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란히 계절을 쓰고 - 두 자연 생활자의 교환 편지
김미리.귀찮 지음 / 밝은세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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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두 사람, 김미리 작가와 귀찮(김윤수) 작가가 각각의 삶과 계절을 기록하며 주고받은 편지집이다. 서로 다른 공간, 다른 감정을 품은 두 존재가, 같은 사계절을 통과하며 각자의 마음을 꺼내 모았다. 서로를 설득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고, 그저 "나는 이렇게 느끼고 있어"라고 담담히 털어놓는 이야기 속에, 서로를 궁금해하고 존중하는 마음들이 곱게 놓여있다.


딱히 용건이 없는 편지를 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쓸모를 따지자면 무용하고, 이득을 따지자면 남는 게 없다. 속도와 효율의 시대에 긴 문장으로 찬찬히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일상을 나누는 과정은 답답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나란히 계절을 쓰고》를 읽으며 생각했다. 편지야말로 우리가 여전히 필요로 하는 소통 방식이라는걸.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라는 외침을 편지가 아니면 어디서 이렇게 선명히 들을 수 있을까.


내 마음도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말이 아닌 글로 타인과 내밀하게 교감하는 경험. 쓸모를 넘어 대가 없이 내주는 시간과 마음에서 사람의 향기가 났다. 들숨에 들숨으로 폐부 깊숙이 채우고 싶은 향기였다.


작가들은 빠른 대화 대신, 느린 기록을 택했다. 한 사람의 계절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답하지 않는다. 충분히 살아낸 후에, 각자의 삶과 감정을 곱씹어 다시 꺼낸다. 이 과정은 어쩌면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관계의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빠른 반응보다 깊은 이해를, 즉각적인 판단보다 긴 여운을 중시하는 태도. 그 느린 교환이야말로, 이 책에서 돋보이는 지점이다.


나란히 수놓인 활자들 사이로 작가들의 수다가 펼쳐진다. 내가 편지를 받은 것처럼 설레고 신났다. 품격 있으면서도 은은하게 웃기는 글들을 읽으며 욕심이 났다. 오만하게도 내가 글을 매우 매우 잘 쓰게 된다면 이렇게 쓸 것만 같다고, 아니 이렇게 꼭 써보고 싶다고. 어쩜 이렇게도 곱고 예쁜 마음들이 한가득 담겼는지 참으로 선물 같은 책이었다.


계절이라는 흐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다. 계절은 살아 있는 존재처럼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봄은 언제나 기쁨이 아니고, 겨울은 반드시 고통만도 아니다. 희망과 두려움, 기쁨과 공허가 한 계절 안에서도 엇갈려 스며든다. 그 사실을 두 작가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삶도 그러하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함께 있음'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는 태도였다. 둘은 나란히 있지만, 결코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같은 봄에도 다른 슬픔을 겪고, 같은 여름에도 다른 기쁨을 품는다. 그 다름을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고, 서로의 거리를 존중한다.


"우리는 다르다. 그러나 나란히 있을 수 있다."라는 선언이, 관계에 지친 많은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것 같다. 관계란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채로도 함께 머무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끝내 이해할 수 없어도, 그래도 괜찮다고 믿고 싶기도 했다.


빠르고 정확하고 유용한 정보만이 소통의 전부가 되어버린 시대에, 이 책은 효율을 거스르는 편지를 선보였다. 쓸모없음 속에 깃든 존엄. 속도 대신 머무름을 선택하는 용기. 편지가 그렇듯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나 시간과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살아가는 일은 결국, 나란히 걷는 일이다.
같은 속도일 필요도 없고,
같은 목적지를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나란히 계절을 건너는 일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동행임을 《우리는 나란히 계절을 쓰고》에서 배웠다.


책을 읽으며 내 마음도 한 자락 편지가 되었다. 고운 이에게 꾹꾹 눌러 편지를 쓰고 싶다. 쓸모를 따지지도,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고. "우리는 다르지만, 나란히 걸을 수 있어요."라고.


