다. 콘크리트를 깔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강 가까이 붙은 호젓한 길인데 걷는 내내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한다. 길은 이따금 물과 직접 닿을 수 있는 곳까지 귀띔해 준다. 곡진하게 물 모심을 하고 나면 그 길이 결국 끊어지고 만다는 사실과 마주칠지라도 그다지 섭섭하지 않다.

 

소담한 내 감사와 물을 소외시킨 부역 토건 종자들 행태를 에낄 수는 없다. 뭣에 쓰는지 모르는 시설 또는 인공물은 그렇다 치고 아는 것들조차 거의 예외 없이 유기·방치되어 있는 강변 살풍경이 점점이 펼쳐진다. 대부분 돈을 노리고 만들었으나 실패했다는 넋두리가 수런댄다. 이상한 콘크리트 더미에 홀렸다 빠져나오니 어, 탄천이다.


 

지하철 7호선 청담역에서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탄천-한강 두물머리 풍경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픈 물 몸 냄새가 자욱하다. 안간힘을 쓰며 물과 땅을 치유하는 다옥한 버드나무 숲이 아니었다면 나는 거기를 뛰어서 지나갔으리라. 두물머리를 잠시 살피다가 광나루까지 가려던 본디 여정을 포기한다. 탄천을 조금 더 걷는다.

 

탄천을 따로 걷는 일은 다른 기회에 맡기고 오늘은 양재천과 이루는 꼬마 두물머리를 거쳐 양재천 따라 조금 나아가다가 학여울역에서 마치기로 한다. 하구부터 얼마간 쭉 이어지는 도시 점령군과 마주한 탓에 무심코 꼬마 두물머리를 지나친다. 되돌아가서 찾지만, 모습을 선명히 볼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다음에 맞은편으로 가야겠다.


 

양재천 나머지 구간도 따로 걷는 기회에 맡기고 점점 무거워지는 허리를 추슬러 역으로 향한다. 정색하고 스스로 다시 묻는다: 제대로인 물 걷긴가? 반걸음 더 곱고 촘촘한 진실을 물으면 한 걸음 더 거기를 향해 내디디도록 팡이실이 춤이 초 인과로 약동한다. 혹시 물 본성 자체를 걷는 카이로스가 들이닥치는 찰나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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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 목마름 절정긴가 한다. 아마도 머지않아 끝날 테고. 단골 백반집에서 소주 두 병을 비우고 허든허든 집으로 간다. 막 씻으려 하는 차에 스마트폰이 부르르 떤다. 심욱보다: 선생님, 고동민이 왔어요! 그래 쌍차 고동민. 가온 아빠. 김정우네 <상도포차>에 있다니 가야지, 하고 서둘러 도로 집 나와 마을버스를 탄다. 떠들썩하다. 들어가니 얼싸안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난다. 모르는 얼굴조차 반가워 이름을 물어보는 찰나 수십 년 동지가 된다. 익히 아는 사람한테 더 가까이 아는 사람 안부를 물으면서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른다. 가까스로 고동민한테 와락 조은영 안부를 묻고, 주강이와 이창근 소식을 듣는다. 그렇게 왁자한 시간이 살 같이 흐르는가 하더니 나는 이미 내 방에 누워 있다. 숙취가 먼저 일어나 알람 제쳐 놓고 나부터 깨운다. 고동민도 심욱보도 사라진 새벽, 타는 목마름 넘어, 살피재 넘어 나는 한의원으로 향한다.

