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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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 해도." -p.49

이 책은 오래전 남편이 반쯤 읽다가 덮어 둔 책이다. 재밌냐는 물음에 글쎄...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네.라는 짧은 대답이 끝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남편은 감정이 단순하다. ㅋㅋ ) 단편 모음집이란 얘기도 일언반구 없었기에 나도 책을 펼치고서야 단편집인 걸 알았다. 하루키 월드 진입 계획을 잡아놓고 첫 스타트를 끊은 책치곤 나쁘지 않다. 출간 순서대로라면 이 책을 먼저 읽었어야 했지만 <일인칭 단수>를 먼저 읽은 점도 한몫한다. 그의 책이라곤 아직 에세이와 단편집이 전부지만 조금은 하루키 느낌을 알 것 같다. 유독 그의 글엔 추억 돋는 요소(음악, 물건)들이 제법 등장한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 속을 애매하게 맴도는 분위기도, 사건을 마주하는 미스터리한 감정들도 글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우스갯소리로 남자들은 여자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한다. 혼자 사는 여자보다 혼자 사는 남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처량함과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건 왜일까. 그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남자들은 유독 여자들에게 집착한다. <그레고리 잠자>편에서 인간으로 변한 잠자가 여자를 보자마자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처럼 남자들에게 있어 성욕은 본능이다. 외모 따윈 상관없다. 더 과하게 말하자면 남자에게 여자는 식욕과도 같다. <독립기관>편 등장했던 남자가 사랑하던 여자를 잃게 되자 거식증에 걸려 죽고 말았던 것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소통의 부재로 인한 오해로 상처를 받거나 분노한다. 벌어진 간격을 방치하면 할수록 감정은 위험해진다. 다행히 단편 속 남자들은 그나마 심성이 곱다. 여자들의 배신에 나름대로 극복할 무언가를 찾는다. <드라이브 마이카>편에서 한 부부는 아이를 잃은 상실감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고 아내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외도를 일삼는다. 그런 아내를 그냥 묵인하던 남자는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이유를 묻지 못한다. 아내를 향한 원망과 의문 때문에 외도남에게 접근하던 지질함까지 보였던 남자는 그를 통해 그 이유를, 그리고 아내를 이해해 보고자 했지만 그가 정작 아내를 이해하게 된 대상은 그의 운전기사였다. 운전만큼은 여자를 믿지 못했음에도 그녀는 믿음이 갔고 그녀의 결정적 한마디로 더 이상은 자신을 속이고 살지 않아도 됨을 깨닫는다. '여자한테는 그런 게 있어요. 그건 병 같은 거예요.' 어쩌면 그가 아내를 사랑했음에도 외도를 눈감아 준 데는 이미 그자신도 아내의 상태를 이해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것이 거짓이든 변명이든.


상처받은 한 남자의 외로운 여정에 연민이 일었던 <기노>편은 가장 여운이 오래 남았다. 아내의 외도를 눈앞에서 목격한 남자(기노)는 분노는커녕 원망의 몸부림도 없이 상황을 정리한다. 시간이 흘러 이혼 절차를 위해 얼굴을 마주하지만 아내의 일방적 사과와 변명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속에 담긴 체념의 뿌리가 너무 단단해 보여서 앞으로 이 남자는 얼마나 많은 체념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가게 될까 걱정스러워졌다. 가슴을 떨리게 하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차인 그. 누군가의 감정에만 맞추며 살았던 그. 이제 그는 그를 둘러싼 무수한 양의적 감정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돌보며 살아야 한다. 그런 깨우침을 준 건 잠시 가게 문을 닫고 떠나라던 의문의 남자였다. 어디든 떠나서 오로지 받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만을 쓴 그림엽서로만 안부를 전하라던 그. 그는 그의 뜻대로 여행지에서 엽서를 쓰다 불현듯 세상과의 단절감에 소스라치게 놀라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비로소 열어젖힌다. 오로지 나만의 것들을. 기억은 여러모로 힘이 된다. -p.270 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다시 제대로 잊고 용서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여자를 잃었던 남자 중에 제일 크나큰 깨달음을 얻은 이가 기노가 아닐까.



