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6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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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대표 작가 제임스 조이스. 그는 젊은 시절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필명을 짓는다. 신화와 종교를 바탕으로 한 이름에는 나름의 의지와 포부가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라는 실명 대신 필명으로 발표한 단편들이 빛을 보지 못하자 소설 속 주인공 이름으로까지 삼으며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 간다. 1장의 문은 그의 빛바랜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어머니의 냄새, 그때 들었던 노래들이 그리움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생의 고민을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 시적으로 녹아있다.

 

조이스의 문장은 유독 촉감이 살아있다. 시력을 잃어가는 그의 현재때문이었으리라. 유심히 읽다 보면 반복되는 문장도 더러 보인다. 그렇기에 시간을 건너뛰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좀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아버지의 높은 학구열덕(?)에 클롱고우스 학교에 남겨진 스티븐은 그때부터 세상의 오물과 차가운 공기에 몸서리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의 이름을 이상하게 보는 이부터 짓궂은 아이들, 게다가 부당하고 잔인한 체벌까지. 지리 교과서 귀퉁이에 적힌 그의 세계는 우주까지 펼쳐져 있었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장난스럽게 가볍고 선생님들의 목소리는 크고 무겁다.

 

방학일만을 기다리던 스티븐은 집안의 가세가 기운 덕(?)에 클롱고우스에서 벗어나 벨비디어 칼리지로 편입하지만 그때부터 그는 방황의 조짐을 보인다. 집안은 급속도로 기울고 아버지의 허영에 신물이 난다.

그의 소신이 담긴 글은 이단으로 취급받고 그가 추구하려던 삶에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하자 증오심만 커져간다. 반항의 불꽃은 일렁이고 거리를 배회하는 횟수는 늘어간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책 속 여인의 이미지가 육욕으로 꿈틀거리자 그는 사창가로 향한다. 실제 그는 아버지의 음주와 폭언과 폭력 그로 인한 어머니의 지나친 신앙심으로 방황의 골이 깊었고 열네 살 때 사창가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3장과 4장부터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진다. 천국과 지옥의 형상이 등장한다. 스티븐은 양심을 잊은 채 욕망을 절제하지 못함을 질타하며 자책하고 괴로워한다. 죄에 대한 두려움은 지옥의 형상이 구체화되어 그를 괴롭히고 악에 굴복했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낀다.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다 못해 고해성사를 한 스티븐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으로 신앙에 지나치게 몰입한다. 그런 이유로 성직자가 되기를 권유받지만 책임감을 감당할 만큼 신앙이 깊지 않음을 깨닫는다. 스티븐의 내면은 자유를 향한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고 예술가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즈음 스티븐은 자신의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과거 어느 때와 달리, 이제 그의 이상한 이름은 하나의 예언처럼 느껴졌다. -p.227

<파이 이야기>의 파텔과 <시간은 밤>의 안나 또한 이름과 운명을 동일시했었다. 어쩌면 그런 인물들 중에 스티븐은 최고이지 않을까.ㅎ 그 깨달음 이후 그는 인생의 진입로를 찾는다. 결정적으로 바닷가에서 본 한 소녀의 모습에서 생의 에피파니를 경험하며 천국의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름에 집착하고 무언가 찌릿한 순간을 경험하는 과정을 계속 그려보았다. 종교나 도덕적 성찰이 아닌 예술적 성찰이라 그런지 여전히 와닿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하기만 하면 당장 그물을 씌워 날아오르지 못하게 해. 네가 지금 나한테 말한 민족이니 언어니 종교니 하는 그물. 나는 그런 그물을 뚫고 날아오르려고 노력할 거야. -p.337

 

5장에서는 예술가의 고민과 정치와 종교에 대한 폭넓은 고민들이 펼쳐진다. 예술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또 무엇인지, 예술가의 자질과 예술과 욕망의 관계, 연민과 공포의 정의에서 출발한 심미적 관계, 신의 존재와 종교의 본질, 국가의 정체성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고민과 확신을 보여준다. 삶의 소음을 잊고 자연에서 영혼의 고통을 씻으려 했으며 공상과 침묵 또다시 소음 속을 거닐며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는 종교를 버린다. 그의 눈에 비친 신부의 모습은 그저 노인의 손에 들린 지팡이 같은 존재일 뿐이다. 사상 따위는 자체의 법에 지배를 받으며 영혼 또한 언어의 그늘에 갇힌다.

