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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전 소설가 김영하의 TED 강연 영상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을 보았다. 소설가라고 하면 과묵하거나 눌변이리라는 편견이 있던 내겐 그야말로 신선한 발견이었다. 물론 김영하가 소설가 말고도 교수, 라디오 DJ, 팟캐스트 진행자 등으로 활약하며 다양한 재능을 보여줘 왔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긴 시간 강단 위에 서서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가슴을 울리며 청중을 휘어잡는 모습을 보며 그가 물건을 팔았다면 내 살림은 거덜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다행히 그는 소설가이고, 현재 내 인터넷서점 장바구니엔 그의 책이 가득하다).
김영하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강연, 대담 또는 인터뷰를 모은 책 <말하다>를 읽었다. 말 잘하는 작가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좋았다. 말만 좋은 것이 아니다. 강연, 대담 또는 인터뷰를 그냥 엮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직접 주제를 정하고 주제에 맞는 말을 갈무리해 엮은 책이라서 생각외로 깊이가 있고 내용이 깔끔하게 연결된다. 이십 년 가까이 한 강연, 대담, 인터뷰를 정리한 수고도 대단하지만, 이십 년 가까이 소설과 문학, 창작 같은 심오한 주제를 최전선에서 고민하며 자신만의 답을 내기 위해 노력해온 노고도 굉장하다.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수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것, 때로 위엄 있고 심지어 존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라. (p.21)
저자는 먼저 오늘날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사인회 같은 자리에서 저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몇 년째 취업 준비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는 젊은 독자들을 보면서 '그들이 자기의 존엄성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결코 낙관할 수 없는 현실을 살면서도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이 사람들을 책으로 이끈다. 나 역시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부터 취업 준비를 하는,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맹렬히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다움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글쓰기란 무슨 의미일까. 저자는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남의 이야기를 그저 소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쓸 때 인간은 즐거움을 느끼고 사는 보람을 느낀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매체가 디지털로 바뀌고 140자의 제한이 생겨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텍스트를 쓰고 이야깃거리를 찾는 이유다.
우리 마음속의 예술적 충동은 억눌렸을 뿐,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억눌린 충동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 (중략) ... 연기가 저게 뭐냐, 발연기다, 노래도 못하는 게 무슨 가수냐, 댄스가 아니라 에어로빅이다. 이런 말을 하면서 채널을 돌립니다. 우리 마음속의 시기심은 우리가 사악해서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마음 저 깊은 곳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p.74)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는 세상과 거리를 두는 행위이기도 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하고 주목받고 싶어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사람에게 필요한 건 어둠이'다. '친구들 만나서 낄낄거리고 웃고 떠들면서 세월을 보내면 당시에는 그 어둠이 사라진 것 같지만 실은 그냥 빚으로 남'을 뿐이다. 글쓰기는 '한 인간이 자기의 과거라는 어두운 지하실의 문을 열어젖히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씀으로써 사람은 강해지고 부조리한 세상과 맞서는 힘을 가진다. 이걸 억압당하거나 스스로 억누를 때 인간은 타인을 비방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악에 기울어지기 쉽다.
그렇다면 김영하가 생각하는 최고의 소설이란 무엇일까.
"다 읽었는데 밑줄을 친 데가 하나도 없고, 그럼에도 사랑하게 되는 소설, 읽으면서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걸린 데가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도 왠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남에게 요약하거나 발췌하여 전달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런 소설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p.92)
소설은 아니지만, 내겐 이 책이 꼭 그렇다. 김영하라는 작가가 키워온 아름다운 것을 몰래 훔쳐본 느낌, 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글을 쓰며 그 속에서 어떤 세상을 보았고 꿈꾸었는지를 알게 된 느낌이다. 소설이라는 광활한 우주에 비해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지를 느끼는 일이 쓸쓸하고 비참하기는커녕 오히려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고백도 아름답다.
아마도 칼 세이건의 말일 텐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말이었어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내 생애에 우주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저와 소설의 관계도 그와 비슷한 것 같아요. 전 세계의 소설에 역사가 있잖아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소설들이 있고, 제가 쓰는 건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죠. 앞으로 남은 생애 안에 제가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밤하늘의 어떤 흔적도 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 세계의 일부라는 것, 내가 그 작가들 중 한 명이라는 것, 그게 어떤 기쁨을 줄 때가 있어요. (pp.89-90)
그 누구와도 완벽하게 합일되었다고 느낀 적 없고, 그 어떤 조직이나 사회에도 완전히 물들어본 적이 없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일체감을 느끼고 어딘가에 푹 빠졌다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은 건 소설(을 비롯한 책)이 전부다. 이런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다니, 대체 그는 여태껏 어떻게 읽어온 것일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 지, <보다>, <말하다>에 이은 김영하의 산문집 삼부작의 마지막권은 <읽다>라고 한다. 어떤 책일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