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카페
프란세스크 미랄례스.카레 산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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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에 읽은 한국소설 한 권이 떠올랐다. <시간을 마시는 카페>라는 이 소설에도 마법 카페가 등장한다. 아스가르드 카페는 과거와 미래의 연결통로 역할을 했다면 <일요일의 카페>의 길모퉁이 카페는 현세와 내세를 연결 짓고 있는 공간이다. 즉 이 소설은 판타지물이다. 오래전 방영된 환상특급이 떠오르기도 하고 심리치유를 위한 어른 동화 같기도 하다.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최대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설레임이다. 편안한 분위기와 음악, 그리고 맛있는 차 한 잔이면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할 정도다. 이 소설이 더욱 힐링 소설로 읽히는 이유는 그런 치유의 공간에서 일어난 마법으로 한 여인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데 있다. 두 분의 작가가 함께 했다는 점도 특이했다. 참, 사랑스런 일러스트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나처럼 표지에 이끌려 덜컥 결제부터 할는지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나쁜 선택을 하려 한 이리스. 그녀의 기분은 이미 선로로 발을 옮기려던 중이다. 그 찰나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일이 일어난다. 생과 사가 갈릴 뻔한 그 짧은 순간, 터지는 풍선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며 살아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리스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필요했다. 자신의 슬픔을 덜어줄 그 누군가가.

어찌 되었든 끔찍한 순간을 피한 뒤 그녀에게 낯선 카페가 들어온다. “이 세상 최고의 장소는 바로 이곳입니다.”라는 카페명이 어딘가 부담스럽지만 누군가 일부러 자신의 취향을 맞춘 듯 그녀는 카페 분위기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낀다. 나 역시 일러스트를 보며 상상을 하고 있자니 휘핑크림 잔뜩 얹은 커피 냄새가 어디선가 나는 듯하다. 이리스는 그곳에서 루카라는 남자와 합석을 하게 되고 석연치 않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카페에 마련된 여섯 테이블은 저마다 테마를 가지고 있었다. 기억의 탁자, 희망의 탁자, 용서의 탁자... 그 자리에 앉아 루카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는 이야기뿐 아니라 그에게 점점 빠져들게 된다.

사랑의 힘은 살아갈 힘을 부여한다. 이리스는 과거의 아픔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다. 카페 주인인 마법사와 루카는 그녀에게 힌트를 주고 또 준다. 고장 난 시계와 주머니 선물과 그리고 작은 메모지 한 장을.

그리고 카페는 홀연히 사라진다.

그녀에게 카페를 찾았던 그때부터가 변화였고 카페가 사라진 이후에도 변화를 계속된다. 그 변화는 그녀는 점점 나아가게 한다. 정녕 우리의 삶 깊숙이 어떤 운명의 힘이 존재하는 걸까. 강아지를 입양하기로 결정한 순간 오래전 인연의 끈이 다시 이어지고 새로운 결심은 새로운 만남과 공간으로까지 이어진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마법 카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그것 또한 사랑의 힘이 만들어 낸 기적이다. 아주 가슴 찡한.

과거를 잘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현재에 일어나는 일보다 현재에 속하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스가 선택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을 함께 하면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 최고의 시간과 장소가 어디인가를 결정짓는 것? 뻔하지만 마음가짐일 테지. 그때마다 쓰자. 버킷리스트고 쓰고 좋은 일 나쁜 일도 쓰면서.. 그러면서 현재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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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스터머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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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스텀 280의 유리 문을 민다. 나는 플라스크에 담긴 눈알을 본다. 동물 눈알은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그 옆 진열대에 주르르 놓여 있는 인간 눈알의 샘플 하나를 가리킨다. 이거 하나 붙여 주세요. 이마에다가.