#도서지원 #우리는나란히계절을쓰고 #에세이신간 #김미리 #귀찮 #밝은세상 #교환편지 #자연생활자 #초록빛나날 #책추천 #베스트셀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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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꿈
앨런 라이트맨 지음, 권루시안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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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인슈타인의 꿈》의 한국어판이 처음 출간된 지 이제 25년이 다 되어갑니다.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1993년 저는 이 책의 성공에 무척 놀랐습니다.
그 후 전 세계에서 이 작은 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주고받다가 결혼하게 된 연인들,
사랑하는 부모가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이 책을 낭독하며 위안을 준 사람들,
이 책에 영감을 받아 음악, 발레, 연극과 같은 작품을 만들고
공연한 음악가와 무용가와 배우 들......

우리는 모두 세상을 조금씩 바꿉니다.
저는 이 책으로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 한국어판 머리말에서


물리학자이자 인문학자, 작가인 앨런 라이트먼.
과학 시대의 영성을 탐구한 그의 전작,
《초월하는 뇌》를 무척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 그의 첫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재출간된다는 소식에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선택했다.


《아인슈타인의 꿈》 은 내게 파격적이었다.
소설은 인물, 배경, 사건이 중심이 된다.
하지만 작가는 인물과 사건보다
"시간적 배경"에 핵심 역할을 부여한다.


주인공도, 줄거리도 없는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소설을 완성했다.


1905년,
젊은 아인슈타인이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특수상대성이론을 구상하던 시기.
그는 연구에 매달리느라 제대로 자지 못해 많은 꿈을 꾼다.


이론을 고민하면서 꾼 꿈들은 "시간이 다른 세계"였고,
영화의 몇 장면처럼 잠시 흐르는 꿈들을 모은 것이 소설 《아인슈타인의 꿈》이다.
2장 분량의 짧은 꿈들이 30개의 장으로 변주되는 색다른 구성이다.


하나의 긴 스토리가 아니라서
중심인물이나 주요 사건이 없다.
꿈속의 세상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시간이 작동한다.


다른 시간 속 전혀 다른 삶의 양상과 감정들은
흥미롭고, 신기하지만 낯설고 무섭기도 했다.


물리학자라는 저자의 직함이
부담스러웠다면 걱정 마시라.
이 책엔 공식 대신 상상력이 담겨 있다.
작가가 해체하고 새롭게 조립한 시간을 따라,
다르게 살아볼 상상력만 있으면 된다.


순서대로 읽을 것도 없다.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 페이지는
곧 시간 여행을 떠나는 문이 된다.
꿈속 세상에 자신을 등장시킨다면,
어느새 사고와 시선이 확장되어 있을 것이다.


"시간이 원으로 되어 있는 세계에서는
악수와 입맞춤, 출생, 주고받은 말 등
모든 것이 정확하게 그대로 되풀이된다."
- 23면

"지구 중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시간이 더디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몇몇 사람들은 젊음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고자 산으로 집을 옮겼다."
-37면

"사람들이 단 하루만 사는 세계를 생각해 보자.
누구나 해돋이를 한 번, 해넘이를 한 번 본다."
- 103면

"사람들이 영원히 산다고 생각해 보자.
이상하게도 도시마다 사람들은
두 가지 종족으로 갈라진다.
나중족과 지금족이다."
- 111면


시처럼 읽는 소설에 가깝다.
한 편 읽고 멈춰도 되고,
하루에 한두 편씩 천천히 읽으면 더 좋다.
한 번에 다 읽기보다,
음미하면서 읽어야 진가를 알 수 있는 책이다.


낯선 모양의 시간 속에서 여러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이 세계라면 어떻게 살까?
시간이 멈춘다면 가장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일까?'


시간과 관련된 물음들은
삶과 죽음, 욕망과 삶의 허무함.... 같은
인생의 본질로 이어졌다.


우리는 어쩌면 30가지의 다양한 시간을
모두 살아본 건 아닐까.


어떤 날은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서 지루하고,
어떤 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서 아쉽고,
어떤 기억은 반복해서 떠오르고,
어떤 일은 원인과 결과가 헷갈릴 만큼 복잡하다.


