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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커 ㅣ 래빗홀 YA
이희영 지음 / 래빗홀 / 2024년 5월
평점 :
<페인트>의 이희영 작가님의 신간, <셰이커>! 처음으로 타임슬립 판타지를 내놓으셨다.
청소년 소설을 주로 쓰시지만 굳이 그 틀에서 글을 보지 않는다. 연령대 상관없이 누가 읽어도 좋은, 여운과 생각거리를 주는 글을 써오셨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아이들과 함께 읽고픈 맘이 절로 드는 소설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전작들이 아이의 눈으로 세상과 어른을 새롭게 그린 작품들이었기에 <셰이커>도 그런 기대를 하며 읽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초록한 표지다. 울창한 숲속 수상한 문을 앞에 두고 한 남자가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인공 서른둘의 직장인 '나우'다. 문 너머로 13년, 19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했을 학창 시절의 나우가 서있다.
형제와 다름없는 친구 이내를 사고로 잃은 그때로, 이내의 여자친구이자 자신의 첫사랑인 하제를 처음 본 그때로 돌아가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그 안에 갈등과 감정들은 너무나 현실적이라 크게 공감하며 하루 만에 읽어버렸다. 나우는 이내를 구할 수 있을까, 하제를 자신의 여자친구로 만들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주인공들의 이름이 남다르다. 나우, 이내, 하제. 이희영 작가님은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이름이 나오면 글의 반은 썼다고 할 만큼 이름 짓기에 공을 들이시고 많은 영감도 받으시는 것 같다.
나우는 now 지금.
이내는 순우리말 과거.
하제는 순우리말 미래.
처음에는 이름들이 특이해서 어색했는데 후반부에 가서는 캐릭터와 찰떡같이 어울리는 참 예쁜 이름이라는 생각을 했다.
<본문 맛보기>
9
"어른이 뭐냐?" 성진이 물었다.
"그 질문에 답을 아는 사람이 어른이지."
"우문에 현답이네."
53
"내가 모르면 이 세상에서 누가 널 알겠냐?"
97
평생을 오직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수많은 '나'들이 찰나에 존재했다, 덧없이 사라지고 다시 존재함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탈피하고 그 껍질을 버리는 갑각류처럼,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20
"나 의외로 대견했네."
고작 열다섯이었다. 어린 나이에 참 의연하게 행동했다. 나우는 문득 그 시절의 어린 자신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가족에게도 가까운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감정으로 힘들고 괴로웠겠지.
141
"열다섯의 몸으로 서른둘의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에는 정반대였죠. 서른둘의 육체로 열다섯의 그날을 늘 아쉬워했으니까요."
둔탁한 것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미 지나간 날들을 아쉬워하며 묶여 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며 걱정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요?
"아니면 양쪽 모두지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살지 않습니까. 결국 손님의 시간도 언제나 과거와 미래가 뒤섞여 있을 뿐입니다.
현재는 없죠."
158
사람의 마음에도 수많은 상흔이 생긴다. 이런 깨달음이 하나둘 늘어 가면 세상은 비로소 그를 어른이라고 부를까.
216
"지금까지 고장 나지 않고 잘 버텨 왔네."
좋아하면 안 되는 상대를 좋아했고,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를 잃었다. 힘들어하는 사람 곁을 묵묵히 지키면서도,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욕심내지 못했다.
열다섯이 이해하기엔, 열아홉이 감당하기엔, 스무 살이 견디기엔 너무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 힘든 시간을 잘 견디며 지나왔다. 신은 인간에게 미래를 준비할 혜안을 빼앗는 대신, 그 미래가 현실로 닥쳤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버텨낼 힘을 주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나우는 깨달았다. 그러니 머지않은 미래에 상상하지 못한 시련이 온다 해도, 그때의 자신은 어떻게든 그 어려움을 이겨 낼 것이다. 나름의 방식대로 헤쳐 나갈 것이다.
218
대학에서 밤새워 공부한 것은 사회에 나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소용없는 것들을 왜 그토록 열심히 했나 싶지만 그건 또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온종일 책상에 앉아 책과 씨름했기에 대학에서도 그럭저럭 공부할 수 있었다. 학점을 따기 위해 분투했기에 사회에 나가서도 차근차근 일을 배울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대체 학교 다닐 대 난 뭐 했냐?' 자조 섞인 농담을 던졌지만, 그 시간이 없었다면 더 크고 넓은 곳에서 더 다양하고 복잡한 일을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왜 중요했는지는, 결국 그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다.
