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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른 차이를 지니게 됩니다.
 키 큰 사람이 있으면 작은 사람도 있고, 뚱뚱한 사람이 있으면 마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부가 흰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르기만 한 걸까요?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만 있고 닮은 점은 별로 없는 걸까요?
 물론 모든 사람이 차이를 갖습니다. 하지만 우 리 서로는 다른 만큼이나 닮아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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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이상의 병사가 빠져나가자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샤를 3세 부르봉 공작 res III: Duke of Bourbon은 당황했다. 이대로가만히 있다가는 전체가 탈영한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대구나 황제 카를 5세가 내린 로마 공격을 여기서 중단할 수도 없는노릇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샤를3세는  임금을 받지 못해 분노하고있던 병사들의 마음을 휘어잡기 위한 방편으로 로마를 점령하면 마음껏 약탈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노략질을 염두에 두고 2만 명의 군대가 로마로 행군하는 사이에도 임금을 받지 못한 병사들이 계속 탈주했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산적과 강도가 군대에 합류했다. 르네상스의 중심지이자 1000년 넘게 가톨릭교도의 성지였던 로마에서 금은보화를 약탈하여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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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쓰시다 선생님이 저만치 앞에 걸어오는 게 보였다. 선생님을 보자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밥자루!"
나도 모르게 선생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런 건방진 조센징! 또 네 녀석이구나! 학교에서 감히 조선말을 입 밖에 내다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선생님이 차고 있던 칼집에서 긴 칼을 획 잡아 뺐다 빠르게 넣었다. ‘착착‘ 소리가 났다. 선생님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표시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선생님이 벼락같은 손놀림으로 내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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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이 사는 모습은 이를 목격한 중국인 허웨이가 보낸 편지가 황성신문에 실리면서 조선에 알려졌어요..
"멕시코 이주민의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어요.
조선인이 여러 용설란 농장으로 흩어져 일할 때 부인이 아이를 팔에 안고 혹은 등에 업고 길가를 돌아다니는 모양은 참으로 소, 말과 같고 보는 이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조선인은제일 등급이 낮은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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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정부의 조직 개편과 김구의 등장-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될 당시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는 안창호가 뽑혔어. 하지만 이승만은 상하이에 오지 않고 미국에서 임지 정부 직제 (직무나 직위에 관한 제도 )에도 없는 대통령 행세를 했지. 그래서 초기 임시 정부는 한동안 안창호가 이끌어 갔어. 그런 가운데 1919년9월 임시 헌법을 개정해 임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자 이승만은 그 이듬해인 1920년 12월에 상하이로 부임해 왔어.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이전부터 국제 연맹에 청원서를 내어 우리나라를 위임 통치해 말라고 요청한 적이 있어. 이러한 이승만의 외교 노선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불만이 매우 많았지. 우리나라를 대신 통치해 달라고 남의 나라에 부탁하다니 불만이 많을 수밖에. 특히 무장투쟁을 주장했던 이동휘, 신채호 등의 불만은 더욱 거셌어. 신채호는 이승만의 위임 통치 요청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어.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은 존재하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되찾기도 전에 팔아먹었으니 더 큰 역적이란 말이오.
게다가 이승만은 미주에서 거둔 후원금을 자기 마음대로 썼다는 의혹이 있어 그러니 임시 정부 요인들 사이에서 불신과 갈등의 골이 깊어기에 이러한 일들로 무장 투쟁론자인 이동휘 같은 사람은 결국 상하이임시 정부를 떠나 본거지 연해주로 돌아가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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