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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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영화 <도가니>. 이 영화의 원작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무렵, 비슷하게 우리나라 사법제도에 '딴지'를 걸며 나온 책이 한 권 있었다. 바로 김두식 교수의 <불멸의 신성가족>. <도가니>도 충격적이지만 이 책 또한 읽는 이의 분노를 끓게 하는 책이었는데, 이 두 권을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읽었던 나는 폐인 상태였다. 사회, 특히 법 체계에 대한 신뢰를 거의 잃었달까...

<도가니>는 큰 화제가 된 영화인데도 차마 보지를 못하고 있던 중에 도서관에 김두식 교수의 전작인 <헌법의 풍경>이 있기에 읽었다. <불멸의 신성가족>이 법조계에 집중적으로 메스를 가한 책이라면, <헌법의 풍경>은 그보다 넓은 범위의 법 현실에 대해 비판하는 책이라서 좀 더 읽기에는 편했다.

저는 가끔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정답을 지닌 사람들이 너무 많은 데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답을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정답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이야기는 얼핏 이해가 잘 되지 않으시지요? 극단에 선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옳고, 남은 언제나 틀리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슬프게도 이런 분들이 누리는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이 됩니다. 이분들의 확신이 구현되는 세상은 다른 쪽 극단에 선 사람에게는 바로 지옥인 까닭입니다. (pp.63-4)

우리들 모두는 어려서부터 '순종'을 최고의 미덕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저는 제가 왜 그 고등학교를 끝까지 다녔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학교를 박차고 나왔다면 제가 영원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생 낙오자가 되었을까요? (p.105) 

저자는 어릴 때부터 법학보다도 인문학, 사회학에 더욱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이류 법조인이라고 자처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법 하면 떠오르는 딱딱한 어투나 도식적인 설명보다는 철학서나 인문학서에서 볼 법한 글귀가 많다. 물론 책 제목이 <헌'법'의 풍경>인만큼 법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그 원인을 법 자체의 해석을 넘어 사회 전체의 악습이나 부정적인 사회분위기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찾으려고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불멸의 신성가족>과 마찬가지로 법대, 사법부는 물론 군법무관 시절까지 법조계에서 저자가 직접 겪은 일화가 자주 등장하여 고발성이 짙다. (이 책보다는 <불멸의 신성가족>의 수위가 더 높다.) 이런 고발성 짙은 이야기는 경험자의 수기로서보다 드라마나 책으로 많이 나올법한데, 생각해보면 미국, 하다못해 일본만 해도 법에 관한 드라마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도 우리나라는 법률 드라마가 별로 없다. (검사랑 연애하고, 변호사랑 결혼하는 얘기는 법률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도 국민의 법에 대한 장벽이 높은 사례로 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외모로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유대인들을 족집게처럼 뽑아내는 작업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아직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말입니다. ... 2001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윈 블랙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 <IBM과 홀로코스트>를 출간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치가 유대인들을 색출하여 분류하고, 강제 추방하고, 수용소에서 학살하는 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IBM의 최신 기술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카드 분류 시스템) (p.86) 

'IBM이라면 그 컴퓨터 회사?'라고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든 부분이다. 내가 무식해서 이제서야 안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몇백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이미 20세기 초에 IBM의 기술이 쓰였다니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저자는 이를 근거로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 과연 나치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냐고 하는데, 수긍이 간다. (당장 이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 내 정보자료도 어디론가에 수집되겠지...) 이 책은 이렇게 법률 외에도 다양한 배경지식을 함께 제시한 점도 좋았다.   

