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조선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20
정명섭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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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 때 아닌 폭설이 내린다면 어떨까. 갑자기 시작된 한파가 그칠 기색 없이 계속된다면...? <미스 손탁>, <어린 만세꾼>, <저수지의 아이들> 등 다수의 역사소설을 집필한 정명섭 작가의 신작 <빙하 조선>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파라는 재난을 맞닥뜨린 상황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상상해서 쓴 판타지 소설이다.


이 소설은 판타지 소설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9년 8월 24일 자에 따르면 "평안도 의주 등지에 우박과 눈이 뒤섞여 내리고, 철산 땅에는 눈이 1자 남짓 쌓여 3일이 되도록 녹지 않았으며, 황해도 곡산 등지에는 산 중턱에 눈이 내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17세기 숙종 대에 소빙하기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료다. 


소설은 열여섯 살 소년 화길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화길은 한양의 소방관인 멸화군의 일원이다. 멸화군 대장인 아버지와 함께 먹고 자면서 일을 돕는 것이 그의 일과다. 어느 날 밤 면주전에 난 불을 끄고 다른 대원들과 함께 한숨 돌리던 그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때는 6월. 한겨울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은 때였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시작된 눈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그치기는커녕 쌓이고 또 쌓여서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농사를 망쳤다. 재난을 틈타 곳곳에서 범죄가 발생하고, 민심이 악화되면서 왕을 탓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세상이 점점 흉흉해지자 화길의 아버지는 화길에게 한양을 떠나 백두산으로 가라고 지시한다. 그곳에 '따뜻한 땅'이 있다는 아버지의 말은 정말일까.


처음에는 안 그래도 추운데 더 추운 곳으로 가라고 아들에게 지시하는 화길의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대로 백두산에 따뜻한 땅이 정말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고, 화길이 따뜻한 땅을 찾는다 한들 아버지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아버지와 함께였다면 화길이 길 위에서 덜 고생하고 덜 고통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품을 떠나 혼자 길 위에 선 화길이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한파와 상관 없이 화길이 살면서 한 번은 거쳤어야 할 인생의 관문을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길이 스스로 친구를 찾고 적을 분간하는 기술을 터득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어쩌면 아들을 좀 더 넓은 무대에서 큰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의 큰 그림 같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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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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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의 책을 그동안 여러 권 읽었다.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가 그랬고, 소설이기는 하지만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와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도 한국계 미국인을 비롯해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약간이나마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최근에 읽은 그레이스 M. 조의 <전쟁 같은 맛>은 이제까지 존재한 한국계 미국인 서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책이다. 


저자는 백인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저자의 어머니 '군자'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귀국했으나 한국전쟁 중에 가족의 대부분을 잃고 부산의 기지촌에서 일하며 남은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이후 상선 선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백인 미국인 남자와 결혼해 그를 따라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 중 둘째 아이가 이 책을 쓴 그레이스 M. 조다. 


한국계 미국인인 저자는 어머니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기지촌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기지촌이 어떤 공간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70년대 한국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외국 남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를 낳아 키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역시 몰랐다.


저자가 15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에게 조현병이 나타났다. 낯선 외국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가족과 이웃들을 위해 음식 만들기를 즐겼던 어머니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저자는 오빠의 아내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어머니가 기지촌에서 했던 일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때까지 조현병의 원인이 유전이나 가난, 이민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닐까 생각했던 저자는 어머니가 기지촌에서 경험한 신체적, 성적 트라우마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저자는 어머니의 생애를 중심으로 공부의 지도를 다시 짰다. 어머니의 삶을 통해 식민주의와 강제 징용, 한국 전쟁과 미군정, 기지촌과 한국 정부의 입양 정책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신체적, 정신적, 성적으로 어떤 고통을 겪었고, 이 고통은 어떤 식으로 낙인 찍히거나 묵인되었는지 살폈다. ('어떤(한국/일본/미국) 남성과 섹스하느냐, 누구에게 성폭력당하느냐에 따라 여성의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했던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한편으로 저자는 그러한 고통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가꾸었던 어머니의 모습도 소개한다. 특히 집 근처 숲에서 블루베리와 버섯을 따서 요리를 대접하고 사업까지 했던 에피소드가 무척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파친코>에서 선자가 오사카의 한 시장에서 김치 장사를 했던 대목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쥐를 소중하게 키우고 '오키'라는 존재를 항상 의식했다는 것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제목이 <전쟁 같은 '맛'>인 만큼 음식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저자의 어머니는 저자가 공부에만 집중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부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김치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김치 만드는 법 만큼은 직접 가르쳐 주셨다. 어머니 말년에 저자가 생태찌개를 끓여서 대접하는 장면도 좋았다. 엄마는 나에게 어떤 맛을 물려주고 싶을지, 나는 엄마를 어떤 맛으로 기억할지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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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사생활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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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내가 한두 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를 대신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201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장진영 작가의 장편 <취미는 사생활>은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해보게 해주는 유쾌하고도 심오한 소설이다. 


자식 넷을 둔 엄마 은협은 위층에 혼자 사는 '나'와 막역한 사이다. 하루 종일 네 아이를 돌보느라 바쁜 은협에게 '나'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다. '나'는 은협이 바쁠 때 은협을 대신해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 큰 아이 둘을 데리러 가고, 피부병에 걸린 딸을 돌보고, 막내인 갓난 아기를 챙겨준다. 그런 '나'를 은협은 언니처럼 따르고 아이들도 '이모'라고 부르며 좋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상이변으로 인해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다. 겨울용 이불을 찾기 위해 옷장을 살피던 은협은 결코 자신의 것일 리 없는 고가의 명품 구두를 발견한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게 분명하다고 확신한 은협은 '나'에게 함께 남편을 미행해 달라고 부탁한다. 전보다 더 바빠진 은협은 전보다 더 자신의 일상을 '나'에게 맡기기 시작한다. 