반면 여자를 잃자 삶을 놓아버린 <독립기관>편의 한 남자의 생도 지나칠 수가 없다. 사랑만큼은 자신감이 넘쳤지만 그 누구의 남자가 되길 거부했기에 그의 대상들은 한낱 스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감정만큼은 지나치게 스스로를 통제하고 절제하며 살아왔던 이 독립적인 남자에게 균열이 생긴다. 인간은 로봇이 될 수 없다. 사랑이란 감정을 얕보았던 그가 결국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놓아 버린다.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한 남자의 말로를 보며 거짓된 사랑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어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우습게 여긴 죄. 어쩌면 그도 그의 운명을 미리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지독한 함정이다.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따윈 할 수 없는 짓이다.


지나친 친밀감으로 인해 더 이상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한 커플이 등장하는 <예스터데이>편은 그녀의 꿈속 이야기를 형상화한 표지 그림 덕에 기억에 남는다. 예스터데이 노래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멋들어지게 소화하고 현지인처럼 사투리를 그럴싸하게 구사할 만큼 자신감 넘치는 재주를 지녔음에도 그녀를 품는 데는 너무나 서툴렀던 남자.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고 사랑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어제를 만드는 것도 결국 나 자신임을 여실히 보여준 단편이었다.

어제는 / 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p.113



하바라에게 성교할 때마다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던 <셰에라자드>편은 잠시 사랑이란 병에 집착했던 한 여인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냥 그녀가 하자는 대로 몸을 내어주는 하바라라는 남자보다 짝사랑이 낳은 아슬아슬한 집착과 현재의 일탈. 전생에 칠성장어였다고 고백하는 이 도무지 설명이 안되는 여자의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그녀의 끊어진 이야기에 대한 안타까움을 하바라 그도 똑같이 느낄테지. 그녀와의 친밀한 시간이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거라는 슬픔. 그렇다면그는 슬픈 칠성장어로 남을 것인가.

새벽 한시, 오래전 사랑했던 여자의 죽음을 전해 듣는 것으로 시작되는 <여자 없는 남자들>편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여자 '엠'과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그전에 그녀가 절반을 잘라 건네주었다는 지우개때문에 짧은 단상이 떠오른다. 아이들 숙제를 봐주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많던 지우개는 다 어디로 사라지고 있는 걸까 하는. 사도 사도 자꾸만 잃어버리는 지우개. 닳아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지우개처럼 그녀도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도 잊었다. 잊고 지낸 그를 다시 깨운 그녀의 부고 때문에 그는 이제 스스로를 여자 잃은 남자들에 편입시킨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듯 잠깐 한눈판 사이에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떠나버린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때 내가 느끼는 감정에 얼마나 충실했냐 하는 것이다. 떠나버린 그녀에 대한 마음이 잃어버린 지우개와 같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남편이 굳이 그에게 엠의 부고를 알린 이유는 뭘까. 분명 엠에게 그의 존재가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그녀의 안녕을 비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한다. 그것은 그의 손에 남겨진 지우개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감정의 치유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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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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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3년 전 드라마를 보다 만났었다.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인상 깊게 보던 드라마가 감우성, 손예진 주연의 <연애시대>였다. 당시 감우성 팬이기도 했고.ㅎ 요즘은 티비와 별로 친하지 않아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를 다시 티비앞에 앉힌 건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낸 감우성 때문이었다. 책의 제목과 드라마 제목(키스 먼저 할까요?)은 별로 통하는 느낌이 없지만 책 내용과 드라마 제목은 뭔가 일맥상통하는 느낌이다. 물론 이 드라마도 몇 회를 보다 말아서 결말은 알 수 없으나 감우성(손무한 역)이 잠 못 들던 김선아(안순진 역)에게 이 책을 읽어주었던 장면은 달달하게 남아있다. 외로움에 목말랐던 두 사람이 밤에 영혼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감성 돋기도 했고.

 

이 나이에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스스로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 알고 봤더니 온통 말라죽은 것만은 아님을 발견하는 것. -p.59

 

자식들이 다 떠나고 덩그러니 노인들만 남은 집. 더군다나 반려자 없이 혼자 남겨진 상황이라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무료함과 싸우고 외로움을 견디는 것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애디 무어는 루이스 워터스를 만나러 갔다. 작되는 이 이야기는 한 노인이 이웃집 노인을 찾아가서 자신과 함께 가끔 밤을 견뎌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한다. 물론 그냥 나란히 누워 서로의 온기만 공유하자는 것이다. 작가의 마지막 책이라는 점이 떠올라서였을까. 사회적 관습과 억눌린 시선으로부터 당당하고 싶으셨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양보다 훨씬 연애관이 자유로운 서양조차도 결말은 그렇지 못했기에 씁쓸했지만.

