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로 산다는 것 낭만픽션 4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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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쓰모토 세이초는 <점과 선>, <모래 그릇>, <검은 가죽 수첩> 등 수많은 인기 소설을 남긴 작가로 유명하지만, <일본의 검은 안개>, <쇼와사 발굴>을 비롯한 논픽션 작품으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57년에 연재를 시작해 1958년에 출간한 소설집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 형태를 취한다. 이 책은 운케이, 제아미, 센 리큐, 셋슈 등 일본의 옛 예술가 10인의 작품과 알려진 이력을 바탕으로 그들의 생애를 재구성한, 일종의 팩션(faction)이다.


노부나가는 차를 이해했다. 분명히 차의 정수를 직감으로 파악했다. 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큐도 노부나가에게 그토록 집착할 수 있었다. 형식은 필요 없었다. 노부나가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늘 충족되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달랐다. 물론 그는 풍류에 이상할 만큼 열심이었다. 하지만 뭔가 정도를 벗어나 있었다. 미에 대한 직감이라는 것이 없었다. 예도에 대한 이해도 겉핥기였고 깊이가 없었다. (89쪽)


이 책에 나오는 10인의 예술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센 리큐다. '와비'라는 미의식에 입각해 다도의 양식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는 센 리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선생이기도 했다. 소박하고 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센 리큐는 비슷한 미의식을 지닌 오다 노부나가와는 잘 맞았지만, 화려하고 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잘 맞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센 리큐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벌였고, 결국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신'인 센 리큐에게 자결을 명함으로써 이들의 싸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승리로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세는 아들 대에서 끝이 났지만, 센 리큐의 미학은 대대로 계승되어 지금까지도 일본의 전통 미학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름은 질투와 욕심에 눈이 먼 나머지 가신을 살해한 폭군으로 기억되지만, 센 리큐의 이름은 자신의 미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진정한 예술가의 모범으로 기억된다.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승자이고 진정한 패자일까. 아무래도 나는 센 리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렇게 스승 리큐의 완성된 다도에 하나하나 도전해 가는 것이 그에게는 성을 하나하나 함락해 가는 듯한 환희였다. 공략할 때까지는 매우 힘겨웠다. 하지만 성문을 열 때의 만족은 환호작약할 정도였다. 빙벽 같은 날카로운 리큐의 예술 앞에서 오리베는 계속 다음 공격에 나서야 했다. (162쪽)


센 리큐의 뒤를 이어 일본 다도의 필두로 떠오른 후루타 오리베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후루타 오리베는 센 리큐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7인을 일컫는 '리큐칠철(利休七哲)'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실력이 우수했다. 센 리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자결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선생이 된 후루타 오리베는 센 리큐가 완성한 다도 양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양식을 선보여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유력한 다이묘들과도 교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오사카 전투가 벌어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양쪽과 교류가 있던 후루타 오리베는 첩자라는 오해를 받아 자결을 명받게 된다. 자결 직전, 후루타 오리베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넘어서려고 했던 스승 센 리큐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과연 나는 리큐의 다도를 넘어섰는지 자문한다. 가공의 이야기이지만 너무나도 사실 같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지중해의 어부들이 바다의 요정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이끌려 따라가다 목숨을 잃듯이, 생전에 본 적 없는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평생을 바치고도 이르지(至) 못해 급기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 올해로 나온 지 60년이 된 소설집이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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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교토 + 오사카 (도서 + 노트) - 일러스트레이터 이다의 카메라 없는 핸드메이드 여행일기 내 손으로 시리즈
이다 지음 / 레진코믹스(레진엔터테인먼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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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기운을 빌어 일찍 자려고 했는데(저녁 먹으면서 맥주 한 잔 마셨음) 인터넷 서핑 좀 하다 보니 술기운이 사라지는 바람에 밀린 서평을 쓰도록 하겠다(이러다 언제 또다시 졸릴지 모름).


<내 손으로 교토>는 2016년 5월에 나온 책이다. 저자는 일러스트레이터 이다 님. <내 손으로 교토> 이전에 <내 손으로 발리>라는 여행 책을 내셨는데 이 책이 잘 되어서 <내 손으로 교토>가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내 손으로 교토> 역시 반응이 좋아서 조만간 다른 지역의 여행 책이 한 권 더 나온다고(어서 나왔으면!). 