그럼에도 논쟁은 끊임없다. 그의 소신은 더욱 굳어지고 영혼의 떨림은 예술적 시구로 꿈틀댄다. 이젠 정말 떠날 때가 된 것임을 깨닫는다.

 

조이스의 실제 삶을 보면 그는 떠났으나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더블린이라는 글자가 짓누르던 삶을 글로 옮겨 놓았을 뿐인데 그에게 가해진 벌은 잔인했다. 그의 삶이 이토록 아이러니해진 이유가 그의 지나친 예술가적 기질 때문이었을까.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제임스 조이스는 날아올랐다.

 

그는 4월 5일 자 일기에 이런 문장을 끄적여 놓았다. '사나운 봄, 질주하는 구름들. 아, 인생이여!'

그의 고뇌는 사납고 그의 영혼은 질주한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나아가리라.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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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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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은 맛있다. 이처럼 소화력 좋고 기분 좋은 두드림을 준 책을 만나 반갑다. 천선란 작가의 이전 단편들이 신선한 바람이었다면 천 개의 파랑은 오월의 바람과 참으로 잘 어울린다.

한국과학문학상이 있는 줄도 몰랐다. SF란 장르를 좋아하지만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다. 주로 외국 작가의 책을 찾아읽다 작년부터 하나 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만나고 있다. 정세랑, 김초엽, 그리고 천선란. 어쩜 이리도 간이 딱 맞을까.

 

천선란 작가에게 대상을 거머쥐게 한 천 개의 파랑은 SF와 문학의 조화가 돋보인다. 기계문명의 등장은 인간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지만 인간의 감성에 물기를 앗아갔다. 생명체를 향한 다정했던 시선은 돈과 쾌락에 혐오스러운 비정함으로 뒤바뀐다. 시대의 흐름에 적당히 어울리지 못하면 야유와 깡통이 날아든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에겐 과학문명과 더불어 문학이란 코드가 들러붙어 있어야 한다. 마치 스카치테이프로 퉁퉁 말아놓은 덤처럼. 그렇게라도 해 놓지 않으면 사막과도 같은 미래의 모습에 암담함을 느끼지 않을까.

 

작가는 휴대폰 메모장에 끄적여놓았던 한 문장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경마가 등장하고 기술 문명인 로봇이 등장한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시점으로 놓고 기수였던 로봇 C-27(기계)과 경마 투데이(동물), C-27에게 콜리라는 이름을 주며 제2의 삶을 선사한 연재(인간)를 등장시킨다. 이 삼박자를 아름다운 관계로 만들어준 요소와 주변 인물들의 배려까지 더해져 뭉클한 휴먼 드라마를 탄생시킨다.

 

우리는 오늘을 산다. 로봇에게도 오늘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만는 기수 로봇으로 만들어진 콜리는 인간의 실수로 오늘을 사는 것만 같다. 분명 학습된 감정체계로 인식해야 함에도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듯하다. 바람에 흩날리던 투데이의 갈기를 만지고 싶어하고 변화하는 하늘빛에 입력된 천 개의 단어를 이리저리 조합해본다. 심지어 가짜가 아닌 진짜 초원을 달리고 싶어 한다. 로봇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모습과 흡사하다. 작가는 이 로봇의 능력을 어느 선까지 두어야 할지 조심스럽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하늘은 파랗고 사과는 빨갛고 구름이 꼭 하얀 것만은 아니다. 천천히 살다 보면 놓치고 살았던 것들이 보이는 법이다. 콜리는 천 개의 단어를 천 개 이상의 단어로 불려가는 삶을 산다. 상대의 행동을 분석하는 이유 또한 이해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천 개의 단어를 알아도 쓰지 않는 단어들이 더 많고 이해조차 포기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연재가 경로에서 이탈한 후 제자리를 찾기까지, 보경이 상실 후 멈춰버렸던 시간을 찾으려 하기까지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아질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 p.83​