때로는 미래를 알 것 같고,
때로는 모든 게 멈춘 것 같다.


다양한 시간의 얼굴을
우리는 이미
조금씩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이 펼쳐준 "특별한 시간 세계"는,
인간이 느끼는 마음속 시간의 풍경을
비유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길게 늘여보고 줄여보면서
중요한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과거의 지금이었고,
미래의 지금일,
그 모든 시간들이 소중하구나!


결국 시간은 모두
"지금"의 연속이다.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시간을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인슈타인의 꿈》은 넌지시 알려준다.


새로운 믿음도 얻었다.
수많은 시간의 얼굴 중,
강물처럼 흐르는 바로 이 시간의 형태가
인간에게 가장 온당하고 완전한 시간이라는 것을.
조물주가 창조한 시간의 무늬들 중,
이 흐름이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선물이라는 것을.


서른 번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단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지금,
나는 정말 살아 있는가."


잠잠한 물결처럼,
이 질문은 한동안
나를 계속 흔들 것 같다.


#아인슈타인의꿈 #앨런라이트먼 #시간여행 #모던클래식 #시간산책 #물리학자의소설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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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아, 어서 와 - 너에게 선물하는 작은 기쁨 나태주·로로 웹툰 만화시집 3
나태주 지음, 로로 그림 / 더블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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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시인 나태주
네이버웹툰 작가 로로의
'행복 웹툰 만화시집'
- 《행복아, 어서 와》


"이로써 내가 꿈을 꾼 한 세상이 완성되고
나의 오랫동안의 꿈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 6면

나태주 시인님도 만화책을 매우 좋아한 아이였단다. 어려운 시로 만화책을 만들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한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시를 가지고 만화책을 내는 시인이 되셨다.


사실 나는 시도, 웹툰도 즐겨 하지 않는다.
시는 어렵다. 마음이 괜스레 바빠서 한 문장씩 음미할 여유가 없다.
웹툰은 재미있지만, 놀이 같아서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


그런데 시와 만화가 만나 탄생한 새로운 장르는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재미와 의미를 고루 갖춘 데다, 감성 지수와 행복 지수까지 높여준다. 친근하고 아름다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놀이인 동시에 독서가 되니, 아이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게 된다. 이 새로운 문학을 "시툰집"이라 부르고 싶다.


《행복아, 어서 와》의 강점은 "하나의 스토리" 안에서 시가 내레이션을 한다는 점이다. 시가 앞에서 이끌고, 웹툰은 삽화처럼 시를 따라가며 보조하는 구조라 예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사랑을 시작한 연인의 설렘에서, 부부가 되고 아이가 태어나 자라기까지 한 가족의 이야기가 영화처럼 어어진다. 그 흐름에서 시는 자연스럽게 숨 쉬고, 웹툰은 생생하고 진솔하게 스토리를 살려낸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책이 "시를 넘어선 새로운 문학", 시툰집의 탄생을 알린다고 느꼈다.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이 서로를 북돋아 하나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듯, 시툰집에서도 시와 웹툰이 나란히 걷는다. 서로를 보완하면서도, 어느 하나를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덕분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빠져들고, 시와 만화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또렷하게 맛볼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시는 짧지만 깊다. 쉽고 친근한 일상 언어 속에 커다란 통찰과 긴 울림을 숨기고 있다. 소박하고 가벼운 듯 해 지나칠 수 있는 의미와 아름다움을 로로의 웹툰이 잡아내 구석구석 비춘다. 사랑스럽고 정감 넘치는 그림체가 시의 후광 받아 생명력과 온기를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환상의 짝꿍이 아닌가!


나는 몰랐다. 나태주 시인의 시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줄. 사랑의 눈으로 아주 작은 것까지 오래 바라보는 시인의 언어가 이렇게나 해맑고 어여쁜 줄.


시인은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주인공 삼아 더없이 귀하게 여긴다. 그의 시 안에서, 평범한 나도 그렇게 소중하고 예쁜 존재가 된다. 그러한 사람, 자연, 삶을 향한 포근한 시선이 위로와 응원이 되어주었다.