 

지하철에서 어제 기억을 더듬는다. 잘못 누른 딸랑 한 컷 사진이 불러오는 인연을 올올이 떠올리며 아픈 그리움을 피워낸다. 2009년 일거에 전 노동자 36%3,000명을 해고한 쌍용자동차 협잡, 거기에 항거하는 노동자들을 때려잡은 이명박 폭정은 노동 역사에 길이 남을 일대 사건이었다. 30명도 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보다 더 많은 공동체적 삶이 파괴당했으나 권력은 여전히 마지막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나는 당시 그들을 돌봤던 정신과 의사 정혜신에게 트위터로 연락해 알량하나마 곁에 있을 자리를 구했다. 집단상담 끝낸 노동자와 가족에게 침 치료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개별 상담을 하며 가장자리를 지켰다. 그들이 대한문에 있을 때, 부산 한진 김진숙을 향해 갈 때, 길거리에서 침을 놓으며 서성거렸다. 얼만큼 큰일이 마무리될 즈음 본래도 없던 이름이지만 끝내 이름 없이 그들 곁에서 나는 사라졌다.


 

가끔 그들 가운데 나를 찾는 이가 없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따금 김정우의 <상도포차>나 페이스북 앞을 지나치거나, 김득중·김정욱의 트위터를 만날 뿐 마주칠 일이 없었다. 오늘 다시 그들 중 몇 사람, 그들 곁에 있었던 벗들 몇과 재회하면서 정색하고 다시 내 삶 한 자락을 되돌아본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내게 누구였을까. 문득 얼마 전 작고한 홍세화 선생을 떠올린다. 그가 한겨레신문과 마지막 인터뷰한 기사를 읽다가 받은 충격 때문이다. 홍 선생이 진보 또는 좌파의 길에 고결이란 표현을 헌정했다. 정직하게 말한다. 나는 바로 그 대목에서 진보 또는 좌파가 이래서 망하는구나, 탄식했다. 고결이라니. 대체 이 중첩 식민지에 몸 섞어 살면서 차마 누가 고결을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고결한 사람은 이미 살해당했다는 프리모 레비의 고백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살아남은 모든 자는 저염(低染)하다.

 

나는 쌍차 해고 노동자가 스스로 고결을 추구했는지 알지 못한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적어도 나는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적어도 나는 저염하다, . 물론 내가 쌍차 해고 노동자만큼 탄압받지 않았으며, 홍 선생처럼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저염의 근거다. 그러나 내 저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이 땅에 대체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이 정직한 고백에서 비롯하지 않는 모든 진보 또는 좌파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 넓게, 이른바 순수를 떠드는 예술, 과학, 문화계 명망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결과 순수는 제국주의, 더군다나 그 식민지에서라면 오직 특권층 부역일 따름이다. 아직 숙취에서 덜 깨어난 탓에 내 말이 과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분명히 하건대 내가 멀쩡한 정신일 때에도 이 말은 취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순간에도 내 몸에서 배어나는 부역자 악취를 맡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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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여정이 멈추었던 여의나루역으로 간다. 여의도 구역 한강 둔치를 마저 걷고 샛강 지나 당산동과 양평2동 구역 한강과 한강-안양천 두물머리 둔치를 적당히(!) 걸을 예정이다. 안양천을 따라 얼마나 걸을지 잘 모르지만, 아직 온전히 가시지 않은 요통이 신호를 울리면 이내 걸음을 멈추기로 한다. 걷기를 중단할 수는 없지만 무리해서는 안 된다. 백세시대 운운하는 마케팅 서사와 무관하게 나는 이미 늙어가니 말이다.

 

