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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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토론 도서로 만난 구병모 작가의 첫 책이다. 책을 만나기전 작가에 대한 정보를 몰라 성별도 오해했다. 필명까지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나니 씁쓸하긴 하다. 암튼 작가의 첫 책에서 작가의 수준 높은 문장력과 탄탄한 묘사력과 풍부한 어휘력에 감탄을 했다. 이야기 또한 현실 세계에 끼어든 상상력이 과하지 않게 흐르고 나머지 상상의 반은 독자에게 던져놓고 있어 여러모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한 여인이 실족사할 뻔한 사연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지만 허우적거리는 가여운 생명에게 주어진 아가미를 가진 자가 전하는 인간미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특이한 건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어 진실은 모호해지지 않을까.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p.22

 

그 바닥없는 물에서 누군가에 의해 들어올려진 적이 있는 '양해류'

그 바닥없는 물에서 다시 태어난 '곤'

그 바닥없는 물에서 영원히 떠돌고 있을 '윤강하'​

 

해류를 살린 곤, 곤을 살린 강하, 실종된 강하를 찾고 있는 곤, 삶의 어느 지점에서 느낀 동질감으로 인해 강하와 곤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는 해류.

이처럼 사건의 시점은 해류에게서 강하로 흐르고 다시 해류에게 흘러 곤에게 전해지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이야기는 무언가 허점을 드러내고 그 허점 속에 캐릭터도 변화한다. 한참 삐뚤어진 캐릭터를 고수하던 강하의 이미지에 인간미가 뚝뚝 흐른 채 끝이 나버려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초반에 보여준 그의 폭력성에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곤은 시종일관 색채가 느껴지지 않는 캐릭터이기도 했고. ​

 

누군가에게 있어 가난은 더 이상 헤어 나오지 못할 저주받은 운명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선택으로 생사의 선택권이 없었던 한 아이의 운명을 삶이 가엽게 여긴 것일까. 극한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진화한 아이는 물고기와 인간 양쪽 세계를 오가는 능력이 생겨난다.

기이한 변화에 신기한 것보다 양쪽 귀 뒤가 근질거리는 것이 왠지 징그러운 기분에 몰입이 안 된다.

 

그렇게 처절한 삶의 바닥에서 건져 올려진 아이는 할아버지와 강하의 보살핌으로 숨을 쉬게 된다. 그 보살핌이라는 게 더러는 구박과 폭력이 동반되기는 했으나 어미에게 버려져 애정결핍에 갈증을 느끼던 강하는 곤의 존재가 싫지만은 않다.

그 불안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요. -p.194

 

그럼에도 강하는 지독하게 곤에게 몹쓸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에게 아가미와 함께 속마음까지 꿰뚫는 능력이 생긴 걸까. 곤은 그저 묵묵히 모든 걸 받아들인다. 강하의 양가 대립되던 감정들이 어찌 논리적으로 설명이 될 수 있을까마는 분명한 건 강하는 곤이 다시 절망에 빠지지 않길 바랐다는 것이다.

어미의 피로 뒤덮인 현장에서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다시는 오지 말라"던 마지막 말속에 담긴 진한 애정에 울컥했다. 이제껏 강하가 싸지른 행동에는 사춘기 반항아의 기질도 다분했지만 곤의 특이함이 곧 위험함이라는 걸 알았던 서툰 방패막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해석이 강하의 입에서 전해진 말들이 해류라는 필터를 한 번 더 거치며 이미지가 순화된 것일 수도 있다. 강하가 끝까지 곤을 증오하고 두려워했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어디서든 살아만 있어주길 바란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쩜 이리도 다들 처절하게 가난할까.

해류가 물속에서 살기 위해 붙잡은 것이 자신이 가진 물건 중 가장 가벼운 핸드백 끈이었다는 대목에서 웃프다가도 상한 젖병이 나뒹구는 작은방에서조차 목숨줄을 붙잡고 있던 곤의 모습을 떠올렸을 땐 비참할 따름이다.

호수에서 건져 올려지던 시체들은 불행을 전시하고 비극은 말뚝을 박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순간 드는 생각이 뛰어내릴 때마다 곤과 같은 생명체가 그들을 물 밖으로 떠밀어 준다면 그들은 다시 살아갈까.

