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의 요코하마 - 나의 아름다운 도시는 언제나 블루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 6
고나현 지음 / 세나북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문화를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으로서 아쉬운 점 한 가지는 일본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여행으로는 수십 번 이상 일본에 가보았지만, 일본을 여행하는 것과 일본에서 생활하는 것은 다르다. 이십 대라면 교환 학생이나 어학 연수, 워킹 홀리데이 등에 도전할 수도 있겠지만,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으로서는 어느 것도 언감생심이다. 그나마 가능한 선택지가 한 달 살기라서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는 것이 세나북스의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이다. 다카마쓰, 교토, 오키나와, 홋카이도, 후쿠오카 편에 이어 이번에 요코하마 편이 출간되었기에 읽어 보았다.


8년 차 일본어 번역가인 저자 고나현 님은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안을 받고 제일 먼저 떠올린 곳이 요코하마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를 덕질로 이끌고 일본어와 번역의 세계로 인도한 게임 '금색의 코르다' 시리즈의 배경이 요코하마이기 때문이다. 성지순례를 위해 여러 번 가봤기 때문에 다른 도시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2018년 이후로는 찾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혹은 변하지 않았는지 궁금한 마음이 컸다. 그래서 도전한 요코하마 한 달 살기. 책에는 2023년 9월 22일부터 10월 21일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한 달 살기를 할 도시와 시기를 정했다면, 그 다음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숙소일 것이다. 저자는 호텔, 레오팔레스, 쉐어하우스, 에어비앤비, 캡슐호텔 등의 선택지 중에서 호텔을 택했다. 관리 부담이 없고 초기 비용이 안 들며 치안이 상대적으로 좋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요코하마는 나리타 공항 또는 하네다 공항에서 철도, 지하철, 버스, 택시 등으로 1,2시간이면 이동 가능하다. 저자는 요코하마 간나이 역 주변 호텔에 묵었다. 시내 중심이라서 어디로든 이동하기 편하고, 일과를 마친 후 가볍게 산책을 하거나 장을 보기에도 좋았다. 며칠 머물고 가는 여행자들은 알 수 없는 이런 정보, 참 귀하다.