 

기계문명의 단점이라면 모든 것들이 쓸모없는 기계처럼 취급되어간다는 것이다.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삶보다 더 상처가 되는 것은 무관심 속에 버려지는 것이다. 연재는 콜리뿐 아니라 안락사를 앞둔 투데이에게도 시간을 벌어준다. 버려진 시간이 아닌 다시 주어진 시간 속에서 얼마든지 인생의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명이 발달이 인간의 삶을 반질반질하게 하는 동안 삶의 격차는 더욱 거칠게 만들어 놓는다. 빈부의 틈이 더 잔인하게 찢어진다. 때때로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다.-p.113 동시에 인간미도 찢긴다. 그럼에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건 소수의 꿈틀거림 때문이다. 막연한 미래를 예견하기보다는 상처를 입은 이들을 살피려는 것이 가까운 미래를 돌보는 일이 아닐까. 진정 살려내고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이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잡아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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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
요조.임경선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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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별로 없는걸 부끄러워할 나이는 지난 것 같고 ㅎㅎ 인생 얘기 시시콜콜 나눌 언니가 한 명쯤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절친이라도 각자의 행복을 좇느라 바쁘고 책 얘기와 내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나누기엔 코드가 맞지 않다. 현재는 독서모임이 조금의 갈증을 덜어줘서 즐겁긴 하지만 그 또한 적정선을 지켜야 관계가 유지된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처지가 많지 않을까.

그럼에도 선뜻 관계를 만드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어렸을 땐 다칠까 봐 두려웠지만 지금은 피곤하다는 핑계가 더 가까운데 이도 따지고 보면 결국 솔직하기 어려워서 오는 피로감일 수도 있다. 말하고 보니 내가 문제구나.ㅋ

 

난 요조도 임경선 작가도 잘 모른다. 단지 문학동네라는 출판사의 인연과 교환일기에 관한 호기심 때문에 샀다. 나는 학창 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쪽지들을 보관하고 있다. 차마 버릴 수가 없어 모아둔 것들이 보물 1호가 되었다. 어쩌다 상자를 열어 꼬깃꼬깃 접힌 기억들을 펼쳐보면 도무지 접힌 채 펴지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그 편지들 속엔 우리들의 속 사정이 리얼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연들은 바래졌을지 몰라도 어느 특정 장면들이 머릿속을 채울 때면 심장이 저릿해져온다. 그땐 그게 힐링이었는데 지금은 왜 마음을 닫아버리고 사는 걸까. 단지 맘 맞는 이가 없어서일까. 두 여자의 말말말도 문자 대화에서 시작되었다는데 그러고 보면 쉴 새 없이 말을 하고픈 이가 없어서인 듯도 하고.

 

그리하여 난 두 여자의 틈바구니에 꼽사리 끼어있는 기분으로 읽어 나갔다. 재밌었다. 삼십대와 사십 대, 미혼과 기혼이라는 조건만 빼면 글을 쓴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도 공감대가 아주 많아 보여서인지 오가는 대화들이 자연스러웠다. 그녀들의 친분의 깊이는 알 수 없으나 생각의 톱니가 잘 맞아 보여 읽기가 편안했다. 어쩌면 나 역시도 그녀들과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책을 잠시라도 놓고 있으면 허기가 온다는 말 완전 공감^^

 

