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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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제사인 아이다(A'ida)와 용접공 사비에르(Xavier). ​​

그들은 끝내 만나지 못했을까.

 

반정부 테러 조직 결성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독방에 갇혀 있는 사비에르. 그런 그에게 아이다는 편지를 쓰고 또 쓴다. 그곳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비밀과 세상의 비밀, 일상의 소음과 세상의 소음, 의심스런 정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

그에게 부쳐진 편지 외에 보내지 못한 편지와 보내지 않은 편지들에 담긴 이야기들에서 그들의 삶의 부재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그럼에도 연애편지 같은 사랑스러움도 묻어난다. 그를 칭하는 여러 언어의 애칭과 그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매일 밤 당신을 조각조각 맞춰 봅니다 - 아주 작은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사비에르는 그녀의 편지 속에 그려진 손그림을 창틀 아래 붙여놓기도 하고 편지 뒷면에 메모를 남기기도 한다. 그녀의 편지가 부드러운 깃털이라면 그의 메모는 날카롭고 강인하다. 그녀의 편지가 하늘로 띄워졌다면 그것은 그가 세상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외침이지 않았을까.

 

이 책은 편지와 메모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앞쪽에는 존 버거가 한국 독자들에게 남긴 편지가 있다.

이 책을 읽은 몇몇 분들이 제가 정말 아이다의 편지를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혼자 꾸며낸 것인지 묻습니다. 물론, 그 질문에 답을 드릴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 그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

 

아룬다티 로이는 이 책에서 절제된 분노를 보았고 옮긴이는 세계화에 대한 저항을 보았다. 그녀와 그의 단순한 사적 이야기가 아닌 세상을 향한 저항과 투쟁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미소는 때론 다정하고 때론 당당하며 때론 든든했다. 그는 갇혔지만 그녀는 살아남은 자들과 꿋꿋하게 버텨낸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과 예측할 수 없는 죽음과 어두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끊임없이 삶을 잠식해 들어오지만 잃어버린 습관처럼 우리의 매일을 이어주는 시간들과 예기치 않은 웃음이 가져다주는 힘을 믿는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울음 대신 웃음을 터트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상한 질문이죠. 우린 삶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p.167

 

 

세상은 그를 가두었고 그녀의 주변은 늘 불안하다. 그럼에도 그녀에겐 어떤 믿음이 느껴진다. 그의 강인하고 단단한 신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유머가 그녀로 하여금 더욱 사랑의 크기를 키워나간다. 편지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어떤 편지가 마지막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절망이나 후회 따윈 없다. 단지 그를 오랫동안 만지지 못해 그녀의 손이 쓸모 없어져 버린 것 같다고 말하는 안타까움과 우리가 계속 싸울 수밖에 없는 당위성만이 가득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p. 95

 

 

삶의 파편들에 상처를 입고 살갗이 찢어질지라도 그녀는 이델미스가 그랬듯 사람들에게 치료 약과 진정제와 희망과 경고를 담은 처방전을 나누어 줄 것이다. 그녀는 그들이 막으려 하는 미래가 반드시 올 거라는 확신이 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거리가 들려주는 희망적인 소문들 말이다. 텅 빈 밤을 울리는 사랑해요라는 말 한마디에 가득 채워지는 것 또한 희망이다. 그녀의 입속에서 그에게로 전해질 메아리. 갑자기 터져 나오는 눈물이라도 그렇게만 흘려버릴 수 있다면 다행인 삶이다.

어둠의 침묵을 깨는 건 새소리이며 뚝뚝 끊어진 일상을 이어주는 사이의 날들로 생을 붙잡아 나간다. 그가 보낸 재스민 화분이 그녀에겐 재스민 벌판이 된다. 그곳에서 그녀의 긴긴 팔다리로 그를 껴안을 수 있기를. 그가 그린 탈출 경로를 보며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는 부은 눈으로 살짝 윙크를 해 보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세상 속에 있든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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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2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이구절에 백만번 공감합니다일상의 소음과 세상의 소음, 의심스런 정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 아룬다티 말처럼 저항과 분노를 편지글에 녹여낸 이작품 건빵님 사진과 리뷰 만큼 멋지고 감동적입니다.^.^

