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낙원
김상균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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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낙원
#김상균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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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사투 끝에 의료진은 아내의 몸에서 뇌와 신경다발을 분리해 수술대 옆의 보존액 병에 담갔다. 투명한 원통형 병에 맑은 푸른빛의 보존액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속에서 아내의 뇌는 마치 우주를 둥둥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보였다. 수많은 주름과 고랑으로 이루어진 뇌 표면에는 무언가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뇌에서 뻗어 나온 신경다발은 마치 나무의 뿌리와도 같았다. 가느다란 실 모양의 수많은 신경섬유가 뇌에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보존액 병 속에 퍼져 있던 나노 전극들이 신경다발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마치 나뭇가지에 이슬이 맺히듯, 신경섬유 끝마다 은빛 전극이 촘촘히 붙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를 연상케 했다. 뇌와 신경다발이 기계와 결합되었다. 아내의 의식은 이제 그 전극을 통해 아르카디아로 연결된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아르카디아로.
11p

"저는 로버트 노직의 경험 기계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계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질적 가치는 결국 경험을 통해 정의되며, 경험 기계는 그러한 경험을 최적화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합니다. 물리적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물리적,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원하는 경험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경험 기계 안에서라면 우리는 이러한 계약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경험을 통해 보다 풍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경험 기계가 제공하는 것이 가공된 것이라는 점에서 윤리적, 철학적 질문이 생기지만, 만약 그 경험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물리적 현실이 아니라고 해서 그 가치를 낮게 평가할 이유는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가입니다. 또한 그러한 경험을 통해, 그것이 물리적 실존 경험이 아니더라도 가공의 세계에서 자신의 선택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궁극적으로는 그 결과가 진정한 인간다움에 가까워지리라 기대합니다. 로버트 노직의 경험 기게는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68p

💡
책 소개부터 너무 파격적이었는데, 초반 도입부부터 기대를 제대로 충족시켜주었다.
세상을 떠나는 가족의 마지막 기억을 최선으로 다듬어주는 작업부터,
부족한 언어 능력을 커버하기 위해 가난한 나라의 아이의 기억을 사는 작업,
그리고 육체는 죽어 사라지더라도 뇌와 영혼만은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는 이상체 아르카디아 등
인도주의와 비인도주의를 오가는 '더 컴퍼니'의 일들을 보며
어떤 것이 인간을 위한 것이고 어떤 것이 인간에 저해되는 것인지
위한다는 명목으로 할 수 있는 행위의 경계는 어디인지
깊게 고민하며 읽었다

※ 이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은 #서평단 활동의 일원으로,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woongjin_rea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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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식 - 우리가 지나온 미래
해원 지음 / 텍스티(TXTY)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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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식
#해원 #텍스티

당장당장 영상화가 시급합니다

186명이 타고 있던 KTX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린다.
차체도 잔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열차는 얼마 후 각각 다른 나라, 다른 장소에서 발견된다.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고 언니 은희에게 의지하던 선영은
언니가 그 열차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언니가 열차에 탄 유일한 범죄자이며
존재하지 않는 사회복지 재단을 사칭해
보육원의 한 아이를 유괴했다는 정황을 알게 된다.

도입만으로도 너무 흥미로웠는데,
파고들면 들수록 참신한 구성과 주제에 책장이 어떻게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후루룩 넘겼다.
2024년 지금 여기, 바로 현재를 가리키는 생동감 넘치는 묘사들로 더 몰입하기가 쉬웠다.

최근 인간은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라고 여길지
생각하게 하는 글들을 꽤 읽었는데
가장 무서우면서도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이상적인 글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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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식 레코드는 19세기에 유행했던 신지학에 등장하는 용어다. 우주의 탄생과 종말에 이르는 모든 역사가 기록된 초자연적인 도서관. 우주를 의식을 가진 하나의 존재로 보는 이들은 아카식 레코드를 우주 의식의 중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16p

"쿠마에의 무녀가 남긴 문섭니다. 시빌라 페이퍼라고 불리죠."
시빌라 페이퍼는 기원전 47년, 고대 로마의 영토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고대의 수비학자들은 여기에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고 믿었고, 알아볼 수 없는 괴상한 문자를 해독했다. 대를 거듭해 가며.
"그들은 여기 적혀 있는 것이 실전된 고대의 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암호 해독하듯 문자를 해독하려 했죠. 시대가 흘러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자가 아니라 모스 부호처럼 어떤 신호를 표시한 그림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이건 아카식 레코드의 신호였습니다. 쿠마에의 무녀는 안테나였던 거죠."
제레미는 만감이 교차하는 눈으로 시빌라 페이퍼를 들여다보았다.
"이 안에는 아카식 레코드에 대한 근원적인 정보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카식 레코드는 우주의 모든 역사가 기록된 블랙박스가 아니었어요. 교차로였던 겁니다. 우주의 과거와 현재, 미래...... 모든 시공과 연결된 교차로."
아카식 레코드를 거치면 원하는 시간대 어디든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바꿔 세상을, 우주를 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거기 들어가서 뭘 어쩌려고요? 우주 정복이라도 하려고?"
제레미 아이즈너는 재미있는 생각이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내가 망친 모든 걸 원상 복구시켜야죠. 여기 갇혀 있는 아이들의 인생도. 그뿐입니까?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숱한 전쟁들. 전부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이 도와주면 가능합니다."
"지금 무슨 게임해요? 그동안 저지른 짓이 있는데, 리셋하면 끝이야?!"
광분하는 나를 보고, 제레미가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그를 따라 건너편에 있는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운동장처럼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182~1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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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xty_is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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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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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다리위에조선인이있었네
#조형근 #한겨레출판