하지만 마냥 법 현실을 비판하기만 한 책은 아니다. 저자는 법대를 나오고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애초부터 법학에 뜻은 없었고, 그나마도 법조계의 주류인 민법이나 상법 같은 분야보다 형법, 장애인법이나 홀로코스트 같은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미국에서도 그런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했을 당시만 해도 그런 비주류의(!) 분야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선배들이 뜯어 말릴 정도였는데, 귀국 후에 보니 비슷한 뜻을 품고 이미 혁혁한 공을 세우기까지 한 후배들이 있어서 적잖이 놀랍고 부끄러웠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새로운 관심사를 가진 새로운 법률가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멸의 신성가족>에서도 궁극적으로 저자가 주장한 것이 법조계라는 성역을 개방하여 보다 국민에게 친숙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책에서 이미 그런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건 이 책이 나온지 벌써 7년이나 되었다는 점이다(2004년 출간). 이 책이 이제까지 여러번 화제를 낳았고 많은 이들에게 읽혔지만, 그때보다 지금의 법 현실이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도가니>도 영화화되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이 책도 다시한번 화제가 되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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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문워킹을 - 보통의 두뇌로 기억력 천재 되기 1년 프로젝트
조슈아 포어 지음, 류현 옮김 / 이순(웅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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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내가 노린)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비법 같은 건 없었지만(정확히 말하면 비법 내지는 기술이라는 것은 있는데 실생활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적어도 저자의 사례에 따르면), 저널리스트인 저자의 위트 넘치는 문체와 실화에 기반한 에피소드가 참 마음에 들었다. 

특히 기억 나는 건 국내에도 잘 알려진 '마인드맵'의 대가 토니 부잔의 에피소드.  

토니 부잔은 어릴 적에 매우 친하게 지낸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이 친구가 비록 학교 성적은 안 좋았지만 꽃 이름, 새 이름, 곤충 이름 같은 건 기가 막히게 잘 외우는 녀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시험을 보면 '미국에서 볼 수 있는 새 두 마리의 이름을 쓰시오' 정도로 일반 상식 수준의 문제가 나오니, 토니 부잔의 친구처럼 특정 분야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는 주목 받기가 어렵고, 오히려 토니 부잔처럼 여러 분야를 두루두루 잘 하는 평균 수준의 아이가 성적이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토니 부잔은 이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지식을 평가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마인드맵을 창시했고, 평생을 기억력 향상이라는 문제에 바쳤다고. 

저자는 토니 부잔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니고, 이 책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조금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 마인드맵에 관한 책을 인상깊게 본 기억도 있고, 이 에피소드처럼 지식을 평가하고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공감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바로 어제 스티브 잡스가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그 또한 학교 같은 정식 교육기관에서 천재 또는 수재라고 인정받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자신의 특별한 재능과 노력으로 온 인류를 즐겁고 편하게 만들어 주는 제품을 발명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학교는, 조직은, 사회는 사람의 가치를 얼마나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원석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그들이 모두 제 빛을 내게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그런 생각을 들게 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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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헌법 - 대한시민 으뜸교양 憲法 톺아보기
차병직, 윤재왕, 윤지영 지음 / 지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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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도서관에서 서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샛노란 표지에 끌려 고른 책이다. 

제목도 어찌나 깜찍한지, 무려 <안녕, 헌법>이다. 헌법 개론서라고 하면 <헌법학원론>, <헌법학강의> 같은 법학 전공서나 수험서만 있는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반인을 대상으로 쓰인 헌법서도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안녕, 민법>, <안녕, 상법>, <안녕, 형법> 같은 책도 있다면 읽어볼 의향 있음! 

책 구성도 참 단순하다. 전문과 본문 10장 총 140개 조항 및 부칙에 이르는 헌법 전문(全文)을(사실 결코 많은 양이 아니다. 검색창에 '헌법'이라고 치면 바로 나오니 인쇄해서 봐도 좋을 정도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줄한줄 설명했다. 이 조항이 실리게 된 역사적 배경, 외국의 사례, 조항과 관련된 판례 등 조문을 이해하기 쉽게끔 다양한 배경지식을 함께 제시한 점도 마음에 든다.  

이미 헌법을 공부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헌법을 한번 쭉 훑는다는 생각으로 읽기 좋고, 한번도 접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어렵게만 느껴지는 헌'법'을 조금 더 가깝게 느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어제오늘 이틀에 걸쳐 읽다가 오늘 책 귀퉁이를 접어버리고 만 부분은 바로 대통령에 대한 부분이다. 마침 대통령의 어원이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이 책에 바로 나와있었다. (大통령이라는 호칭은 수상, 총리는 물론이요,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의 president보다도 강한 느낌이 든다)

대통령이라는 용어는 미국 연방헌법의 프레지던트president를 번역한 것이다. 프레지던트는 미합중국이 탄생하기 전 준비단계였던 1774년 9월의 필라델피아 대륙회의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당시 미국 동부의 주정부들이 모여 연방국가 건설을 계획하는 회의를 열었는데, 회의를 주재할 의장격의 대표를 선출하면서 그 사람을 프레지던트라고 불렀다. 회의를 진행한다는 프레자이드preside에서 만들어 낸 말이다. ......