<내 손으로 교토>는 제목 그대로 저자가 교토를 여행하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직접 쓰고, 그리고, 붙여서 만든 책이다. 일반적인 책과 달리 저자의 노트를 바로 책으로 구현했기 때문에 저자의 여행 노트를 직접 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여행지에서 물건을 구매하고 받은 영수증이나 입장권, 메모, 심지어는 부적까지(실은 금각사 입장권이다) 실물의 크기와 색상을 그대로 재현한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에서 가장 좋은 건 저자의 그림이다. 교토 지도를 이렇게 멋지게 표현하다니! 교토를 흐르는 가모가와와 가츠라가와, 두 강은 물론, 아라시야마와 히가시야마, 킨카쿠지(금각사), 료안지, 긴카쿠지(은각사), 니시키 시장 등 유명한 장소를 빼놓지 않고 그려 넣었다. '발에 채이는 게 절', '발에 채이는 게 신사'라고 써넣은 센스 보소 ㅋㅋㅋ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구라마 온천 체험기다. 교토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한 저자는,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편하게 쉬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이 구라마 온천에 가게 된다. 아아, 구라마 온천! 그곳이 천국이었을 줄이야!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피로도 풀고, 그동안 못 먹었던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으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즐거웠다. 나도 저자처럼 여행비 아낀다고 며칠은 게스트하우스 애용하고 하루 몰아서 쉬는 편이라서 더욱 공감했다 ㅎㅎㅎ





공감한 대목 하나 더 ㅎㅎㅎ 일정 끝나고 숙소 침대에 딱 저 자세로 누워서 일본 텔레비전 보는 것. 그거슨 내가 일본 여행하는 이유 ㅎㅎㅎ 일정도 일정이지만, 나는 일정 끝나고 다 씻고 침대에 누워서 일본 텔레비전 볼 때가 너무 좋다. 평소에 안 보던 드라마나 버라이어티 쇼도 일본에서 보면 왠지 재미있고, 심지어는 뉴스도 재미있다. 아는 얼굴 나오면 그렇게 반갑다(아베는 안 반갑다). 일본어를 아니까 재미있는 것이겠지만은... 아, 일본 가고 싶다.





생각해 보니 여행할 때 최대한 절약하는 것도, 역사와 문화, 미술에 열광하는 것도, 고급지고 화려한 것보다는 소박하고 앤틱한 것을 좋아하는 것도 이다 님과 나의 공통점인 듯 ㅎㅎㅎ 나는 워낙 일본에 관심이 많고 일본 여행을 많이 하는 편이라서 이다 님이 일본 여행 책을 많이 내주셨으면 좋겠다. 공감 좀 하게 ㅎㅎㅎ 그러고 보니 이 책 나왔을 때 북토크 참석해서 이다 님도 직접 뵙고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벌써 1년도 더 된 이야기라니. 시간 참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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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니 2017-08-21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표지며 그림이며 제 스타일... 핸드메이드 여행일기라, 뭔가 특별해보이면서 해볼만 한 거같아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합본, 특별판)
존 르 카레 지음, 최용준.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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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남이 쓴 서평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읽기 전에 남이 쓴 서평을 먼저 읽는 편이 좋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책의 구성이 잘못되었다. 이 책은 존 르카레의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를 함께 실은 합본이다. 문제는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가 먼저 나오고(1961년 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나중에 나왔다는 것이다(1963년 작). 두 소설이 아무 관련이 없으면 모를까, 등장인물도 일부 겹치고 줄거리도 연결되는데, 굳이 나중에 나온 작품을 앞에 배치하고 먼저 나온 작품을 뒤에 배치한 출판사의 의도는 무엇일까. 현명한 독자라면 (나처럼) 책에 실린 순서대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고 나서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를 읽지 말고, 331쪽부터 나오는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를 읽고 나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기를 간곡히 권한다. 


둘째, 내용이 어렵다. 존 르카레의 소설은 똑같이 동서 냉전기의 영국이 배경인 첩보물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달리 선악 구분이 모호하고 다른 요소 없이 오로지 두뇌 싸움에만 치중한다. 그러니 책을 읽기 전에 간략하게라도 내용을 알아두면 좋다. 


먼저 존 르카레의 데뷔작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는 존 르카레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지 스마일리가 주인공이다(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게리 올드만이 맡은 역할이 조지 스마일리다). 영국 정보부 소속 첩보원인 조지 스마일리는 공산주의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외무부 직원 페넌을 면담하게 된다. 면담 결과 스마일리는 페넌이 결백하다고 확신하지만, 이튿날 페넌이 자살한 채 발견되어 스마일리는 충격을 받는다. 페넌의 집에 찾아간 스마일리는 자살이 아닌 이유를 몇 가지 찾게 되고 이를 상사에게 보고하지만, 상사는 사건을 묻으려고만 해 결국 스마일리는 사표를 낸다(이 소설 뭔가 국정원 마티즈 사건과 비슷하다. 왜인지는 소설에서 확인하시길...) 