💡
'포로감시원'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생각도 상상도 존재를 인지해 본 적도 없다.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죽지 않기 위해 끌려와
상관 없는 나라 사람들을 감시하고 벌주고 폭력을 집행해야 하는,
그러지 않으면 너무나도 쉽게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떨지
도저히 상상도 가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후 가해자로 처벌-심지어 사형-을 받아야 하고
스스로 변론할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부인하지는 않는 사람들의 사람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많이 들어본 사람들의 이름과, 난생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의 이름 사이에서
경중을 따질 수 없다.
모두에게 무거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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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사유'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나를 끼워 넣는 일'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연루됨의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사유의 의미는, 우리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이 책에 담긴 열여덟 개의 이야기들이, 우리가 과거와 미래 사이로 틈입해 들어갈 수 있는 길,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주리라 확신한다.
6p

포로감시원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잘 감시하는지 늘 감시받았다. 잘 때리라고 늘 맞았다. 피에르 불은 <콰이강의 다리>에서 이렇게 적는다. "(니컬슨) 대령은 다시 구타를 당했고, 고릴라 같은 조선인은 처음 며칠 동안의 가혹한 체제를 재개하라는 엄명을 받았다. 사이토는 감시원까지 때렸다. 그는 ... 죄수뿐만 아니라 간수에게도 권총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중첩된 운명의 희생자였다. 조선인 B, C급 전범의 비극을 연구한 일본의 사회학자 우쓰미 아이코는 포로감시원들의 개인적 학대가 없지 않았지만, 식량과 의약품이 부족해 포로를 학대할 수밖에 없던 상황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60~61p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일제의 전쟁 수행에 협력한 가해자였다. 이런 사례들을 근거로 한국도 일본과 같은 전범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현실적 함의는 일본에 동조한 같은 전범국이니 일본에 대해 전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논리에 동조하는 논리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한편에는 그들은 강제로 끌려간 것이니 그저 순전한 피해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있다. 구조적 악이 있다면 그에 동조한 개인의 윤리적 책임은 간단히 면제될 수 있을까? 이학래가 수기에서 고백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62~63p

※ 이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은 #서평단 활동의 일원으로,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하니포터 #하니포터9기 @hani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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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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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많던신여성은어디로갔을까
#김명임, #김민숙 #김연숙 #문경연 #박지영 #손유경 #이희경 #전미경 #허보윤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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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남자 혹은 가정의 부속품쯤으로 여기는 것은 똑같구나.
그때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대신에,
그때보다 신사인 척이라도 하는 의지는 줄었구나,
하는 생각에 참담한 한편 웃겼다.

저렇게까지 열심히 조롱하고 희롱하고 경시할 일인가?
재밌나 그게...
아연실색한 장면들이 많다.

닫힌 세상에 태어났을지언정 타고난 팔자를 얌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거절하고 항의하고 끝내는 떨쳐내어 준,
멋있는 언니들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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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신여성'은 있어도 '신남성', '구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이 상징하는 시간성의 기표가 되기 때문이다. 남성 주체는 여성이라는 대상을 통과해 자신을 인식한다. 남성의 글쓰기가 여성에 대한 이중 메시지와 자기 분열로 점철된 이유다. 신여성의 재현 주체가 주로 남성이었다는 사실, 즉 '신여성 담론'은 여성도 근대적 보편성(평등)에 포함된다는 모던에 대한 남성의 당황과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당대 신자유주의 통치 체제에서 여성의 개인화에 대한 남성의 반발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이것이 오늘날 여성의 시각에서 <신여성>을 재해석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이다.
5p

(도둑이) 손 빠르게 (여핵생의) 머리에 꽂힌 보석이 박힌 듯한 핀(을 뽑아 달아나자, 여학생이 하는 말) "그까짓 것은 빼가서 뭐 하나. 야시장에서 십오 전 주고 산 것을 모르고." (도둑) "아차, 속았다. 보석핀인 줄 알았네. 야시가 생기니까 이런 가짜가 생기지." (하고는 내팽개친다. 그러자 여학생이 냉큼 주워 달아나며 하는 말) "이것이 십오 전짜리 같은가? 진고개 가서 이십륙 원 주고 산 것이란다."
42p

이를 통해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이 돌이킬 수 없는 소비사회가 되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소비사회에 진입한 당시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욕망도 마주치게 된다. 여성의 소비를 여성의 허영으로, 여성의 허영을 여성의 본능으로 만들어, 새롭게 등장한 모던걸을 구제불능의 정신적 미성숙자로 만들고 시어 한 남자의 욕망과,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비를 통해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자 한 여성의 욕망이 동시에 드러난난다. 신여성의 모던한 치장은 그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신여성의 도시적 생활양식은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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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자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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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자들
#김려령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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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가장 멀 수 있는 가족,
가장 먼 존재이지만 가장 가까울 수 있는 타인.
그런 것들을 현실과 가장 가까운 언어로 생동감 있게 풀어냈다.
실제 대화에서 사용하는 생생하고 통통 튀는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가장 밀접한 그림을 그려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귀기울여 듣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현실에서의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여기에 있음을, 사실 아주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린다.
잊지 않도록 새겨준다.