예쁜 너

사람은 언제 예쁜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
앞에 있을 때 예쁘다

마음 놓고 웃을 때 예쁘고
마음 놓고 말할 때
더욱 예쁘다

너는 언제 예쁜가?

네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
있을 때 예쁘고
내 앞에서도 가끔은 예쁘다

너를 예쁘다고 생각하므로
가끔은 나도
예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로로의 그림은 단순하지만 표정과 몸짓의 디테일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둥글둥글 풀린다.

부드럽고 은은한 선과 색감, 일상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담아낸 그림은 시인의 시와 똑 닮아있다. 《행복아, 어서 와》에서 만난 두 사람의 인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행복아, 어서 와》는 결혼, 출산 장려 시툰집 같기도 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가슴 벅찬 행복을 진심으로 그려냈다.

미혼들에게는 가족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한 꿈을, 부모들에게는 자녀로 인해 (앞으로 줄) 행복했던 나날을 진하고 향기롭게 전해줄 것이다.


로로 작가의 전작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고양이는 그 자체로 행복이며 행복을 전달하고 이어주는 독보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만화 곳곳에서 대활약을 펼치는 사랑스러운 고양이와 함께, 나태주 시인의 시 한 편 한 편에 스며든 반짝이는 여운을 즐기기를 바란다.


행복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이 시툰집을 건넨다.

#도서지원 #행복아어서와 #나태주 #나태주시집 #로로 #웹툰만화시집 #행복시 #더블북 #행복이란네가있어내가끝까지흔들리지않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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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 - 낯선 경험으로 힘차게 향하는 지금 이 순간
조승리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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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세상을 구경하고
사람을 겪어내며
최대치로 느낀
'살아 있다는 감각' "


이 한 줄이 이 책을 잘 말해준다.
삶을 단단히 붙잡고자 기어이 길을 나선 사람의, 가장 뜨겁고 솔직한 기록.


좋은 여행이란 뭘까.
SNS에 올릴 만한 풍경? 맛집 리스트? 삶의 전환점이 되는 어떤 깨달음? 우리는 여행에서조차 특별한 ‘의미’를 남기고, 추억이든 배움이든 무언가를 득템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시간과 에너지에 돈까지 들였으니 여행이라는 고생 끝엔 응당 낙이 와야 하고,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조승리 작가의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은 그 익숙한 틀을 당연하다는 듯 깨뜨린다.


작가님은 십 대 시절 발병한 질환으로 빛 정도만 구별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이다. 20년간 안마 일을 병행하며 글을 쓴다. 2023년 샘터 문예공모전 생활수필 부문 대상을 받고, 2024년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첫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이 책은 이병률 시인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추천을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전작의 소문을 익히 들어왔기에, 작가님의 차기작 소식이 반가워 잽싸게 서평단에 지원했다. 제목마저 강렬하다.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 당최 어떤 내용일지 알 수 없어 호기심 가득, 기대 만발한 설렘으로 책을 마주했다.


수평선을 흔들듯 바다에 풍덩 빠지는 익살스러운 해가 표지를 장식했다. 물끄러미 그 해를 바라보다, 문득 자신이 직접 쓴 책의 표지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작가님은 글을 쓰셨을지 궁금해진다. 일반적으로 시각장애인은 음성으로 화면을 읽어주는 스크린 리더와 일반 키보드로 글을 쓴다고 한다. 컴퓨터 앞에 앉아 듣고 두드리며 모든 걸 쏟아냈을 작가님의 작품이 내 앞에 당도했다. 이 책은 보지 못하는 세상을 누구보다도 실감나게 불꽃처럼 그린 날 것의 에세이였다.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은 여행기로 시작한다. 말레이시아, 일본, 백두산, 필리핀, 마카오, 베트남... 좋은 여행에 대한 질문이 먼저 떠오른 이유도 그래서다. 예상한 대로 평범한 여행기는 아니다. 저자는 엉망진창이었던 여정까지도, 불편했던 기분과 실패로 가득 찬 경험들마저도, 굳이 미화하지 않는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대로 끝난다고? 이쯤에서 뭔가 감동적인 반전이나 근사한 성찰이 나와야 하지 않나? 시각적 정보가 아니라 촉감, 냄새, 소리, 감정 같은 것들로 쌓인 기억의 기록은 엉망이라면 엉망인 채로 남는다. 엉망이라는 건 어떤 기준에서는 불편함이겠지만, 또 다른 기준에서는 감각적으로 가장 풍부한 순간일 수 있다.
그렇게 풍성한 감각으로 드러난 이야기들은 솔직해서 정이 갔다.


