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행복하라 -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21가지 행복 습관
마르시 쉬모프.캐럴 클라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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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 책은 그 책을 읽을 당시의 마음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게 다른것 같다.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일으킨 베스트셀러 책이 내겐 도움이 안될때도 있고, 많이 읽히지 않은 책을 보다가도 어떤 한 구절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건 이런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내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내 안에 있던 분노,자격지심,패배자 같은 마음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나아갈수 있다는 작은 용기와 파이팅을 심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찾게 되는것 같다. 

'이유없이 행복하라'라는 제목이 시선을 확 끄는 이 책은 내용면에서 만족스러움을 주었다. 저자가 인터뷰한 100명은 인생의 행복에 대해서 알려주었는데, 그 인터뷰를 통해 공통된 습관이 있음을 발견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행복을 얻은 사람들의 비결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비결은 어렵고 얻기 힘든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 상태에 따라,노력에 따라 얻을수 있는 것들이었다. 

세상은 분노로 넘쳐나고 있다. 사람들은 쉽게 타인을 미워하고 증오한다. 화해와 용서, 연민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그게 쉽다면 아마 이런 책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먹는다는게 어렵기 때문에,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행복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요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리고 행복을 느끼게 되는 횟수도 다를 것이다. 행복하려면 무엇을 해야한다 라는 공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자신의 행복지수를 스스로 만들수 있다는 뜻이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느낄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질 높은 삶이 또 있을까? 어떤 이유를 만들지 않아도 항상 행복하다면 이 책의 제목처럼 '이유없이 행복할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따뜻한 미소에, 도움의 손길에 행복을 느낄수 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누구는 불행을 생각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희망을 보게된다. 그건 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수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행복을 찾을수 있는 기회가 와도 평소처럼 불행의 습관을 반복하고 있다면 결코 행복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행복도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걸 알게됐다. 이유없이 행복해지는것이 빈말도,내가 접하기 어려운 일도 아님을 알게됐다. 행복의 습관을 들일수 있는 용기와 꾸준한 노력이 내게 필요하다는걸 다시 한번 알려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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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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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밝은 미소를 띄우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치열한 삶을 살아가던 아름다운 사람 장영희. 그런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TV뉴스를 통해 알게 된 날, 안타까움과 슬픔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어야만 했다. 선생님의 말대로 나쁜 운명을 깨우지 않기위해 살금살금 걷지않고 쿵쾅쿵쾅 저벅저벅 당당한 발걸음으로 살아와서일까? 소아마비라는 장애뿐 아니라, 암은 그녀에게 끊임없는 투병과의 싸움을 계속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녀를 하나님의 곁으로 데려가버렸다. 야속하게도 말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암환자 장영희'로 비쳐지기를 싫어했듯이 나 또한 선생님을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오고 암과 싸워온 교수로 생각하지 않으련다. 그리고 더이상 슬퍼하지 않을것이다. 짧디 짧은 인간의 삶이지만 그래도 이 지구에 왔다간 흔적을 남기고,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던 선생님의 바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가족,지인,친구들 뿐 아니라 수많은 독자들이 그녀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몇십년이 흘러도 그녀의 글과 메시지는 잊혀지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독자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장영희 선생님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소위 지식인들이 으레 내보이는 권위의식이 없고 소탈하고 인간적이라는데 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녀만큼 허레의식과 체면치레가 없고 자신의 모든것을 내보이며 글을쓰는 사람도 드물었다. 특히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의 단점을 밝힌다는건 분명 쉬운일이 아니다. 내가 만약 그녀라면, 그러니까 유명하고 실력있는 영문학 교수에 수필가에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 자신을 좀 더 완벽하게 포장했을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게으름과 건망증, 무위의 재능(아무것도 하지 않을수 있는 능력이 넘친다는 뜻)을 거리낌없이 글의 소재로 삼았다 또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이 너무 게으르고 이기적이어서 라고 말한다. 그뿐인가. 자신의 마음속에는 가끔씩 평화를 싫어하고 오히려 분란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도깨비가 살고있다고 밝힌다. (내게도 이런 도깨비들이 살고있고 불쑥불쑥 튀어나올때가 있다) 이처럼 선생님의 글을 읽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성격들이 너무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아! 선생님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나처럼 한없이 게으르기도 하고 약속시간에 늦기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을때의 경험과 느낌을 소상히 적은 대목에선 울컥 눈물이 났다. 선생님은 그때를 '내 자유의지와 노력만으로 이길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사실이 불공평하게 느껴졌고, 오로지 건강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우월감을 느낄 사람들이 미웠고, 동정이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다' 라고 고백한다. 이 이유들이 가슴속에 콱 박혔고 그 심정이 이해가 됐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것이다. 사람들의 계속 되는 위로와 안타까운 표정은 투병 생활을 더 힘들게 만들었을테고,무엇보다 선생님의 말대로 자존심이 상했을테니까. 왜 하필 내가? 라는 의문도 계속 들었을테고 말이다.