 

루이스는 애디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이 걱정스러워 뒷문으로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은 누군가의 사생활을 입에 담기 좋아하는 작은 시골마을이기 때문이다. 가십거리로 심심풀이 땅콩이 되고 싶어 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허나 애디는 당당히 앞문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이제 벗어던지라는 말과 함께.

 

애디의 용기와 믿음을 믿게 된 루이스는 낯섦을 극복하고 그녀와 함께 하는 날을 늘려 나간다. 이상한 하루에서 편안한 하루가 되기까지 그들은 서로가 살아왔던 시간과 가족이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사연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속내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애디가 더 이상 남의 시선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말한 이유도, 루이스가 남들의 시선에 조금은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듯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의 빈자리를 애정으로 메워가는 동안 이웃사람들뿐 아니라 각자의 자녀에게까지 따가운 소리를 듣게 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응원하는 이웃도 있다. 나는 못해요. 이 나이에 어떻게 -p.67

 

게다가 애디의 아들의 이혼 위기로 손자가 집에 머무르게 되면서 두 사람은 공동육아에 돌입하며 더욱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그 좋았던 시간은 애디의 아들로 인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보이는 것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 인생도 어쩌지 못하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아들놈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엄마의 인생을 멋대로 하려는 건지.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진다.

 

나는 이 물리적 세계가 좋아요. 당신과 함께 하는 이 물리적 삶이오. 대기와 전원, 뒤뜰과 뒷골목의 자갈들, 잔디, 신선한 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당신과 함께 누워 있는 것도요. -p.141

 

물리학을 이해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더 경이롭게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저 문장이 더 와닿는다. 애니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속에 루이스가 함께 들어와 있는 것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 물리적 세계에서 한발 물러나버린 건 애디였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아픈 게 아니라 짜증이 났다. 결말을 탓하기 전에 이게 우리의 현실이란 사실이 더 맘 아프다. 왜 우리는 꼭 그 나이에 다다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걸까. 노년의 삶과 더불어 사고의 편협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랑이란 모험에 나이의 제한이 어디 있으며 부모나 자식은 서로의 인생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왜! 무슨 자격으로 행복을 빼앗는가.

 

애디가 이웃집 남자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얼마나 고심을 했을까. 오랫동안 주변의 시선을 깜쪽같이 속여 왔던 애디가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쉽지 않았겠지만 손자 때문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인연을 놓아버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오직 물리적 거리만을 남겨둔 두 사람. 서로의 외로운 밤을 달래 줄 체온은 없지만 목소리에 담긴 온기만으로도 그들의 밤은 안녕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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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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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해가 흘렀다. 작년 9주기를 맞아 들였던 책이 <대범한 밥상>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기념에세이가 출간되어 반가웠다. 국문학을 자꾸만 등한시하면 안되는데 일년동안 <토지>외엔 그렇다하게 읽은 책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번 10주기 기념 에세이는 산문 660여 편에서 35편을 선별했다고 한다. 늦게 문단에 등단했지만 삶이 곧 쓰기였던 작가. 그 글속에 담긴 삶의 진정성을 알기에 읽고 또 읽게 된다.

 

제목이 입에 잘 붙지 않았다. 모래한 알? 모래한 톨? 모래만 한? ㅋ 모든 원인은 세세히 살피려 들지 않는 나의 허술함때문이겠지만. 이렇듯 살면서 우리는 이런 비슷한 경우를 자주 접한다. 단순히 익숙한 것에서 오는 착각, 보이는 것만 보려는 고집, 아는것으로만 재단하려는 오만. 제목은 진실만을 쓰겠다는 신념에서 따온 것이었다.

