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가림이 무기다 - 소리 없이 강한 사람들
다카시마 미사토 지음, 정혜지 옮김 / 흐름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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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을 가리는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대학교 신입생 때다. 익숙한 학교, 늘 만나던 친구들로부터 떨어져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학과 모임과 동아리, 그 어느 곳에도 자리를 잡지 못했고, 같이 수업 들을 사람은 있어도 속마음을 내보일 만큼 친한 친구를 사귀지는 못 했다. 그 덕분에 공부에 빠지고 책을 만나고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공부든 책이든 글쓰기든 결국엔 사람을 사귀기 위한 행위이며,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 사귀려면 역시 직접 만나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낯가림, 이대로 괜찮을까?
 

<낯가림이 무기다>의 저자 다카시마 미사토는 사람 사귀기를 겁내고 남 앞에서 말하기를 힘들어하는 낯가림이야말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당장은 화려한 말재주를 가진 사람, 기발한 처세술을 가진 사람이 잘나 보이지만, 그들이 잘못된 언동이나 행동으로 분위기를 망치거나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때, 뒤에서 조용히 남들을 관찰하고 사람의 됨됨이나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기술을 가진 낯가림쟁이가 빛이 나고, 중요한 정보로 판세를 뒤집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열 수 있다.


상사에게 입이 발린 말을 못 해서, 자기 PR이 서툴러서,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출세 못한다고 괴로워할 것도 없다. 오히려 낯가림쟁이는 이성적이고 분위기를 잘 파악하며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일에서 실력 발휘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해보니 직장에서 일을 잘 하는 사람, 믿고 따르고 싶은 사람 중에 말주변이 좋거나 아부를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되레 낯을 가리고 과묵한 사람일수록 일처리가 깔끔하고 성과가 좋은 경우가 많다. 나는 그런 사람 중 하나일까. 돌아보게 된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SNS 시대에 낯가림은 점점 더 큰 미덕이 될 것이다. 최근 모 연예인이 여성 스태프의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을 해 문제가 되었다. 낯을 가리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상대의 감정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을 것이고, 평소에 말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남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자제했을 것이다. 비슷한 일들을 보면서 앞으로는 낯을 가리고 말을 아끼는 사람일수록 더욱 빛을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가림이 무기'라는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 될까? 지독한 낯가림쟁이인 나로서는 반가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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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0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상대방을 생각해서 신중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데 외향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성격이 답답하게 느끼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봐요. 저도 조금이라도 남들에게 안 좋게 보는 것을 싫어해서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만약에 실수를 하면 바로 사과를 합니다. 괜히 변명을 늘어놓으면 제 인상이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요. ^^

키치 2015-08-09 12:0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편이라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몰라도 저처럼 내향적인 사람들은 cyrus 님의 화법을 더 높이 살 거라고 믿습니다 ^^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 꼬리가 보이는 그림책 15
이한솔 그림, 이채 글.기획 / 리잼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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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았지만 어른들의 욕심과 사회의 편견에 의해 동심에 상처를 입고 자아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이 사랑스러운 동화책을 부디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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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 꼬리가 보이는 그림책 15
이한솔 그림, 이채 글.기획 / 리잼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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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란 무엇일까, 아이에서 어른으로 외형적인 변화를 겪는 것? 부모와 학교,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를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 나는 진정한 성장이란 오히려 외적인 변화보다 내적인 변화이며, 남들이 요구하는 가치가 아닌 자기 본연의 가치를 깨닫고 확고히 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과 다른 나, 내가 되고 싶은 나, 참다운 나를 찾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기록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집해서 그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이채의 첫 번째 프로젝트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는 치마 입기를 좋아하는 열 살배기 남학생 꽁치의 성장을 그린 동화책이다. 매일 아침 옷장에서 마음에 드는 치마를 골라 입고, 학교에서는 남자 친구, 여자 친구 가리지 않고 공놀이, 공기 놀이를 하며 신나게 노는 꽁치에게 어느 날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다. 꽁치가 '사과소녀 선발대회'에 나가기 위해 워킹 연습을 하고 장기자랑을 하는 모습을 본 엄마가 이제 그만 치마를 입지 말라고 하며 옷장에서 치마를 싹 치워버린 것이다.



