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피의 세계]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때였다. 같은 반에 또래보다 조숙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그 친구가 성경책마냥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당시 200여 페이지의 문고본 책을 읽는 게 전부였던 나는 책의 두께에 질려 읽어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소피의 세계'라는 제목만을 기억해 두었다.

 

십 여 년이 흐른 후,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이 책을 다시 마주쳤다. 그 때 보았던 것과 똑같은 표지와 '현암사' 라는 오래된 출판사의 이름을 보니 친구가 책 읽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듯 했다. 16년 전 추억 속의 그 책을 이제는 직접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의 세계] 는 노르웨이의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가 쓴 철학 입문서이다.  고등학교에서 몇 년 간 철학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 저자는1986년 문단에 데뷔하여 주로 어린이와 젊은이를 위한 작품을 썼는데, [소피의 세계]는 그런 저자의 지적 배경과 문학적 소양이 결합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발간 당시 북유럽과 독일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듬해에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35개국에 번역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소설로 읽는 철학'이라는 부제대로 소설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가 쉽다. 소피의 세계와 힐데의 세계, 이렇게 두 세계로 나뉘어진 액자식 구성이며, 두 소녀가 서로의 비밀을 찾아가는 - 일종의 추리소설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은 대부분의 철학 입문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부터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20세기 철학으로 이어진다. 철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거나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이 책이 여느 철학 입문서와 다른 점은 노르웨이 출신 저자가 쓴 책 답게 북유럽 신화 같은 북유럽 쪽의 소재가 많이 나온다는 것과 철학뿐 아니라 학계 전반에 걸친 남녀 차별 전통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는 물론 근대 사상가들에 대한 설명에도 반드시 그 인물이 어떤 여성관을 가졌는지에 대한 언급이 있고, 학계에서 흔히 소외되는,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여성 철학자들을 철저히 부각시켰다. 이런 점이 20세기 말에 나온 [소피의 세계]가 21세기에도 유효하며 가치있는 책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지난 삼천 년의 세월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깨달음도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리

- 괴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상의 인문학 -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알라딘 서재 말고 외부에서 서평 블로그를 운영한지 이제 3년이 조금 넘었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어떤 일로 인해 만들었던 블로그가 내 첫번째 블로그다. 처음에는 일기나 사진, 최근에 본 영화나 드라마 이야기 같은 잡담을 주로 올렸다. 그러다가 점점 서평의 비중이 늘어서 3년 전에 아예 서평 위주의 블로그를 따로 만들었다. 그 블로그가 현재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다.

 

서평 블로그라고 해도, 읽은 책에 대해 쓴 글을 보통 서평이라고 해서 서평 블로그지, 엄밀히 말해 내가 쓰는 글은 서평이 아니다. 사전에서 서평의 정확한 뜻을 찾아보니 '서적에 대한 비평과 평가, 주로 해당 서적의 내용에 관계된 전문가가 집필한다'고 나오는데, 내가 쓴 글은 비평도, 평가도 아니요, 더군다나 나는 어느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그러니 지극히 비전문적인 사람의 시선에서 보고 느낀 감상을 적은 글이라고 할 수 밖에. 학교 다닐 때 쓰던 독후감의 연장이라고 하면 되려나.

 

그러면서 굳이 서평 블로거이고자 하는 이유는 그나마 내가 세상과 소통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방식이 책이고 글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고 속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아날로그 매체인 책과 느림의 예술인 글을 좋아하면 아웃사이더 취급 받기 딱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책을 읽고 글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 주변에는 그 책을 읽은 사람이 없어서 답답한 사람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 창에 책 제목을 검색했을 때 우연히 내 블로그가 눈에 띄어 내 글을 읽게 되고, 이로 인해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공감에 대한 갈증이 해소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서평 쓰기는 메마른 작업이다. 공력은 많이 들지만 청고한 인격을 만드는 데도, 지식의 성채를 짓는 데도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그건 사랑 없는 섹스는 아닐지언정 출산이 배제된 섹스와 닮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p.107 서평, 그 사소한 정치, [일상의 인문학])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문장노동자인 장석주의 서평집 [일상의 인문학]을 읽으면서 나에게 서평이란 어떤 의미인지 되짚어 보았다. 장석주는 1955년생으로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및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입상하면서 시인 겸 비평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출판사 대표 겸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일상의 인문학]은 저자가 2010년 3월부터 세계일보에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원고를 모아서 만든 책이다.

