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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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년 전 헤어진 애인과 비밀스러운 집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찾아가는 소설.

단 두 명의 등장인물과 제한된 공간에서 초등학생의 일기, 집안의 소품을 바탕으로 미스터리를 풀어간다. 빠르게 읽히고 내용의 진행을 따라가는 게 쉽다.

독서의 쉬움과 별개로 담고 있는 주제는 아동학대에 관한 것으로 생각할 거리를 주기도 한다. 아동학대는 보통 신체적 학대, 심리적 학대, 보호 의무 태만과 거부, 성적 학대로 이루어지는데, 이 네 가지 행태를 모두 보여준다.

사야코는 아동학대의 가해자인 엄마다.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도 학대의 피해자였음이 드러난다. 또한, 주인공 ‘나’ 또한 생모에게 버려지고 친척에게 입양된 전적이 있는데, 입양 사실을 알게 된 후 생모와 양부모 중 어떤 부모와 살고 싶은지 선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모는 노후와 기댈 사람이 필요해서 원한다는 것을, 양부모는 대를 이을 필요에 의해서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밀스러운 집에서 알게 되는 사실은 친아들의 교육과 사회적 성공에 실패한 아버지는 친아들 대신 그의 손자 유스케를 아들처럼 키우면서 엄한 교육을 시킨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죽고 등장한 친아버지는 유스케를 신체적으로 학대한다. 견디기 힘든 날이 이어지고, 그 와중에 이복동생인 차미를 아버지는 성적으로 학대한다. 유스케는 동생인 차미를 위하고,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에 불을 지른다. 이 과정에서 가정부의 딸 진짜 사야코가 죽게 된다. 살아남은 차미에게 할머니는 가정부의 딸로 살게 만든다.

결국 집이란 것, 가정이란 것이 존재에게는 무덤이었음을 깨닫는다. 사야코는 어떤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할지 고민한 듯한데, 결국 자신은 자신일 수밖에 없다고 믿고 앞으로도 살아가려 한다는 것으로 맺음 한다. 과거 차미의 신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야코의 이름을 계속 쓴다.

학대 가해자가 역시 학대의 피해자였다는 개연, 현재 학대 가해자인 사야코의 악어의 눈물과 혼란스러워하는 정신 상태는 요즘 시선에서는 불편하다. 그러나 이 책이 처음 발간된 것이 1994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대부분의 대중문화가 가정을 중심으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가정으로 회귀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가정이 개인의 무덤일 수 있다는 시각이 신선해 보이는 것이다. 지금이야 대부분이 자각하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내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휘발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깊이 들어가지 않고 쉽고 간단 명료하게 외피를 건드리는 솜씨가 뛰어나지만, 그 깊이가 아쉬운 것이다.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 되진 못하지만 아동학대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서술한 것을 본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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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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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한국작가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상상력이 풍부하고 현실의 비극을 발랄하게 서술해 나가는 작가의 글이 재미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유산자가 무산자를 억압하고, 그 속에서 신음하는 모습은 신물 날 정도로 보지만, 이렇게 재기 발랄한 문학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는 것은 삶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이 책이 발표될 시점에 비슷하게 20대를 보냈던 내가 경험한 시대보다도 훨씬 삶의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작가 박민규는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두 편의 작품이 표절 시비에 걸렸고 그를 인정하기까지 했지만, 그가 어딘가에 갇히지 않고 상상해 온 이야기들만큼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즐겁게 그의 단편을 읽다가 평론가의 해설이 나오는 부분은 화가 나서 덮어 버렸다. 독자에게 해석해 줘야 하고, 평론가를 통해서만 작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층의 해석을 방해하는 그런 해설은 읽기 싫다. 더욱이 이 책에 실린 평론은 그 심층을 해부한 것도 아니다. 혜성처럼 등장했던 작가, 그 작가에 대해 내가 인정하마 하는 식의 평론이라 읽기 싫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작가와 독자가 그의 작품을 매개로 만날 때, 개인에게 의미 있는 독서가 된다.

그런데 박민규의 작품 내용은 쉽게 잊힌다. 이미 그의 작품 3권을 읽었는데 기억나는 줄거리는 아무것도 없다. 왜 그랬을까. 뼈대는 동시대인이 이미 알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고, 충격은 그의 발랄한 상상력인데. 그 상상이란 것은 내가 흉내 낼 수 없으며 생각의 방향이 바뀌지 않는 한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인가. 많은 독서는 나중에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데, 박민규의 작품은 특히 그러하다. 그저, 그 한계를 두지 않는 상상을 배울 수밖에. 그 상상에서 용기를 얻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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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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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책. 문학을 통해 평생 구도하듯 실험해 왔다는 마루야마 겐지의 독특한 소설 <달에 울다>와 사건 전후 맥락의 모호함 속에 또렷한 메시지를 전하는 <조롱을 높이 매달고>가 수록되어 있다.