'나'는 은협인 척하고 아이의 학교를 찾아가 담임 선생님과 친해진다. '나'는 은협인 척하고 전셋집 주인을 상대하고, 동대표 아주머니를 만나서 입주민의 권리를 논한다. 사람들은 은협과 만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만난 사람은 은협이 아니라 '나'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의 행위를 은협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그 결과 은협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이 소설은 한국의 부동산 문제를 다룬 소설 같기도 하고, 독박 육아 문제를 다룬 소설 같기도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리플리>나 <마르탱 게르의 귀향>처럼 타인을 가장하는 삶에 대한 소설이라고 느꼈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의 공급과 내가 아닌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수요가 만나는 지점에 관한 소설이랄까.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고, 내가 아닌 존재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에 관한 소설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한 사회적 조건으로 한국의 부동산 문제와 독박 육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크게 새롭지 않은데, 남성의 아이덴티티 내지는 남성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새롭고 재미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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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동 이야기
조남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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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집'에 대한 욕망을 그린 콘텐츠가 많은 편이다. 일단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떠오르고, 작년에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도 생각난다. 이런 콘텐츠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에게 집은 단순히 먹고 자고 쉬는 곳 이상의 개념이다. 어떤 동네,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가 그 사람의 경제적 자산의 기반이 되고, 정치적 입장을 정하며,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고, 개인적 욕망을 좌우한다.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가 2022년 발표한 연작 소설집 <서영동 이야기> 역시 한국인들의 집을 둘러싼 욕망을 다룬다. 


서영동 주민들이 애용하는 인터넷 카페 '서사사(서영동 사는 사람들)'에 어느 날 '봄날아빠'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인물이 글을 올린다. 육아를 위해 영끌을 해서 아내의 부모님이 사는 서영동의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밝힌 그는 그동안 서영동 옆동네는 매매가가 1억이나 오른 반면 서영동은 그대로라며 중개업소의 가격 담합을 의심했다. 이 글은 곧 카페 회원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사람들은 논란의 제공자인 봄날아빠의 정체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대체 누가 집값이라는 예민한 문제를 대놓고 건드린 걸까. 


여기까지만 보면 집값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일 것 같은데, 소설은 '집값'보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주목한다. 가정의 실질적인 가장은 자신인데 결혼할 때 부모님이 집을 마련해준 남편의 눈치를 보고 사는 유정, 겉보기에는 자수성가한 가장이지만 실제로는 부동산 투기로 돈을 모은 아버지를 어떻게 봐야 할지 갈등하는 보미, 자신의 학원 옆에 노인복지시설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다가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경화, 힘들게 자가를 마련했는데 윗집의 층간소음 때문에 고통받는 희진 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읽는 내내 몰입이 잘 되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결혼 후 아버지 소유의 집에 사는 걸 내내 죄스러워 했던 보미가, 알고 보니 그 집이 아버지 소유가 아니라 남동생 소유인 걸 알고 대분노하는 장면이다. 부모에게 집을 물려받은 남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의 차이가 가족 내 남녀의 지위 차이를 만들고 가족 간 불화를 야기하는 이야기가 보미의 이야기라면, 결혼 생활을 망치는 이야기는 유정의 이야기이다. 둘 다 <82년생 김지영>의 연장선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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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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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성애자 시스젠더 여성이지만 성소수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관심이 많다. 비장애인이지만 장애에 대한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다. 이런 나를 소개하면 어떤 사람들은 "당사자성도 없으면서 왜 그런 걸 공부하느냐"라고 묻는다. 대답할 말이 궁했는데, 김승섭 교수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읽고 답을 찾았다. 당사자성이 없으니까(모르니까) 알고 싶고, 알고 싶으니까 공부하는 거라고.


김승섭 교수는 주로 장애인,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저자는 비장애인 이성애자 기혼 유자녀 남성으로, 자신이 연구하는 문제에 대한 당사자성이 없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부교수로 재임 중인 이력 등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도 특권층에 해당한다.


저자 역시 당사자성이 없는 문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과 회의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런 저자가 임상의사가 아닌 보건학자의 삶을 택한 건, 가난과 가정폭력으로 인해 우울증이 생긴 게 분명한데 약으로 치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스스로 처했던 사건에 대해 말하는 데 필요한 언어를 가지지 못한 걸 보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이야기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했고, 자신이 그걸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동자 등 한국 사회에서 아픔을 겪고도 아픔을 말할 수 없었던 존재들에게 응답하고 그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겪은 문제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연구는 샘플 확보부터 어렵다. 힘들게 샘플을 확보해도 샘플 수 부족을 사유로 다른 연구에 밀려 지원이나 정당한 평가를 못 받을 확률이 높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문제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 심사자가 비장애인, 비성소수자, 남성이라면 적확한 심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고통을 상기하는 일 자체가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조사 항목에서 어떤 내용을 삭제한 적도 있다. 윤리적으로는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하지만, 학문적으로는 그것이 잘한 결정이었는지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으로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지만, 학자로서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약자, 소수자의 이야기가 주로 '비참함의 언어', '슬픔의 언어'로만 공유되는 것을 경계한다. 비참하고 슬픈 면이 있는 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 책도 다루는 문제는 복잡하고 심각한 것이 많지만, 책 자체는 (저자가 오랫동안 공부한 내용을 몇 시간만에 읽어버린 게 미안할 정도로) 어렵지 않고, 다 읽고 나서 뭐라도 해보고 싶어진다. 지금의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무엇일까. 이 문제의 답을 찾는 것이 올해의 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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