여의도에서 선유도 맞은편 강변까지 물 가까이 난 오솔길이 호젓하다. 대개는 그 안쪽 편한 포장도로를 걷거나 자전거로 달리지만 나는 애써 그 오솔길을 찾는다. 물과 마주하고 가 닿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 길은 낚시꾼이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웬만한 사람들 눈에는 띄지도 않는 외진 곳곳에 낚싯대를 걸쳐 놓은 낚시꾼이 앉아 있을 수 있겠나. 그 오솔길은 끊일 듯하면서도 대개 이어져 있다. 걷는 내내 엄밀한 희락이 넘실거린다. 게다가 봐도 봐도 물리지 않는 버드나무가 끝도 없이 나타나 내 나무 본성과 물 본성에 맞장구를 쳐주니 오길 잘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장마철이라 수량이 늘어나 살짝 물에 잠긴 길을 걸을 때는 찰방찰방 물소리가 난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지낸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비 그친 웅덩이에 일부러 빠져 그 속에 담긴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망가뜨리는 재미를 만끽하곤 했다. 이 재미가 그리도 깨소금 맛인 까닭이 있다. 실은 웅덩이 속 하늘에 빠져 떨어지면 죽는다고 놀린 마을 어른 말씀이 끌고 온 공포심을 다 떨쳐내지 못한 채 딴에는 도전이라고 여기며 덤볐기 때문이다. 떨어져 죽기는커녕 무서운 그 하늘을 도리어 내가 부숴버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이없음을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추억이 하찮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평생을 두고 이런 서사의 나선 순환을 거치며 자라고 깨달아간다. 거짓말이라 하든, 속담이라 하든, 격언이라 하든, 율법이라 하든, 심지어 진리라 하더라도 그 서사에는 이른바 과학이 자랑하는 수학적·인과론적 지평 바깥, 또는 너머 무엇이 반드시 포함된다. 제국주의 초기는 물론 지금도 무지한 제국 시민과 그 부역자는 이런 진실을 인류학개념으로 단순화·극단화해서 핍박하고 살해하는 판이다.

 

아무리 최첨단 과학과 그 기술을 구가하면서 살아도 인간은 무지(어리석음)와 공포, 그리고 탐심에서 배어 나오는 주술 의존 본성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다. 첨단 과학기술이 빚어낸 작품인 최고급 자동차를 산 어떤 부자가 무사고를 기원하며 타이어에 막걸리 뿌리는 행동이 그리 기이하게 여겨지지 않는 정서를 대개는 공유한다. 유럽 0.1% 최상위 지배층의 100%가 주술을 숭배한다. 그 주술에는 시온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이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유럽 민속 인식 체계에 속한다. 과학으로 주술을 타파한다는 거짓말은 제국주의 기만전술이다. 아니, 투사 음모다. 이게 진실이다.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 (부부)가 주술 통치를 한다고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일급 지식인이 드디어 나왔으나, 파장은 크지 않을 듯하다. 당사자는 물론 지식인 권력 핵심에 있는 자들이 모두 그 주술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정치적 일급 담론 반열에 올릴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려면 주술 개념을 근원적으로 재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모든 미신은 주술을 구사하지만, 모든 주술이 미신이지는 않다는 진실부터 드러내야 한다. 미신적 주술은 주술의 힘을 인과 법칙처럼 속이는 거짓말에 담는다. 그래서 가짜다. 참 주술은 그 힘을 비, 아니 초 인과적 네트워킹, 그 동시성에 둔다. 그래서 진짜다.

 

더욱 중요한 분기점은 주술 개념이 현실화하는 사회적 과정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가짜 주술은 사적 이득을 추구하는 배타적·일방적 지향을 고수한다. 진짜 주술은 공동체 전체 안녕을 추구하는 호혜적·쌍방적 지향으로 번져간다. 가짜 주술은 제국주의가 이성과 역사와 과학의 이름으로 만들어낸 착취·살해용 경전이다. 진짜 주술은 제국주의가 인류로 몰아버린 범주 인류가 함께 만들어낸 공존·공생용 합의문이다.

 

성산대교 가까이서부터 길은 아연 살풍경이 된다. 자전거 도로 바깥, 그러니까 강 가까운 수직 벽 쪽으로 놓인 보행자 도로가 공포를 자아낸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과속하다 사고를 낼까 봐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보행자 도로를 수직 벽 끝 쪽으로 배치한 일은 수긍이 잘 가지 않는다. 이런 살풍경은 안양천과 두물머리를 이루는 곳까지 쭉 계속된다. 보행자로서 내가 느낀 공포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태까지 강물을 걸으면서 일관되게 지녔던 느낌의 연장이다. 인간과 자연을 이간하고, 시공자나 소유자 편의 위주로 무례하게 자행한 토건 풍경에 대한 분노 말이다.