글쎄다. ​

 

자연의 순환만을 떠올렸을 때 강물은 흘러 바다로 가는 게 이치다. 하지만 민물고기는 바다에서 살지 못한다. 늘 강물 냄새가 나던 곤이 바다로 가서 살수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실종된 강하의 신분이 새 삶을 줄 수도 있었지만 인간 속에 스며드는 삶이 더 난관이다. 그랬기에 물 밖보다 물속에서 평온함을 찾았던 곤에게 있어 강하를 찾는 일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이 강이든 바다든 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물 만난 물고기가 되어 계속 헤엄쳐 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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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삶의 지도를 확장하는 배움의 기록
이길보라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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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 책을 몇 분이 소개할 때만 해도 그저 그런 자기 계발서 정도로 여겼었다. 책은 다 때가 되면 찾아온다는 말이 어쩜 그리 맞아떨어질까. 작가의 이름이 특이해서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데프 보이스 시리즈를 통해서 이번에 연줄을 잡아보기로 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책에는 작가의 도전기가 담겨있다. 데프 보이스에서 작가가 코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보였던 내 반응 역시 놀라움과 대단함이었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런 정체성을 신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서 겪은 경험담을 통해 '다름이 주는 풍성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들리지 않는 이들과 들리는 이들, 공교육과 새로운 도전 사이에서 그녀를 당차게 밀어 준 건 농인인 부모님 덕이었다. 장애를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식에게만은 방법을 제시해 주던 부모님의 역할이 더 값져 보였다. 물론 코다여서 겪었을 불편함에 대해선 세세히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적지 않은 상처와 날카로운 베임이 있었을 것이다. 결혼 이야기까지 오가던 남자친구의 거절 이유에 나까지 흥분하고 분노했으니 그녀 역시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작가님의 2년 동안의 네덜란드 고군분투기도 무척 훌륭하고 인상 깊었지만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지닌 문화성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이렇게 매력적으로 열린 나라라면 열정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그을음마저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동성 간의 결혼을 제일 먼저 합법화한 것만 보아도 개개인의 삶과 인권을 존중했음을 알 수 있듯이 수용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참 좋아 보였다. 지금의 네덜란드를 만든 건 이러한 사고방식을 국민들 대다수가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건 총장도 자전거를 타고 다닐 만큼 자전거가 친숙한 나라라는 점이고 다문화에 대해 협력하고 연대하려는 자세를 갖췄다는 점이다. 그러니 다양한 사람들이 모며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개개인의 발언권을 중시하고 저마다의 속도를 인정하는 태도,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을 기다려주던 급우들의 모습 역시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든 게 유학 생활일 텐데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것들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유학자금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한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우린 언제나 '정상성'과 '일반화'에 대한 질문만을 받아왔다. 그녀 역시 그런 질문들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되고 투쟁가가 되었다. 그러한 시선을 독특하게 바라본 외국인을 보며 작가가 느낀 부러움이 와닿는다.

 

개인의 예술 작업이 꼭 어떤 사회 문화적 억압으로부터 시작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무엇보다 그가 가진, 동기들이 가진 자유로움과 유연함을 갖고 싶었다. -p.154​

 

그곳처럼 우리 사회 역시 이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국적이 어디인지, 성별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 지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성장기 일반적인 코스라는 것도 필요 없고 타인의 시선 또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경험에서 얻은 넘어짐 정도는 얼마든지 성장을 위한 동력임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면 정말 좋겠다. 남들이 하니까 하고 남들처럼만 하기 위해 원치 않는 길에 서서 방황하던 시절은 나 때로 끝내야겠다. 내 아이들만큼은 틀 밖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지지하고 응원해 주어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두려움이 앞설 때 망설여질 때면 이 주문을 외워야겠다.

괜찮아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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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 케이스릴러
전건우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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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 그들이 믿는 건 마귀예요.

그럼에도 믿음에는 다 가치가 있고, 그 믿음이 강할수록 믿음의 대상은 실제한다는 거지. -p.42

7월에는 사서 모셔두기만 했던 호러 스릴러들을 하나둘 뒤적여 본다. 먼저 쪼로록 줄 서있는 한국 작가의 책들이 눈에 밟힌다. 즐기는 장르가 아님에도 한 번씩 당길 때가 있고 또 한 번 잡으면 후루룩 읽히기도 하니까. 7월 첫주는 맘먹고 <마귀>로 주말을 보냈다.

 

이전에 읽었던 <순교자>에서는 신을 의심하게 된 목사가 믿음에 관한 본질에 대해 고뇌하는 내용이 나온다. 신과 인간, 인간과 신의 관계, 신의 존재 유무와 믿음의 실체 등에 대해 내내 고민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악의 존재 유무와 실체 더 나아가 미신, 심령, 혼령 등 온갖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것들까지 등장한다.