<커스터머>속 세상은 그런 것쯤은 귀걸이나 코걸이를 걸듯 뚝딱할 수 있다. 메타버스 속 아바타가 아닌 자신의 신체를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디자인할 수 있다. 눈 색상은 물론이고 모양까지 바꿀 수 있으며 팔을 호스로 바꾸거나 피부색을 바꿀 수도 있다. 뿔을 달거나 날개를 달 수도 있으며 어깨에서 꽃이 피어나게 할 수도 있다. 놀랍도록 기술은 진화해서 무엇이든 가능하다. 생명체의 진화는 끝난지 오래이고 이제는 변형이 대세인 시대다. 생물과 무생물 안되는 게 없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강아고양이는 over지만 움직이는 돌맹이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반면 이런 유전자 변형으로 생긴 돌연변이도 있다. 요기까지만 생각하면 와~~ 멋지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세상이 한번 뒤엎어지고 난 후 인간들은 더 조심스럽고 불안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똑같이 살아남았음에도 어떤 계층은 죄책감에 억눌려 있고 어떤 계층은 분노에 억눌려 있다. 공부를 잘해야지만 빛을 볼 수 있다는 말이 모래바람만큼 갑갑하다. 그만큼 고착화된 계급 문제를 해결하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화합은커녕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불안정해 보이는 세상이다. 재건의 날이랍시고 행하는 의식 자체도 오히려 그날의 아픔을 부채질하는 듯 불편해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노력은 한다. 통합 교육 정책이 그런 의도였으니까.

인간은 날씨 하나에도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존재다. 그만큼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 되는 것도 있다. 수니가 사는 웜스구역은 전 세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어대는 모래바람을 감당할 수 없다. 모래가 가득한 도시에 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지끈거리고 깝깝하다. 그런 수니에게 태양시의 고등학교 통지서는 빛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입장권이 아니고 무엇이랴.

수니의 삶을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면 고등학교 입학을 그 경계지점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그만큼 수니는 엄청난 성장을 이룬다. 커스터머는 한 소녀의 성장기이자 '다름에 관하여'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 수니는 그토록 원하던 커스텀을 한다. 룸메이트 안을 향한 사랑과 어느 날 이마를 뚫고 나온 뿔에도 당당하다. 수니의 용기는 태양시의 진짜 햇빛이 만들어낸 것일까. 모래시의 억압이 만들어 낸 것일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지금보다 더 잔인하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이라고 나눈 거 자체가 아이러니지만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난 이들을 향한 비난이 도를 넘는다. 모든 건 인간의 과한 욕망 때문에 생겨난 결과임에도 커스터머를 혐오하고 돌연변이를 저주라 여긴다. 비단 인간의 비난 욕구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중성인으로 태어난 사람들까지 인류의 해악으로 여긴다.

비마저도 다양한 이름을 지니는게 세상인데 사람들은 존재의 다양성을 불편해한다. 어째서일까. 모래 색깔에 맞춘 건물들 사이로 파란색은 그저 튀는 색이자 거슬리는 색일 뿐이다. 어째서일까.

참 성가시다. 이런 것들에 의문을 가져야 되는 일이. 희망과 유대는 은밀한 조롱과 불쾌한 속삭임에 껍데기로만 존재한다.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건 커스텀이 아니다.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건 차별과 혐오, 선입견과 조롱, 비난과 원망 등의 감정들이다. 지금도 뿌리깊게 내려진 이러한 감정들이 힘든 팬데믹 시대를 갉아먹고 있지 아니한가.

한낮의 열기와 저녁의 서늘함, 비가 내린 후의 촉촉함, 다시 해가 뜬 후의 맑은 마름. 이런 날씨를 누릴 권리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구역 안에서 누군가에겐 과한 빛을 누군가에겐 어둠과 그늘만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 수니는 중성인인 안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음을 안다. 그처럼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들기 전에 경계를 허무는 것부터가 제대로 된 재건의 시작이 아닐까.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그저 그 선택을 존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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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호에 핀 꽃 사거리의 거북이 16
김춘옥 지음 / 청어람주니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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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잘 만나 태어나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일까.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깔리면 늘 드는 생각 중 하나다. 누군가의 열두 살은 오래전 누군가의 열두 살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오래전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시기를 따져보면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고 있는 이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겼다. 나라 잃은 설움을 환희로 되찾은 것도 잠시 다시 이념의 전쟁터로 전락한 한반도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념의 희생자가 되고 외세의 힘에 그어진 38선으로 생이별을 겪은 사람들이 넘쳤다. 지금은 북한과의 외교가 중단된 상태이기에 이산가족 상봉이니 금강산 여행이니 하는 뉴스가 끊어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TV에서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소양호에 핀 꽃>의 시대적 배경은 그런 민족의 비극을 담고 있다. 그랬기에 지금 세대들에게는 무덤덤해졌을 당시의 아픔을 공감하고 과거의 잘못을 돌아볼 수 있겠다.

