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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ㅣ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평점 :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1850년대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화자는 초로에 접어든 변호사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이들은 일장일단이 있으며, 일이 많아 필경사 한 명을 새로 고용한다. 그가 바틀비다.
바틀비는 구석진 자리에서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화자가 지시하는 일에 대해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저항한다. 화자는 정상 범주에 속하는 일을 시켰으나 그의 거부에 충격 받는다. 이후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숙식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해 회유해 보지만 바틀비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선택을 고수하고 실행한다. 해고했으나 바틀비는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결국 화자는 자신의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겨 바틀비를 남겨두고 오지만, 마음에는 꺼림칙하고 불안한 마음이 남았다.
이전 건물에 새로 들어온 변호사나 건물주는 바틀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화자이니 바틀비를 건물에서 나가게 하라고 위협하지만, 바틀비는 그 무엇도 말하지 않고 건물 주변에서 노숙인이 되어 갈 뿐이다. 결국 경찰에 연행되고 구치소에 감금된 바틀비는 먹지 않는 것을 택함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바틀비의 마지막을 화자는 지켜본다.
바틀비라는 독특한 캐릭터,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되지도 설명되지도 않는 이 괴팍한 캐릭터와 많은 함의가 담긴 이 소설은 소극적 저항을 비롯해 많은 철학적 담론에 소환되기도 한다.
내 눈에 뜨이는 것은 바틀비의 예기치 못한 저항이기도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화자라는 캐릭터다. 사무실의 자본가이며 고용주이자 변호사인 화자는 바틀비의 대응에 처음에는 충격을, 이후에는 이해를, 차츰 회유와 멀어짐, 도망침을 택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정황상 화자는 처음부터 경찰을 불러 바틀비를 구치소에 보낼 수도 있었고,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명예와 고귀한 인격을 추구하는 화자는 우회적인 방법을 택해왔다. 그런 것이 용납되었던 시대가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바틀비를 이해하려 했던 시선이 있었고, 그의 마지막 순간에는 연민을 느꼈던 인간성이란 동지가 있었기에 바틀비는 소극적 저항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금 만약 어떤 작품에 바틀비 같은 인물이 등장하고 화자가 특별히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은 우월한 계급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과연 바틀비의 행동을 기다려줄 수 있을까? 대뜸 경찰에 신고하고 내쫓으면 된다는 반응이 우선하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 시대의 작가는 바틀비와 대적하는 화자라는 인물을 이해시키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바틀비가 그토록 소극적인 저항을 이어갔던 것에는 궁금증이 생긴다. 자기 삶을 의욕적으로 꾸려나가지도 않으며, 곁에서 도움의 손길을 주겠다는 제안도 있었다. 그러나 바틀비는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한다. 무언가 마음에 드는 공간 혹은 순간을 찾았을 때, 내게 점유할 수 있는 서류상 권리가 없다 해도 그곳에 존재할 수 있는 권리.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권리. 소유도 점유도 할 수 없는 순간에 택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것은 아니라서, 먹지 않는 것을 택함으로써 죽음에 이른 바틀비의 생이 결국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바틀비는 신에게 저항했던 것이 아닌지 생각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생명을 준 신에게, 그 생명 속에서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인간의 저항이란 먹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