약봉투에 적힌 45라는 숫자가 진정 내 나이인가를 의심하면서도 하나둘씩 고장나는 몸땡이를 보면 세월의 정직함에 웃음이 난다. 일에 치여 산 삼십대보다 사십대의 여유가 좋고 말의 무게를 체감하기에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도 충분히 동의한다. 서로의 라이프 스타일과 성향이 달랐음에도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건 서로를 인간적으로 믿기 때문이고, 상대의 눈을 통해 나를 다시 바라보고 상대의 말 한마디에 흔쾌히 나를 수정할 수 있는 것 또한 진심이 통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다름이 조심스러워 말을 아낄 필요도 없다. 상대의 깜냥을 알기에 글 속에서 푸근함이 전해진다. 생각의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는 사이가 된다는 게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솔직과 정돈된 가식의 어중간한 지점을 맴돌고 있는 나는 앞으로 어떤 인연에게 맘껏 솔직해질 수 있을까.

 

교환일기를 통해 서로의 정(우정과 속 사정)을 나누다 보면 마음이 바로 서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딸아이에게 꼭 이 책을 읽히고 싶다. 좀 더 주체적이고 또렷한 존재로 거듭났으면 해서.

누군가의 수다가 조언이 된다는 건 역시 예술가들이기에 가능한 것이었겠지만 더 많은 분들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참한 생각은 닮고 싶은 것이기에.

 

어쩜 그리도 고마운 문장들이 많던지.

'하나로 똘똘 뭉치는 것' 이상으로 '각자의 개체로 흩어질 줄 아는 것'이 중요한것 같아. -p.67 라는 말을 각자가 잘 인지한다면 속터지는 일이 좀 줄어들텐데.

 

"어차피 해봤자야"

"사람들은 다 똑같애"

나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과는 가급적 거리를 두고 있어. - p.97

나도 앞으로 이런 말은 쓰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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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리커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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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작가는 생소하지만 2월에 단골 동네 책방 SNS에서 책과 작가 소개 글을 보았다. 책방 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이미 어린이라는 세계를 지난 청소년 두 분이 있어 등한시할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마치 더 이상의 육아서는 필요하지 않다는 듯 밀어두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읽은 건 주변인들의 강력 추천 때문이고 무의미를 의미 있게 바꾸고자 한 다짐 때문이었다.

 

작가는 독서교실을 운영하면서 많은 어린이들의 삶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적잖은 깨달음을 얻는다. 수업했던 책들도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다. 책 속 지혜와 경험에서 우러나온 글들을 읽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왜 그때를 까맣게 잊고 어른으로 성장해버린 것일까. 서툴지만 기발하고 엉뚱하지만 진실된 행동들이 왜 이상하게 비틀리고 획일화돼 버린 걸까. 왜 어린이들에게 차렷, 열중쉬엇이라며 고함만 치는 것일까.

 

나도 고백컨대 어린이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결혼하니까 애를 낳았고 내 아이니까 키웠을 뿐이다. '노 키즈 존'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이나 '오죽하면'이라는 쪽을 더 응원해오기도 했고 그 부모의 그 아이라는 방정식이 맞다고 여겨 '노 배드 페어런츠 존'에도 마찬가지의 시선을 두었다. 가끔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한탄도 한다. 그렇다고 내 아이들이 절대 유별난 건 아니다. 단지 육아에 온통 내 시간을 뺏기는 게 가끔 억울했고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의 눈빛에 적절히 대응하는 게 어려웠다.