"예상대로 여행은 엉망이 됐다.
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앙헬레스는 치안 문제 때문에 데려갈 수 없다며 가이드에게 거절당했다. 해안가인 수비크에서 노을을 오랫동안 보고 싶었는데, 가이드가 곧 차 막힐 시간이라고 다그쳐 얼마 머물지도 못하고 다시 차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툴툴대는 가이드가 꼴도 보기 싫었지만 어쨌든 며칠간은 그의 안내를 받아야 했기에 팁을 챙겨주었다. 다음 날 그는 약속 시간을 두 시간 넘겨 출근했다. 전날 내가 준 돈으로 밤새 술을 마셨다 했다."
-70면


조승리 작가는 삶이나 여행을 포장하지 않는다. 삶이란 게 꼭 어떤 의미를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버거웠으면 버거운 대로, 망했으면 망한 대로 둔다. 어쩌면 그 안에서 뭔가를 끌어내려고 애쓰는 순간, 진짜 경험은 오히려 묻혀버릴 수 있다. 불편한 기억도 그대로 놓아둘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어떤 사람에게는 더 깊은 통찰이 될 수 있다.


책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타인에게 읽히기 위한 매체다. 누군가에게 보이고, 이해받기 위해 문장은 끝없이 펼쳐진다. 자연스럽게 작가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에 묶인다. 어떻게든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이 압정처럼 집필이라는 길에 뿌려진다.


조승리 작가는 그 틀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수어 버렸다. 부족하고 보이기 싫은 모습조차도 그대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선언 같다. 그것은 글쓰기를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한 도구, 자기 회복이나 존재 확인의 수단으로 삼은 자의 당당함이다.


나라면 절대 못했을 일이다. 꿈보다 해몽이다. 엉망으로 구겨져버린 경험에서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부분을 고르고 골라내 꾸몄을 것이다. 솔직하게 실패를 드러내는 척하면서 결국은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요리조리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좋았다. 멋진 글을 쓰기보다 정직하게 자기 존재를 남기는 자의 멋과 자유가 있다. 그 지점에서 생명이 불꽃처럼 타오른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꼭 교훈이 따라붙지는 못한다. 때로는 아무 의미도 없고, 방향도 없고, 그저 힘들고 후회스러운 날도 있다. 그럴 수 있다. 당연하다. 매 순간 의미로 충만하지 않아도 인생은 그대로 괜찮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든 무엇이라도 추출하고 싶었다. 내가 부족해서 놓쳤을 뿐, 그 모든 시간에 반짝반짝 귀한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그것을 찾아내 글로 표현하고, 누군가에게 즐거움과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내 삶이 좋은 이야기로 남길 바랐다.


내가 조승리 작가님처럼 쓸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작가님의 이 통쾌한 용기를 닮고 싶다. 타인의 공감도 좋지만 내 삶의 진짜 결도 지키고 싶다.


결국 기록의 가치는 '완벽한 해석'이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그때 무엇을 느꼈고 어떻게 견뎠는가, 그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엉망이던 순간도 웃음이 되거나, 뜻밖의 깨달음이 되어 돌아온다. 글은 그것들이 돌아와 닿을 수 있는 투명한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이 책은 그렇게 갑갑한 내 글쓰기에 숨구멍이 되어주었다.



"낯선 경험으로 힘차게 향하는 지금 이 순간"
부제처럼 이 책은 내게 낯선 글쓰기로의 방향을 보여주었다. 당신도 검은 불꽃이라는 과거의 어둠을 연료 삼아 빨간 폭스바겐을 타고 미래로 나아가는 조승리 작가님의 세계를 낯설게 만나보길 추천한다.