가장 마음에 남았던 글은 '상자'와 '황금꽃다발'.

🔖
"알아. 그래서 순전히 내 문제라고 한 거야. 추억을 저장하는 방식은 집마다 다를 테니까. 그리고 이건 좀 다른 말인데, 나는 네 올케 임신 때문에 온 가족이 모였다는 것도 살짝 불편했어. 당연히 축하할 일이지만, 각자 다른 도시에 사는 가족들이 단지 누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모여서 식사한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됐어. 게다가 넌 이유도 모르고 그냥 아버님이 내려와라, 다 같이 식사하자, 그 말 한마디에 네시간이나 달려서 내려갔다고. 전에도 몇번 그랬지. 너희 집을 내 기준에서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건 절대 아냐. 단지 그런 일에 내가 자꾸 이상해지고 싶지 않을 뿐이야. 너희 집은 계속 그럴 거고, 그때마다 난 불편하겠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그래도 가족 모임은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는데, 그 상자는 정말 아니었어. 배냇저고리, 나달나달한 담요, 빛바랜 젖꼭지, 딸랑이...... 그걸 담고 있는 어머님 한복 상자. 어머니 치마폭에 그대로 갇힌 아기. 내 생각이 너무 나갔다는 거 알아. 그만큼 불편하고 적나라했다는 거야. 그런데 넌 그걸 또 새 상자에 담고 싶어 했어. 앞으로도 또 30년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간직할 수도 있겠지. 숨 막혀. 옆에 못 있겠어. 이미 그렇게 됐어. 내 연인이 옆자리 직장동료보다 불편하면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어. 미안하다. 집에 있는 내 물건들 다 버려줘. 혹시 내 집에 있는 네 물건 중에 필요한 거 있니? 보내줄게."
"아니, 없어. 다 버려."
52~53p, <상자>

작은놈하고 나는 큰놈이 뭐 하는 놈인지 잘 모른다. 무슨 공부로 무슨 박사가 됐는지도 모르고, 무슨 책에 어떤 이야기를 썼는지도 모른다. 무슨 박사라고 말한 적도 없고, 무슨 책을 썼다고 가져온 적도 없다. 들어보니 TV에도 심심찮게 나오는 모양인데 이렇듯 우연히 보는 게 아니면 나온 줄도 모른다. 나보다 먼저 죽을 듯 파리한 꼴로 나와서 어머니는, 어머니가, 해대는데 염병도 그런 염병이 없었다. 제 어미가 이때까지 비행기 한번 안 타본 걸 기가 막히게 잘 포장했다.
"삶의 반경만 보면 매우 좁습니다. 어떻게 보면 늘 그곳에 상주하는 분이셨죠. 그런데 때마다 이곳저곳을 다니는 저보다 당신의 혜안이 더 넓었습니다. 사유란 그런 겁니다. 얼마나 깊게 보는가. 그 깊은 사유를 통해 세상을 읽으셨죠. 저는 감히 흉내도 못 낼 정도로."
작은 삶의 반경 안에서도 무슨 대단한 철학적 사유를 하는, 내가 그런 어머니라고 했다. 저는 미처 볼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이라고. 오래 살다보니 별소리를 다 듣는다. 내가 언제 이 동네를 그리 아름다워했더냐. 딱히 갈 곳 없어 살긴 산다만 징그럽다 징그러워. 나도 비행기 타고 너 공부했다는 나라에 가서 고철덩이 탑도 보고 싶고, 남들 다 다녀왔다는 베트남 가서 쌀국수 한번 먹어보고 싶다. 늙은 어미 데리고 외국에서 며칠 지내기가 그리 껄끄럽더냐. 사회자가 교수님 작가님 두 호칭을 섞어 부르는데, 너 뭐 가르치고 뭐 쓰는 놈이냐. 내가 너에 대해 이토록 아는 게 없는데, 너는 내가 모르는 나까지 무척 잘 아는구나. 고얀놈.
"잠 온다. 꺼라."
나이 먹는다고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었다. '분이셨죠?' 방송에서 나에 대해 한 얘기는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에 대한 회고였다. 제 바로 밑으로 태어나 이른 나이에 떠난 누이와 아버지는 실제 죽었으니 개의치 않는 것 같았고, 작은놈은 언급도 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를 없고, 나는 과거 모습만 언급함으로써 지금의 나를 죽였다.
68~69p, <황금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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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bi_in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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