욥은 이쪽 저쪽 이야기에 죄다 등장할 만큼 성경에서 파격적 인물이었나 보다. 무교인 내가 종교의 뿌리까진 이해할 순 없지만 어찌 되었든 악마라는 소재가 매혹적이긴 하니까. 다만 포맷의 신선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이비 종교인들의 집단자살을 모티브로 하여 악귀를 통한 부활 의식을 꾀하는 소재는 한 번쯤 어디서 본듯한 테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적정선을 유지하여 무리하지 않고 잘 끌어간다. 과하지 않게.

 

겨울만 되면 유달리 많은 눈으로 고립되다시피하는 소복리. 많은 눈을 예고하던 마을에 어느 날 외지인이 들어온다. 그들은 마귀를 숭배하는 사이비 집단의 중심축으로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이곳을 찜 한 것이다. 마을에는 평범하지만 그들의 계획을 방해할만한 용기를 지닌 인물들이 살고 있었고 거기에 오래전부터 사이비 집단의 뒤를 캐던 인물들이 합류한다. 뭐 이쯤 되면 어벤저스 팀 못지 않다.ㅎㅎ 왜냐 악귀를 처단할 온갖 종교인들과 무당까지 있었으니까.

 

게다가 만화방을 운영하는 인물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처럼 온갖 신을 믿는다. 많이 믿을수록 좋지 않겠냐며. 그렇다. 마귀 하나 물리치기 위해 이왕이면 온갖 신들이 합심하면 더 좋지. 많은 종교인들이 자기 신만 최고라고 여기지 않고 이리 합심하면 얼마나 좋을꼬. 이왕이면 더 인류애적으로다가.

믿음이 아무리 강한들 이기적 믿음은 사이비가 되는 것이다. 올바른 믿음이란 타인의 행복까지 생각하는 것인데 자기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것은 그릇된 믿음이다.

 

믿음의 목적이 무엇이건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을 향한 믿음에서 시작돼야 한다. 에필로그에서 충격적 가족사를 보여준 선우가 끔찍한 범죄현장 속에서 보여준 활약상을 보면 할 수 있다는 용기였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맞서는 용기들이 모여 악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대단한 무기와 대단한 능력보다 더 중요한 건 이런 것임을 이야기에서 볼 수 있었다.

 

여름이 아직 많이 남았다. 케이스릴러 몇 권 쌓아두고 여름밤 열대야를 이겨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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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수화 통역사 세트 - 전3권 - 데프 보이스 + 용의 귀를 너에게 +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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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는 언어다.

그럼에도 우리는 수화를 신체적 신호 그 이상의 섬세한 언어로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유독 수화를 눈여겨본 때가 있었다. 코로나 재난 방송 당시 질병관리청장 옆에서 열심히 수화를 하시던 여성분을. 아니 그분에게 시선이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빠른 손놀림도 신기했지만 얼굴 표정과 몸짓까지도 굉장히 섬세해서 수화라는 언어의 세계에 잠깐 호기심도 생겼었으니까.

 

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뮤비 엔딩에 보면 잠깐이지만 수화가 등장한다. 아이 러브 유를 뜻하는 손가락 수화였는데 이번 신곡 <퍼미션 투 댄스>에서는 아예 작정하고 수화로 춤 동작을 선보였다. 알고 보니 뮤비에 등장한 수화는 국제수화라고 한다. 수화에도 국제수화가 있고 나라마다 쓰는 수화가 다르며 각 나라 안에서도 방언처럼 수화의 종류가 또 나뉜다. 게다가 농인의 특성에 따라 사용되는 방식도 여러 가지라 수화가 생각보다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번에 만나게 된 <데프 보이스> 시리즈를 통해 알게 되었다. ​

 

희한하게 관심이 생기면 호기심이 충족될만한 무언가가 등장한다. 그러니 이 책이 나에게 온 것은 운명이다.ㅋ

<데프 보이스>의 저자 마루야마 마사키는 수화 통역사를 통해 그들만의 세계의 문을 독자들에게 열었다. 들리지 않는 자들. 즉 청각장애를 가진 이들의 세상 말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작가의 노고가 빛나는 작품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나 역시 작가 이길보라님이 의심했듯 작가가 코다이거나 혹은 농인이 아닐까 했었으니까. 더 놀라웠던 건 이길보라님이 코다였다는 사실이었다. 작가님의 책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을 바로 들였다.