건빵과 별사탕 2021-01-22 11:45   좋아요 1 | URL
이 책을 한 삼일 붙잡고 있었는데요. 여전히 울렁울렁하네요. ㅎㅎ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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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책은 이 책의 옮긴이 김현우 작가의 책 <건너오다>를 읽다가 호기심에 들였다. 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그리 마음에 담아두고 계신 걸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의 문장이 이토록 좋은 이유가 존 버거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존 버거가 미술평론가였단 사실도 이 책을 펼치고서 알았다. 책에 실린 그의 드로잉을 보면서 사진도 좋지만 앞으로 선을 써보는 건 어떨까 하는 마음도 꿈틀댄다. 좀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팔십 년간 글을 써온 작가의 내공은 어떨까. <자화상> 도입부를 읽으며 다양한 사유를 즐길 수 있겠다 싶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새해가 되서 습관들이기 목록에 매일 글쓰기를 넣었다. 책 리뷰 쓰는 거 외엔 글쓰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쓰는 일이 자꾸만 버거워진다. 게다 언어의 한계에 자꾸만 부딪히는 것 같고.

 

저자가 말하는 언어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읽다 보니 언어의 모습에 대해 고심해 보게 된다. 나는 언어로 나의 의미를 잘 찾아가고 있긴 한 걸까. 스스로를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로 생각한다는 저자처럼 나도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겠다.

 

이 책은 그냥 그의 문장을 찬찬히 따라가다 괜찮은 지점에서 잠깐씩 쉬어갔다. 요즘 매일 필사하며 책을 읽고 있는데 오늘은 찰리 채플린에서 잠시 멈췄다.

 

채플린의 익살이 지닌 에너지가 복수성(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인 어떤 사람)에서 기인한다고. 그 복수성이 있었기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음.. 그 복수성도 좋은 쪽으로의 복수성이야겠지. ㅎ 이중인격자말고.ㅋㅋ 그의 노년의 모습은 처음 보았는데 정말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렘브란트의 노년의 자화상들이 대체적으로 분위기가 우울하던데 저 작품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네. 찾아보니 그가 죽기 6년 전에 그린 작품으로 나이 많은 노파가 자신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처럼 그려달라며 옷을 벗고 포즈를 취하자 그 모습을 보고는 배꼽을 잡고 웃다가 죽었다는 그리스 화가 제우크시스와 동일시 한거라는데...ㅋㅋㅋㅋ real?? 믿거나 말거나?

스스로를 비웃은건지 아님 해탈?의 경지에 이른건지 그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웃는 모습이라 좋네.^^

​채플린의 익살이 지닌 에너지과 렘브란트의 웃음.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는듯하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의 그림은 <세월이라는 음악의 춤>이라는 작품으로 알게 되었다. 그의 그림에는 언제가 이야기가 가득하고 깊은 의미들이 숨어 있다. 그의 작품 아르카디아의 목자들도 마찬가지다. 존버거는 오십 년 지기 친구였던 스벤의 장례식 후 불현듯 그와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푸생의 그림을 떠올린다. 이 그림의 시선은 한 목동이 가리키고 있는 그림자로 향한다. 비문을 읽어주고 있는 장면으로 마치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걸 상기시켜 주는 듯하다. 석관에 쓰인 글: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

 

언어가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대변해 줄 수는 없다. 때로는 노래로 때로는 풍경으로 때로는 한 송이 꽃으로, 서랍 속 물건으로 삶의 이치를 읽어내기도 한다. 자연의 외양들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일이 가능할까.-p.104

물론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듣고 자연을 찾는다. 언어로 이해받을 수 없는 순간을 이해하고자.

미디어의 무차별적인 언어에서 조금 멀어져 문학의 언어로 심신을 닦고 살자.ㅎㅎ

언어에 관한 사유보다 그림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아졌지만 나름 괜찮은 시간이었다.