 

일단 본격적인 인문학 서적이 아니라 저자가 읽은 인문학 서적에 대한 서평 칼럼이라서 읽기에 쉬웠다. 저자의 글도 수려하고, 롤랑 바르트, 발터 벤야민 등 유명한 학자부터 알랭 드 보통, 김훈, 한강 등 최근 작가까지 다양한 저자들의 책이 망라된 점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저자의 책을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대학교 1학년 인문교양 시간에 배운 롤랑 바르트, 20세기 사회과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인물인 미셸 푸코, 자크 아탈리, 발터 벤야민, 지그문트 바우만 등 평소 이름과 주요 사상만 알았지, 정작 그들이 쓴 책을 읽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장석주 저자의 평을 먼저 읽으니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고 이해하면 좋을지도 알겠다. 가장 좋은 서평은 책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라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장석주 저자의 서평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먹고사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인문학은 사람이 개별자에서 벗어나 나와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는 것, 즉 사람과 문화, 그것을 둘러싼 우주와 생명 세계, 그 현상과 본질을 깊이 보게 한다. 필요와 욕망은 가깝고 근원은 멀다. 통찰이란 목전의 필요와 욕망을 넘어서서 근원을 꿰어 봄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인문학의 큰 미덕은 창의성, 통찰력, 소통의 힘을 키워 준다는 점이다. 현실이 던적스럽고 갈 길이 흐릿할 때 인문학은 필요하다. (p.5 일상을 떠난 인문학은 없다, [일상의 인문학])

 

 

내친 김에 이 책에 소개된 책 몇 권을 구입했다. 저자의 말대로 '서평 쓰기는 메마른 작업'이지만, '현실이 던적스럽고 갈 길이 흐릿할 때' 책만한 등대가 또 없다. 그의 서평이 나에게 그동안 몰랐던 책으로의 길을 터준 것처럼, 나의 서평도 누군가에게 불빛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과학 - 위대한 석학 16인이 말하는 뇌, 기억, 성격, 그리고 행복의 비밀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1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이한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몇 달 전 카렌 호른이 쓴 <지식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경제학자 10인을 심층 인터뷰한 책으로, 제법 두꺼운 책인데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폴 새뮤얼슨, 애로, 뷰캐넌, 솔로 같은 이름을 되뇌이며 학부에서 경제학을 복수전공한 보람이 있다고 나 자신을 다독였다. ^^ 

 

이번에 스티븐 핑커의 <마음의 과학>을 읽고 개인적으로 전에 읽은 <지식의 탄생> 때와 비슷한 감동을 느꼈다. 출판사가 같고, 책 편집이나 구성이 비슷해서 그 때의 감정을 또 다시 느낀 것도 있겠지만, 단 한 권의 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의 학문에 관한 속깊은 이야기를 듣는 경험은 TV나 영화와는 또 다른 감동을 주는 것 같다.

 

다만 <지식의 탄생>에 나오는 학자들이 모두 노벨 경제학상 수상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던 반면, 이 책에 등장하는 16인의 석학들은 <엣지 재단(Edge foundation Inc)>에 속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이 다르다. <엣지 재단>은 1996년 존 브록만에 의해 출범한 비공식 모임으로 각 분야의 핵심에 있는 과학자, 철학자, 예술가, 기술자, 사업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 나는 정말 이런 조직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들고, 여러 분야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비공식 모임이라는 말에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템플 기사단 같은 느낌도 들었다.)

 

엣지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지식인으로는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 <언어 본능>의 스티븐 핑커, <총,균,쇠>의 재레드 다이아몬드, <생각의 지도>의 리처드 니스벳, <몰입의 즐거움>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생각에 관한 생각>의 대니얼 카너먼,  긍정심리학의 선구자 마틴 셀러그먼 등이 있다. 한분 한분 현재 학계에서나 출판계에서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분들이라서 이분들이 모두 엣지의 회원이라는 사실이 놀랍고, 그만큼 엣지 재단이라는 모임이 대단한 모임이라는 것을 알겠다.

 

엣지 재단이 만든 엣지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마음의 과학>은 '마음'에 초점을 맞추었다. 엣지 회원들은 이론심리학, 인지과학, 신경과학, 신경생물학, 언어학, 행동유전학, 도덕심리학 등 서로 다른 배경과 전공분야를 반영하여 뇌, 기억, 성격, 그리고 행복에 관한 이야기들을 총 16편의 글로 펴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여러 학문을 아우르는 일종의 지식 세미나로 볼 수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의 최재천 교수는 이 책을 일컬어 '통섭의 불꽃이 튄다'는 표현을 하셨다는데 정말 그렇다.