 

이런 토건과 가짜 주술은 본성이 같다. 부역 권력이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집어던지는 가짜 주술은 얼마나 물과 사람 위를 휘저으며 내달리는 콘크리트 길을 닮았는가. 두물머리 돌아 안양천으로 접어들 때는 마침내 그동안 밑으로 지나온 아홉 개의 다리, 올림픽대로, 아찔한 램프(ramp)들이 나뿐 아니라 강물도 제압해 버리는 거대한 다족류 괴물로 상상된다. 중랑천에 비해 폭은 좁지만 깊어서 유유해 보이는 안양천이 마치 주눅 들어 괴괴히 흐르는 듯하다. 안양천을 1km도 채 걷지 못한 상태에서 걷기를 중단하고 벌벌 떨며 양평교를 건너 신목동역으로 간다. 아무래도 더 걸으면 안 되겠다, 오늘은.


 

크게 아쉽지는 않다. 주술과 토건 이야기가 갈마들며 속을 흔들었지만, 어차피 반제국주의 전선에서 마주쳐야 할 일과 마주쳤고 도리어 더 넓혀야 할 지평 한 자락을 보았으니 고맙다. 아내와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매혹적인 버드나무 오솔길을 걷어 물 모심도 했으니 더 고맙다. 지하철로 이동해 광화문 와서 바다 이야기를 담은 책 하나 품은 뒤 교보 뒤 한적한 거리공원에 앉아 무료를 즐긴다. 안 하던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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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대권 님이 시민언론 민들레에 쓴 글을 그대로 싣는다




얼마전 열린공감TV에서 굥짜장 썰뎐 24: 죽은자의 영혼을 제물로라는 동영상을 보고 깊은 충격에 빠졌다. 동영상이 공개된 지 꽤 되었지만 그것을 입에 올리는 지식인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도 살아있는 권력을 다룬 것이라 두려웠거나 아니면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영적 세계를 다룬 것이라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유튜브 방송의 선정성 여부를 떠나 그 동영상을 보고 나니 그동안 의문투성이였던 대통령 부부의 행적이 일목요연하게 이해되었다. 갖은 핍박 속에서 동영상을 만든 열린공감TV의 취재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후보 시절 손바닥에 자를 쓰고 나와 팔을 휘두른 일, 특정 숫자에 집착하는 일,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이전한 일,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식에 초대받아 영국까지 가서는 문상을 거른 일, 살아있는 소의 껍질을 벗겨 제사를 지내는 장소에 연등을 단 일,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장소에 지은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일 등등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일들이 모조리 이해되었다.

 

그 동영상에 따르면, 그러한 행위의 배경에 주술이 있는데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토착 주술이 아니라 일본에서 건너온 주술이라는 것이다. 하긴 이 땅에서 태어나 70년을 살았어도 듣도 보도 못했던 일이라 의아하긴 했었다. 우리나라 주술은 괜찮고 일본 주술은 나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저들이 맹신하는 일본주술에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있어서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을 희생시켜 나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성공 배경을 생각하면 이런 주술에 빠져있는 것이 백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주술이란 초자연적 힘을 빌어 내가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할 때 사용하는 술수를 말한다. 주술은 나라와 지역마다 매우 다양하게 분포하는데 가장 공통적인 것은 신(귀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면서 소원을 빌거나 액운을 면케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구약성서에도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내용이 나오고 우리 고전 소설 심청에도 성난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인신공양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역사적으로 인신공양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은 멕시코 지역의 아즈텍인들이 신전에 바친 인신공양이었다.