1844년 청나라에서는 프레지던트의 음을 따라 백리이천덕伯理爾天德이라고 표기하였다. 조선도 1882년 공식 문서에서 백리이천덕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했다.  

프레지던트를 지금처럼 대통령이라 번역한 것은 일본이었다. 미노사쿠 린쇼는 1873년 <프랑스 헌법>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거기서 프랑스의 1852년 헌법에 등장하는 프레지던트를 대통령이라 번역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백리이천덕을 사용하던 가운데 1883년 홍영식이 미국을 다녀와 고종과 문답하면서 대통령이란 한자어를 구삭하였다.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프레지던트를 대통령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대만 헌법에서는 대통령 대신 총통이란 용어를 채택하였다. 총통 역시 프레지던트의 번역어다. (p.291)

(프레지던트를 '백리이천덕'이라고 표기한 청나라인들의 센스에 웃음 빵터졌다...^^;;)

일본에서 미노사쿠 린쇼가 대통령이라고 처음 번역 표기한 것을 홍영식이 들여왔다고 하니,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우리나라에서 쓰기 시작한지가 백년이 훨씬 넘은 셈이다. president를 왜 굳이 '대통령'이라고 번역한 것인지는 미노사쿠 린쇼의 저서를 읽어봐야 알 것 같으나 거기까지는 패스-_-; 

법전공자가 아니라도, 법학자, 법조가가 아니더라도, 주권자인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은 괜찮은 일인 것 같다. 법전 특유의 어려운 문어체나 한자 표기가 전혀 없으니 마음은 가볍게, 그러나 헌법을 대하는 뜻은 무겁게 두고 읽어본다면 색다른 경험이 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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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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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백 번 달군 금침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언젠가 인터넷인가 책에서 <나를 알아주는 벗>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짧은데도 묘사가 어찌나 강렬한지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게다가 조선 시대에, 임금도 아니요 공자님도 아닌 '고작' 벗에게 이런 정성을 쏟은 학자가 있었다니, 당시로서는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글쓴이가 누군지 궁금하여 이름을 찾아보니 이덕무라고 했다. 같은 시대 사람인 정약용이나 박지원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조대왕 시절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마침 그의 글을 모은 <책에 미친 바보>라는 책이 있다고 하여 서둘러 읽어보았다. 이덕무가 쓴 글과 서간문 등을 모아 만든 산문집인데, 책 제목은 생전에 그가 책 읽기를 마치 미친 사람처럼 좋아했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 '간서치'에서 따왔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많이 보았는데 이런 뜻이었구나. 

고전이나 유학에 대해 잘 몰라서 간혹 읽기에 어려운 글도 있었지만, 친구나 가족에 대한 글은 읽기 쉬웠다. 무엇보다도 글 한편 한편 이덕무라는 인물의 사람됨이 드러나 재미있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열광한 글은 바로 이 글. 이서구에게 쓴 편지다.

이서구에게 2

내가 단것에 대해서는 마치 성성이(오랑우탄)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만큼 좋아한다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단것을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것이 생기면 내게 주곤 했는데, 오직 박제가만은 그리 하지 않았소. 박제가는 세 번이나 단것을 먹으면서도 나를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주지도 않았소. 어떤 때에는 남이 내게 준 것까지 빼앗아 먹곤 했다오. 친구의 의리상 허물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는 것이 당연하니, 그대가 내 대신 박제가를 깊이 나무라 주기 바라오. (p.157) 

이 글에 등장하는 이서구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고 박제가는 알다시피 '북학의'의 저자다. 두 분 다 국사 시간에 책에 밑줄 죽죽 그어가며 배운 위인들 맞다.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위인으로서의 품위는커녕, 이덕무가 좋아하다못해 환장하는 단 음식을 빼앗아 먹는 얄궂은 벗(박제가)과 그런 이덕무의 투정을 받아주는 너그러운 벗(이서구)만 보인다. 게다가 이덕무는 어떠한가. 박제가에게 불만을 바로 말하지 않고 이서구에게 이른바 '뒷담화'를 늘어놓다못해 대신 혼내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이쯤되면 사람 냄새 나다 못해 시트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래, 그들에게도 이렇게 시트콤처럼 즐거운 시절이 있었겠지, 암... 