그런 힘든 상황을 겪어온 그녀였기에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을 더 노래했는지도 모른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게, 찬란하게 피어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본다는게,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살을 부빌수 있다는게,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고 내 일을 할수있다는게 얼마나 축복된 일이고 감사해야할 삶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면 헛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늘 반반의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열심히 살아간다'고 말한 것이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으로 이별할때 그 아픔은 표현할 길이 없지만, 한가지 위안이 있다면 어쩌면 그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 언젠가 좀 더 좋은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입니다'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을 믿는다. 그리고 선생님이 남기신 모든 글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고 살만하게 만들거라는것도 믿는다. 인간의 '선함'을 믿었고 그 본성이 세상을 살만하게 유지시켜준다고 준다고 했던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살면서 나쁜 운명이 나를 덮치겠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고 이겨내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운명이 오리라는것도 이젠 안다. 아니,잘은 모르더라도 그렇게 믿고 이 한 세상을 살아야겠단 결심이 생긴다. 장영희 선생님이 살아온 날도 기적이고,살아갈 날도 기적이라고 믿었던 것 처런 나도 그렇게 믿고 살련다. 이렇게 아침 햇살을 맞으며 깨어나고 사랑하는 이 들과 웃으며 삶을 즐길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기적인지를 너무도 잘 알게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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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1
미우라 시온 지음, 윤성원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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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껏 달려본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아무 생각없이 바람을 가르며 뜀박질했던 행복했던 나는 어디에 있을까. 학창시절엔 친구들과 참 많이도 뛰어다녔었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가 좋아서, 뛰면 뛸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좋아서, 뛰고 난후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보여서 달리는게 좋았다. 달리기는 어떤 운동기구도 필요없고 그저 튼튼한 두 다리만 가지고 있으면 가능했다. 그래서 참 많이도 달렸었는데 사회인이 되고나니 내 두 다리는 멈춰버렸다. 운동할 시간이 있으면 10분이라도 더 자는게 좋았으니까. 그래서 달리기의 즐거움을 잊고 살았다.

그리고 난 지금 다시 달리고싶단 강한 욕망이 생겼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있다]를 읽고나서 부터다.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젊은 청춘들의 달리기를 보고있자니 잊고있었던 즐거움이 생각났고, 책에 몰입하면 할수록 나도 같이 뛰는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나도 느꼈었는데 라는 회상도 하면서 말이다. 달리는건 그저 마음만 먹으면 할수 있는건데 왜 난 그동안 그 즐거움을 애써 외면해왔을까.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고 기운이 없다는 이유로 인생의 행복 중 하나를 스스로 포기했던 거였다. 이젠 달려보고 싶다.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새벽 공기를 가르고 싶다.

가케루는 달리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육상 선수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폭행사건에 휘말리면서 육상부에서 퇴출당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 일만 없었더라면 가케루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탄탄대로를 걸었을것이다. 물론 강압적인 분위기와 다른 선수들의 질투를 견뎌내며, 달리기의 즐거움을 모른채 살았겠지만. 그런 가케루에게 인생 최대의 사건이 벌어진건 편의점에서 빵을 훔쳐 달아나던 그날 밤 이었다. 가케루가 달리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기요세는 바로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알게 된 것이다.