 

그러나 생명과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지면서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산 제물을 바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우리나라도 제사 때 삶은 돼지머리를 올리는 것이 그나마 남아 있는 희생제물의 흔적이다. 이런 판국에 살아있는 소의 껍질을 벗겨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엽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전통에 이런 사례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바가 없고 일본 민속에 소와 말을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은 발견된다. 이들은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되도록 끔찍하게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것이 더 효험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죽은 영혼들이 산 자의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고지에 지은 아파트에 들어가 산다든지, 혹은 조선시대 때 공동묘지였던 용산에 대통령실을 만들어 들어간다든지 하는 것이 그렇다. 우리 풍수에서는 사람이 죽은 터에 들어가 사는 것은 일종의 금기사항인데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일본은 워낙에 전란이 많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사람이 많이 죽은 곳에 성이나 사찰을 짓는 일이 많다. 죽은 자의 영혼이 자기를 보호해 준다고 믿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부모가 죽으면 유골분이나 위패를 집안에 모시는 것도 비슷한 논리이다.

 

대통령 부부가 일본식 주술에 빠져 있어서인지 주변에 친일파들이 꼬여든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고위직 명단을 보면 검사 출신 아니면 친일파가 압도적으로 많다. 대통령 부부의 스승이란 작자는 아예 대놓고 일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이들의 꿈은 어쩌면 일본과 한국이 하나의 나라가 되어 자신들만은 여전히 지배자의 위치에서 자손 대대로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들은 일제 강점기 이래 지금까지 지배자 위치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하지만 1980년대 이래 민주화 운동이 거세어지고 심지어 운동의 주역들이 정권을 잡는 일마저 벌어지자 심기일전하여 일본 주술에 빠진 주태백을 대통령 자리에 앉히고 만 것은 아닌가.

 

대통령이 된 뒤 윤석열 부부가 청와대를 거부하고 용산으로 간 이유 역시 주술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윤석열이 용산행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이유에는 주술 외에 스승 천공과 주한 미군사령부의 존재가 있다. 정치 문외한이라는 그가 대통령으로서 의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비빌 언덕이다. 주술사인 스승과 영원한 동맹인 주한 미군사령부 곁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이 그가 선택한 용산이란 땅의 지정학적 내력이다. 용산은 역사 이래로 외국 군대가 이 땅을 침략했을 적에 수도 서울을 장악하고 반도 전체를 감시하기 위한 주둔지였다. 4대문 밖이라 민초들과 섞일 염려도 없고, 코앞에 한강이 있어 배를 타고 어디든 갈 수가 있다. 13세기 말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원나라 군대의 주둔지였으며, 임오군란 때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같은 곳에 주둔했으며,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 군대가 바로 그 자리에 들어섰다가, 일본 패망 후 미군이 대신 들어서서 지금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외국군이 한반도를 침략하면 반드시 장악해야 할 지정학적 적소였던 곳이다. 일제는 그곳에 사령부와 병참기지 및 조선총독부 관사를 두었다.

 

나는 한미연합사가 창설되던 해에 그곳에서 군생활을 했다. 매일 남의 나라 깃발이 내걸린 연병장을 오가며 식민지의 비애를 곱씹곤 했다. 그날, 한미연합사 창설 당일 나는 수백 개의 별들이 모여있는 행사장 외곽에서 권총을 차고 경호업무를 해야 했다. 윤석열은 이런 역사를 알고 갔을까? 그는 왕이 되기 위해 용산으로 갔지만 실은 점령군이나 식민지 본국의 총독으로 그 자리를 찾아간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주술과 장소와 인물이 어우러져 블랙코미디 같은 정치극이 벌어지고 있다. (: 한미연합사는 20221115일 평택 미군기지로 이전 완료했다. 그날 기념행사 축사에서 윤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전 장병은 라캐머라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팀(One Team)이 되어 한미동맹의 심장인 연합사가 더욱 활기차게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길 당부드린다." 사령부가 이전했다고 해서 미군이 아주 철수한 것은 아니다. 사령부의 핵심 인력이 여전히 용산에 남아 있을 것이고, 주한 미대사관도 가까운 장래에 그 언저리로 이사 올 계획이다.)