 

 

 

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은 하나의 선 위에 찍힌 점이 아니다. 이 선은 전례가 없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의 일시적 탐욕에 의해 절단되고 있다. 우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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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0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건빵님 이페이퍼 넘 좋아 존버거 저책 구판으로 갖고 있는데 이책번역가 김현우님이 본업을 거의 포기하고 존버거 책번역 에 매달리며 존버거가 살던곳도 답사했던 분인데,,[,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은 하나의 선 위에 찍힌 점이 아니다. 이 선은 전례가 없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의 일시적 탐욕에 의해 절단되고 있다. 우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생태계질서 파괴로 전염병공포 환경오염속에 살고 있는 현재 인류에게 말하는 문장 같네요 건빵님 필사 멋져요!

건빵과 별사탕 2021-01-20 10:30   좋아요 1 | URL
김현우 번역가님의 열정이 너무나 궁금해서 저도 찾아읽게 된 책인데 사유들이 너무 고급져서 감탄사 연발하며 읽었습니다.ㅎㅎ

대충 끄적인 필사에도 감탄사를 쏘아주시다니 기분 너무 좋은데요^^
오늘도 멋진 하루 되시길요. scott님.
 
좋은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황인숙 지음 / 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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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고양이를 만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 상대는 맘줄 생각도 안 하는데 매번 먼저 인사를 던진다. 간혹 몇 번의 간식으로 안면을 튼 녀석들은 가끔 뻔뻔하게 들이대서 날 당황하게 만들 때도 있다. 왜 꼭 그럴 때마다 간식거리가 없는 건지.....

 

며칠 전에 재미 삼아 해 본 '나에게 어울리는 동네는?'이라는 유형 테스트에서 얼토당토않게 청담동이 나왔다. 아무리 봐도 내겐 촌자가 들어간 동네가 어울릴듯한데 청담동이라니.ㅋ 저자 황인숙 님은 해방촌에서 길냥이들의 밥그릇을 책임지고 계신다. 30년이 넘는 시간을 해방촌에서 보내면서 저자에게 늘어만 간 건 끈끈한 연민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게와 집들, 가난하지만 그 속에서 한 끼의 정을 나누던 사람들. 그 시간을 지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변치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길냥이를 향한 시선이다. 이게 투철한 애묘심보다 더 투철해야 하는 게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저자의 말처럼 치졸한 냉혹함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시인의 시나 글은 잘 몰라도 자동 존경 모드로 돌입하게 된다.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건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돕는 것에서 얻는 기쁨도 크겠지만 저자의 선행은 결코 자기만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된다. 그렇다 보니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비슷하게 닮아간다. 고양이를 싫어하고 힘들 일을 싫어한다던 친구조차도 그런 친구의 노고를 마냥 외면하지 못했듯이. 로또가 당첨되면 고양이 밥 주는 알바를 쓰겠다는 작은 소망에 피식 웃게 된다. 비록 로또의 행운은 어디론가 실종되어버렸고 인생은 불그죽죽한 궁상 같지만 내가 내민 손길이 어디선가 부메랑이 되어 행운으로 돌아올지도 모를 것만 같은 야릇한 기분을 우찌 설명할 수 있을까. 정말 가까운 곳에 거주한다면 그 피로를 덜어드리고 싶다.^^ 좋은 일은 나눌수록 좋은 법이니까.

 

언제부턴인가 비 오는 게 싫다. 그토록 좋아했는데 꺼리게 된 세 가지, 눈과 비와 긴 계단. -p.28

 