 

 

 

 

 

주인공 아라이는 들리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들리는 자로 태어난 코다(CODA : Children of Deaf Adults)이다. 언뜻 생각해 보면 들리지 않는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라도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가 싶겠지만 아라이에겐 그들과 동일하지 않다는 조건 때문에 '흠이 있는 아이'가 된다. 혼자서만 듣게 되는 빗소리도 낯설고 기이한 경험이지만 '가족과 세상'사이에서 홀로 '통역'자가 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라이는 원치 않았던 존재가 되어 그만의 소외감과 차별감을 떠안게 된다.

우리편? 아니면 적?​

청인과 농인의 어중간한 경계에서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 하나는 오랫동안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미묘한 통증을 남긴다. 그랬기에 그는 더 이상 수화를 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통역자의 삶으로 이끈다. 찬찬히 받아들인 시간 속에서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된다.

 

<데프 보이스>는 아라이가 수화 통역 일을 하던 중 법정 통역 일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추리물이다. 그전에 아라이가 맡았던 세세한 일화를 보면 농인들이 얼마나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무시당하고 차별받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수화로 대화하는 이들을 보며 들리지 않는다고 막말을 하는 자들, 농인이라고 처음부터 대놓고 무례하게 구는 자들뿐 아니라 부작용이라는 단어와 묵비권이라는 단어조차도 제대로 전달하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며 농인들이 사회와 소통하는 일이 얼마나 퍽퍽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한 예는 나머지 시리즈에서 더욱 드러나는데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어디에도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시스템이나 들리는 사람들 속에 절대 섞이지 못한 채 투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심지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삶에 마음 한켠이 먹먹해져 온다.

농인의 유전적 요인을 의심해 강제적 불임시술까지도 자행되었었다는 사례는 충격이긴 했으나 아라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그 두려움이 이해가 된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싸울 수 없는 자들에게 변호사는 필수다. 그렇지만 농인들에게는 그보다 더한 능력자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쓰는 언어를 제대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수화 능력자말이다. 코다로 살아온 아라이는 누구보다 농인들의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기술에 마음이 더해져야 통하는 법이니까. <데프 보이스>에서 아라이를 통해 닫혔던 문이 열렸다면 다음 시리즈부턴 그 열린 문을 통해 더욱 복잡 다양한 세상을 들여다보게 된다. 진심은 통한다는 진리가 들어먹히는 광경은 아름답다. 미숙해 보였음에도 아라이의 진심이 통과한 주변은 한결 부드러워지고 밝아진다.

 

 

 

 

작가는 처음부터 <데프 보이스>를 시리즈로 엮을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순전히 독자들의 응원덕이었다. 속편까지 무려 7년이라는 기간이 걸리긴 했다지만 단편을 장편처럼 엮어놓아 무리가 없다. <용의 귀를 너에게>는 수화라는 특수한 언어가 음성 언어를 거부한 한 아이에게 귀가 되어주는 과정을 친근하게 보여준다. 즉 수화의 영역을 넓힌 것이다. 추리극 밑바탕엔 기득권층의 낡은 정치적 야심이 깔려 있지만 미혼모 아래 발달장애아, 심지어 스스로 가족에서 이탈해 버린 한 남자의 아픈 운명까지 등장시키며 이래저래 소외된 자들을 하나하나 포용해간다.

 

전편에서 아라이의 법정 통역사다운 면모가 약했었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그 역할을 다한다. 같은 농인들을 등쳐먹던 피의자의 양심을 끌어낸 것이다. 바람의 소리를 기억했던 한 남자는 오래전 그 소리를 잊지 못한 채 세상의 소음과 단절돼 버린다. 그는 상실감을 극복하기보다는 자신의 소리안에 갇혀 버린다. 내면의 소리까지 잊어버렸던 한 남자에게 던진 한 마디가 꽤 인상 깊게 남았다.