220
시간을 천천히 지나온 것이 아니었다. 시간 여행자가 되어 이리저리 뛰어넘어 왔을 뿐이었다. 마음은 여전히 과거의 상처를 지닌 채, 시선은 늘 미래로 향해 있는, 매일같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다.
252, 253
"성진아, 너 그동안 어떻게 견뎠냐?"
문득 묻고 싶었다. 출구도 빛도 없는 그 어지러운 미로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그 암흑을 어떻게 헤쳐 왔는지. 벽이 나오면 돌아가고, 빛이 없으면 손으로 더듬거렸을 아프고 힘든 시간을 어떻게 버텨 냈는지 정말 궁금했다.
"인마, 견디기는 뭘 견뎌. 그냥 산 거고, 그냥 쓴 거야.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 뭐.
다 지난 후에 뒤돌아보니, 아!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버티고 견뎠을까? 하지. 막상 그때는 그저 하루하루 사느냐고 그런 생각도 안 들어. 어른들이 그러잖아. 살면 다 살아진다고. 뒤돌아 볼 것도 없고 너무 멀리 내다볼 것도 없고, 그냥 지금 발끝만 보고 가면 어디라도 도착해 있는 거야. 결국 사는 건 다 위대한 일이야.
너는 뭐 안 그러냐?"
<감상평>
읽고 나니 3개의 키워드가 남았다.
어른. 시간. 우정.
1. 어른이란?
<셰이커>의 첫 문장이 "어른이 뭐냐?"이다. 중간중간 질문에 대한 답일 수 있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자기가 쓴 카드는 자기가 해결하는 사람, 부드럽고 달콤한 것에서 쓰고 독한 것(커피나 소주)으로 서서히 길든 사람, 마음의 상흔을 만들며 하나둘 깨달아가는 사람, 좋지 않은 자유와 쾌락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
유은실의 <순례 주택>에서는 자기 힘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을, 줄리 리스콧-헤임스의 <어른의 시간>에서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말한다.
어른이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 오래 굴려보았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그럼에도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이다. 나우처럼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현재를 붙잡아도, 나처럼 미래를 향한 두려움과 불안이 현재를 가려도, 그래도 견디며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나는 그런 어른이고 싶다. "미래의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싶어서."(46쪽)
2. 시간
칵테일은 독한 양주에 감미료나 방향료, 과즙 따위를 얼음과 함께 혼합한 술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어떤 비율로 배합하느냐, 어떤 잔에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온갖 맛이 공존한다. 그런 칵테일을 작가님은 시간에 빗대셨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차례차례 흘러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칵테일처럼 섞여 있다는 걸 말한다. 열다섯의 몸으로 서른둘을 두려워하고, 서른둘의 몸으로 열다섯을 후회한다. 과거와 미래를 사느라 현재를 살지 못하는 우리들을 비춰준다.
당신은 어떤 재료로 시간을 채웠나? 더는 어쩔 수 없는 과거의 재료? 아직 오지 않아, 완벽히 대비할 수도 없는 미래?(266쪽)
나는 <셰이커>를 통해 배웠다. 우리가 넘치게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생각할 현재라는 시간이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을 향유할 수 있는 현재라는 이 귀중한 지금을 스마트폰이나 영상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결의가 솟구쳤다.
3. 우정
<셰이커>에는 "내가 모르면 이 세상에서 누가 널 알겠냐?" 호언장담하는 깊고 시원한 우정이 있다. 길고 험난했던 친구의 과거를 "너 그동안 어떻게 견뎠냐?"라고 헤아려주는 코끝 찡한 우정이 있다.
삶의 본질은 관계이다. 이들의 우정이 마음을 열고 타인의 진심을 보는 순수한 관계의 결정체로 보였다.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도 그대로 받아주고, 나보다 친구를 위해 배려하는 속 깊은 마음들을 엿볼 수 있어 기뻤다.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성숙한 우정을 평생 나누는 친구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우의 친구 성진의 말처럼 "결국 사는 건 다 위대한 일이다."
"나 의외로 대견했네." "지금까지 고장 나지 않고 잘 버텨왔네."라고 나의 과거를 안아주고 싶다. 아주 조금씩 지나온 시간을 지우고, 지금에 머무르고 싶다.(260쪽) 현재라는 "이곳은 누구나 올 수 있는 평범한 곳"이다. (207쪽) 현재를 놓치지 않고 싶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는 시간을 앞서 걱정하고 싶지 않다. (60쪽)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후회하는 대신 그때의 선택을 내 인생의 정답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우리를 닮아 아름답고 맛 좋은 칵테일을 기대하며... <셰이커>가 아니면 경험하지 못할 시간을 누릴 수 있길!
*** 이 글은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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