부상 때문에 예전처럼 달릴수 없게된 기요세에게 최대의 꿈은 '하코네 역전 경주'에 나가는 것이었다. 총 10명의 선수가 뛰어야하는 경주인데 딱 한명의 선수가 모자라 신청할수가 없었는데, 그러던차에 달리기에 재능이 있는 가케루를 보게 된 것이고 기요세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기요세가 살고있는 지쿠세이소엔 그를를 포함해 총 9명의 간세 대학 하숙생들이 있었고 가케루가 합류하면서 10명, 즉 경주에 나갈수 있는 인원이 되었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이 달리기를 할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기요세의 반 협박과 구슬림에 넘어가 얼떨결에 경주 선수가 된 것이다.

쌍둥이 조지와 조타, 담배를 많이 피는 니코짱, 만화책만 보느라 체력이 꽝인 왕자, 흑인 유학생인 무사, TV퀴즈쇼에 열광하는 킹, 머리가 좋은 유키, 시골에서 올라온 신동, 그리고 가케루와 기요세가 바로 새로 만들어진 팀의 선수들이었다. 누가 봐도 오합지졸에 성공가능성은 50%도 안돼보인다. '하코네 역전 경주'는 풋내기 아마추어들이 도전할 일이 아니었다. 오랜세월동안 달리기를 해온 선수들도 탈락하는게 부지기수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곳에 지쿠세이소 하숙생들이 참가하겠다는건 그야말로 무모한 도전이었고 죽음의 레이스였다.

이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좀 하다가 그만둘 생각이었고 열정도 없었다. 하지만 기록이 좋아지면 질수록 이들의 열의는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의 응원도 한몫했다. 특히 가케루를 못마땅하게 보는 타 대학 선수의 노골적인 비웃음이 기폭제가 되어 이들의 단결심은 더 견고해졌다. 절대로 그들에게 질수 없다고,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목표했던 지점에 골인할수 있을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이틀 연속으로 진행되는 '하코네 역전경주'는 선수 10명 모두의 땀과 노력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가장 잘 달리는 가케루와 가장 못 달리는 왕자나 흘리는 땀과 노력은 같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게 바로 역전 경주가 주는 감동이다. 1등이 아니면 달리는 의미가 없고, 빨리 달리는것만이 진정한 달리기가 아니냐는 의문에 기요세는 이렇게 대답한다. 장거리 선수에게 가장 큰 찬사는 빠르다가 아니라 강하다 라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강인함을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처음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던 선수들은 '하코네 역전 경주'를 하면서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달리는 모습에 감동 받은 나 또한 부르르 전율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산다는것도 강인함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속도에만 신경을 쓰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건 강인하게 사는게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이 뛰는 속도에 신경쓰지 않고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나만의 길을 묵묵히 달려나가는것 말이다.

달리기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 하게 만드는, 가볍게 읽을순 있지만 그 내용의 무게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런 책이다. 거기다 무작정 달리고 싶게 만드니 새로운 즐거움과 동기를 얻으며 책을 덮었다. 다른 분들도 이와 같은 체험을 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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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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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카스트제도는 국가의 대대적인 정책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직도 카스트제도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을 받고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3500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 인도인들의 의식을 지배해 온 카스트제도가 한순간의 정책으로 사라지는건 어찌보면 불가능하다. 그로 인한 비극적인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전 세계적으로 규탄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아직도 그 잔재가 뿌리깊이 박혀있는것이다. 상류층 여자가 신분이 낮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자 명예를 더럽혔다며 여자를 살해하는 인도의 슬픈 현실. 카스트제도가 없었다면 이 연인은 행복한 사랑을 했을것이다. 태어날때부터 정해진 계급의 굴레에 갇혀 살아가는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카스트제도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그들은 가장 천한 계급으로 심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다. 교육을 받을 기회도 차단된채 마을의 허드렛일을 하고 그 대가로 음식을 구걸해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어떻게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살수 있었을까. 어째서 몇천년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온갖 차별을 견뎌내고 참을수 있었을까. 짐승이 자유롭게 먹는 물도 이들에겐 허락되지 않았을 정도니 살아간다는게 힘겨운 전쟁이었을 것이다. 불가촉천민 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던 꿈은 얼마나 많았을지, 인간이 아닌 더러운 물건 취급 당하면서도 화를 억눌러야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은 얼마나 뜨거웠을지를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런 불평등 제도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암베드카르 박사였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엔 나렌드라 자다브의 부모님인 '다무'와 '소누'가 있었다. 다무의 어머니와 소누는 불가촉천민인 자신의 인생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다. 조상들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도 당연히 감내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무는 이런 취급을 받는것에 절대로 동의할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아이들과 미래의 후손들을 생각하니 반드시 불가촉천민의 굴레에서 벗어나야함을 깨달았다. 힌두교를 믿지만 자신들에겐 사원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가만히 보고 있을수 있는가.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투쟁해 자유를 쟁취하는게 덜 고통스러운 길 일것이다. 

