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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존재하는 인간 ㅣ Endless 3
정영문 지음 / &(앤드) / 202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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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존재하는인간 #정영문
#넥서스북 #엔드리스시리즈
💡너무 자주 박힌 쉼표에 진득히 묻어나오는 힘
나는 그 여름 아침의 무료하게 따사로운 기운과 평화에 온몸을 맡기고 있는데, 마치 그 온기와 평화가 벤치와 같은 앉을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그것들에 몸을 지그시 기대고 있고, 그것들 역시 내 기분을 아는 듯 나를 아득하게 감싸주고 있다. 아니 최소한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나는 하마터면, 아아,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눈을 뜨고 있다는 것, 곧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순수한 은총인가, 그 은총의 빛이 내게 집중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것을 이렇게 눈을 지그시 감으니까 더 잘 느낄 수 있구나, 하는, 평소에는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을 한다. 거기에 더해 나는, 내게 이렇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다시 말해, 내게 은총의 빛을 이렇게 아낌없이 쏟아줄 필요까지는 없는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13~14p
나도 글 쓸 때 쉼표가 주는 숨 한 번의 여유와
쉼표를 찍음으로써 살릴 수 있는 글맛을 사랑하는 편인데,
이 글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읽은 글 중 쉼표를 가장 잘 살렸다
💡역설과 반어의 맛
늘상, 나는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철학자요. 물론 나는 철학자라곤 만나본 적이 없긴 하지만, 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그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실성을 했는데 나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었소. 그의 말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거죠. 우리가 함께 앉아 있을 때면 그는 늘상, 그런데 지금 내가 여기 있나요, 지금 여기 있는 게 바로 나인가요, 지금 내가 여기에 있고, 여기 있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게 내가 틀림없나요, 설마 내가 살아 있는 게 사실무근은 아니겠죠, 떄로 나는 누군가와 나를 대신해 생각을 해주지 않으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때도 있소. 그런데 지금 내 말이 들리나요, 나는 가끔 사람들이 하는 말은 들을 수 있지만 내가 하는 말은 들을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오, 목소리를 잃은 것도, 귀가 먹은 것도 아닌데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지, 아니면 나 외의 세상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인가, 라는 말로 나를 조금은 헷갈리게 하기도 했소. 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알고 있었소."
94p
💡인간의 존재와 비존재, 부조리와 비합리, 권태로운 인간과 그를 혐오하는 권태로운 인간
그렇다. 그 부패하고 있는 시체가 강조하는 것은 고집스러운, 섬뜩하며 그로테스크한 권태이다. 그곳에서 권태는 질서이며 그 나머지, 잔혹과 덧없음은 그 권태의 부차적인 속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끔찍함은 잔혹하게 일그러진 그 모습이 아니라 그것에서 배어 나오는 권태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또한 그 권태는 그 동물의 시체에 내재해 있기보다는 그것과 관계하는 나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끔찍함은, 세상의 종말 따위가 온다 해도, 그 종말 이후에도 남을 이 진저리 쳐지는, 나의 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권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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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두 장 정도를 읽으며 쉼표의 속도감에 익숙해지면 앉은 자리에서 무릎과 이마를 수시로 치며 호로록 읽을 수 있는 수작이다. 글맛을 물성으로 살린 게 바로 이 책이 아닐까.
한 번 읽읕 때 글맛을, 두 번 세 번 읽으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바닥을 깊이 음미하며 읽기에 좋다.
※ 이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은 #서평단 활동의 일원으로,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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