 

박완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고운'이다. 그냥 글들이 다 곱다. 물론 세상과 사람을 향한 작가님의 마음씀씀이가 고와서일테지만. 거짓없고 꾸밈없는 소박함으로 물든 곱디 고운 글들이다. 쉽게 읽히지만 이렇게 쓰기가 쉽지 않다. 진심이, 진실이 들어가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문장들. 그런 모래알같은 순간들을 되짚어 보니 보잘것없어보이는 시간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어떠한 순간 혹은 소소한 사건을 두고 스스로를 돌아본적이 얼마나 될까. 순간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남탓만 하거나 아니면 심한 자책으로 소심해져서 자꾸만 위축되진 않았던가. 불필요한 감정을 솎아내고 상처받은 기분을 희석시키는 일에 게을리하면 분노만 쌓여간다. 그렇기에 문학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작가가 내어준 마음의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으면 좀 더 겸손해지고 소박해지지 않을까.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p.15

 

작가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생각의 결을 닮고 싶어진다. 지하철에서 치맛자락을 깔고 앉은 맷집 좋은 무뚝뚝한 남자를 향한 오해, 폭설이 내린 날도 어김없이 비워져 있는 연탄재를 보며 느끼는 고마움, 연민과 동정사이에서 오가던 영악한 마음, 물질만능주의와 문명앞에 움츠러들던 신세, 분한마음에 내 지른 고음뒤로 진저리처지는 씁쓸함, 외할머니의 쑥떡을 떠올릴때마다 드는 창피함, 잃어버린 가방에 대한 속상함보다 지저분한 속옷따위를 누군가에게 들켜버린듯한 수치심, 자연이 내어주는 소박한 자리를 귀이 여기는 마음.

 

<할머니와 베보자기>에서는 정말 눈시울이 뜨끈해졌고 <달구경>에서 손자가 내 뱉은 한 마디(할머니, 왜 달이 나만 따라다녀?)에 내 맘도 뭉클해졌다. <다 지나간다>를 읽으면서 새벽잔디를 깎기 위해서라도 마당있는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새벽의 잔디를 깎고 있으면 기막히게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건 향기가 아니다. 대기에 인간의 숨결이 섞이기 전, 아니면 미처 미치지 못한 그 오지의 순결한 냄새다. -p.110

 

흐르는 물소리가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는 작가. 그러고보니 작가 한지혜 님도 눈 내리는 소리가 '괜찮다, 괜찮다'로 들린다고 했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열고 있으면 그렇게 들리나보다.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 기억을 곱씹을때마다 밀려오는 감정들에 드는 애착들. 그런 잔상들이 나를 보이지 않는 삶의 끝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삶의 유한함에 입 맞추고 모진 시간까지도 끌어 안는다면 행복이란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라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작가는 얼마나 많은 내적 고통을 감당했을까. 쓰고 또 쓰는 일이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간것임을 알겠다. 습작을 즐겨 했다던 작가의 습관을 닮고 싶어진다.

 

이솝우화에 보면 인간의 양면성을 이야기한 글이 있다. 인간은 한 입으로 따뜻한 바람(호~~)과 차가운 바람(후~~)을 불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좋은 관계를 위해서 호와 후를 적절히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이 무엇이든, 문학이 주는 역할이 무엇이든 그저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던 작가.

오래 행복하고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으며,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 되고자 했던 작가의 바램덕에 마음의 온도가 조금 상승된 기분이다. 호~~~하고 불어주셨으니.^^

그리고 나도 귀엽게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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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03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 신간 산문이라니 너무 반갑네요. 표지부터 삽화 까지 너무 예뻐요. 이책 제 장바구니 속으로~(토지는 9권에 멈춘지 몇년쨰인 1人ㅋㅋ)

건빵과 별사탕 2021-01-03 23:43   좋아요 1 | URL
토지는 진짜 맘 단디 먹고 가야해요.ㅎㅎ 저도 13권에서 다시 출발하려고요^^
 
체실 비치에서 (영화 특별 한정판, 양장)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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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와 플로렌스 두사람은 방금 식을 올렸다.

그들에게는 너무도 많은 계획이 있었다. -p.12

첫눈에 반해 아주 천천히 사랑을 키워가는동안 그들은 누구보다도 멋진 미래를 그리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사정보다 더욱 심각한 속사정이 있었다. 호텔방을 가득 메운 어색함과 두려움의 입자들. 서로가 눈을 맞추면서도 자꾸만 뜸을 들였던 이유가 기대와 떨림이 아니었다니.