언제까지고 바람 속에서 혼자 서 있을 생각이로군. -p.199​

 

<용의 귀를 너에게>는 범죄의 실마리와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달장애가 가지는 특수성을 이용해 사건을 풀어가는 점이 흥미롭다. 교육의 진정한 목표뿐 아니라 농인 학교와 같은 특수학교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고 가족이라는 표면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던 아라이와 범죄로 인해 불안정해져버린 루미를 보며 가족의 의미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세 번째 시리즈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에서는 어느덧 세월이 훌쩍 지난다. 아라이는 드디어 가정을 이루었고 선택한 통역사의 삶도 안정돼 보인다. 두 번째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단편으로 엮여 있지만 아라이의 삶을 중심으로 농인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과 불공정한 사회의 이면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통역 역시 특정 분야의 지식이 없으면 난감하고 다루는 수화 체계가 다르면 아무리 통역사가 있다 한들 무용지물이다. 좌약이라는 단어조차 제대로 전달이 안되어 앉아서 약을 먹었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여럿 발생하는 것이다. 의료나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 '말이 통하는 누군가'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게끔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장애아는 줄여야만 하는 거래.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거" -p.141​

SF 소설을 보면 가까운 미래에는 장애 정도는 얼마든지 고치는게 가능하다. 장애가 있는 인간이 줄어드는 세상이 아닌 없는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줄이는 게 대안이 아니다. 장애를 가진 이들과 어떻게 하면 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을지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는 수화가 아닌 수어라는 표현이 맞는 표현이라고 한다. 수어도 또 하나의 언어로 인정받은 것이다. 사용하는 언어체계가 다르다고 편이 나뉘어서야 되겠는가. 그만큼 소통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아라이는 우려했던 대로 태어난 딸이 '들리지 않는 아이'다. 여전히 모든것들이 미흡하지만 미유키가 느낄 심리적 동요, 사춘기 미와를 지나게 될 소외감, 딸이 성장 후 노동 현장에서 겪어야 될 불편함들이 여느 우리네 성장통과 크게 다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진짜 장애는 장애를 가진자가 아니라 장애에 대해 편견을 지닌 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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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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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단편들을 읽으면 희부윰한(이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해서인지 나도 써본다.ㅎ) 감정의 뻐근함이 밀려온다. 봄이 아닌 여름이라서 오는 삶의 불쾌지수가 여름의 비 내음 같기도 하고 전 땀내 같기도 하다. 그렇듯 어떤 여름은 연속적으로 환기되기도 하고 오래전의 여름임에도 끈덕지게 달라붙기도 한다.

표제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2020년 김승옥 문학상 대상작이다. 책이 있음에도 읽지 않고 있다 단편집에서 제대로 만난 셈인데 무언가 내재된 의미가 많아 보여 가벼이 읽을 내용들은 아니다. 그만큼 '너'와 '나' 그리고 '우리'라고 불리는 사이들과의 복잡 미묘한 감정선들 때문일 것이다.

"넌 어디에서 왔니?"라는 물음에 "페퍼로니에서 왔어."라는 뜬금없는 대답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누군가에겐 뿌리를 지키고 정리하는 일(족보사업)이 중요하지만 누군가에겐 출신 배경 따위를 언급하는 일이 피로(강선)하거나 때론 위협(이기성)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야 하고 가야만 할까. 외국을 들고나고 하다 아무 곳에도 적응하지 못한 강선, 팟캐스트로 논객을 자처하다 외부와 소식을 끊어버린 기오성, 엄마의 죽음 이후 거처를 옮길 계획인 은경.

때론 지겨운 물음과 거북한 상황에 주저하고 머뭇거리더라도 나와 너는 우리가 되기 위해 부단히도 애쓴다는 것. 강선이 그렇게 기다리는 건 진짜 정말 레알 굿퍼슨이었을까. 외로움이야말로 정말 견딜 수 없긴 하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 시절을 통과했다는 것. 그렇게 좌절을 좌절로 얘기할 수 있고 더 이상 부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성장이었다. -p.40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와 뿌리라는 소재로 비슷하게 얽혀 있는 <마지막 이기성>에서는 유실이라는 이름을 숨길 수밖에 없는 동포 유키코와 유학 생활의 위기가 온 기성의 일화가 등장한다. 한인 차별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구호 대신 선택한 것이 배추심기라니. 작은 땅덩이 위에 유키코가 했던 수고가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보았을 때 그 엄청난 떨림이란.