저자는 요코하마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일하는 틈틈이 요코하마의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체험했다. 요코하마 카레 알펜 지로, 기린 맥주 공장 투어, 컵누들 뮤지엄, 아카렌가소코, 산케이엔 등 요코하마의 명소들을 부지런히 다녀온 여행기가 유용하고 흥미롭다. 가마쿠라, 에노시마, 도쿄 등 인근 도시를 방문한 이야기도 좋았다. 맥주를 좋아하는 저자는 10월에 있는 요코하마의 대형 이벤트인 옥토버페스트도 즐겼다. 한 달 살기에 앞서 체류 기간 동안 현지에서 열리는 축제 정보를 미리 알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일종의 여행기 또는 체류기로서도 유용하고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분야는 다르지만) 같은 일본 문화 덕후로서 공감가는 대목이 아주 많았다. 한국에서도 화제인 집사 카페 체험기, 좋아하는 BL 작품의 팝업 스토어를 보러 가는 대목도 재미있었고, 동방신기의 멤버를 좋아하는 일본인과 덕후로서 교감한 대화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나 또한 여러 차례 요코하마에 가봤기 때문에 반가운 장소도 많았다. 오래 전 어느 날씨 좋았던 날에 야마시타 공원 산책하고 저녁에 만요 클럽에서 온천을 즐겼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기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 - 나를 위로하는 일본 소도시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 1
이예은 지음 / 세나북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까지 한국인들이 주로 찾는 일본의 여행지는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들 위주였다. 지금은 다르다. 일본 여행의 수요가 늘어나고 직항 항공편이 늘어나면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의 소도시들을 찾는 여행객들이 증가하고 있다. 다카마쓰도 그중 하나다. 다카마쓰는 일본 남서쪽에 위치한 시코쿠 지방의 항구 도시이자 일본 43개 현 중 가장 작은 가가와 현의 현청 소재지다. 직항 항공편으로 인천에서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고, 맛있는 우동과 수준급의 미술관, 천혜의 자연 환경 등 여행자들이 원하는 요소를 두루 갖춘 여행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근 들어 인기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이예은 작가의 책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는 다카마쓰 여행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2015년부터 도쿄에서 살고 있는 저자는 6년 전 어느 날 문득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달 살기를 해볼 만한 일본의 소도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찾은 곳이 다카마쓰였다. 일본에서 가장 작은 현이니 다카마쓰에서 한 달을 지내며 가가와 현 전역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기대감으로 선택한 곳이었는데, 직접 살아보니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저자는 다카마쓰 한 달 살기의 경험을 각각 '푸드 테라피', '아트 테라피', '워킹 테라피'로 정리해 소개한다. 다카마쓰가 위치한 가가와 현은 '우동현'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일본에서 우동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다카마쓰에는 우동 외에도 와산본, 안모치조니, 호네츠키도리, 후르츠산도 등 이색적인 별미 음식이 다양하다. 최근에 본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가와 현 명물인 호네츠키도리에 관한 영상을 보았는데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다양한 맛의 치킨에 익숙한 한국인의 입맛에는 살짝 아쉬운 맛일지 몰라도 현지인들의 소울 푸드를 체험해보는 자체만으로 특별한 추억이 될 것 같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가 그 지역의 미술관에 가보는 것이다. 다카마쓰에도 유명한 미술관이 여럿 있다. 책에는 이사무 노구치 정원 미술관, 기쿠치 간 기념관, 마루가메시 이노쿠마 겐이치로 현대미술관 등이 소개되어 있다. 다카마쓰에서 예술로 유명한 곳으로 나오시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오시마에는 지추 미술관, 이우환 미술관, 이에 프로젝트 등 다양한 미술관 및 예술 체험 기회가 있다. 미술관은 물론 작가에 관한 설명도 나와 있고, 티켓 이용 팁과 이동 방법 등 구체적인 정보가 나와 있어서 유용할 것 같다. 이 책에는 이 밖에도 걷기 좋은 길, 추천 숙소, 여행 팁, 추천 여행 코스 등이 실려 있다. 


5년 만의 개정판 출간을 기념해 새로 추가된 여행기도 있다. 다카마쓰항에서 페리로 20분이면 도착하는 메기지마, 100마리가 넘는 고양이들이 사는 '고양이섬' 사나기지마 여행기가 그것이다. 둘 다 전혀 몰랐던 곳인데, 메기지마는 일본의 유명한 전통 설화인 '모모타로 이야기'가 시작된 곳으로, 사나기지마는 바다 옆 방파제 위를 유유히 '날아다니는' 고양이들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외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들 중에도 이렇게 가볼 만한 곳, 재미있는 곳이 많다니. 정말이지 여행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켄터키주에 사는 일곱 살 소녀 재뉴어리는 어릴 때 엄마를 여의고 식구라고는 아빠뿐인데, 그 아빠는 엄청난 부자인 동시에 열정적인 수집광인 로크 씨를 위해 전 세계를 떠돌며 보물을 발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로크 씨가 소유한 대저택에서 사는 재뉴어리를 보고 사람들은 부러워하지만 재뉴어리의 생각은 다르다. 대저택이 아니라도 좋으니 아빠 엄마와 같이 살고 싶고, 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로크 씨의 시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다. 바깥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고, 좋아하는 개도 키우고 싶다. 그런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발견한 것이 문제의 '푸른 문'이다.