띵동! 안전 문자 소리다. 코로나 소식이 아닌 대설주의보 발령이란다. 뜨아~~~ 이번 겨울은 왜 이리 혹독할까.(허나 저자가 지나온 겨울은 똑같이 혹독했다.ㅎ 겨울은 늘 추웠던 게야.) 기후 위기 때문이라 죄인처럼 할 말은 없다만 떨어지는 기온에 내 맘도 한없이 무겁다. 올해는 유독 더 한파가 기승이다. 보일러 온수배관이 언 적은 나도 첨이었으니까. 도저히 이 추위를 그냥 무시할 수가 없다 보니 오지랖만 늘었다. 일단 이 겨울은 넘기고 보자 싶어 매일 밥동냥하러 오던 녀석을 사무실에 가뒀다.(녀석의 의견을 반은 무시했으니 미안하지만 가둔 게 맞다.) 겨울만 지나고 원하면 언제든지 가도 좋다는 전제하에 돌보기 시작한 지 3주가 지나고 있는데, 요 녀석 당분간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다행히 원래 있던 녀석들하고는 서열정리도 돼가는듯하고.^^ 봄 내음이 퍼질 때쯤 녀석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대게 자정이 지난 시간에 동네를 한 바퀴 돈다. 한 손에는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빈 그릇들과 물통이 들어있는 부직포 가방, 다른 한 손에는 고양이 사료와 간식들이 들어 있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p.57

 

한 해를 넘기고 못 보던 길냥이를 다시 보게 되면 눈물 나게 반갑고 살아줘서 고맙다는 마음마저 든다. 저자도 그런 경험을 옮겨 놓았다. 몇 해를 보다 못해 구조까지 시도하다 실패하고 거의 죽기 직전의 고양이를 울면서 따라갔건만 싸가지 없는 여인네 때문에 마음이 쓰겁다. 에잇! 이 몹쓸 인간아!

내 삶은 확실히 길고양이들 밥을 주기 전과 후로 갈렸다. -p.146는 저자의 말을 곱씹어 보면 그만큼 더 내공이 쌓였다는 뜻일 것이다. 따가운 시선과 긁어대는 말투에도 버럭 하지 않을 인내심. 이건 진짜 대단한 내공이다. 팔자소관이라고 쑥덕대고 끈질기게 밥그릇을 치우는 인간들도 있지만 저자는 그보다 더 단단해져만 간다.

 

가끔 들르는 고양이 가족이 있다. 이미 따뜻한 분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인데 오가는 길목에 있어 나도 가끔 들여다본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고양이 밥그릇 주위에 까치들이 모여 밥도둑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고양이 밥을 주다 비둘기들이 꼬여 고생을 치렀다는 저자의 일화가 떠올랐다. 저 녀석들을 쫓아버릴까 하다 내버려 두긴 했는데 저러다 더 많은 애들이 몰려오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고양이는 물을 자주 마셔야 되는 동물이다. 겨울엔 부어 놓은 물이 꽁꽁 얼어버리는 일이 잦아 더 자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생각처럼 뚝심을 발휘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유독 이번 겨울 동안 동사한 길냥이가 많다고 한다. 아직 겨울은 더 남아있고 이 추위를 나지 못하는 애들이 더 있을 것이다. 길냥이들의 쉼터에 따스한 시선과 온정을 베풀어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평범한 나날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자도 도무지 출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 문장이 유독 와닿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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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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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적당히 협조하고 수긍하서 장단 맞춰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네 편 내 편으로 구분 짓어를 좋아해서다. 그 니편내편안에서도 또 니편내편을 가르며 작은 공동체를 꾸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속력이 때로는 누군가의 목을 옥죌 수도 있다는 걸 까맣게 잊는다. 그러한 것들의 밑바탕에 정치적 신념과 종교가 자리 잡게 되면 더욱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네 편이고 내 편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혼돈은 작중 화자인 '나'를 통해 드러난다. 정작 현실에선 입을 걸어 잠그고 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늘어지는 문장 때문에 번역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했다. 우습게도 블랙유머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문장과 설정들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하자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p.61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진실이 아닌 거짓이란 결론에 체념하고 만다. 이런 시대적 모순과 감정의 아이러니를 문체에 담은 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랬기에 '나'는 철저히 입을 다문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지이든 무관심이든 상관없이 침묵을 택한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침묵은 곧 오해와 고립을 낳는다. 모든 사건의 인과관계는 그 집단의 이익과 연결되고 각자의 욕망으로 흐른다.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사람들의 눈밖에 난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이 위협적인 건 아니었다. 주인공 '나'가 여자 화장실에서 '아무개 아들의 아무개'에게 위협을 당할 때 그녀를 적대시하던 여자들 덕에 위기를 벗어났던 순간들이나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로 불리던 진짜 밀크맨이 총격을 당해 병원 신세를 지고 있을 때 '아무나 사랑하려는 여자' 들 덕에 밀고자라는 혐의를 피하게 된 것과 같은.