#도서지원 #검은불꽃과빨간폭스바겐 #조승리 #이지랄맞음이쌓여축제가되겠지 #세미콜론 #에세이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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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 - 무의미한 삶을 지탱하는 10가지 깨달음
마이클 노턴 지음, 홍한결 옮김 / 부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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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는 원제목 <The ritual effect>에서 알 수 있듯, 삶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리추얼을 제안한다. 리추얼(의식)이란 일상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담아 반복하는 행동으로,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의미 없이 자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의미가 있기에 삶에 리듬과 활력을 불어넣는 도구로 작용한다.


리추얼에 관한 책들이 대부분 심리학, 종교학, 인문학적 접근이었다면 《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는 행동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한 점이 흥미로웠다. 저자 마이클 노턴은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교수이자 행동경제학 연구 권위자다. 경영학자이지만 심리학 기반에서 의식을 통해 인간 행동을 분석한다.


"왜 리추얼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를 인간 행동의 과학적 메커니즘으로 풀었다. 이론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사례와 실험으로 공감과 흥미를 끌어내, "내가 왜 이걸 할 때 기분이 좋은지", "왜 반복하면 의미가 생기는지"를 납득시킨다. 행동경제학은 "당연한 것"에서 통찰을 발견하는 학문이기에 너무나 평범해서 놓쳤던 작은 행동들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과 행복에 영향을 주는지 새로운 시선으로 비춰준다.


"삶을 사랑할 방법을 찾고 실천하는 순간,
삶의 본질은 그 어느 것보다 특별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단 하나의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12면

리추얼은 삶을 사랑하는 연습이다. 삶을 사랑하는 가장 특별한 방식이다. 삶을 사랑하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딱 맞는 방식이다. 엉뚱하고 임의적일지라도, 자신에게 더없이 적절하고 효과가 좋다면 훌륭한 리추얼이다.


<상실>로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른 조앤 디디온은 글이 막힐 때마다 작업 중인 원고를 비닐 봉투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한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는 분홍색 플라스틱 바닷가재를 상자에 넣어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가지고 다녔다. "처음에는 그저 기능적이었던 평범한 활동이 우리에게 지극히 중요한 활동이 되면서, 평범함을 초월한 비범함이 느껴지기에 이른다." (78면)



"습관은 당신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지만,
리추얼은 당신을 충만하게 만든다."
- 로빈 샤르마

반복적인 행동이라는 점에서 리추얼은 습관과 비슷하다. 습관의 본질은 '무엇을' 하는가에 있지만, 리추얼의 본질은 '어떻게' 하는가에 있다. 습관이 실제적 보상을 준다면 리추얼은 감정적, 심리적 영향까지 덧붙는다. 좋은 습관이 자동화되어 별 노력이나 생각 없이도 루틴을 수행하는 행위가 습관이라면, 리추얼은 특정한 방식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커피를 내릴 때, 자동화된 습관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최대한 빠르게 카페인을 섭취한다는 무엇이 중요하다. 반면, 리추얼을 행하는 사람은 굵게 간 커피 원두만 사용하고, 프렌츠 프레스 외에는 쓰지 않는 자신만의 유일한 방법, 어떻게가 중요하다.


갑자기, 베토벤이 떠오른다.
"60알의 원두는 나에게 60가지의 영감을 준다."
베토벤은 아침을 시작할 때 60알의 커피콩을 세고, 그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강박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이지만 베토벤에게는 예술가로서의 하루를 시작하는 경건한 준비였던 것이다.


특정 행동에 따라 습관과 리추얼을 따로 구분할 수는 없다. 행동 자체가 아니라 행동에 부여하는 감정과 의미가 중요하다. 리추얼은 본질적으로 감정 유발제이기에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감정을 마음대로 불러일으킬 수 없지만, 리추얼을 통해 기분을 바꾸고 북돋울 수 있으니 리추얼을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얼마나 요긴한지 모른다. 내가 기분 좋아지는 행동을 알고 선택해 매일 리추얼로 삼아 행할 수 있다면, 매일 아침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커피를 내리는 순간을 '리추얼'로 삼는다면, 리추얼이 없는 삶과 분명 다를 것이다.