 

참 많은 순간들이 지난다. 아이의 속도를 인정하지 못하고 아이의 높이에서 바라봐 주지 못했던 시간들과 아이가 지닌 감각과 호기심에 내 방식대로 반응했던 시간들이 부끄러워진다. 코를 제대로 푸는 법을 가르쳤던가. 운동화 끈을 제대로 묶는 법을 살갑게 설명해 주었던가. 엄마 곁을 좀처럼 떨어지지 못하는 아이를 귀찮아하며 밀어낸 적은 없었던가. 빨리빨리 다그치며 기다림이란 소중한 시간을 배우지 못하게 한건 아닐까. 어쩜 이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어린이날이라 오늘자 뉴스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떴다. '아이 친구에 떡볶이 사준 게 무개념?…"길거리 음식 먹인 적 없다" 타박 문자'(출. 아시아 경제) 기사 내용을 보며 이 부모는 진짜 부모 공부 다시 해야 되겠단 생각이 절로 든다. 아이는 혼자 키우는 게 아니다. 사회와 나라와 온 우주가 함께 키워야 한다. 이렇게 내 안에서 내 방식을 고수하며 상대의 성의를 상식이 없다고 매도한 부모 밑에서 자랄 아이의 감성이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어린이가 없어도 읽어야 한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선 줄을 보며 어린이도 사려고 줄을 섰냐며 묻는 몰지각한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여러 감동의 에피소드 중 아이의 이 한마디가 여전히 내 맘을 울린다.

"녹을 까요?" ​

선생님이 나눠 주신 초콜릿을 엄마 아빠와 먹기 위해 손에 쥐고 갈 생각을 하다 선생님에게 물은 것이다. 정말 예쁘지 아니한가. 이 아이는 분명 제대로 된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설득하는 말로 '무엇을 하지 말자'보다 '무엇을 하자'라는 말이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자기가 고른 책을 직접 결제하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준 책방 주인의 마음처럼 그런 어른이 되자. 다시 돌아간다면 이번만큼은 아이의 말을 들어 주고 기다려 줄 텐데.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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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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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는 몇 년 전 영화를 본 후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화의 여운이 너무 길어서 책을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해놓구선 작가의 다른 책을 먼저 읽었다. 얀 마텔. <파이 이야기> 이후 15년 만에 내놓았다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내겐 신선함과 충격 그 자체였다. 종교와 철학, 삶과 죽음, 인간과 동물이 오묘하게 뒤섞인 환상과 현실의 야릇한 궁합. 나의 모자란 상상력을 쥐어짜내면서도 작가의 문장들에 매료되어 몇 번이고 곱씹어 읽은 기억이 있다. 순서가 뒤바뀌긴 했어도 어찌 되었든 얀 마텔의 느낌을 만끽해서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그 느낌들이 되살아났다.

 

<파이 이야기>는 책보다 영화를 먼저 본 이들이 많을 것이다. CG의 놀라운 기술력에 무섭고 두려워야 할 태평양의 밤바다와 밤하늘에 대한 기억은 온통 반짝이는 것들로 각인되어 있고 무심하게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린 호랑이의 뒤태 또한 오래도록 남아 있다. 완독하고 보니 영화는 원작에 충실했다. 1부에서 종교와 동물 이야기를 읽고 있을 땐 영화를 먼저 본 걸 후회했다가 2부에서 본격적으로 바다 표류기가 시작되었을 땐 영화 이미지라도 떠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으니까.

 

1부는 의외의 즐거움을 주었다. 동물과 종교에 관한 견해에 다시 눈이 띈다. 어쩌면 1부는 2부의 이해를 돕기 위한(호랑이와의 생존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에 대한) 밑밥이다. 그렇기에 1부를 잘 읽어둬야 한다. 생존을 위한 이론 공부랄까. 동물의 특성, 습성, 영역, 서열, 동물을 다루는 방법, 동물과의 안전거리 및 동물이라는 동반자?에 대한 소중함까지. 물론 동물은 동물일 뿐이라는 교훈을 던져 주며 리처드 파커의 무심함에 가슴이 삐걱이기도 했지만.

종교 또한 비껴갈 수 없다. 어쩌면 예측할 수 없는 삶을 헤쳐나가기 위해선 모든 신이 총동원되어도 될까 말까다. 파이는 그저 신을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다. 예수님, 마리아님, 마호메트님, 비슈누님 그 외 온갖 만물의 신들에게 기도하고 의지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했다. 그저 그뿐이었다.