재뉴어리는 일곱 살 때 로크 씨와 떠난 여행에서 그 문을 처음 발견했다. 그 문을 발견하고 아끼던 가죽 수첩에 '소녀는 그 문을 열었다'라고 적으니 거짓말처럼 문 밖의 세계로 갈 수 있었다. 그때 주운 여왕이 그려진 은화는 오랫동안 재뉴어리의 보물이었다. 재뉴어리는 열일곱 살 생일에 그 문을 다시 발견했다. 보물 상자에서 표지에 <일만 개의 문>이라고 쓰인 가죽 장정의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재뉴어리는 그것이 아빠가 몰래 준비한 생일 선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고, 비통해진 재뉴어리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이 어릴 때 보았던 바로 그 푸른 문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채로.


앨릭스 E. 해로우의 데뷔작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월드판타지상 등 유수의 상에 노미네이트된 화제작이다. 이 소설은 일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같은 전통적인 환상 동화의 공식을 따르는 듯 보인다. 현실에 불만족한 소녀가 어떤 계기로 현실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신비로운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전의 인격보다 훨씬 더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른 문 너머의 세계에서 재뉴어리가 하는 모험은 그저 지루한 일상과는 다른 신비롭고 흥미진진한 경험만은 아니다. 재뉴어리보다 먼저 그 문을 찾은 여성인 애들레이드 리 라슨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과감히 위험한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후에 펼쳐지는 애들레이드의 이야기는 재뉴어리에게 있어서 과거의 이야기인 동시에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현재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문 너머의 세계를 알게 된 재뉴어리는 자신을 구속하는 로크 씨의 대저택을 떠나 실제로 모험을 떠나는데, 이 대목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이 소설은 허구를 가정하는 환상 소설인 동시에 실제를 반영한 역사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에선 유색 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분수에 맞게 사는 법"을 모른다고 여겨졌다. 재뉴어리는 어릴 때에는 그러한 차별을 모르다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유색 인종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구분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배움(사회화)은 결국 체념으로 이어지기 쉬운데, 재뉴어리는 푸른 문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한계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임을 알게 된다. 이는 여전히 많은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깊은 감동과 자극을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교도관이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편지에 따르면 이 사형수는 한 남자를 죽이고 그 사람의 금고에서 3만 엔(현재 가치로 약 1억 6,000만 원)을 훔친 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일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이므로 실은 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게 있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더 이상의 극형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그저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 마음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는 이 사형수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는 일란성 쌍둥이 형이 있고 그가 저지른 모든 범죄와 살인은 바로 이 형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한다. 대체 어떤 사연일까.


에도가와 란포는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894년생인 에도가와는 1923년 작가로 데뷔한 이래 수많은 추리소설과 탐정소설, 괴기 소설을 발표하며 엄청난 명성과 인기를 얻었다.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은 1924년에 발표된 <쌍생아>부터 1931년에 발표된 <메라 박사의 이상한 범죄>까지 총 16편의 괴기스럽고 잔학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로 실린 단편 <쌍생아>는 일란성 쌍둥이 형을 죽이고 형의 행세를 하며 범죄 행각을 벌이고 다닌 사형수의 이야기를 그린다. 쌍둥이 트릭 자체가 지금은 새롭지 않지만 당시에는 기발했을 것 같고,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성장 과정에서 생긴 차이점을 지우기 위해 화자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자세하게 서술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인간의 악의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범죄로 이어지는지, 첫 번째 범죄가 두 번째 범죄로 연결되고 두 번째 범죄가 세 번째 범죄로 연결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생생하게 묘사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어지는 단편 <붉은 방> 역시 살인자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인생이 너무 시시하고 지루한 나머지 살인이라는 '유희'에 빠져들었고, 그 결과 99명의 목숨을 빼앗게 되었다고 밝힌다. 언뜻 보기에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하게 결여된 나머지 목숨을 빼앗는 행위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처럼 보이지만 뒤늦게라도 죄책감을 느끼는 걸 보면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아닌 것 같고, 그보다는 누군가의 작은 악의로도 죽음에 다다를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목숨은 언제나 위태롭고 이를 강력한 법률이나 사회 제도로 방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 책에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단편 <인간 의자>도 실려 있다. 작가인 요시코는 자신의 팬이라고 밝힌 남자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가구 직공인 남자는 가구 중에서도 의자를 전문으로 만드는데, 어느 날 자신이 만든 의자가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기상천외한 생각을 떠올린다. 예전에 이 단편을 읽었을 때에는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소설의 형식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을 못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이중, 삼중의 반전으로 독자를 놀래키는 방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서 과연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샤워
다카세 준코 지음, 허하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혼한 지 십 년 차인 서른여섯 살 여성 이쓰미는 며칠 전부터 남편 겐시가 목욕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목욕뿐 아니라 세수도 안 하고 양치도 면도도 안 한다. "얼굴 정도는 제대로 씻는 게 어때?"라고 물어도 남편은 고개만 갸웃할 뿐이다. 이대로 안 씻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지장이 생길 것이다. 아니 당장 이쓰미 자신이 남편의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집 안에서 숨쉬기가 힘들다. 성관계는 물론이고 가벼운 신체 접촉도 엄두가 안 난다. 이대로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계속될 수 있을까. 이쓰미는 씻지 않는 남편을 씻게 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는데...