이 책은 바로 아버지 다무와 그런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 이해해준 소누의 이야기이다. 자다브의 성공 스토리와 자서전 형식일줄 알았기에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부모가 있었기에 자다브가 성공할수 있었음을 알게됐다. 불가촉천민 출신이면서도 인도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차기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자다브는 부모 세대의 투쟁이 있었기에 성공할수 있었다. 또 자다브는 부모님이 가보지 못한 사원에 환대를 받으며 출입하게 됐는데 이는 참으로 감동스러운 일이었다. 얼마전 TV 에서 만난 그는 부인과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 가 맛있게 식사를 했는데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불가촉천민 출신이라는 점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아 보인다. 

물론 카스트제도가 완벽히 사라진건 아니다. 사람들은 은근히 그가 불가촉천민 출신임을 알려주고 캐내려고 한다. 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카스트제도로 인한 고통을 받고있다. 가난하고 못배운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해왔던 일을 그대로 하고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편견의 눈초리를 받고있다. 하지만 다무와 소누 같은 사람이 있는 한, 나렌드라 자다브같은 사람이 계속 나오는 한 '카스트제도'라는 구시대적인 제도는 사라질 것이다. 자신들의 인생을 옭아맨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한 암베드카르 박사처럼 제 2의,제 3의 투쟁자들이 계속해서 나온다면 '평등'이라는 말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것이다. 그 날이 멀지 않았다고 믿는다. 꿈과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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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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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낯선 나라인 과테말라. 그곳에서 오랫동안 벌어진 내전을 난 알지 못했다. 뉴스를 통해 몇번 본적은 있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고 한귀로 흘려보냈었다. 그러다 이 책을 읽고나서야 그 끔찍한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게됐고 온 몸에 소름이 돋을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사소한 일에 불평하고 불만을 쏟아내는 동안 과테말라에선 인종청소와 함께 죄없는 목숨이 사그라들고 있었던 것이다. 36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 벌어진 전쟁. 지구는 또 하나의 전쟁을 통해 많은 피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평화 라는 말은 단지 이상주의자들이 하는 말일까. 동화책 속에서만 발견할수 있는 단어인걸까. 전쟁에 관한 기록을 볼때마다 '인간은 대체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지 못하는걸까'라는 자괴감이 밀려든다. 희망의 씨앗이 싹 틔는 모습을 발견하면 무참히 짓밟고 파괴와 탄압이라는 씨를 뿌리는 그들. 이성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살육과 약탈만이 가득한 그곳. 바로 거기에 나무소녀가 있었다. 보지 않아야 것을 보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경험하지 말아야 할 일을 겪었다. 너무도 끔찍하고 잔인해 눈을 질끈 감아버리게 만드는 그 모든것을 겪어야만 했다. 

작가는 말머리에 "하기 힘든 이야기를 용기를 내어 들려준 실제 나무소녀에게 이 책을 바친다. 나무소녀는 과테말라에서 어느 길고 긴 밤, 안전한 장소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라고 적었다. 한 소녀가 용기있게 증언해 준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우리는 똑똑히 볼수있게 되었다. 그것은 충격과 비극의 아수라장 이었다. 