 

이 책은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개인적으로 부커상 작품을 좋아한다. 강한 주제의식, 독특한 서술과 문체들의 난해함이 좋다. 책을 온전히 흡수하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수확량도 만족스러우니까.

이 책 또한 독특한 점이 두드러진다. 인물들에게 고유명사가 없다. 즉 화자인 '나'는 가운데 아이(열 명 중 중간이라서)로, 형제들도 첫째, 둘째, 셋째로, 그녀의 남자친구는 어쩌면 - 남자친구로, 남자친구가 그녀를 부를 때도 여자친구로. 그렇듯 특정 직업이나 명칭으로만 불린다. 게다가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임에도 정치적 용어가 없다. 70년대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을 암시하는 듯한 단어만 존재한다. 물 건너, 길 건너, 반대자, 수호자, 국가 암살단 등. 그러므로 굳이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까지 필수적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의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이 이상야릇하고 우스꽝스러운 현상들이 꼭 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물들에게 고유명사가 없다고 했지만 딱 한 명 등장한다. Milkman!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the milkman(진짜 the milkman도 있다)이 아니라 밀크맨이라고 불린다. 영국에서 밀크맨은 주로 주부들을 유혹하는 대상으로 자주 농담에 등장한다고 한다. 소설 속 밀크맨은 '나'의 주위를 맴돌며 '나'를 온갖 루머를 시달리게 만들고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이다. 무장단체 요원이라고 의심받는 그가 왜 '나'를 미행하고 접근하는지 명확한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정말 웃기는 건 사람들이 생산하는 루머다. 그가 위험한 인물임에도 사람들은 열여덟 살 소녀와 마흔한 살을 불륜으로 묶어 치졸하게 '나'를 질타하고 압박한다. 마치 네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왔다는 것처럼. 게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나'를 비난한다. 그녀가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굴지 않는다는 점과 걸어 다니면서 책을 본다는 점은 사회와 자신의 안전을 망각하는 위험하고 기이한 행동으로 결론 내려 버린다. 그녀를 믿어주어야 하는 가족은 물론이고 절친까지도 조심성 없는 그녀를 탓한다. "그럼 조심해야 해" 291

 

사회적 제약과 억압으로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납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미 그녀의 시도도 '거짓말'라는 단어 앞에 무력해진다. 획일화된 생각과 고정관념을 깨부수기도 힘들뿐더러 그들 스스로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나'는 분명 남자친구와 함께 일몰을 보았음에도 하늘이 파란색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본 다채로웠던 하늘의 색상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세부적인 사항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애초에 없는 것으로, 본 적이 없는 것으로 하고 사는 편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곳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조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함을 당하고 수치를 감당해야 하고 구타와 총살을 당한다. 그래서 침묵에 부적응까지 필요해진다.

 

경미하여 공동체에서 용인할 수 있는 정신이상이 있고 경미하지 않고 상도를 벗어난 정신이상이 있다. -p.94

 

수시로 폭탄이 터지고 군인들과 경찰의 불심검문에 시달려야 하는 이 전쟁이라는 불가항력 시대에 맨정신으로 버티는 게 가능이나 할까. 힘든 날만이 아니라 언제나 꾸준한 타인에 대한 공포가 인정사정없이 끼어드는 시대에 말이다. 영화 <벨파스트의 눈물>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떠올라 더 갑갑하다. 빛을 뺏기거나 그 빛이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어느 누구하나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것도 문제다. 불행이 당연시 되고 비극을 그냥 받아들이며 사는건 인간의 삶이 아니다. 어린 시절 강간의 트라우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미쳐버린 아버지, 자녀들을 버리고 자신들의 인생을 찾아 떠나버린 어쩌면-남자친구의 부모, 수녀가 되어버린 첫사랑을 잊지 못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진짜 밀크맨, 핵소년과 알약소녀, 문제의 여성들. 반면 자신의 빛을 내려 하는 이들도 희미하게나마 연약하게나마 존재했다. 프랑스어 선생님과 어쩌면-남자친구, 알약소녀의 동생이 있다.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 팬층을 확보한 셋째 형부는 세상을 향해 이의를 던지고 덤비라는 신호를 계속 보냈으며 누구도 사랑하지 않지만 이웃사람들을 돕는 진짜 밀크맨은 진심으로 그녀의 연민(손수건에 감싸 쥔 고양이 머리)에 손을 내민다. 모이면 그 파워를 무시할 수 없는 여성들은 '나'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뜻밖의 연대의식을 발휘했다.