가람이는 어느 날 자신에게 증조할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머나먼 북쪽 땅에서 말이다. <소양호에 핀 꽃>은 가람이네 할아버지가 그 안타까운 상봉 현장의 주인공이다. 어찌하여 할아버지는 5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서야 증조할아버지를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가람이는 할아버지와 방을 나누어 쓰는 사이다. 가람이는 증조할아버지와의 만남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계실 할아버지를 위해 가계도를 직접 그려 선물하기로 한다. 그런데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없던 가람이는 궁금해진다. 그리고 상봉전 지금은 사라진 마을 구만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때는 광복이 되기 직전부터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의 시대로 가람이의 할아버지가 열두 살이던 시절이다.

할아버지의 모습으로만 보아왔던 가람이에게 할아버지에게도 나와 같은 열두 살(준태)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도 묘하지만 생소한 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더욱 낯선 세상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저물어가던 시기였으나 일본인들은 더욱 악착같이 조선인들을 괴롭혔다. 긴 전쟁에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져가고 정신적으로는 무기력해져간다.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 아버지로 인해 준태의 마음 한켠은 원망도 서려있다. 반면 승우네처럼 친일파로 전향한 집들은 큰 소리를 치며 같은 동포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기도 한다.

소양호는 구만리와 대흥리 사이를 흘렀고 사람들은 사공의 도움으로 그곳을 오갔다. 구만리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준태와 승우, 난이는 마냥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일 수가 없다. 준태와 승우는 한바탕 쌈질을 할 수밖에 없었고 난이는 승우네 아버지로 인해 아버지가 주재소로 끌려가는 일을 당하게 된다. 이쯤 되면 이 세 친구에겐 우정 따위는 존재할 수 없을 듯 보인다.

그러나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 되자 상황이 달라진다. 준태의 아버지가 돌아왔고 친일파였던 승우네는 마을에서 쫓겨난다. 게다가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민족은 갈라질 조짐도 보인다. 준태에게 소양강은 돌아온 아버지와 낚시를 하며 부자간의 정을 돈독히 한 곳이자 난이와의 추억도 있는 곳이었지만 더 이상 소양강은 그런 추억의 강으로 남지 못한다.

"내가 돌아오는 날, 낚시하러 가자꾸나." -p.99

난이 아버지의 말처럼 강물에는 모든 삶이 다 들어있는 듯하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비극까지도 조용히 떠안고 흐른다. 무심하다고 느낄 만큼. 오래전 준태에게 강은 비극과 막연한 기다림의 장소일 뿐이었다. 그러나 강은 무심하지 않았다. 오래전의 약속을 잊지 않은듯하다. 이제 준태에게 강은 치유의 장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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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2022 : Better Normal Life
김용섭 지음 / 부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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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는 우리의 생활 전반을 뒤엎었다. 저마다 이전과는 달라진 세상, New Life를 부르짖었다. 나 또한 체감의 온도가 상승중이었기에 이제는 공부란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불을 지핀건 경제공부를 하면서다.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변화의 바람은 불어왔고 그 바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때 무엇보다 트렌드 공부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점을 가면 제일 먼저 향하는 쪽이 소설 코너다. 즉 나란 사람은 경제 인문 코너 쪽은 거들떠도 안 보았었다. 그런 내가 서점 입구에서 경제도서로 직진한 건 대단한 사건이다.ㅋㅋ

이미 김용섭 소장님의 트렌드 분석 영상은 맛보기로 몇 편 보았다. 이 트렌드 시리즈가 해마다 출간되고 있었단 사실도 몰랐으니 내가 얼마나 변화에 무딘 채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코로나는 내 지적 영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준 셈이다.