존 르카레의 세 번째 작품이자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주인공은 영국 정보부 소속 첩보원인 앨릭 리머스다(조지 스마일리는 조연으로 나온다). 한때 독일 지부 제일의 실력자였던 리머스는 동독 정보부 소속 첩보원 문트에 의해 첩보망이 파괴되어 한직으로 밀려난다. 이때 영국 정보부로부터 '관리관'이라는 자가 나타나 이 기회를 역으로 이용해 문트를 제거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이를 받아들인 리머스는 긴 준비 끝에 영국 정보부에서 쫓겨나 원한을 품은 인물로 보이는 데 성공하고, 자신에게 접근한 첩보원을 이용해 동독 정보부에 잠입한다. 과연 그는 무사할 수 있을까?


첩보전을 치르면서 서방은 개인을 희생시켜 왔다. 집단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서방의 위선이다. 나는 그것을 철저히 비난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평가하는 데 점점 더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558쪽)


셋째, 존 르카레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면 작품이 더 잘 보인다. 알려져 있다시피, 존 르카레는 영국 정보부 M16에서 근무한 적 있는 전직 첩보원이다(제임스 본드가 M16 소속이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쓴 이언 플레밍 역시 영국 해군 첩보원 출신이지만, 존 르카레는 이언 플레밍처럼 영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지도 않고 첩보원을 영웅시하지도 않는다. 동서 냉전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을 편들지 않고 양쪽 모두 단점이 있으며, 정확히는 자유 진영이 점점 공산 진영을 닮아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로 인해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비슷한 첩보물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존 르카레의 소설이 다소 심각하고 암울하고 비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장벽은 무너졌고 냉전은 끝이 났으며, 제임스 본드 시리즈조차 원작자 이언 플레밍이 아닌 존 르카레의 세계관에 점점 가까워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최근 개봉된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대부분 적이 내부에 있고, 제임스 본드는 자신을 영웅으로 인식하기 보다 구시대의 퇴물로 여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서 이 소설을 읽으면 훨씬 잘 읽힐 것이다(아니어도 돌은 던지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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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7-08-15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키치 2017-08-15 21:25   좋아요 1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길 위의 인생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고정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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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생>은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운동가이자 세계 최초의 페미니즘 잡지 <미즈>의 창간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회고록이다. 제법 두꺼워서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으려고 했는데 한 번에 다 읽어버렸다. 저자의 인생 여정도,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어서 영화로 만들면 몇십 편은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그중에 몇 편은 대박 칠 듯하다.


저자의 부모님 이야기부터. 1934년생인 저자가 한평생 자유를 추구하며 산 데에는 아버지의 공이 크다. 저자의 아버지는 틈만 나면 가족을 차에 태우고 방랑을 떠났다. 평생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않았고, 돈이 필요할 때는 골동품을 팔아서 해결했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가 평범한 회사원이길 바랐고, 자신도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을 나와 사회에 나와 보니 아버지가 안정적인 생활을 버리고 방랑을 택한 이유를 알게 됐다.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은데 평생 한 곳에 정착해 한 가지 일만 하는 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에게 자유로운 영혼을 불어넣은 것이 아버지라면, 저자를 페미니즘으로 인도한 것은 어머니다. 저자의 어머니는 한때 잘 나가는 기자였지만, 당시 관습 때문에 결혼 후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일을 그만두고 나서 심한 우울증을 앓는 모습을 지켜본 저자는 대학 졸업 후 남자친구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관습대로 남자친구와 결혼하는 대신 아이를 지우는 편을 택했다. 당시 미국에선 낙태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인도까지 가서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다. 저자는 이를 계기로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관리할 권리조차 가지지 못한 현실에 눈떴고 여성 운동에 뛰어들었다. 


나같이 얌전 떨지 않는 여자에 대해 글을 써야 해요. 여자애들은 규칙을 깰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수녀님들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줬더라면, 20년은 덜 까먹었을 텐데. 


희생자가 되고, 섹스만이 나를 가치 있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믿게 되는 건 끔찍한 일이에요. 도움을 받지 못하면 여자아이들은 그렇게 믿으면서 자라죠. 하지만 어떤 남자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기 시작해요. 그게 남자가 되는 길이니까요. ... 내가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학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훨씬 비참했을 거예요. 


여성 운동가가 된 저자는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한없이 까칠해 보이던 한 여성 택시 운전사는 저자에게 "댁같이 설쳐대는 여자들이 나 같은 외톨이도 도왔어요."라고 극찬을 보냈고, 집회에서 만난 열두 살 남짓한 여학생은 "미국 헌법 제정자들인 건국의 아버지들이 건국의 어머니들을 포함시켰더라면 그 재생산의 자유야말로 권리장전의 서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당차게 말해서 저자를 놀라게 했다. 여기서 재생산의 자유란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통제하고 임신과 출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일컫는다. 


