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만의 방
김그래 지음 / 유유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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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이후의 나를 상상하면 그저 막막하다. 삼십 대 후반인 지금도 밥벌이가 힘든데 나이 들면 더 힘들겠지. 시간이 흘러 가족도 친구도 만날 수 없는 날이 오면 무슨 기쁨과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까, 같은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고독과 후회로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내게 책 한 권이 도착했다. 김그래 작가의 <엄마만의 방>이다.


이 책은 50대 미싱사인 엄마가 베트남 현지 공장을 감독할 전문가로 파견되면서 딸인 저자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담고 있다. 대체로 부모보다는 자식이 유학이나 취업 등을 계기로 외국에 나가서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부모 중에서도 엄마가 해외 파견 근무를 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점이 신선했다. 오십 넘은 여자가, 가족을 놔두고 혼자서,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외국에 간다고 하니 말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딸인 저자만 "오십이 넘어서도 새로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건 멋진 일"이라고 엄마를 격려했다는 것도 K-장녀로서 무척 공감되었다.


겉으로는 엄마를 응원했지만 내심 저자도 엄마가 외국에서 잘 살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엄마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초반에는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안 맞아 고생하는 듯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혼자서 여행도 다니고 현지 직원들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는 강좌를 열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자식들의 손을 빌려야 했던 일들을 스스로 해내면서 성취감도 느끼고 자신감도 높아졌다. 오히려 저자가 외국에서 낯선 사람들과 잘 지내는 엄마를 보면서 빈 둥지 증후군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하다. 이런 식으로 어른이 되어도 엄마에게는 평생 관심과 돌봄의 대상이 되고 싶은 자식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 대목들도 좋았다.


책을 읽다보니 필연적으로 나의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나의 엄마도 형제자매가 많은 집의 장녀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해 결혼 전까지 가족들을 부양했다. 결혼 후에는 바로 임신, 출산, 육아를 하고, 누군가의 아내, 엄마, 며느리로만 살았다. '자기만의 방'은커녕 자기만의 시간도 오롯이 가져본 적 없다. 그런 엄마의 삶을 생각하면 딸로서 마음이 아픈 것이 사실이지만, 엄마의 삶을 안쓰럽게만 여기고 싶지 않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했다. 섣부른 연민으로 죄책감을 덮기 보다는, 엄마의 삶에서 긍정적인 면을 더 많이 발견하고 닮으려고 노력하는 편이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더 좋은 일일 테니 말이다.


이 책은 일하는 중년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하다.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소위 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평생 가족을 위해 일하고 돈을 번다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로는 많은 어머니들이 일과 육아, 살림, 간병 등등을 동시에 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저자의 엄마도 스무 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해 30년 넘게 미싱사로 일하며 가족들을 먹이고 돌봤다. 처음엔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을지 몰라도 계속하다 보니 전문성이 생겼고, 오십이 넘어서는 전문가로서 해외 파견 제안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런 식으로 여성의 노동도 경력이 된다는 것, 여성이 나이 들어서도 스스로 자기 자신의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이 매우 큰 귀감이 된다. 엄마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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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4 3 2 1 1~2 세트 (양장) - 전2권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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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미국. 민스크 출신의 19세 청년 이사크 레즈니코프가 뉴욕항에 도착한다. 레즈니코프는 이민자 티가 나는 러시아 식의 긴 본명 대신 당대 최고의 부호인 록펠러의 성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이민국 직원이 이름을 물었을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잊었는데요"라는 뜻의 이디시어 "Ikh hob fargessen(이크 호브 파게센)"이 입에서 나왔고, 이민국 직원은 그의 이름을 "이커보드 퍼거슨(Ichabod Ferguson)"이라고 적었다. 그렇게 이커보드가 된 그는 어찌저찌 미국 사회에 정착해 아들 셋을 얻고 그중 하나가 스탠리다.