나무소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진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살림이 풍족하진 않았지만 사랑하는 부모님과 오빠, 동생들이 있었기에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나무소녀가 살고있는 마을은 부귀영화를 바라지도 않고 자연이 주는 은혜에 감사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무소녀의 15번째 생일날 비극은 시작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정부군은 축제 분위기를 험악하게 바꾸며 행패를 부렸고, 이에 항의하는 오빠를 끌고 가 버렸다. 반군과 정부군의 싸움은 이 작은 마을에 불운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원한건 전쟁이 아니었다. 정부군의 편도 아니었고 반군의 편도 아니었다. 그저 땅을 일구며 살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며 사는게 그들의 꿈이었다. 하지만 정부군은 젊은 남자나 남자아이, 에스파냐어를 하는 사람,반군에 동조한 사람을 막무가내로 잡아가기 시작했고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살인에 정당한 이유는 없었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너무도 쉽게 총을 쏴댔고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에겐 아이나 여자, 노인들은 고려의 대상이기 보다는 쉽게 죽일수 있는 장난감 이었다. 마음의 양심은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들은 한마디로 미치광이였다. 

나무소녀는 그렇게 가족과 이웃들을 잃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살해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총탄에 픽 픽 쓰러지는 아이들을 봐야만 했다. 시장에 물건을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을이 불타는것을 목격했고 결국 부모님과 동생의 시체를 묻어줘야만 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동생 알리시아만이 나무소녀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지만, 동생은 충격 때문에 말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무의미한 전쟁. 정부군과 반군이 쓸고간 자리엔 마을이 아니라 무덤이 생겼고 깊이를 알수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모든게 꿈이었으면, 지독한 악몽이었기를 바랬을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알리시아를 데리고 피난길에 오르다 만난 임산부는 길에서 아이를 낳고 정신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출산을 도와준 나무소녀는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야만 했다. 군인들이 오는 소리 때문에 아이의 엄마를 도와줄수가 없었고 잘못하면 다 죽을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나무소녀가 모진 마음을 먹었더라면 아이를 떼놓고 도망칠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기가 먹을 우유를 구해오기 위해 마을로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고,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 현장을 목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알리시아와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기를 알리시아에게 맡기고 마을로 들어선 나무소녀. 친절한 사람들은 소녀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잠시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은 이 마을을 피바다로 만들었고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다. 여자는 강간한 다음 죽이고, 아이들은 데리고 놀다 죽이고, 노인들과 남자들도 차례차례 죽였다. 쉽게 살인을 저지르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나무소녀는 다행히 나무에 올라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 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틀동안 나무위에 있느라 생긴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이 모든 상황을 봐야만했던 정신적 충격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수치심에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로 분노와 죄책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자신에겐 숲이 신성한 안식처이고 나무가 좋다던 아이가 이런 결심을 한것은 너무도 슬프고 비참한 일이다. 왜 이 아이가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대야만 했는가. 왜 끝없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살아남기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는가. 모든걸 내 책임으로 돌리는 자책감은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컸다. 

"이렇게 살려면 살아남는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는 소녀의 말은 그래서 더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친구들과 뛰어놀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흠뻑 취해야 할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한다는것 자체가 비극이다. 특히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아이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부족한 식량과 물건을 얻기위해 하루종일 돌아다녀야만 했고 미래는 없어보였다. "내가 하루 더 살아남는다면 다른 누군가는 대신 죽어야한다.내가 식량을 구하면 다른 누군가는 주린 배를 쥐고 자야한다."는 것을 생각할 정도로 빈곤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나무소녀는 좌절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미 웃음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미소를 돌려주기위해 놀이를 시작하고 학교를 연 것이다. 축구공 하나 때문에 아이들이 뛰어놀고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걸 보며 가슴이 뭉클했다. 어른들이 하지 못한 것을 나무소녀가 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을 하지 않았던 동생 알리시아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것도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나무소녀가 다시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보다 더 강해진 나무소녀. 그녀가 보여준 용기와 삶에 대한 철학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내게 많은것을 시사해줬다. 부디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해졌으면 한다. 더이상 잃어버릴것이 없는 소녀에게 '희망'과 '행복'이라는 말은 온전히 다가가고 실제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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