그 느리고 비전문적이고 헛수고에 가까운 선택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러한 완고한 아마추어들의 예측 불가능성이야말로 고정된 세계를 뒤흔드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p.122

등장인물 간의 껄끄러운 관계와 어설픈 시간 속을 헤집다 보니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속 삼수생과 장의사 조교 형의 기이한 삼각구도에 우울과 짜증이 인다. 삼수생임을 누구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자신을 학대 중인 나, 의대 적응 실패 후 휴학해버린 장의사, 그런 장의사를 가스라이팅 하는듯한 조교 형. 그 시절에 우리를 지배하던 사람과 감정들은 대체적으로 불안한 시행착오를 거친다. 좋은 사람이라고 못 박고 있으면서도 언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를 나쁜 사람의 행태는 장의사에게도, 조교형에게도, 삼수생에게도 있는 면이다. 그런 불안한 자기검열을 지난 후 되돌아본 그해 여름. 실패와 충동적 만남의 시작과 끝이 있었고 뜬금없는 죽음도 있었던 그해 여름의 일들에게서 분명 작가가 건네는 말을 새겼다. 스물한 살에 바친 열정이라곤 외우고 적고 또 외운 것이 전부여서 아쉽고 그 흔한 안부 인사조차 물을 수 없었던 시절의 메마름으로 안타깝다.

유일한 겨울이야기 <크리스마스에는>에는 옛 연인과 일적으로 어쩔 수 없는 재회를 하게 되지만 안 좋았던 끝이 조금은 다듬어진 얘기여서 좋았다. 나쁜 새끼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는 건 그만큼 내적 성장이 이루어진 셈이니까.

함께 내려간 팀원 간의 불협화음(띠동갑의 말싸움)은 계속되고 그 화음 속에 짜증지수가 상승하자 문학동아리 선배에게서 들었던 개돼지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려던 순간. 그 순간을 덮어 버린 건 옆 테이블에서 울려 퍼진 덕담 가득한 소음이었다. 그 소음의 파동이 연말이라는 새해라는 시간에 섞여 들어서일까. 분명 옛 연인은 당시의 감정을 속였고 재회시엔 자신의 능력까지 속였다. 그런 점에서 재형은 욕을 처먹어도 싼 인간이지만 '나'는 그저 건,조,하,게. 응수할 뿐이다. 크리스마스였고 새해가 밝았으니까.

<기괴의 탄생>편에서는 존경하던 교수의 사생활을 비난하는 제자가 등장한다. 참고 있다 결국은 비난의 화살을 쏘아버렸지만 리애라는 제3의 인물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그러한 과정도 필요했을 것이다. 뒤에서 그런 척 아닌 척 수군거리는 대상보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어설픈 과정이었다고 위로했다. 참으면 분노하게 되니까.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 최대한 가까이 가 볼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고 아무래도 좀 더 어두운 편에서 보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에는 크게 관심도 없는 사랑의 면면을 왜 이 여름 이렇게 고심해야 하나 생각했다. - 기괴의 탄생

<깊이와 기울기>는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등장한다. 각자 무언가 예술적인 결과물을 위해 모였지만 그들이 합심해서 이룬 결과물은 섬에 버려져 있던 르망 자동차를 굴러가게 한 일이다. 예술이 삶의 목적을 만났을 때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희망적이었다.

그런 집단체의 여름에 비하면 우리의 나날들은 너무 헤이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는 기억 저편에서 '낫 크라이' 하는 말이 떠올랐다. -p.263

마지막만큼은 시원하고 당당했던 단편 <초아>편에서는 세상에 적당히 편승해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리고 여리지 않은 초아, 스스로 논객이라고 자처한 초아는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이종사촌이다. 초아는 부당함에 당당하지만 주변 시선을 외면하지 않는 덕도 갖췄다. 그것은 자기 밥그릇은 살뜰히 챙길 줄 아는 괜찮은 이기심인 것이다. 무언가에 이끌려가듯 살던 '나'는 그런 초아와의 재회를 통해 스스로에 대한 정당성을 찾아간다.

그럼에도 그 당당함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윗집에 당당히 도배비를 달라고 얘기하는 초아의 행동은 right 이지만 삼수생이 장의사에게 불편하니 그 토스트 집에서 있지 말라고 요구하는 건 over 아닌가. ㅋ

이번 단편들에서 언급된 '좋은 사람'이란 단어를 보며 난 좋은 사람일까 보다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시절이 보인다. 착하면 피곤하고 착하면 바보고 착하면 등신이라는 말은 현대가 만들어낸 공식이다. 초아처럼 빠손할 관계는 빠손하고 은경처럼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려 한다. 그렇지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은 왜 이리 아픈 걸까. 사랑은 그렇듯 손해 보는 관계인가 보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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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7 2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건빵과 별사탕 2021-07-08 08:36   좋아요 0 | URL
축하인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