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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평점 :

얼마 전 엄마의 장례를 치른 동이는 대학 시절 친구 혜란에게 석이가 캄보디아에서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최근 들어 연락이 뜸하기는 했지만 한때는 가깝게 지냈던 친구 석이가 엄마의 장례에 오지 않은 걸 내심 섭섭하게 여겼던 동이는 예상 밖의 소식에 깜짝 놀란다. 게다가 캄보디아라면 그들이 9년 전 해외 봉사단으로 선발되어 바울학교 선생님으로 몇 달을 일했던 곳이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동이는 그 길로 혜란을 만나서 무작정 캄보디아로 향한다. 그들은 9년 전 바울학교의 학생으로 만났던 삐썻과 재회해 석이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닌다. 그러면서 과거의 기억을 천천히 돌아본다.
예소연의 소설 <영원에 빚을 져서>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공감 가는 대목이 참 많았는데, 나 또한 대학 시절 학교 봉사단으로 파견되어 바울학교와 비슷한 선교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봉사 활동도 하고 학점까지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봉사단이 된 세 사람이 예상보다 힘든 업무에 몸과 마음이 지쳐 가는 모습, 자신들이 뭐라고 남에게 '봉사'할 자격이 있는지 자문하는 모습 등이 이십여 년 전의 내 모습 같았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무식해서 용감했던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보다 더 나아진 게 맞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9년 전 큰 뜻 없이 캄보디아에 갔던 세 사람은 그곳에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인생을 바꿀 만한 경험을 했다. 그전까지 세 사람은 그야말로 평범한 한국의 대학생들이었다. 만나면 하하 호호 웃으며 즐겁게 놀았지만, 동이는 내심 자기보다 훨씬 부유한 석이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고, 특목고 출신인 석이는 입시에 실패해 겨우 인서울 대학에 진학했다는 뒷말이 따라다녔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캄보디아 사람들 눈에 세 사람은 모두 부유한 나라 한국에서 온, 부유한 대학생들이었다.
세 사람은 우연히 한국에서 태어나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공부해서 대학에 갔을 뿐인데,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우러름을 받는 상황이 당황스럽다. 학생들보다 영어를 훨씬 못하는데 그들에게 영어로 수업을 하는 상황도 기가 막히다. 순진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할 거라고, 한국에 돌아가도 너희를 잊지 않을 거라고 책임 없는 약속을 하는 것도 불편하다. 학생들 앞으로 들어오는 돈을 갈취하는 것으로 모자라 학생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듯한 학교 사람들에게 찍소리조차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이런 와중에 한국에서 배가 침몰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전에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보고 안심했던 그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혜란은 교회를 찾는 횟수가 줄고, 반대로 무교였던 석이는 매일같이 교회로 향한다. 동이와 혜란은 점점 더 종교에 의존하는 석이의 모습에 거리감을 느끼고, 급기야 석이에 대한 안 좋은 말을 본의 아니게 퍼뜨리게 된다. 이후 석이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더욱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믿음을 잃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이 석이를 캄보디아로 돌아오게 만든 것일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동이와 혜란은 이태원 참사와 비슷한 '꺼삑섬 물 축제 압사 사건'에 대해 배우며 세상에는 말도 안 된다고 느껴지는 죽음이 넘쳐 나고, 말도 안 되는 죽음이 넘쳐 나는 게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태도는 영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과 그로 인한 고통은 어떻게든 인간을 따라 오기 때문이다. 고로 자신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느낀다면 과거를 부정하고 미래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 그때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돌아봐야 한다. 미래는 다른 어느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지나온 길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