 

나는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서 심리학자들의 글을 특히 주의 깊게 읽었는데, 출생순서와 성격의 관계를 주로 연구하는 학자인 프랭크 설로웨이의 '성격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악명 높은 스탠퍼드 감옥 실험의 주인공 필립 짐바르도의 '당신은 식초 통에 든 단 오이가 될 수 없다',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의 '성선택과 마음', 긍정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먼의 '에우다이모니아 : 좋은 삶', 자폐증을 주로 연구하는 사이먼 배런코언의 '동류교배 이론' 등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학부 시절 여러 수업을 통해 들은 사례라서 학문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실험인지 알고 있는데, (스탠퍼드 감옥 실험 : 실제 감옥을 흉내낸 공간에서 실험에 참가한 평범한 대학생들에게 임의로 죄수와 간수의 역할을 주었는데 36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본래 인격을 잃고 각자의 역할에 몰입하여 욕설과 폭력, 급기야 고문 등의 행위를 저지름. 익명화, 탈개인화된 상태에서는 착한 사람도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실험.) 이 실험을 기획한 필립 짐바르도로부터 실험을 창안한 의도와 당시 상황, 그 이후의 진행 경과 등을 알 수 있어서 뜻깊었다.

 

이 실험을 생각하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선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다가도 상황에 따라, 역할에 따라 너무나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믿게 된다. 그의 글 제목처럼 식초 통에서 나 홀로 단 맛이 나는 오이가 될 수는 없다. 단 맛이 나는 오이가 되려면 힘들어도 단 맛을 내는 통으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아니면 식초 통에서 신 맛이 나는 오이로 살던가...)


독서의 계절, 학문의 계절 가을. 이 책을 읽으니 독서 수준도, 학문의 스펙트럼도 레벨이 한 단계 업된 기분이 든다. 앞으로 엣지 재단에서 또 어떤 책을 낼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저의 심리학 - 모두가 다 루저야, 미래를 향해 달려!
신승철 지음 / 삼인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거 심리학이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가정폭력이나 학원폭력,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 같은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하여 분석하는 학문이었다면, 최근에는 개인을 넘어 사회적인 문제로 범위를 넓혀 분석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가령 정혜신 정신과 박사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을 집단 심리치료한 사례를 들 수 있는데, 노동 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가 개인에게 가하는 정신적인 악영향에 대해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아닌가 싶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사회 구조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일방적이라고 보았단 반면, 최근에는 개인의 병든 심리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싸이코패스)

 

'루저(loser)' 문제도 개인의 심리라는 측면과 사회 구조의 병폐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루저'는 몇 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모 여대생이 특정 신장에 미달하는 남성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하여 화제가 된 말인데, 최근에는 신장뿐 아니라 학벌, 외모, 직업, 재산 등 여러 측면으로 보아 미달하고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학벌이든 외모든 뭐라도 하나 빠지는 사람이 루저라면, 이 모든 기준을 충족시키는, 소위 '스펙'을 전부 갖춘 '엄친아', '엄친딸'은 우리 사회에 0.001%도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회의 99.99%가 루저인 사회, 이런 사회를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루저의 심리학>의 저자 신승철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한국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루저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심리를 분석한 뒤 임상 실험을 통해 그들의 삶을 바꾸는 과정을 이 책에 담았다. 루저라는 주제 자체는 처음 보는 것이 아니지만 사회적인 이슈로 볼 수 있는 문제를 개인의 심리 차원에서 접근한 점이 신기했고, 막연한 서술이 아니라 저자가 피험자들과 직접 일대일로 만나 임상 실험을 하는 과정이 담겼다는 점이 신선했다.

 

이 책에 나오는 루저는 꿈루저, 외모루저, 돈루저, 실업루저, 빚루저, 학벌루저, 주택루저, 직장루저 등이다. 용어 자체는 낯설지만 책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일상에서 한두번쯤은 만나봤을 인물군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꿈루저' 편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꿈루저는 말 그대로 꿈이 없는 사람인데, 자신의 꿈을 찾고 몰두하는 대신 연예인, 드라마 이야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인터넷상만 해도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연예인의 가십과 드라마 줄거리에 인생을 맡기는 사람들. 'TV가 대신 꿈을 꿔 줘요'라는 피험자의 말은 안타까우면서 한편으로는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현재의 사회는 거대 구조나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작은 기계 부품들의 연결 방식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 사회이며, 그렇기 때문에 <u>작은 기계 부품이 색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사회임을 알 수 있다. ... 색다른 꿈에 따라 전체의 방향성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언제든지 가능하며, 이 꿈의 행로에 따라 특이한 삶을 사는 것도 언제든 가능하다.</u> ...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틀 안에서 똑같이 움직여야 할 로봇과 같은 운명에 놓인 것이 아니라 자신마다 특이한 삶의 방식과 특이한 꿈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이 바로 '자신만의 아주 특별한 꿈꾸기'의 순간이자 꿈루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색다른 계기라고 할 수 있다. (pp.53-4)


저자는 책에 나온 실험을 통해 '루저' 문제는 사회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 탓만 하지 말고 일단 나부터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을' 루저'라고 규정짓는 것은 남일 수도 있고 사회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만약 나인 경우에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가령 '꿈루저'라면 꿈이라는 것을 너무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 것, 손쉬운 것에서 시작하는 방법이 있다. '주택루저'라면 TV에 나오는 멋진 집, 이웃이나 친척이 산 집을 탐할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집의 소중함을 깨닫고, 내가 꿈꾸는 집을 생각하는 방법이 있다.