2022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의 작가 다카세 준코의 소설 <샤워>는 씻지 않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사수하기 위해 분투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쓰미의 남편 겐시가 씻기를 거부하게 된 계기는 직장 내 괴롭힘과 따돌림이다. 회식 자리에서 입사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후배에게 물세례를 맞은 이후로 남편은 수돗물과의 접촉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수돗물로 샤워는 물론 세안과 양치도 안 하고, 수돗물을 마시는 것도 안 한다. 이쓰미는 궁여지책으로 수돗물 대신 생수 사용을 권하지만 경제적 부담이 커서 지속하기 어렵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씻지 않는 남편 때문에 이쓰미의 고민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별거나 이혼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쓰미 자신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보는 건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이쓰미가 남편을 아직 많이 사랑한다. 씻지 않아 냄새가 나도 여전히 남편의 몸을 만지고 싶고 남편이 자신의 몸을 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그렇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 남편의 체취에 익숙해질 즈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씻지 않는 남편 때문에 내가 괴로운 건 어떻게 할 수 있어도 남들이 괴로운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때부터 이쓰미는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편을 지키는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지금 이 상황을 아무 상관 없는 누군가가 판단해줬으면 했다. 비 오는 밤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어도 그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이 도시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55쪽)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씻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생긴 부부 간의 문제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 간의 거리 문제가 다각도로 그려져 있다. 지방 출신인 이쓰미는 가족은 물론 친척 간의 거리가 지나칠 정도로 가깝고, 회사 동료나 이웃들과 만나면 안부 인사를 나누는 정도는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반면 도쿄 출신인 남편은 친척은 물론 가족과도 개인 대 개인으로서 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웃은 같은 동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 정도로 인식한다. 회사 동료들에게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해도 곧바로 항의하지 않고, 악취를 풍기는 정도로 일종의 수동 공격을 할 뿐이다.


지방 출신이지만 도쿄에서 산 지 십여 년이 지난 이쓰미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걸 경계하는 도쿄 사람들의 태도를 산뜻하게 느끼면서도, 타인으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는 상황에 처하는 것 역시 경계하는 도쿄 사람들의 태도를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정신적으로는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위기 상황인 남편을 누구라도 도와주기를 바라고, 남편 자신도 이쓰미에게 한 번이라도 좋으니 도와달라는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선뜻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도 사랑, 도와달라는 말을 못 들었어도 기꺼이 도와주는 아내의 마음도 사랑이지 않을까. 대놓고 써있지는 않아도 부부 모두 사랑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겨도 계속 사랑하겠다는 자세가 엿보였기 때문에 결말이 더욱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