이 책이 좋았던 건 Better라는 단어가 주는 긍정의 에너지 때문이다. 2년이라는 팬데믹을 지나오는 동안 많은 이들이 부정적 감정에 시달려왔다. 그로 인해 사회는 더 다양하고 세분화된 격차와 분열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불평과 불만이 속출한다. 의심과 불신이 당연시되고 가짜 뉴스에 불안심리는 극대화된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 기사를 피해 종이 신문으로 옮겨 왔다. 어처구니없는 막말 댓글을 안 봐서 속이 후련하다.

사실 전문가들은 2022년은 위기가 가속화될 것이라 말한다. 더 힘들 거라고. 듣기만 해도 아찔하다. 아니 지금까지 힘들었는데 더 힘들 거라니. 하지만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위기대응능력이 출중하지 않은가. 아침에 신문을 펼칠 때마다 그런 기사들을 보아왔다. 백신을 개발하고 더 발 빠른 코로나 검사지를 만들어 내고 코로나 잡는 친환경 페인트와 코로나를 식별하는 마스크 등등. 대단하지 아니한가.


우리는 좀 더 긍정적이 될 필요가 있다. 그만큼 개인의 트렌드 대응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비즈니스적인 사고도 필요하다. 돈도 벌어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선 트렌드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Repair, Gardening, Small Action, Multiverse, Unlimited Style, All round veganism, 오염 엘리트, 클러터 코어, 크래프트 소비, 디지털 자산 등의 트렌드 키워드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내가 제일 먼저 찾아 읽은 건 환경도서였다. 비거니즘과 스몰 액션에 동참했다. 집콕 생활에 반려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고 식습관과 내가 소비하는 물건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미 샴푸와 린스와 바스대신 비누 하나로 머리를 감고 목욕도 한다. 미니멀을 고집하는 건 아니지만 굿즈에 대한 욕심을 버린 지도 오래다. 쓰레기를 줄이는 게 쉽지는 않지만 버리는 양에 늘 신경을 쓴다.

수많은 데이터가 말하고 있다. 가죽을 얻기 위해 10억 마리 이상의 동물의 희생되고 전 세계 농지의 80% 이상이 가축을 위한 곡물을 재배하는 데 쓰이며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15% 이상이 축산업에서 나온다. 전 세계 산업 폐수 중 20%가 패션산업에서, 세계 탄소 배출량의 약 10%가 의류와 패션산업에서 발생한다. 이미 우리는 너무 과하게 먹고 있지만 전 세계인의 10%에게는 기아 문제가 심각하다. 환경과 지구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친절한 소비주의가 필요하다는 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스몰 액션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주변을 바꾸는 일이다. -p.236

기업이 하는 친환경 사업도 놀랍다. 포도껍질, 사과 껍질, 파인애플 잎과 줄기, 버섯균으로 가죽을 만든다. 명품을 리페어하고 호텔은 비건 프렌들리 사업에 공을 들인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 업계와 철강, 선박 산업이 변화하고 있다. 이처럼 친환경 액션에 동참하고자 하는 고객은 자연스럽게 ESG 사업에 공을 들이는 기업에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2022년에는 멀티버스가 가속화될 것이다. 이제 메타버스가 뭔지 블록체인과 NFT가 뭔지 책으로 살펴본 게 다인데 22년에는 체험이란 걸 해 보려 한다. 최근 MBTI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 지인들 중에 이 테스트를 신뢰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가끔은 그 유형에 자기를 꿰다 맞추려는 듯 과해 보이긴 하지만 그만큼 자기 자신을 알려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지만 반면 자기중심 위주의 사고방식은 위험하다. 이 검사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비전문가 모녀에 의해 탄생된 테스트 하나가 코로나 시대 구글 검색창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사실도 재밌는 현상이다. 이렇듯 긴 팬데믹은 유행에 휩쓸리는 삶이 아닌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문화로 바뀌어가고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며 특정 현상에 편승하기보다는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맥시멀리즘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트렌드의 흐름에 올라타야지만 Better가 가능하다. 내 삶 어느 부분이 트렌드에 걸맞는지 혹은 맞추어갈 수 있는지를 고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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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의 역사
마야 룬데 지음, 손화수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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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래전부터 벌의 생태를 연구했고 벌을 길들여보려고 했지만 언젠가부터 벌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지만 이유는 찾을 수 없고 사라져버린 벌들의 자리를 인간이 대신하는 지경에 이른다. 작가가 가정한 2098년의 세상은 진보의 진보를 거듭한 신문명이 아니라 한차례 큰 붕괴를 겪고 난 세상이다. 끔찍한 식량난으로 인공수분 작업장에 강제 동원되는 인간들은 문명을 다시 일으킬 만큼의 능력조차 잃어버린 모습이다. 어린아이들마저 인공수분 종사자로 길러지고 있었으니 삶의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벌들은 왜 사라져버린 것일까. 과연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벌들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지구는 멸망할 것인가. 벌들의 역사는 기후 위기를 경고하는 책이다. 벌들의 역사라는 제목을 먼저 뽑아놓고 플롯을 구상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야기는 서로 다른 연대가 돌아가며 흘러간다.