 

사교적인 배려라는 담요가 그들을 결속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리고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었다. -p.174

 

섹스와 결혼이 혼연일체였던 시절을 지나 은밀하게 혼전순결이 깨어지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두사람은 혼전순결을 존중한다. 그렇지만 각자의 이유가 달랐다. 첫경험에 거는 기대와 걱정의 차가 극명하게 갈렸다. 문제가 더 심각했던건 플로렌스였다. 그녀는 섹스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그것은 역겨운 고통을 유발한다. 그녀의 몸은 본능보다 이성에 더 충실하다. 진실을 얘기할 기회를 놓쳐버린 플로렌스. 어쩌면 그런 상황쯤은 견딜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고 여겼을것이다. 사랑해라는 말을 수없이 속삭이면서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거는 미래처럼 단단히 결속시킬 자신이 있었다. 에드워드가 조금만 협조를 해 준다면.

 

그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늘 새롭게 굽이치는 파도나 물결과 같은 것임을 깨달아가고 있었고, 바로 지금 그런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다. -p.150

 

로큰롤과 일렉트릭 블루스를 즐겨 듣던 에드워드, 클래식에 강렬한 열정을 쏟는 플로렌스. 서로의 동선이 겹치지 않을만큼 취향은 달랐어도 각자 자라온 환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래도', '그래서' 였기에 그들은 문제될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시대의 흐름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즉 젊은 에너지의 자유분방함과 격정적인 순간을 첫날밤으로 아껴둔것이다. 아니 미뤄둔것이라고 보아야겠다.

 

자꾸만 다짐하며 마음을 다독이는 플로렌스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아름답게 리드하고자 한 에드워드. 그녀의 머리속을 지배한 당연한 의식 그리고 형식적인 손놀림. 하지만 먼저 상황을 종료시킨건 에드워드의 지나친 성적 흥분감이었다.

 

그토록 아름답던 체실비치에서 두사람은 시작도 전에 깨어진다.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잘게잘게.

 

두사람의 닮은 점이라면 거짓 감정속에서 성장기를 지났다는 점이다.

 

감정적으로 메마른 성장기를 지난 플로렌스. 그녀는 감정의 솔직함보다 형식적 관계를 더 중요시했다. 모든 인간관계의 평정을 위해 언제나 노력은 스스로의 몫이었다. 사랑이라는 껍데기속에서 완벽한 침묵을 택한 그녀. 그런 그녀의 침묵은 바이올린 선율을 통해서만 격정적으로 흘러 터진다. 오로지 섹스에 대해서만 형편없던 그녀. 그렇다고 그녀의 사랑까지 의심할 수 있을까.

 

미쳐버린 엄마를 위해 연극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에드워드. 어머니를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지켜내기위해 택한 침묵들. 그는 그곳을 떠나 자신만의 세계에 안착하는 날만을 고대했다.

 

Lie.

서로가 그토록 원했던 이상적인 미래는 그들을 구조하지 못했다. 고통의 신음과 흥분의 신음은 파열음을 만들뿐이었다.

서툴러서 미안했고 솔직한 감정앞에 미안했고

서로가 하나가 되는 순간의 황홀감을 받아들일 수 없어 미안해한다. 혐오와 수치심으로 범벅이 되어버리고 각자 홀로 남겨졌음에도 영원히 그들은 그 미안함으로 놓쳐버린 사랑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그리움으로 채우며 살아갈것이다.

 

멀쩡한 성인 두 명이 그런 사건을 서로에게 설명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p.165

 

부드러운 애무와 그 순간 퍼져나가는 짜릿함. 플로렌스에게 거기까지가 마지노선이었다면!

그렇다면 에드워드가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만 있었더라면 그들의 미래는 정말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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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이 그림 여행 - 화가의 집 아틀리에 미술관 길 위에서 만난 예술의 숨결
엄미정 지음 / 모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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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한 해가 넘어가는 시점에 내가 넋 놓고 바라본건 타종행사가 아닌 멋진 드론쇼였다. 어마어마한 최첨단 장비들이 선보이는 불빛 쇼. 밤하늘을 수놓은 불빛은 마치 고흐의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를 떠올리기도 했다. 빛의 향연이 만들어낸 기분좋은 설레임을 끌어안고 새해 첫날 밤을 보냈다.

