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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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그것을 아는 사람,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승우 작가가 2017년에 발표한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 말이다.


소설집의 제목에 영향을 준 첫 번째 단편 <모르는 사람>의 주인공 '나'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 성장했다. 건설회사 중역으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던 아버지가 십일 년 전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살아 있기는 한 건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알 길이 없으므로 알기 위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 '나'와 달리,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실종 혹은 부재에 관해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나'는 어머니의 상상을 망상으로 치부하지만, '나'보다 아버지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어머니의 말이라서 그저 무시할 수만도 없다.


두 번째 단편 <복숭아 향기>의 주인공 '나' 역시 아버지의 부재 속에 성장했다. 대기업 인턴 사원인 '나'는 정규직 전환 후 첫 근무지로 M시를 택한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언젠가 일어날 줄 알았던 일이 결국 일어났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M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음 만난 곳이기 때문이다. M시로 간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외삼촌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첫 만남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는,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간하기 힘든 내용인데...


말레이시아 여행 중에 만난 현지인 가이드와의 인연을 그린 <찰스>라는 단편도 흥미롭다. 주인공 김철수는 자신과 한국 이름이 같은 가이드 찰스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잘해주는데,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인해 자신의 판단을 돌아보게 된다. 이어지는 단편 <넘어가지 않습니다> 역시 한국인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 간의 오해로 인해 빚어진 갈등을 그린다. 타인의 역사를, 언어를, 입장을, 감정을 모른다는 것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담담한 문체로 섬세하게 그려낸 것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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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포옹
박연준 지음 / 마음산책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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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시인의 산문을 좋아한다. 큰 사건이 없어도 작은 발견으로 공감과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걸 박연준 시인의 산문을 읽을 때마다 배운다. 박연준 시인의 여섯 번째 산문집 <고요한 포옹>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이 책은 저자의 반려묘 '당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남편인 장석주 시인과 단둘이 사는 저자는 전부터 고양이를 집에 들이고 싶었지만 남편의 반대로 그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상의 없이 고양이를 집에 데려왔는데, 걱정한 대로 불같이 화를 냈던 남편이 지금은 저자보다 더한 고양이 사랑꾼이 되었다고 ㅎㅎ


마흔 넘어서 처음으로 운전에 도전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주차하다 기둥을 들이받고 단골 카페의 유리창을 깨는 사고를 내자 남편은 제발 운전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러든 말든 여전히 즐겁게 운전을 하고 있다니 씩씩하고 멋지다. 몇 년 전 배우기 시작한 발레도 여전히 배우고 있다. 해보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것은 '되기 쉬운 나'를 버리고 '되고 싶은 나'를 택하는 결심이기도 하다. 그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의 간극보다는 작다. "행복은 체험이다. 많이 겪어본 사람이 더 자주, 쉽게 겪을 수 있다." (61쪽)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어떻게든 실행하는 성격은 글을 쓰고 책을 내면서 길러진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첫 번째 산문집 <소란>을 출간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어떻게 받아들이지 몰랐고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는 책이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시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스스로를 알아볼 것' 그리고 '모르는 채 태어날 것'. 오랫동안 괴롭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던 저자가 이제는 행복을 이야기하고 성취의 기쁨을 알려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도 저자의 나이쯤 되었을 때 이렇게 산뜻하고 유쾌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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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의 실패
강산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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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어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한다. 대학에 가면 뭐든 할 수 있다, 좋은 대학에 가면 더 많이 할 수 있다, 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마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해 한 달 아니 일주일도 안 되어 깨달을 것이다. 대학에 가면 뭐든 할 수 있다던 어른들의 말은 거짓이었다는 걸. 대학에 가도, 좋은 대학에 가도 뭐든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애초에 뭘 좀 해본 애들이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강산 작가의 만화 <루의 실패>는 이슬아 작가가 이 책을 2023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해서 알게 되었다. 주인공 루와 친구들은 서울 모처의 대학가 주변에 사는 이십 대 청년들이다. 전공 공부에도 취업 준비에도 전념하지 못하는 이들은 하루하루를 시덥잖은 일들로 채운다. SNS에서 유행하는 카페에 간다거나, 데이팅 어플로 원나잇 상대를 찾는다거나, (극장에 진득하게 앉아 영화 한 편은 못 보면서) 틱톡 영상을 몇 시간씩 본다거나 하는 식이다.