스탠리는 로즈라는 여자와 결혼해 아치라는 아들을 얻는다. 스탠리는 가구 및 가전제품 판매점을 운영하고, 로즈는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사진을 배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이 소설이 20세기 초중반의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가족사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러다 조금씩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 전에 읽은 챕터에서는 스탠리의 판매점에 불이 났는데 지금 읽는 챕터에서는 무사하다든지, 이전 챕터에서 사진관을 그만뒀던 로즈가 다음 챕터에서는 계속 사진관에서 일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챕터 간의 내용이 직렬로 연결되지 않고 일종의 '평행우주'처럼 병렬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이 소설의 전체 구조가 눈에 들어 왔다. 이 소설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의 1은 1부의 2가 아니라 2부의 1, 3부의 1, 4부의 1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1부의 2는 2부의 2, 3부의 2, 4부의 2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주인공 아치 퍼거슨이라는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아치 퍼거슨이 될 수도 있었던 네 사람(퍼거슨 1, 퍼거슨 2, 퍼거슨 3, 퍼거슨 4)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두 가지 방식의 독서가 가능하다.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퍼거슨 1의 이야기를 읽은 후에 퍼거슨 2, 퍼거슨 3, 퍼거슨 4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네 가지 버전의 이야기에서 아치 퍼거슨은 각각 다른 삶을 산다. 어떤 삶에서는 아버지를 영원히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어떤 삶에서는 아버지와 반목하고 절연한다. 어떤 삶에서는 어머니가 사진 작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만, 어떤 삶에서는 어머니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살아가는 데 만족한다. 어떤 삶에서는 에이미가 아치의 연인이 되지만, 어떤 삶에서는 배 다른 남매가 된다. 유년기에는 대부분 부모와 친척들에게 일어난 사건 또는 그들이 한 선택에 의해 아치의 인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아치가 청소년기를 지나고 청년이 된 후에는 아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또는 아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변화가 대부분이다.


가령 어떤 삶에서 아치는 소설을 쓰고, 어떤 삶에서는 소설 대신 신문 기사를 쓴다. 어떤 삶에서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고, 어떤 삶에서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떠난다. 어떤 삶에서 여성만 사랑하지만, 어떤 삶에서는 남성을 사랑하고, 또 어떤 삶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사랑한다. 어떤 삶에서는 성 구매자이고, 어떤 삶에서는 성 판매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삶이 품을 수 있는 다양한 조건들을 일종의 가능성 또는 선택지로 보고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구성해 보여주는 점이 이 소설의 미덕이자 장점이다. 구성 자체가 특이하고 특별하지만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다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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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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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이 쓴 산문집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점이 있다. 어쩌면 소설가들은 산문도 그렇게 자신의 소설처럼 쓰는 걸까. 황정은의 산문은 황정은의 소설 같고, 박민정의 산문은 박민정의 소설 같고, 한정현의 산문은 한정현의 소설 같고... 이번에 읽은 김초엽 작가의 첫 산문집 <책과 우연들>을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김초엽의 산문은 김초엽의 소설 같구나. 장르를 불문하고 글은 글쓴이를 반영하는구나...


이를테면 소설가가 된 계기에 대해 대부분의 작가들은 '소설이 좋아서', '글쓰기 밖에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해서' 같은 주관적인 답변을 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저자는 포스텍 재학 시절 과학 서평 또는 칼럼 연재로 용돈 벌이를 했고, 소설가보다는 과학 논픽션 작가가 되고 싶었으며, 한국 소설은 등단 이후에야 제대로 읽기 시작했고, 글쓰기는 몇 권의 작법서를 수험서처럼 독파하면서 익혔다, 라는 식으로 자신이 소설가가 된 이유와 과정에 대해 객관적인 팩트를 제시한다. 이런 면이 과학도 출신 소설가다울 뿐 아니라,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담담한 태도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김초엽 소설의 매력과 연결된다고 느꼈다.


작품의 영감을 얻는 방법도 인상적이었다. 화학을 전공한 저자는 전부터 소설보다 과학 논픽션을 더 많이 읽었다. 자신의 관심사를 따라서 과학 논픽션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질문들이 떠오르는데, 그 질문들이 곧 소설의 영감이 된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자신의 직간접적인 체험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라서 신선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소설이라는 핍진한 이야기로 발전시키는 방법은 몇 권의 작법서를 통해 배웠다. 어떤 작법서에는 어떤 특장점이 있고 자신은 그 책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등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시험 합격 수기 같기도...?)


