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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나는 지금 발리의 한 리조트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오른손에는 샹그리아가 찰랑거리는 잔을, 왼손에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손을 잡고 있다...라고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발리는 무슨. 낮 동안 찜통 안의 만두가 이런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더위 속에서 주중 근무보다 갑절은 힘이 든 주말 근무를 한 다음, 편의점에서 산 4캔에 만 원짜리 맥주와 찬물 샤워 기운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내일도 근무라서 얼른 불 끄고 잠이나 잤으면 딱 좋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켠 것은, 오늘 밤이 가기 전에 요시모토 바나나의 신작 <서커스 나이트>를 읽고 난 감상을 몇 자라도 끼적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발리의 발 없는 귀신들이 꿈에 나타나 밤새 나를 괴롭힐지도...!
남편 사토루와 사별한 후 시부모님 집 2층에서 어린 딸 하나를 키우며 살고 있는 사야카는 어느 날 기묘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사야카가 현재 살고 있는 집에 예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 집 정원에 소중한 것이 묻혀 있으니 파서 가져가도 되겠느냐는 것이다. 사야카는 편지의 내용보다도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고 더욱 깜짝 놀란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사야카의 옛 연인인 이치로. 사야카는 이십 대 초반에 이치로와 결혼을 생각할 만큼 뜨겁게 사랑했지만, 불의의 사고를 겪은 이후 도저히 이치로와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도망치듯 발리로 떠났고, 그 후 친구처럼 지내고 있던 선배 사토루로부터 암 선고를 받았는데 죽기 전에 아이를 낳고 싶으니 결혼해주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덥석 결혼을 결정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치로에게 다시 연락이 오다니. 이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사야카는 이치로의 허락을 구하기 전에, 정원에 묻혀 있다는 '소중한 것'이 뭔지 직접 파내서 알아내기로 한다.
사실 사야카에게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물과 대화할 수 있는 '사이코메트리'라는 능력이다. 사야카는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활용해 '소중한 것'이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 묻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가족들 몰래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를 파서 조그만 꾸러미 하나를 발견해낸다. 꾸러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작은 뼛조각. 사야카는 뼛조각에 말을 걸어서 이치로에게 죽은 형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뼛조각에 담긴 사연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이치로를 만나기로 마음을 정한다.
소설은 사토루를 잊지 못하고 있던 사야카가 옛 연인 이치로를 거듭 만나면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사야카는 겉보기엔 어려서부터 발리에서 자라서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성으로 보인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를 동시에 잃은 데다가, 두 번째 가족을 만들어준 사토루까지 암으로 세상을 떠나서 마음의 상처가 많았다. 이치로와의 관계 역시 사야카에게는 결말을 짓지 못하고 묵혀둔 원고 같은 것이었다. 사야카는 한때 이치로의 가족이 운영하는 신사에서 지내기도 했고, 이치로의 어머니와는 마치 친모녀처럼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사고를 겪고, 사야카의 몸에 그 흔적이 남기까지 하면서 이치로와 그의 가족은 사야카에게 든든한 기둥이 아닌 무거운 돌덩이 같은 존재로 바뀌었고, 결국 사야카는 이치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사야카와 이치로는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서로에게 미안한 일, 서운한 일을 어루만지고 다독인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미처 아물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던 마음의 상처가 스르르 낫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일부러, 억지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무엇이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대체로 이런 태도는 소극적이고 답답하게 보이기 마련인데,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은 여유롭고 편안하게, 때로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듯한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는 사야카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별의 아픔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일부러, 억지로 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는 실제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머리를 아무리 열심히 굴려도 때가 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람이 몸을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적합한 장소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이 있다. 사야카는 남편과 사별한 후 너무 늦게 그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고 - 가슴 아파하지만 시간을 돌린다 한들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사야카는 이치로의 어머니에게 사죄하지 못했다고, 이치로의 마음을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다고 후회하지만, 지금 사는 집에서 사토루의 가족과 평안한 생활을 보내지 않았다면, 발리에서 이치로의 진심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그런 후회조차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천 위의 무늬 한 조각이다. 어떤 무늬로 완성될지 - 무늬로 완성되기는 할지 -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다 보면, 이치로가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편지를 보낸 주소가 하필 사야카의 집이었던 것처럼, 사야카가 이치로의 편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새로운 사랑을 찾은 것처럼, 온 우주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노를 저어 당신이 탄 배를 마땅히 가야 할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것이다. 내 우주는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 것일까. 지금으로선 그곳이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고 다정한 애인이 기다리는 발리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