치마를 입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부터 아무 옷도 입지 않고 등교마저 거부하는 꽁치의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들은 '하지 마라'는 말이 떠올랐다. 놀지 마라, TV 보지 마라, 가요 듣지 마라, 연예인 좋아하지 마라, 짧은 치마 입지 마라, 염색하지 마라... 그들의 말을 따라 놀지 않고,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다 참고 착한 딸, 착한 아이로 자란 나는 제대로 놀 줄도 모르고 좋아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 시절 내가 잃어버린 '치마'가 지금 어디 쳐박혀 있는지도 모르는,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 되었다.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는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았지만 어른들의 욕심과 사회의 편견에 의해 동심에 상처를 입고 자아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이 사랑스러운 동화책을 부디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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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기 없는 얼굴로 일이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볼 때 예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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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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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이라고 하면 지긋지긋한 풍경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히 들어선 지하철 안, 비슷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가지였다가 이제는 스마트폰을 향하고 있는 눈동자들,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 같고,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듯한 표정들로 이루어진 풍경. 



<걸 온 더 트레인>의 첫 장면에 나오는 출근길 풍경은 조금 다르다. 영국 애시버리에서 유스턴까지 가는 오전 8시 4분 완행열차. 기차 통근에 이골이 난 듯 짜증 섞인 한숨을 픽픽 내쉬는 사람들 속에서 레이철이라는 여인만은 눈을 빛내며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기찻길 옆에 있는 빅토리아 왕조풍의 2층짜리 연립주책. 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에 사는 두 남녀에게 레이철은 각각 제이슨과 제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혼자만의 망상을 펼치며 시간을 보낸다.



사실 레이철은 출근할 직장이 없다. 그녀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으로, 술 때문에 생긴 실수로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같이 사는 친구 캐시에겐 해고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은행 잔고가 바닥을 보이지만 직장을 구하는 건 말뿐이고, 새출발할 용기를 내기 보다는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서 자신을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기찻길 옆 집에 사는 제이슨과 제스 커플은 레이철이 살아가는 유일한 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레이철은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은 행복을 헤아린다. 어째 자신의 행복은 보지 못하고 남의 행복만 넋 놓고 보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런 레이철이 사건에 휘말린다. 매일 기차 안에서 훔쳐 보았던 여인 '제스'가 실종되는 사건의 진상을 우연히 레이철이 목격한 것이다. 레이철은 제스가 왜 실종되었는지,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알코올 중독인 데다가 실업자에 범죄를 일으킬 뻔한 전력이 있는 그녀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는 레이철조차 자신의 기억을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하필이면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기억만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처음엔 망상하길 좋아하고 의지력도 약하고 산만하기까지 한 레이철이 참 미덥지 않았다. 미덥지 않은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며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은 지금은 다시 한 번 소설을 읽으며 레이철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가보고 싶다. 통근 기차 안에서 레이철이 본 것이 제이슨과 제스라는 망상 속 남녀 주인공이 아니라, 레이철이 가지지 못한, 아니 박탈당한 행복과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소설을 다시 읽는다면 레이철을 직장도 없이 출근하는 엉뚱한 여자, 남의 삶을 엿보는 수상한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박탈당한 억울한 여자, 남에 의해 굴절된 삶을 의심조차 안 한 가엾은 여자로 여기며 읽어보리라.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마주하는 비슷비슷한 얼굴들에도 혹 레이철 같은 사연이 숨어있지는 않을까. 꼭 레이철 같은 사연은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볼 법한 직장인의 얼굴을 한 그들이 사실은 복권에 당첨되었는데 취미로 회사원 코스프레(?)를 하는 중이라든가,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유기한 뒤 뻔뻔하게 출근하는 척하는 중이라든가 하는 건? 왠지 오늘 출근길은 기분이 퍽 다를 것 같다. 불금이라서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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