2098년 인공수분 종사자 타오, 1852년 곤충학자 윌리엄, 2007년 양봉업자 조지.

세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벌과 연관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벌을 연구하면서 벌통 제작에 골몰하던 윌리엄은 좌절과 재기를 거치며 열정을 쏟아붓지만 시대상 남성형을 대변한 것일까. 가부장적이고 찌질하고 답답하다. 아들아들하다 아들에게 팽당하고 결국 딸 샬롯에게서 희망을 보게 되지만 그의 의지는 네트워크가 활발하지 못했던 시대 탓에 다시 꺼지고 만다.

양봉업으로 먹고 살아온 조지는 CCD 현상 앞에 가업이 위태로울 지경이다. 게다가 과하다 싶을 만큼 아들이 가업을 잇길 바란다. 대출까지 얻어 일을 벌여보지만 사라져가는 벌들로 인해 미래는 속수무책이다. 실제 벌들의 개체 수는 1980년대 이후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매년 겨울마다 그 수가 더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군집 붕괴 현상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작가는 이러한 사실들을 기반으로 시대를 엮었다고 보이지만 하나로 묶는 데는 실패한 게 아닐까.

어찌 되었든 작가는 타오가 사는 시대를 디스토피아로 그려 강한 메시지를 남기고자 했을 것이다. 타오는 스스로 벌이 되어야 하는 처지였기에 꽃이 만발한 나무를 보고도 아름다움에 취할 수 없다. 실제 인공수분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벌들의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이 중국에서 더 두드러졌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을 모델로 잡은 것일까. 작가의 참고 서적에도 신중국이란 책이 눈에 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이에게 원인 모를 사고가 일어나고 아이와 강제 격리를 당하게 된다. 당국은 무언가를 자꾸 감추고 아이의 행방도 알려주지 않는다. 애초에 삐걱대던 남편과의 관계는 서서히 더 멀어져 가고 아이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베이징으로 향한다.

인간의 삶은 자연을 기반으로 돌고 돈다.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벌들이 하는 일은 삶을 위한 투쟁이다. 인간이 그들을 길들이고자 한다면 그들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다. 벌들이 인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사라졌든 환경오염이나 지나친 문명의 발달로 사라졌든 중요한 건 인간이 그 흐름을 깨트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디서 해답을 찾아야 할까.

타오는 베이징을 헤매고 다니다 뜬금없이 도서관을 찾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책 중 <눈먼 양봉사>라는 책은 타오에게 생각의 전환을 던져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보인다.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에 대해 아무리 떠들어도 눈먼 자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의도처럼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결국 교육과 지식임을 재차 깨닫게 된다. 2098년에 나는 없지만 백세시대로 놓고 보자면 우리 아이들은 살아있을 수도 있다. 타오가 그랬듯 우리 아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길 바란다면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시작은 좋았으나 깊이 따지고 들면 어딘가 개연성이 부족해서 청소년 소설로 적합해 보인다. 책장은 술술 넘어가지만 이야기가 늘어진다고 느낀 이유는 벌들의 생태와 양봉 이야기가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결말 역시 왜라는 의문이 남고 제목이 굳이라는 생각도 떨칠 수 없지만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오기에는 괜찮았다고 보인다.

작가의 이름을 보면서 꿀벌 마야가 떠오르는 건 나만 그런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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