하지만 이 글만으로 그들의 우정을 전부 판단해서는 안 된다. 뒷부분에 훗날 이덕무가 소중한 벗인 박제가가 북학만 좋아한 나머지 행여 임금의 노여움을 살까 걱정하여 임종을 앞두고도 박제가에게 '임금의 노여움을 사지 말고 부디 몸조심하라'는 글을 남기는 부분이 나온다. 죽음이 코 앞까지 다가왔는데도 행여 존경하는 임금과 사랑하는 벗 사이가 멀어질까 염려하는 이덕무의 마음이 애처로웠다.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하면, 역사라는 단어의 무게 때문인지 근엄하고 무게 있는 어르신의 모습만 떠올랐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를 흉보면서도 걱정하는 모습도 그렇고, 박지원이 새로 펴낸 글이 멋지다며 찬사를 보내고, 넉넉잖은 살림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은 지금 내가 작가와 예술가를 좋아하면서도 가벼운 지갑 사정을 걱정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일까. <책에 미친 바보>를 읽으며, 책만큼이나 벗과 인생에 미쳐있었던 조선 후기의 선비 이덕무의 모습에서 오늘을 사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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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30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오늘 저도 읽기 시작했어요.^^ 아까 커피숍에서 '문장과 학풍에 대하여'까지 읽었는데.. 반갑네요.

키치 2011-08-31 01:33   좋아요 0 | URL
제가 모르는 게 많아서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벗에게 쓴 편지와 가족에 대한 얘기가 좋았어요. 섬 님 마음에도 좋은 느낌으로 남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홀가분 - 마음주치의 정혜신의 나를 응원하는 심리처방전
정혜신.이명수 지음, 전용성 그림 / 해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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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나 정신분석에 대한 책은 한 달에 한 권만 읽자, 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나한테는 그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아서...) 이번달은 예외로 해야겠다.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몇 번이나 결제할까 말까 고민한 책이,  도서관 신간 코너에,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깨끗한 상태로(물론 책을 정리하는 사서님들의 손은 탔겠지만... 그리고 배달하신 분도, 서점 직원도... 음음...) 놓여있는데 어찌 안 읽을 수 있으랴... ㅎㅎ 

<홀가분>은 정신과의사 정혜신과 그녀의 남편 심리기획자 이명수가 함께 쓴 책이다. 부부가 같은 분야에서 때로는 동료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밀고 당기고 보완하며 활동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는데 이렇게 책까지 같이 쓰시다니, 부러움을 넘어 배가 슬슬 아프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지난 5년간 나눈 고민과 생각의 결실을 화가이자 아트디렉터인 전용성의 그림과 함께 담아낸 그림 에세이로, 제목대로 '홀가분'하게 읽기 좋다. 나도 잠자기 전이나 이동할 때 틈틈이 여러 편씩 읽었는데 마음이 차분해지고 개운해져서 좋았다. 시간도 훌훌 잘 갔다.    

 

한 초등학생은 백 점을 맞았는데도 아빠한테 눈물이 쏙 빠질만큼 혼이 났답니다. 백 점은 맞았지만 글씨가 삐뚤빼뚤해서 앞으로 글씨를 똑바로 쓰지 않는 나쁜 버릇이 생길까봐요. - 모진 사랑(pp.144-5) 
박태환을 축구장으로 데려가 박지성만큼 뛰지 못한다고 윽박지르고, 김연아에게 골프채를 쥐어주고 미셸 위처럼 스윙을 못한다고 한숨 쉬고, 조용필의 글발이 양인자만 못하다고 혀를 차기 시작하면, 견뎌낼 장사가 없지요. - 자책은 이제 그만(pp.44-5)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인간이자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사는 시민으로서 이러한 사회적인 압박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어렵다. 먹고 살려면 수없이 다치고 깨지면서 좀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고, 그런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 점을 맞아 기분이 좋은 아이를 글씨가 안 예쁘다는 이유로 야단을 친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으니 맥이 탁 풀린다. 열심히 했는데도 칭찬은커녕 생각지도 못한 트집이 잡혀 혼이 나는 아이의 모습은, 안 놀고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취업이 어렵고, 취업을 해도 버티기가 힘들고, 높기만 한 집값에 물가인상에 교육비에 등록금에 노후대비 등등 갈수록 걱정이 태산인 대한민국 보통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닮았다. 