 

주술에 빠진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국민청원이 2주도 채 안 되어 100만 명을 넘었다. 기록적인 수치. 하지만 별다른 상황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정상적인 정치인이라면 제정신이 아닐텐데 윤석열은 무척 태평스럽게 보인다. 이미 이런 일을 예상하고 주술적으로 대처해놨기 때문이다. 스승이, 오방신이 지켜주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으랴!

 

그러나 그 주술적 대처가 과연 효과가 있을지 어떨지를 떠나 탄핵을 바라보는 국민 전체가 대통령 부부보다 더 심각한 주술에 빠져있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경제성장이라는 주술이다. 경제성장 주술에 한 번 빠지면 백이면 백 출구를 찾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윤 정권이 당선 이후 줄기차게 외치는 부자 감세규제 혁파는 경제성장 주술에 빠진 이들을 달래는 조처이다.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이들은 법적으로 치명적 하자가 없이 경제성장 주술을 적당히 읊조리는 것만으로 정권 유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 어찌하여 경제성장에 대한 믿음이 주술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제성장이라는 신념은 주술의 요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다. 주술은 주술사와 신자, 주문(呪文), 주구(呪具), 주술 행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술사는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기업체 총수이고 신자는 고객들이다. 이들이 온갖 광고를 통해 주문(呪文)을 외우면 고객들은 해당 상품을 주문(注文)한다. 주구는 상품 유통과 관련된 모든 설비와 장치를 말하며, 주술 행위는 판매 촉진을 위한 각종 이벤트나 판매행위를 뜻한다. 이 과정이 원활히 진행되면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이는 곧 고객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주술의 내용이다.

 

경제성장 주술이 현대인을 사로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술에도 계보와 역사가 있다. 이 주술은 처음부터 주술로 개발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특정 계급의 사람들이 자신의 상업활동을 가로막는 구체제를 타파하기 위해 갖은 무도한 짓을 벌이다가 점차 힘을 얻게 되자, 용하다는 주술사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정교한 신념체계와 주술행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대표적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는 이기심이야말로 인간의 행복 실현을 위해 신()이 내려준 국부의 원동력이라고 갈파함으로써 단순한 성장 이론을 주술로 격상시켰다. 사람들은 하찮아 보이는 개인의 상업활동이 주문만 잘 외면 어마어마한 부를 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야말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으로 권력까지 장악한 다음 국경을 넘어 무자비한 부의 사냥에 나섰다. 이 주술의 특징은 나의 이익만 잘 챙기면 보이지 않는 신()이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란 믿음이다. 가난에 지친 민초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다. 당장에 사람들은 오랜 세월 자신의 행동을 옭죄고 있던 종교를 걷어차고 이 새로운 주술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주술은 종교처럼 복잡한 의식이나 규정, 교리, 사제 계급 같은 것이 없다. 좋아하는 주술사의 말만 믿고 자기 이익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주술은 거의 기성 종교를 대체할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의 경우 주술사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등은 죽어서 신이 되었고 이들을 따르는 신자들이 한국 보수정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민주화운동 경력을 내세우는 민주당이 아무리 다수 의석을 차지해도 한국사회의 보수적 기조는 변하지 않는다. 주술은 형성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회에 대한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돈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며 사는 게 장땡이다. 이 주술의 핵심 가치는 자유인 바 자유의 다양한 측면은 다 무시하고 오로지 돈 버는 자유만을 추구한다. 그 결과 부자는 많아졌지만 세상 인심은 그만큼 고약해졌다.

 

돌이켜보면 경제성장 주술의 창안자들은 기실 기독교를 주술화하여 중세 암흑기를 이끈 사람들의 후예이다. 그들은 주술화된 종교에서 배운 것을 돈 버는 일에 적용하여 대성공을 거둔 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 기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샤머니즘도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 국가 이데올로기였던 불교와 유교의 탄압 아래 먹고 살기 위해 저잣거리에서 얄팍한 주술로 사람들의 주머니를 노리다가 지금은 아예 종교나 철학의 면모를 잃어버리고 주술로만 인식되고 있다.