신호와 반복 행동, 보상으로 작동하는 습관의 알고리즘이 기계적으로 최적화와 효율화에 집착한다면, 독특한 리추얼의 행동은 삶을 가치 있고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마침내 내 건강을 최적화했다. 이제 최대한 오랫동안 재미없게 살 수 있다> -톰 엘리슨의 에세이 제목
"반드시 해야 하니까"가 아니라, "스스로를 챙기고 아끼기 위해" 정성과 시간을 내어주는 삶은 분명 다채로운 감정으로 인해 훨씬 큰 만족감을 준다.



"감정다양성"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만족감, 즐거움, 기쁨, 신비함, 고마움뿐 아니라 슬픔, 두려움, 불안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낄 때 삶이 감정적으로 더 풍부해지면 전반적인 행복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긍정적 감정의 우세 여부보다 경험하는 감정의 다양성과 풍부함이 웰빙과 더 밀접히 연관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47면


기쁨 세 번을 느끼는 것이 기쁨 두 번, 불안감 한 번을 느끼는 것보다 당연히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태계의 건강이 생물다양성에 달려 있듯, 우리의 웰빙도 감정의 넓고 깊은 스펙트럼에 좌우된다는 사실이 무척 인상 깊었다. 매일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도 내치려고만 하지 말고, 건강한 내면 생태계를 위해 필요한 감정이라는 다시 깨닫는다.


리추얼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사소하고 이상하더라도 자신에게 딱 맞는 것이 중요하다. 우연히 쌓일 수도, 의도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계속 반복하면서 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선택하고 색다른 감정과 의미를 찾는 순간, 그때가 자신의 리추얼이 탄생하고 힘을 발휘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만의 리추얼을 하나 만들고 싶어 궁리했다. 문득 기분이 좋아지고, 내가 나로 존재함이 알아차려지는 순간. 마음이 움직이며 내 안에 자연스럽게 무언가가 싹 트는 순간. 그 찰나를 의식적으로 반복하면 그것이 곧 리추얼이다.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 전 유튜브로 출생률 급감이 불러온 한국의 인구 위기를 다룬 영상을 봤다. 심각했다.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물론 사회, 문화, 군사적으로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소름 끼치게 무서운 현상이 현재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거리에서 스치는 사람들이 달라 보였다. 대화를 나누는 분들로 북적이는 카페가 시끄럽지 않고 정겨웠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생명이었다. 그렇게 다음 리추얼 후보 가 만들어졌다.


"마음속 산책 인사"
걸으면서 눈에 띄는 누군가에게 마음 속으로 다정하게 인사하고, 그분의 오늘을 살짝 상상한다. '안녕하세요. 오늘 어떤 일로 이 거리를 걷고 계세요? 전화하면서 미소 짓는 표정이 보기 좋아요.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걸까요, 날씨가 좋아서 봄이라서 좋으신 걸까요. ~~~"
이렇게 상상하다 보면 마음이 부드럽게 펴지는 것 같다.


리추얼은 기억에 남는 행위가 아니라, 느낌에 남는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오늘 느꼈던 좋았던 순간, 그 감정을 따라가보자. 예측 불가능한 삶을 붙잡아 주체적으로 이끌며 돌보고 있다는 나만의 감각을 가져보자.


리추얼은 삶을 지탱하는 깊은 뿌리이자 세상에 하나뿐인 나로 생동하는 다정한 공간이 되어 준다. 《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를 통해 일상적인 순간들을 비범하게 만들어 줄 각자의 리추얼을 발견하길, 일상의 행위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달콤한 도구로 리추얼을 즐기길, 습관 형성과 개선을 넘어서 삶의 목적과 개성에 어울리는 리추얼로 삶에 깊이와 의미를 더하길! 응원한다.



#도서지원 #어떻게이삶을사랑할것인가 #마이클노턴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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