힌두교도들도 사랑에 용량에 있어서는 대머리 기독교 들과 같다고. 이슬람교도들이 모든 사물에서 신을 보는 방식이 수염 난 흰두교도와 같고, 기독교들이 신에게 헌신하는 마음은 모자를 쓴 이슬람교도와 같은 것 아니겠냐고 -p.70​

 

피신 몰리토 파텔, 파이 파텔, 과학자들이 우주를 이해하는 데 사용한 신비로운 숫자 '파이'​

열여섯 살 파이는 모든 신을 사랑하고 동물에 대한 경이로움을 아는 소년이었다. 동물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1970년대 인도의 혼란기를 피해 캐나다행을 감행한다. 하지만 원인 모를 이유로 배는 침몰하고 구명보트에 덩그러니 남겨진 건 파이와 얼룩말과 하이에나와 오랑우탄과 서기의 실수로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을 가진 호랑이뿐이었다. 그도 잠시 곧 서열이 정해지고 파이와 리처드 파커만 남는다. 주위엔 상어 지느러미가 유유히 떠다니고.

 

그렇다. 그의 인생이 이제 작은 생존 보트 한 척 안에 달렸다. 닻도 키도 없이 오로지 주변 환경의 뜻대로 내몰린 처지가 된다. 보트 안에서 남은 것이라곤 생존에 대한 절박함으로 인한 살려는 의지뿐이다. 호랑이로부터 상어로부터 풍랑으로부터 그리고 굶주림으로부터.

그러나 차차 새로운 의지가 생겨난다. 리처드 파커 길들이기. 길들인 후 함께 하기. 그것이 바로 진정 살고자 하는 의지가 된다.

마음 한편에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p.207​

 

열여섯의 순진한 소년은 생존법칙을 준수했고 게으른 기대감을 떨치고 현재에 집중한다. 터지는 눈물에 지쳐 있을 수만은 없었다. 처음 해 본 살생의 흐느낌이 자신감으로 뒤바뀐 후부터 227일간의 일과는 바쁘게 흘러갔다. 기도는 빼놓지 않는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려 들 때마다 나름의 방법을 쓰며 의지한다. 터번은 신의 모자(언제나 올이 줄줄 풀렸다), 바지는 신의 의복(산산조각이 났다), 리처드 파커는 신의 고양이(계속 위험스러운 존재였다), 구명보트는 신의 방주(감옥이었다), 양손을 쫙 펼친 곳은 신의 땅(천천히 날 죽이고 있었다), 하늘은 신의 귀(잘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라고 되새기면서. 펜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일기도 쓴다. 그럴수록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만으로는 인생을 헤쳐나갈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자 그것 또한 살아가는 방식이었을 뿐이다.

 

여러 가지의 하늘과 바다를 보았고 온갖 밤과 달을 보았다. 최악의 권태와 공포를 맛보았고 영양실조로 눈이 멀어버렸을 땐 앞날이 깜깜해진다. 식인섬의 존재 역시 뜻하는 바가 있다. 살면서 우리는 식인섬같은 인간이나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땐 재빠르게 관계를 끊고 발을 빼야 한다는 점이다. 망망대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파이에게 리처드 파커는 희망이었다. '난 죽는다'가 마지막 일기였지만 운명의 신은 그와 리처드 파커까지 살려 주었다. 호랑이와 함께 한 그의 생존기는 굉장하고 흥미로운 사연이지만 현실에 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이는 다른 버전의 리얼 생존기를 들려준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이고도 끔찍한.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을 두고 잠시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리처드 파커와 함께 한 그 시간들을 믿고 싶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죠.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p.375

나 또한 그들이 짓고 있는 다채로운 표정들을 믿는다. 세상을 아름답게 해 주는 묘하고 섬세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동물들의 표정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정말로 사랑해'라는 파이의 말이 진심이란걸 나또한 누구보다 잘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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