 

책덕후라면 누구나 새해 첫 책을 고르는데 신중할 것이다. 며칠만 지나도 그런 의미따윈 무색해지고 늘 하던대로 살아가겠지만 '첫'이라는 한 음절이 주는 의미가 워낙에 특별해서 침대맡에 쌓아둔 책을 뒤적였다. 어젯밤의 설레임을 이어 줄 책을 고르다 그림 여행이라면 더할나위없는 선택이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누군가의 발자취만 몇권째인지... 웃음이 나지만 지금은 더욱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나. 새해 아침 커피한잔 내려놓고 유럽 곳곳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저자는 이 책을 오래전에 준비했다. 한 예술가의 행보를 성실히 따르며 내 놓은 결실에 훗날 나의 발자취도 더해볼 수 있을까 기대해본다.

 

뒤러로 시작해 마티스로 끝맺고 있는 여행길은(그러고 보니 며칠전 마티스 특별전 알람이 떴었는데 잊고 있었네) 그림보다 인물들의 발자취에 더 초점을 두었다. 1부까지 읽고보니 확실히 작가의 생애에 좀 더 치중했음이 보인다. 여러 그림 에세이를 읽어도 매번 기억의 절반은 휘발되 버리기에 이렇게 한 작가에게 여러면의 지면을 할애한 점이 고마웠다. 그들의 생가, 작업실, 가족, 그들이 지나온 길을 지나니 자연스레 그림과 사연이 하나가 되어 다가온다. 한 예술가를 향한 시선은 어떤 순간, 어떤 공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 다를 수 밖에 없고 작가의 일생을 놓고도 감정의 농도가 다 다르기에 매번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어도 새롭게 다가온다. 내가 알고 있던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속 '노란벽의 작은 자락'은 어느 곳을 의미할까. 이렇듯 예술작품과 문학(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 만나면 그 의미가 더 심오해진다.

 

평소 그냥 괜찮네라고 여긴 작품이지만 저자의 찬사가 자꾸만 붙게되면 정말 그렇게 보일때가 있다. 그것은 저자만의 감수성과 작품의 이야기가 더해진탓도 있지만 그렇게 이해하고 들여다보면 정말 더 좋아지는 그림들도 있다. 클림프의 <키스>를 바라보면서 여태껏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도 실제로 그 그림을 앞에 선다면 아마 꽃밭에 시선을 못박고 있었을런지도.

 

반면 극찬을 듣고도 그 감흥을 덜 느끼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을텐데 저자는 <성삼위일체> 앞에서 그런 경험을 한다. 허나 이는 여행 후 미술관련 서적을 보다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 그림속 3차원 공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이상적인 눈높이가 175cm라니. 음. 그렇다면 받침대 정도는 작은 이들을 위한 배려차원에서 준비해두면 안되는 것인가? ㅋ

 

저자는 여성화가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잠시 쉴 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된다. 대체 얼마를 걸었기에 발이 퉁퉁 부은걸까. 팍팍한 일정과 정해진 시간은 이처럼 타국에서 온 관람객들의 심신을 분주하고 고달프게도 하지만 시선이 닿는 곳곳에서 전해지는 예술의 혼때문에 힘든줄도 모르고 또 걷게 되는게 아닐까. 저자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여성화가 앙귀솔라. 난 그녀의 이름도, 그림도 처음 접했지만 왜 그토록 저자가 보고 싶어 했는지 알것만 같았다. 강렬하고 역동적인 카라바조, 신비스럽고 웅장한 엘 그레코 두 거장은 그림만큼이나 삶의 폭이 넓고 자유로웠다.

 

3부 프랑스편에서는 봐도 봐도 좋을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모네의 정원을 찾아가고 고흐의 그림속에 등장하는 노란집이 있던 자리와 카페를 둘러보기도 한다. 글로만 보던 예술가 세잔은 그곳에서 다시 보게 되는데 세잔의 정물화에서 놓친 시간성을 알게되자 나조차도 세잔이 다시 보인다. 얼마전에 살까말까 고민하던 패터 한트케의 책을 들여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여행은 아무리 잘 계획을 해도 수많은 변수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박물관이 공사중이라든가 날씨가 좋지 못하는건 부지기수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문이 어려운곳도 있고 차편 실수로 제때 도착하지 못하기도 한다. 마치 내 모습인것마냥 안타깝지만 그것마저도 내겐 여행의 묘미로 다가온다. 새해 첫날 선택한 여행에 기분이 들뜬다. 그곳이 아니라서 어떤 일치의 순간이나 저릿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작가의 생을 알고나자 강렬한 끌림은 더해졌다. 작년에 갈 수 없었던 미술관 방문 계획을 다시 짜보련다. 앙리 마티스전 알림이 다시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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