<달에 울다>에서는 형식적 독특함과 문장의 아름다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계절을 그린 병풍을 소재로 하이쿠처럼 시를 써 내려간 소설이다. 내용면에서는 전체주의적 권력의 몰락을 그린 듯하다. 마을 촌장에 의해 죽은 남자, 그 남자를 때려잡은 아버지, 그 남자의 딸, 그 딸에게 사랑을 느끼는 주인공. 주인공이 10살, 20살, 30살, 40살이 되어 가는 시간을 병풍의 사계절과 교차시키고 그때마다 바뀌는 이들의 관계를 그린다.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로 절제된 문장에 압도되어 읽게 된다. 촌장의 권력은 마을을 휘어잡고, 촌장의 풍족한 곳간을 도둑질한 남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무참히 살해된다. 이들에게 명령한 이는 촌장, 남자가 죽은 날 마을 사람들은 잔치를 벌이며 시끌벅적하게 웃고 먹고 논다. 그날 마을을 떠났던 남자의 딸은 몇 개월 안에 다시 마을로 돌아왔고, 꽃다운 나이가 되어서는 주인공과 육체를 나눈다. 여름의 열정에 빠진 주인공은 결국 아버지를 사다리에서 떨어지게 만들어 불구의 몸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떤 죄책감도 없으나 그 딸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마을에 돌아왔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겨울이 되었을 때, 촌장은 아슬아슬한 도로에서 차가 전복되어 죽게 되고 촌장의 아들은 그의 권력과 권위를 그대로 물려받지는 못할 것이라 암시한다. 스무 살 이후 마을을 떠났던 여자는 초주검이 되어 돌아와 집 눈밭에 쓰러져 죽는다. 마을의 모든 역사를 지켜보는 주인공. 사건들은 인물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마치 계절이 지나고 세상이 변화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는 듯이. 인간의 안간힘이 작용하지 않아도 스러질 것은 스러지고 죽어야 할 것은 죽는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재미는 덜했지만 인생 후반기를 기대하며 가족과 살던 곳을 떠나 고독과 환영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지켜보는 힘으로 읽게 된다. 모든 관계와 의무, 책임으로부터 떠나온 주인공은 피리새를 가져오고 싶지만 노인 때문에 항상 실패한다.

마지막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다. 자살한 노인, 피리새를 얻은 주인공. 그러나 피리새의 조롱을 열어주고 그 마을을 떠나는 주인공. 피리새가 과연 열린 조롱을 떠날지 새장이 열린 것도 모르고 새장 속에서만 지저귈지 의아해 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비슷한 메시지를 넣은 작품들이 꽤 되는데, 이 소설이 최초로 발표된 것이 1986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앞선 생각을 써 내려갔다는 생각이 든다.

부록으로 역자가 소개하는 마루야마 겐지에 대한 설명도 꽤 인상적이다. 작가가 지향했던 삶. 고립되고 고독할 것. 그 말을 보며 힘을 얻는다. 반드시 친구를 만들어야 하고, 어떤 관계는 부지런히 유지해야 하고, 수다스럽게 떠들어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줘 좋았다. 우리는 다른 모습, 다른 개성을 가지고 살아도 되니까. 이런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작가를 만날 때 기분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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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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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하고 당혹스럽고 두꺼운 책.

페르난두 페소아가 그의 여러 헤테로님 중 하나인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로 분해 쓴 ‘사실 없는 자서전’이다. 일기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한 이 책은 여러 해설과 주석이 붙을 수 있겠지만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것에 대해서 적기로 한다.

이 책은 내 머릿속의 언어와 어휘를 모두 해체시켜 버린다. 추상과 구체를 마구 오가면서 사색하는 화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명제, 일반적 범주의 사색이 아니라 전복시키고 돌아보는 사색을 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이 글을 길게 읽다 보면 허무해지기도 한다. 책의 제목이 왜 불안의 서일까. 허무의 서가 더 어울릴 법한 내용인데. 그것은 무욕과 허무와 체념의 화자가 그럼에도 삶을 부정하지 않고 생생히 존재하는 꽃잎처럼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 생생한 삶과 화자의 사색이 주는 간극은 결국 존재의 불안이라는 감정을 자아낸다.

아포리즘으로 활용할 수 없지만, 자꾸 밑줄 긋게 된다. 상식과 진부한 느낌을 전복시키다 보니 전체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아포리즘으로 몇몇 구절이 떠돌아다니게 된다면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방해될 수 있어 보인다. 아포리즘 자체에 부정적이지만 이 책은 그 위험성이 더 커 보인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무책임. 그 무책임한 용기가 마음에 든다. 느낀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때 느꼈으나 기록할 수 없다는 말을 쓰는 것. 그것은 시인이기 때문에 이런 사실 없는 자서전을 쓰고 꿈 없는 꿈을 꾸는 시인이기에 가능해 보인다.

읽는 내내 사실은 내가 이 책을 왜 읽고 있을까 의구심에 빠지곤 했다. 지식으로 쌓을 것도 아니며, 대공감을 일으키는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 끝까지 읽게 만든다. 그것은 자신 안으로 가장 깊이 침잠했던 시인. 그 침잠 속에서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한데도 아무것도 표현해내지 못한데도 실패한 것이 아니란 생각에 공감해서다. 몽상가가 되어도, 생각 없는 생각에 잠겨 있어도, 남들은 생각하는 줄 알겠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부정될 수 없다.