 

'Why be a runner when you can own the race?''라는 말을 좋아한다. 남의 경기에서 뛰다가 패자가 될 것을 걱정하지 말고 네 스스로 경기를 만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을 우리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루저가 될 것을 걱정하기 전에, 루저라고 자기 자신을 탓하기 전에 내가 바라는 승자의 모습은 무엇인지, 내가 두려워하는 루저의 모습이 무엇인지부터 아는 게 맞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셜 정치혁명 세대의 탄생 - 네트워크 세대는 어떻게 21세기 정치의 킹메이커가 되는가?
한종우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예전에는 선거운동 하면 후보자들이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여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거나, 지하철이나 길거리, 시장 등에서 유권자들을 한명 한명 만나며 유세를 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선거운동의 특성상 후보자들이 만나는 유권자들도 학교나 직장에 있는 청년층보다는 중장년층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선거운동 풍경은 조금 다르다. 과거의 모습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형태의 선거운동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간 인터넷을 통한 선거운동이 활발해지더니, 얼마 전부터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 서비스를 통한 선거운동이 트렌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매체들은 후보자 개인과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고 쌍방향으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또한 그동안 주요 유권자층에서 배제되다시피 했던 젊은층의 참여를 독려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유권자인 청소년층도 인터넷을 통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일도 적지 않다.

 

+

 

<소셜 정치혁명 세대의 탄생>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정치현상을 적확하게 짚어내고 구체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저자 한종우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후 미국 시러큐스 대학에서 석사, 박사를 취득하고 맥스웰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사이버 세대의 정치현상에 관해 활발한 연구,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정치학자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같은 디지털 정보 기술을 활용하여 한국의 정치문화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분석 자료와 함께 보여주었다. 정치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등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주제들이 한 데 어우러져 있어서 어떤 책일지 궁금했는데 읽어보니 역시 좋았다.

 

먼저 저자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변화 현상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어디서 이 현상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 저자는 과거 알렉산더 토크빌이 당시 신대륙이었던 미국에서 발견한 '타운 미팅'을 이 현상의 기원으로 제시했다. 토크빌은 권력 상층부의 주도 없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공 문제를 논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타운 미팅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찬사를 보낸 바 있다. 한국의 유권자들이 디지털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정치 문제를 논의하고 투표를 독려하는 현상은 현대판 타운 미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게다가 이 현상은 비단 한국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도 아니다. 4년 전 미국 대선에서 정치 신인이나 다름 없던 오바마가 노장 맥케인을 누르고 대통령으로 선출된 데에는 디지털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젊은 세대들의 공이 컸다. 또한 이집트, 튀니지 등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에도 트위터, 페이스북의 영향이 컸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의 중심에 있는 'R세대'에도 주목했다. R세대는 다른 말로 '2030세대'로도 불리는데, 신네트워크 정보 기술의 폭발적 보급과 동원력을 바탕으로 정치 무관심층에서 참여적 유권자로 극적으로 변모한 점이 특징이다. (p.124) 흔히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적인 속성이 강하고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말이 있는데, R세대는 다르다. 부모 세대인 386세대에 비하면 이념적인 성향도 낮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동기부여가 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R세대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와 휴대폰을 자유자재로 이용해 왔기 때문에 디지털 기술에 친숙하고,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 소셜 미디어 활동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도 크다.

 

특히 저자는 '생활정치'라는 개념에 주목하여 R세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생활정치란 앤서니 기든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평등이나 해방과 같은 이슈들과는 관련이 적고, 급속한 탈전통화 추세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p.169) R세대는 정치 외에도 경제, 환경, 문화, 복지 등 다양한 이슈에 관심이 많고, 이는 바로 생활정치에 속하는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R세대는 당장 정치에 관심이 없어도 내가 좋아하는 문화, 내가 관심 있는 환경 문제에 찬성하는 후보자가 있으면 바로 열성적인 유권자층으로 돌변할 수 있다. R세대의 이러한 특징을 잘 이해하고 선거운동에 활용하는 후보자가 정치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

 

이 밖에도 책 후반부에 일본 정치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일본 정치에 관심이 많아 이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을 비교하는 대신,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거나, 왜 일본은 이러한 변화에서 뒤처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책이 차후 발간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