게다가 한 번뿐인 인생 내 맘대로 살 권리가 있는데도 친척, 이웃, 지인 등등 감 놔라 배추 놔라 오지랖 넓은 사람도 많은 게 우리 사회의 특징이자 문제다. 진짜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 대개 비슷비슷하다는 것. 대학은 어디 이상 가야 한다, 결혼은 언제까지 해야 한다, 애는 몇 이상 낳아야 하며 연봉을 얼마를 받아야 어쩌고저쩌고... 왜 그 이상을, 그 너머의 것을 생각하지 못할까.     

 

제 경험에 의하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든 힘의 근원은 자기를 절절하게 느끼는 행위에서 비롯합니다. 잘나든 못나든, 상처투성이든 아니든 그 안에서 내 본래의 모습이 이랬구나, 내가 그래서 힘들었구나, 나한테 이런 욕구가 있었구나...... 를 알아차리고 발견하기. 그럴 때 인간의 자기치유력은 극대화됩니다. - 자기치유력의 근원(pp.194-5) 

  

이 책의 저자들은 답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아보자고 말한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처가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마주하는 것을 꺼린다. 아마도 입시에 취업에 경쟁에 숨 쉴 틈 없이 살다보니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없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귀중한 시간을 놓쳐서는 인생 자체에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주변을 보면 재수, 삼수를 하거나 입대, 유학 중에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는 사람이 제법 있다. 시간도 남고, 원래 생활에서 비껴나 있다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 자기가 진짜 원하는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거나, 전역 후 전보다 치열하게 살게 되었다거나, 유학 후 진로를 변경하는 등 인생의 반전을 이루었다는 스토리도 심심찮게 듣는다.  

나는 재수도 안 했고 1년 휴학 기간도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건만 대학 졸업 후 취업을 못해 인생 최초로 여유로운(또뜨는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한테는 지금이 그 재수, 삼수, 입대, 유학 같은 기간인 것 같다. 이 시간 덕분에 나는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고, 그 결과 평생을 걸고 싶은 공부도 찾았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특히 심리학 책에 눈을 뜨면서 내 안의 상처와 욕구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고나니 첫째, 화내는 일이 줄었다. 덤으로 화내고 나서 후회하는 일도 줄었다. 둘째, 자신감이 생겼다. 나조차도 몰랐던 콤플렉스들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셋째, 여유가 생겼다. 아픈 말들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그 사람 마음에 병이 있나보다 하며 넘기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신경쓰이는 일이 줄고 마음 다치는 일도 별로 없게 됐다. 어쩌면 누구보다 날 괴롭히고 힘들게 한 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인에게 억하심정이 있던 설렁탕집 주방장이 주인에게 손해를 끼칠 요량으로 뚝배기에 고기를 듬뿍듬뿍 넣었더니 '고기 반 국물 반'이라는 소문이 나서 최고의 설렁탕 전문점이 되었다는 전설처럼요. 그래서 모자람이 성취의 가장 중요한 동기라는 성공신화는 어떤 경우엔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잠언이 됩니다. 지금 무언가 모자란다고 느낀다면 '조만간 무엇을 이루겠구나' 하는 신호일지도요. - 결핍 동기(pp.58-9)


먼저 나부터 돌보자는 말에는 심리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바로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하나 이상의 결핍 요소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나 '나는 완벽하다, 내 말이 곧 법이요, 진리다.' 라는 식으로 믿을 때 문제가 생기고 사람들과 갈등이 생긴다. 먼저 자신의 존재의 불완전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기라는 철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세상을 이해하게 될 수 있는 것 같다.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는가' 라는 유명한 노랫말도 있지만, 때로는 내가 바꾸지 않아도 시간이나 상황이 저절로 바꾸어주는 때가 있고, 내가 굳이 말하고 행동하지 않아도 남이 저절로 깨닫고 바뀌는 때가 있다. 또 내가 맞다고 여긴 것이 훗날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도 있다. (그런 때는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자다가 하이킥한다는 말이 절로 이해가 된다.)  

그저 홀가분하게 모든 걱정근심을 내려놓고 세상을 향한 안테나를 조금 접어두는 것이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라고, 조금만 덜 빡빡하게 살자고 말하는 이 책, 참 홀가분하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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