시인들의 글을 읽을 때 행복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을 느낌을 그들이 대신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무릎을 치며 공감하고,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것만 같던 나의 외로운 생각은 지원군을 얻는 느낌인 것이다. 페소아는 그런 면에서 스스로를 비생산적 인간이라 생각하는 내게 든든한 원군이 되어준다.

깊이 침잠해서 생각의 방향을 잃었을 때, 그 우물에서 무엇도 끓어 올리지 못했을 때 나는 다시 이 책을 꺼내 읽을 것 같다. 나보다 앞서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향했던 이, 그 결과물을 궤짝에 아무렇게나 남겼던 이, 생각의 지도를 스스로 그려보았던 이. 그를 생각하며 내 생각의 지도를 새로 그려나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참, 이 책의 좋은 점 중 하나.

배수아 작가가 번역하고 김소연 시인이 발문을 붙였다는 것도 아주 큰 매력이다.

모든 것을 생전 처음인 듯이 감각하기.

인생의 신비를 종말론적으로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꽃잎을 직접 만지며 감각하기. - P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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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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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중 나치당원으로 명성을 얻었고, 극작가였으며, 라디오에서 나치를 위한 선전에 열을 올렸던 주인공 하워드 W. 캠벨. 그는 연합군에 포섭된 스파이기도 했다.

전후 미국으로 건너와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던 캠벨은 이웃에 사는 러시아 스파이에 의해 정체가 드러난다. 그러자 이스라엘에서는 그를 전범재판에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미국 극우보수의 일원은 그를 지키려고 애쓴다. 죽은 줄 알았던 아내가 돌아왔으나 알고 보니 러시아에 포섭된 아내의 동생이었고.. 그가 연합군에 협력한 스파이였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인데 그는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황. 여러 에피소드를 겪으며 그는 이스라엘 전범재판에 서게 되고 결국 그를 포섭했던 대령이 신분을 보증해 주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서문으로부터 편집자의 말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독특하게도 이미 소설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캠벨의 고백록 형식을 취하면서 아이히만, 괴벨스 등의 위선과 파렴치를 위트 있게 드러낸다. 단순히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을 핍박했던 과거에 머물지 않고, 전후 사회에서 공산주의와 인종을 빌미로 다시 한번 절대악과 적을 만들어내려는 네오나치의 움직임을 함께 그려 현재성을 더했다. 전쟁 서사는 읽기에 괴로운 면이 있는데, 이 책은 커트 보네거트 특유의 블랙유머와 패러독스로 경쾌하게 읽어나가는 신기를 발휘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는 캠벨의 행적 중 연합국 첩자였던 면을 부각시켜 그의 행동을 긍정하듯 정리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캠벨은 이미 나치 전범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첩자로 포섭될 수 있었고 본문에서 작가가 이미 지적했듯 “그는 너무나 공공연하게 악에 봉사하고 너무나 은밀하게 선에 봉사했다. 이것은 그의 시대가 낳은 범죄였”다.

독일 나치와 유대인으로 생각하면 거리감을 두고 읽게 되지만, 이를 친일파와 한국 사회로 대입해 읽으면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주인공이 친일 인사였고 전쟁 막바지에 연합군을 위해 일했다고 하면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그런데, 작가는 독자의 고민을 여기서 고이게 하지 않는다.

“순수한 악을 물리치겠다고 전쟁을 일삼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꼴이 된다. 싸움을 벌일 이유는 많다. 하지만 적을 무조건 증오하고,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자기와 함께 적을 증오한다고 상상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악이 어디 있는 줄 아는가? 그건 적을 무조건 증오하고,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신과 함께 적을 증오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온갖 추악함에 이끌리는 것이다. 남을 처형하고, 비방하고, 즐겁게 웃으면서 전쟁을 벌이는 것도 백치 같은 그런 마음 때문이다.”

즉, 인간 모두에게는 남에 대한 적개심이 있으며 이를 발휘할 수 있도록 명분을 만들어 내는 것은 누구라도 언제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총칼과 가스실이 있는 전쟁만이 아니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쉽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말로 싸움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우리 안에 들끓고 있는 적개심, 증오. 누군가 이를 부추기려 할 때 우리는 건강하고 품위 있는 이성으로 이를 다스릴 수 있어야겠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 애정,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또, 작가의 재기 발랄한 문장처럼 차갑고 무거운 순간에 유머를 발휘할 수 있다면 끔찍한 상황까지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는지.

뼛속까지 휴머니스트였던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악이 어디 있는 줄 아는가?

그건 적을 무조건 증오하고,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신과 함께 적을 증오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온갖 추악함에 이끌리는 것이다.

남을 처형하고, 비방하고, 즐겁게 웃으면서 전쟁을 벌이는 것도

백치 같은 그런 마음 때문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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