하루하루를 시덥잖은 일들로 채우는 이들의 마음이 결코 편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들은 저마다 공황과 분노, 불안과 우울에 시달린다. 특히 친구들 사이에서 대장 역할을 맡고 있는 루의 경우가 심하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 생활비를 받아 쓰는 루는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 친구들에 비하면 형편이 낫다. 하지만 루 자신은 일찍이 경제력을 갖추고 자신의 진로를 찾아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극도의 불안과 열등감을 느낀다.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청춘들의 불안과 분노라는 흔한 소재를 다룬 만화인데, 소재를 표현하는 방식이나 전개는 기발하고 참신하다. 루의 친구들 중 하나인 '블래키'는 인간이 아니라 개다. '종소수자'인 블래키는 친구들 사이에서 대체로 존중받지만, 이따금 친구들이 자신 앞에서 '개새끼', '개같다'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쓸 때마다 흠칫 놀라며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이런 일들이 쌓여서 어떤 식으로 관계에 균열을 내는지를 보여주는 섬세한 만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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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비밀 클럽 1
후쿠시마 텟페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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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학원 도시 '사립 유칼리잎 학교'의 신입생 네코타 유이치는 무슨 동아리에 들어갈까 고민하던 중 엄청난 미소녀 아리가사키 치토세가 부장이자 유일한 부원인 '방과 후 비밀 클럽'에 들어간다. '방과 후 비밀 클럽'은 이름 그대로 방과 후에 부장과 부원들이 모여서 학교 곳곳에 숨겨진 비밀들을 알아내고 진상을 파헤치는 것이다. 네코타는 학교의 비밀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아리가사키가 예쁘기도 하고 아리가사키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동아리 활동에 참가한다. ​ 


1권에서 아리가사키와 네코타는 교내 신문부의 비밀, 학교 휘장의 비밀, 매점에서 판매하는 빵의 비밀, 온라인 수업의 비밀, 안뜰의 저수지와 선도부장의 비밀 등을 알아낸다.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신비한 분위기의 미소녀와 어리바리한 소년의 조합인 점, 학교를 배경으로 소소한 추리를 해나가는 과정을 너무 무겁지 않고 유쾌하게 그린 점 등이 요네자와 호노부의 동명 인기 소설이 원작인 애니메이션 <빙과>를 떠올리게 한다. 작화는 데즈카 오사무 느낌이 나는데, 작중에 데즈카 오사무의 명작 <불새>가 언급되는 걸 보면 높은 확률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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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에서 서민이 되어서 약혼을 파기당했습니다! 4
오오이와 켄지 지음, 쿠라모토 카야 그림, 타카나시 카오루 원작 / 대원씨아이(만화)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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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귀족의 딸로 키워진 안나가 아기일 때 다른 아기와 바꿔치기(체인질링)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갑자기 서민의 딸로 살아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라이트 노벨 원작의 로맨스 판타지 만화다. 4권에서 안나는 동생들과 함께 시장에 간다. 안나는 동생들보다 나이는 많지만 서민으로 살아본 경험은 적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동생들에게 배워야 하는 신세다. 똑똑하고 씩씩한 아네트 누나와의 생활에 익숙한 동생들은 동생들 대로 답답하다. 과연 이들은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까. ​ 


안나와는 반대로 귀족 영애가 된 아네트는 만에 하나 귀족이 된다면 이루고 싶었던 일을 마침내 이룰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한다. 하지만 아네트의 소원을 들은 부모님과 오빠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며 그 대신 아네트에게 다른 진로를 제시한다. 한편 안나는 처음으로 혼자서 시장에 갔다가 마리를 만나 함께 옷 가게에 들른다. 그곳에서 우연히 귀족 영애 시절의 안나를 아는 어떤 인물을 만나는데...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안나와 아네트의 심리 묘사가 자세하며, 무엇보다 작화가 예뻐서 보는 내내 즐거웠다. 원작 소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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