 

대통령 부부가 빠져있는 것도 이 계열의 주술로 보인다. 게다가 우리와는 풍토가 다른 일본 신도(神道) 전통에서 만들어진 주술을 들여와 일인들이 주장하는 내선일체에 앞장서고 있다. 나는 언젠가 페이스북에서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며 일인들이 우리를 동등한 시민으로 인식하고 대우해 준다면 굳이 내선일체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썼더니 한 젊은이가 일본인의 상식을 믿으시고 지금부터라도 마음 놓고 친일하세요라고 댓글을 단 일이 있었다. 이 정도로 일본이 우리 안에 깊이 들어와 있었나? 놀라면서 대통령의 일본 주술이 결코 예외적 일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주술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기만 하다면 구태여 이런 글을 쓸 필요가 없다. 개인적 차원의 주술은 잘못되더라도 피해가 개인과 그 주변에 한정되지만, 더 큰 범위에 적용되는 주술은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특히나 경제성장 같은 주술은 비록 행위는 개인적일지라도 그 후과는 글로벌 차원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더더욱 깊이 생각해야 한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지구촌 대부분 나라는 어떻게 빨리 경제성장을 해야 할 것인지가 가장 큰 과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성장의 결과로 나타난 기후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다. 사실 경제성장을 그만두면 기후가 좋아진다는 것을 코로나 사태를 통해 확인한 바 있지만, 이미 주술에 푹 빠져버린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하면서도 기후위기를 극복할 방도가 없을까 하고 잔머리를 굴리고 있다.

 

문제를 일으킨 원인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결과만 제거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것을 실현하려면 그야말로 초자연적 힘이 필요하다. 주술에 빠져 이런 결과를 맞이했는데 이를 극복하려고 또 다른 주술을 도입한다? 주술의 악순환에 빠진 이들이 결국 당도하는 곳은 패가망신이나 국가 부도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례가 있다. 이스터섬의 비극이나 나우루 공화국의 몰락이 좋은 예이다.

 

주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이다.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그만두면 굶어 죽거나 혹은 이웃 나라의 노예로 전락할 것으로 예측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중독 치료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으면 금단현상으로 인해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 기간을 어떻게 해서라도 견뎌내면 알코올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경제성장도 마찬가지다. 경제성장을 그만두면 당장에 생활 수준이 떨어진다. 개인의 생활수준 뿐 아니라 국민 세금으로 만든 모든 시설의 관리수준도 떨어진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삼류 국가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정신은 주술에 사로잡혀 있는데 수준만 떨어지면 삼류 국가가 맞다. 그러나 정신 수준을 높이고 물질 수준을 낮추면 일류니 이류니 하는 구분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의 사회가 나타난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찌 보면 이중의 주술에 걸려있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더 모를 것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 모두가 주술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 부부에게 주술에서 깨어나시오! 하고 호통칠 수 있다.

 

사실 대통령이 빠져 있는 주술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다.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냉각수를 바다로 방류할 때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면서까지 지지한 것은 그가 빠져 있는 이중의 주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주술행위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나 동아시아 역사에서 일본의 경제성장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는 듯 보인다. 일본은 장기 침체에 빠진 자국 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후쿠시마 사고 여파로 중단된 원전을 소리소문없이 재가동하고 있다. 냉각수 방류는 그를 위한 일차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이다. 경제성장 신화를 쓴 일본 극우 세력과 정서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는 윤석열이 일본식 주술에 빠져 일본의 성장이 곧 한국의 성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탄핵도 좋지만 지금은 주술을 깨는 일이 더 급하다. 윤석열을 끌어내린다고 해서 파괴적인 주술행위가 중단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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