 

​밀크맨은 과연 누구였을까. 어쩌면-남자친구가 더는 남자친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듯이 밀크맨도 어쩌면-밀크맨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어쩌면-남자친구의 집을 뒤져 자동차 부품 조각을 찾는 것이나 허상이 벗겨진 밀크맨의 이름 앞에서나 그렇듯 철저하게 부풀려 놓았던 거짓 앞에서 바람맞은 꼴이 되었다. 혁명은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른다. 실체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나'의 주위를 맴돌며 긴장감을 유발하던 밀크맨이었지만 오히려 더 기분 나쁘고 경계해야 될 대상은 찰칵 소리다. 그러한 소리에 눈을 돌리고 반응해야 한다. 밀크맨이 조여오던, 공동체가 조여오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애써야 한다.

 

살다 보면 많은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법이다. 나는 결국 산다는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p.432

밀크맨의 죽음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씩 빛을 내려한다. 사람들이 그토록 믿는 것들에도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욕망이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어떤 색이든 될 수 있음도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라고요라며 삶의 가장자리로 옮겨 앉을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선택을 해야 하는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어둠이 아무리 크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어둠은 없다. -p.122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허구와 풍자의 세계. 넘치고 넘치는 문장들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그 속에서 찾은 유머와 삶의 깨달음이 좋아던 책이다. 두께에 겁먹지 말고 도전해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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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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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육세의 노모는 딸의 두 번째 사위에게 선인장이 꽃을 피울 것 같아 초대에 응할 수 없다고 한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고양이와 부랑자들, 임신한 하녀들에게 대문을 열어주던, 자연의 경이로움을 알고 생명의 고귀함을 알았던 여인.

그런 여인의 딸 콜레트.

<여명>은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문학이 그녀의 삶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를 먼저 보는 편이 책을 흡수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녀의 인생의 롤 모델은 어머니(시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와의 편지는 그녀가 글을 쓰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거침없이 나갈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순수한 어머니의 삶과는 달리 그녀가 새벽의 문턱에서 품었던 것이 선인장 꽃이 아님을 고백하지만 열정과 수치스러움의 혼란에서 갈등하던 그녀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딸의 사랑을 응원하는 것으로 화답한다.

 

그녀는 자신의 굴곡진 삶에 어머니를 삶을 대입시킨다. 시작을 소유하기 위해 시간의 사닥다리를 오르던 어머니. 아무도 눈뜨지 않은 시간 속에서 갖는 자신만의 세계를 탐닉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평판이 좋지 못했던 자신의 삶이지만 나름의 헌신을 다했음을 변명한다. 하지만 넘나들 수 없는 어머니의 세계에 비해 자신은 어딘가 늘 부족해 보인다. 삶의 연륜을 어찌 따라잡을 수 있을까. "데어봐야 뜨거움을 안다"던 명언과 기다림이란 우아한 예절과 사양할 줄 아는 최고의 멋임을 알려준것도 어머니였다. 그녀가 맞이한 여명의 순간순간 앞에서.

 

언제나 너의 삶을 살라던 어머니의 조언이 있었음에도 삶에 비치는 불안감은 그녀의 생각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곳이 나의 마지막 집일까? 나는 단지 혼자가 될 뿐이지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를 떠나버린 많은 남자들 덕에 우정의 증거를 보여주었던 친구들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까지도. 그리고 나도 붙잡아주기를····· 이라는 끝맺음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온통 사랑이었다. 낭만이었고 열정이었고 쾌락이었다. 평온과 불안이 뒤섞인 혼돈 속에서 그녀는 사랑으로 매번 새로이 태어났다. 그녀가 얼마나 매력있는 여성이었으면 황혼의 나이에도 젊은 사랑이 찾아올까. 영화를 보고 나니 이 문장의 의미와 그녀의 매력을 더 알것만 같다.

