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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인입니다 - 전쟁과 역사와 죄의식에 대하여
노라 크루크 지음, 권진아 옮김 / 엘리 / 2020년 6월
평점 :
어쩌다 보니 요 며칠 동안 전쟁 이후의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달아 읽었다. 첫 번째 책은 독일 출신의 작가 노라 크루크의 그래픽 노블 <나는 독일인입니다>이다. 1977년생인 저자는 68혁명 이후 독일에서 이루어진 교육개혁의 첫 수혜자다. 이 교육개혁을 통해 독일의 젊은 세대들은 그들의 조부모 또는 부모 세대가 국가의 발전이나 민족의 중흥 같은 명분 아래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구별짓고 통제하고 배척하고 살육했는지를 상세히 배웠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사랑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강한 일체감을 느끼는 일이 자칫하면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치달을 수 있는지 생생한 사례를 통해 배웠다.
문제는 저자가 미국에 가면서부터다. 학업을 위해 미국에 온 저자는 미국인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한 태도로 나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에 놀랐다. 저자와 같은 독일인이라도 전쟁 이전에 이민을 와서,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도 위화감을 느꼈다. 왜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을까. 왜 나는 나의 조국을 사랑해선 안 될까. 고민을 거듭하던 저자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데, 자기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겠는가."라는 생각에 미친다. 그리하여 저자는 그동안 알려고 하지 않았던,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외조부모의 이력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나를 있게 한 나라를 사랑할 수 없으므로, 나를 있게 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돌린 것이다.
가족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누구보다 가까운 피붙이인데도 그랬다. 캐묻는 상대가 (저자의) 아버지이거나 작은할아버지이거나 고모이다 보니 때로는 가족으로서 선을 지켜야 해서 입을 다물거나, 때로는 가족이라도 선을 넘어야 해서 얼굴을 붉히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도 집요하게 탐문한 결과, 저자는 자신의 가족들이 나치 치하에서 어떤 식으로 생활했는지, (가장 중요한) 나치에 협조를 했는지 안 했는지 등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만약 나라면 집안 어른들을 상대로 이런 식의 조사를 할 수 있을까. 그들이 일제 강점기 때 무엇을 했는지 - 혹은 하지 않았는지 - 묻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종전 후 저자의 할아버지가 나치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준 유대인의 아들 월터와 연락이 닿아 전화 통화를 하는 대목이다. 저자에게 "죄의식 가지지 말아요."라고 말한 월터는 14살 때 어머니가 유대인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어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가족의 역사를 알기 전의 저자라면, 죄의식 가지지 말라는 월터의 말에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월터에게서 어머니를 빼앗고 힘든 생활을 하게 한(적어도 그런 상태로 내버려 둔) 어른들 중에는 저자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기에, 저자는 쉽게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한다. 윤리와 정의 대신 생존과 안락을 택한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에 지금의 저자가 있기에 모종의 책임을 느낀다.
월터의 말대로 전후 세대에게는 선조가 저지른 전쟁에 대한 죄의식을 느낄 의무가 없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의무에서 벗어난다면, 실제로 피해를 입었고 여전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누가 사죄하고 배상해야 할까. 제대로 알지 못하니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으니 책임질 마음도 안 생긴다. 결국 책임은 사랑으로부터, 제대로 된 앎으로부터 비롯됨을, 직접 자신의 가족사를 들추고 캐냄으로써 증명한 저자의 노력과 용기가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