저자는 글쓰기를 문자 그대로 '공부'하고 공부하듯이 글을 쓰는 유형의 작가인데, 나는 이렇게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글을 쓰는 작가가 그렇지 않은 작가보다 훨씬 더 믿음이 가고, 작품에 대한 기대와 애정도 높아진다. 문과 과목이 싫어서 이과를 전공했고 과학자가 되려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던 사람이 소설 창작이라는, 어떻게 보면 자신이 그동안 걸어온 길과 전혀 다른 (듯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겪은 시행착오와 희로애락을 소개하는 대목들도 좋았다. 저자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건 책과 '우연들'이라고 썼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결국 저자가 해온 '노력들'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음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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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랭면 (여름 리커버)
김지안 지음 / 미디어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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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냉면 없이 어떻게 여름을 버텼을까. 어쩌면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그들만의 냉면이 있었던 건 아닐까. 김지안 작가의 동화 <호랭면>은 더워도 너무 더웠던 조선 시대의 어느 여름날을 배경으로 한다. 더위 때문에 힘든 건 어른도 어린이도 마찬가지. 그래도 놀거리를 찾아 씩씩하게 동네를 누비던 김 낭자, 이 도령, 박 도령은 웬 서책 한 권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서책에 따르면 구범폭포라는 곳에 절대로 녹지 않는 신비로운 얼음이 있다고 한다.


노는 거라면 빠지지 않는 김 낭자, 이 도령, 박 도령은 녹지 않는 얼음을 찾아 구범폭포로 향한다. 얼음을 찾으면 어떻게 먹을지 궁리하고 상상하느라 가는 길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얼음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그들 앞에 무서운 호랑이가 나타나는데...! 이야기의 배경과 전개는 전래 동화의 그것인데, 요즘 사람들이 즐겨 먹는 냉면이 나오니 반갑고 새롭다. 무엇보다도 냉면의 시원함과 감칠맛을 그림으로 표현한 솜씨가 대단하다. 집에 걸어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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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1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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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권여선 작가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을 여러 권 읽고 너무 좋아서 장편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권여선 작가가 1996년에 발표한 첫 번째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의 개정판이 출간되어 읽어보았는데, 작품 자체도 좋았지만 권여선 작가의 원점, 시작점을 알게 된 느낌이라서 더 좋았다. 소설은 서른 살을 앞둔 미옥이 그동안 살았던 방을 비울 날을 일주일 앞두고 이사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옥은 선원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슬하에서 두 자매 중 차녀로 태어났다. 여중, 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명문대에 입학하는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으나 대학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미옥이 대학에 입학한 시기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던 때였고, 인문대생인 미옥 또한 선배의 부름을 받고 언더서클에 가입해 시위 현장을 따라 다니게 되었다.


사실 미옥은 시위 자체보다 언더서클에서 만난 동기들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미옥은 동기인 여자 친구 둘, 남자 친구 셋과 일종의 그룹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이십 대 내내 미옥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성적인' 미혜와 '중성적인' 수진은 미옥으로 하여금 앞으로 어떤 여성상으로 살아갈지 결정하는 데 있어 일종의 모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타입의 남자 친구 셋(한영, 명호, 종태)은 미옥에게 각각 사랑, 관심, 우정 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미옥의 내면을 성장시킨다.


이 소설은 민주화 운동 당사자의 경험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후일담 문학으로도 분류될 수 있고, 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내면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성장 소설로도 분류될 수 있다. 과거의 사건들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지 않고, 이사를 일주일 앞둔 미옥이 곧 있으면 떠날 방 안팎의 풍경들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시간적으로는 뒤섞여 있지만 작품 전체로 보면 유의미한 순서로 각각의 사건들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구성한 점이 기발하고 훌륭하다고 느꼈다.


아울러 이 소설은 한 여성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험한 일들을 여성 자신의 관점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로도 분류될 수 있다, 미옥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부재하고 외가 식구들이 집 안을 점령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동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나 여학교 시절 동급생들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었던 것, 대학생이 된 후에도 미혜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 등은 퀴어 서사의 관점으로도 분석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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