정말 그랬다. 여자들은 행복한 사랑을 해본 횟수만큼 많은 고향을 가지며,

사랑의 고통이 치유되는 하늘 아래서 매번 새로 태어난다. -p.19

 

그녀는 이제 사랑 때문에 이는 마음의 동요와 그녀를 둘러싼 관계들에 신중해야 한다. 어머니의 연민이란 스스로가 편하기 위한 이기심이었음을 깨닫자 그녀는 이제 진정한 나의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한다. 삶과 이상이 언제나 같지 않아도 됨을 그녀의 선택에서 보았다.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그녀는 그녀를 위하고, 엘렌을 위하고, 마지막으로 비알을 위한 선택을 한다. 사랑하지만 보낼 수밖에 없는. 그 이해 못 할 유행가 가사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심적 고뇌가 너무나 솔직해서 맘이 아프기보다는 그저 응원하게 된다.

 

날이 샘과 동시에 느꼈을 그 새로운 기분은 사랑으로 충만해질 순간들이 아니라 생을 향한 그저 그런 끄덕임을 다시 한번 새기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계절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헌신하고자 한다. 이웃들과의 즉석 만찬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와 수확을 앞둔 포도송이에서 느끼는 삶의 충만감. 해가 다시 떠올랐을 때 자신이 해야 하는 일 또한 포도를 수확하는 일상적인 과정임을 깨닫기까지 그녀의 삶은 수만 가지 형용사가 가득한 삶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첫 작품에 대해 지나치게 형용사가 많다는 이유로 출판을 거절을 한다. 남자들의 단순함이란... ㅋ

 

"가을에만 수확을 하리니·····"

이 말처럼 사랑의 유통기한을 확실히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무엇보다 그녀에게 더 끌렸던 이유도 자연과 동물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과 위선에 지쳐갈수록, 거친 인생에 맘이 쓸려갈수록 시골 풍경을 동경하고 동물들의 작은 몸짓에도 맘을 기울인다. 그녀의 문장에는 이토록 자연과 동물에 관한 은유가 돋보인다. 어떤 문장에서는 그녀 스스로의 고통을 엿볼 수 있고 어떤 문장에서는 남녀의 관점의 차이를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동물들은 사랑의 배신으로 고통스러워할 때의 나를 가장 싫어했다는 것을. 그들은 내에서 절대적 패배와 그로 인한 고통의 냄새를 맡았다. -p.28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식물들은 피곤해지나 보다. 꽃 전시장의 화초들은 매일 저녁 사람들의 지나친 찬사에 죽어간다.-p.54

 

물구덩이 곁에서, 암고양이는 음푹한 작은 발로 물방울을 움켜잡고는 그 물방울이 넘쳐흐르는 모양을 바라본다. 아마도 여자애들은 목걸이를 가지고 저렇게 놀리라····· 그러나 비가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 수고양이는, 아직까지도 비가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놈은 현관에 앉아 한참 동안 비를 바라보다가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 p.159

 

특히 그녀의 각별한 고양이 사랑 때문에 그녀가 더 좋아진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끌림이다.

동물들은 얼마나 감탄스런 존재인가? 이 고양이는 특별하다. 마치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친구처럼, 나무랄 데 없는 애인처럼. -p.55

 

자, 이제 개와 고양이와 함께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동쪽의 어슴푸레한 보랏빛을 만나러 가자. -p.63

 

자연이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한파 때문에 몸도 마음도 힘들다. 프로방스의 여름 때문에 여름빛이 그리운 지금이다. 이 책을 새벽녘에 펼치면 또 어떤 느낌일까. 아침잠이 많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새벽녘에 눈이 떠지는 날이 온다면 반드시 여명을 펼쳐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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