남성들의 이야기 중에는 쇼킹한 것도 적지 않다. 저자는 언젠가 택시 안에서 성희롱, 성차별 발언을 퍼붓는 남성 운전사를 만나 한참 설전을 벌였는데, 나중에 그 운전사를 다시 만나 덕분에 자신의 성정체성이 여성임을 깨달았다는 감사 인사를 받았다. 누가 봐도 마초같이 보이는 남성을 만난 적도 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어렸을 때 집안의 남성 어른으로부터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했고 그 반작용으로 마초 같아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이었다. 그는 여성 성폭행 피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여성들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당하는 차별과 폭력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털어놨다.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그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만한 희망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면, 나는 여행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요. 길 위로 나서서, 그 길이 당신을 어디론가 데려다주도록 하세요. 길은 엉망진창이겠지만 우리의 삶도 그런 것이죠. 


저자는 대학 시절 민주당 선거 운동원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예상치 못한 차별을 겪고 보수 정당이나 진보 정당이나 여성을 차별하기는 마찬가지인 걸 깨달아서 정치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았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기자 시절에는 예쁜 외모 때문에 덕을 본다는 비난을 듣기 싫어서 외모를 숨겼더니 이번엔 못난 외모를 숨기는 거냐는 비아냥을 들었다는 에피소드도 기억에 남는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이러나 저러나, 여자는 여자라서 차별받고 여자라서 비난받는 게 일상이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평생을 페미니즘 운동에 바친 저자가 존경스럽다. 올해로 한국 나이 84세인 저자는 지금도 여성 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자신의 문제가 곧 사회 문제임을 인식하고 두 가지 모두를 해결하기 위해 기꺼이 길 위로, 세상 속으로 뛰어든 용기와 열정이 멋지다.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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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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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미 도미히코의 신작 장편 소설 <야행>은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의 필력을 보는 재미가 탁월하다. 10년 전 같은 학원에 다녔던 친구 여섯 중 한 명이 실종되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남은 다섯이 교토에 모인다. 교토에서도 깊은 산속 마을인 구라마의 한 여관에 짐을 푼 이들은 회포를 풀 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시다 미치오라는 동판화가의 <야행> 연작을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른 이유로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밤이 깊도록 한 사람씩 <야행>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게 되는데 사연이 하나같이 기묘하다. 


깊은 밤 한 방에 모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괴담을 하는 형식은 일본의 전통 괴담인 '백물어(百物語)'를 연상케 한다. 백물어란 밤에 촛불을 백 개 켜놓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괴담을 하고 괴담이 끝날 때마다 촛불을 하나씩 끄면 촛불이 모두 꺼지는 순간 귀신이 나타나거나 마지막으로 말한 사람이 죽는다는 괴담이다. 소설 속에서도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모두의 이야기가 끝나면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야행>이라는 제목 또한 일본의 전통 괴담인 '백귀야행'과 관련이 있다. 백귀야행이란 요괴나 귀신들이 심야에 마을에 집단으로 나타나 배회하거나 행진한다는 전설이다. 소설 속 친구들도 집 나간 아내를 찾으러 갔다가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난다든지, 모르는 할머니를 차에 태워줬는데 일행 중 두 명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저주를 듣는다든지, 불타는 집 앞에 서서 내 쪽으로 손을 흔드는 여인을 본다든지 하는 기이한 체험을 한다. 요괴나 귀신을 봤다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실제라고 하기엔 미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작가는 여기에 연작 그림이라는 장치를 더해 따로 떨어져 있는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한다. 7년 전 사망한 기시다 미치오의 유작인 <야행> 연작은 하나같이 시커먼 배경에 희뿌연 선으로 얼굴은 매끈한데 표정이 없는 여자가 그려져 있다. 작품에는 오노미치, 오쿠히다, 쓰가루, 덴류쿄, 구라마 같은 지명이 제목으로 붙어 있으며, 이는 소설 속 친구들이 기묘한 일을 겪은 장소와 일치한다. 친구들이 저마다 작품을 보고 자신이 겪은 체험을 떠올리는 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이들이 겪은 체험은 과연 환상일까 현실일까. 


<야행>은 일반적인 미스터리 소설처럼 '누가 누구를 죽였나(whodunnit)', 즉 사건의 범인과 진상을 알아내는 데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독자들에게는 낯설거나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백물어나 백귀야행 등 일본의 전통 설화에 관심이 많고, 판타지와 미스터리가 혼합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원해온 독자라면 상당히 만족할 듯. 후자인 나는 이 책을 읽는 순간 빠져들었고 읽는 내내 황홀했다. 몇 번을 더 읽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오늘 밤 한 번 더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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