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불가능
신은혜 지음 / 제철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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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31일 친구와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 저자는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내기를 했다. 1년 동안 인생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도전해 이기면 상금 50만 원을 받는 내기였다. 첫 번째 도전 과제로 운전 면허 취득을 정한 저자는 그 해의 열 달이 지나도록 시험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회사 일이 바쁘고, 틈틈이 여행도 다녀야 하고, 재미있는 영화, 드라마가 너무 많다는 핑계로 미루고 또 미뤘기 때문이다. 그런 저자와 달리 친구는 스스로 정한 과제를 거의 다 해낸 눈치였다.

그제서야 다급해진 저자는 문제집을 주문하고 학원에 등록했다. 과연 저자는 친구와의 내기에서 이겼을까.


신은혜의 <가능한 불가능>은 SBS 라디오 <김선재의 책하고 놀자>의 코너 중 하나인 '김혼비의 취향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책이다. 충동적으로 친구와 일 년에 하나씩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에 도전하는 '할 수 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저자는 총 9년에 걸쳐 운전을 비롯해 피아노, 영어, 수영, 하와이 1년 살기, 방통대 입학, 한국어 강사 교육, 글쓰기 등을 해냈다. 어느 것도 만만하지 않은데, 결코 길지 않은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냥 초보자도 아니고 자신에게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결국에는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니 매우 큰 자극이 되었다. 성과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각 단계의 과정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줘서 각각의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북으로도 훌륭하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저자가 그때 그때 마음이 동해서 도전한 일들이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있어 디딤돌 역할을 한 것이다. 저자가 운전을 배우고,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곡 'Summer'를 연습하고, 중학교 때 포기한 영어를 공부할 때만 해도 자신이 몇 년 후 퇴사하고 하와이로 갈 줄은, 그곳에서 친구를 차에 태우고 운전하고, Summer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하와이 대학교에서 영어로 강의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런 식으로 삶의 궤적들이 연결되는(connecting the dots) 전개가 좋았고, 그러한 전개가 (허구가 아니라) 저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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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말들 - 언어덕후가 즐거운 수다로 요리한 100가지 외국어의 맛
구로다 류노스케 지음, 신견식 옮김 / 유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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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몇 개의 외국어를 배울 수 있을까. 몇 개는 고사하고 하나라도 잘했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구로다 류노스케의 생각은 다르다. 어려서부터 외국어 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는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한 후 현재는 슬라브어 학자이자 언어학자로서 다양한 나라의 언어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저자는 전공인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등의 슬라브어 외에 영어에도 능통하지만, 전공이 아닌 언어나 사용 인구가 적은 언어에도 관심이 많다. 이 책은 그렇게 접한 백 가지 언어에 대한 저자의 경험과 생각을 들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는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처럼 사용 인구가 많은, 이른바 메이저 언어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불가리아어처럼 상대적으로 사용 인구가 적은 언어에 대한 내용도 있고, 디베히어, 라오어, 레토로망스어, 링갈라어 등 이름조차 낯선 언어에 대한 내용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소수 언어, 비인기 언어를 배우면 강사는 물론 교재를 구하기도 힘든 어려움이 있지만, 강사나 교재를 구하는 과정 자체가 공부가 되고 추억이 되며, 경쟁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로 인정받을 가능성도 높다.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나 지역을 방문했을 때 환영받을 확률도 높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1980년대 말에 러시아어 통역사로 사할린섬을 방문했을 때 사할린 거주 한인을 만났던 일을 들려준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인이 철수한 뒤에 남은 사람들로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어를 잘했다. 저자는 이들이 일본과 일본어에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우려와 달리 이들은 일본인과 일본어로 말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내색을 보였다. 공통의 언어로 역사를 극복하고 인연을 만든 귀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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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의 삶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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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는 자아를 성찰하는 내면 일기보다 외부 세계에 자신을 투영하는 외면 일기, 즉 바깥 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일종의 사회 탐구 프로젝트를 실천했는데, 그 일환으로 출간된 책 중 하나가 1985년부터 1992년까지의 기록을 담은 <바깥 일기>이고, 다른 하나가 1993년부터 1999년까지의 기록을 담은 <밖의 삶>이다.


<바깥 일기>에서는 저자가 사는 신도시에 새로 생긴 기차역과 그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이 주를 이룬 반면, <밖의 삶>에서는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가는 대중매체 속 현대 사회의 모습에 대한 관찰이 주를 이룬다. 대표적인 예가 리얼리티 쇼의 흥행이다. 저자는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리얼리티 쇼가 생겨나면 허구는 사라질 테고 그러다가 그렇게 연출된 현실을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면 허구가 되돌아오리라"고 예측했는데(15쪽), 이 예측이 맞는지 틀린지 현재로서는 모르지만 나로서는 공감이 된다.


이 책이 집필된 1990년대 중후반에는 국제적인 규모의 분쟁이나 사건이 많았다. 걸프전, 보스니아 내전,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 다이애나 비 사망, 유럽연합 출범과 유로화 사용 등이다. 1993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폭탄 테러에 대해 기술하면서 예술이 생명보다 소중한지 묻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유기된 동물의 안위를 걱정하는 뉴스를 보면서 노숙자의 복지를 생각하는 대목도 있는데, 인간중심주의를 내세웠다기보다는 사건의 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지극히 아니 에르노다운 시각으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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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일기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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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어도 사람마다 관찰하는 것이 다르고 인식하는 것이 다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관찰하고 인식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에르노의 산문집 <바깥 일기>는 외부 세계에 대한 관찰을 통해 저자 자신의 내면을 성찰한 기록을 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자아를 성찰하는 내면 일기보다 외부 세계에 자신을 투영하는 외면 일기, 즉 바깥 일기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에 더욱더 적합하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은 1985년부터 1992년까지 7년에 걸쳐 '바깥 세상'을 관찰한 기록을 담고 있다.


저자의 시야에 들어온 것들은 하나같이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전철역 실내 주차장에 적힌 낙서, 객실 안에서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톱을 깎는 청년, 엄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르는 아이, 계산을 틀려서 관리자에게 야단맞는 상점 직원 등 저자가 속해 있는 시공간과는 다른, 2024년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어떤 모습은 저자의 시선을 통해 비범하고 특별해진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 운동복 차림의 모녀를 보면서 저자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린다. 두 손이 화학 약품으로 망가진 아프리카계 남자를 보면서 저자는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손이 누구 덕분에 고운지 상기한다.


보이는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도 한다. 저자가 다니는 전철역이나 기차역은 가난한 학생이나 노동자, 운전하지 못하는 여성이나 노인, 아이들이 주로 이용한다. 상점이나 슈퍼마켓은 일부의 상인이나 노동자를 제외하면 이용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자기 차가 있는 남성이나 부유층, 지식인 계급은 대중교통수단을 잘 이용하지 않고 상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일도 거의 없으며, 그러니 역이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인이나 거지를 마주칠 일도 드물다. 그러면서 가난은 사라졌다고, 빈부 격차나 양성 불평등은 옛날이야기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는 지적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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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
양영희 지음, 인예니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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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코리안 영화감독 양영희의 영화는 아직 못 봤지만 그의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는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의 뒤를 이어 한국에 출간된 양영희의 책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는 저자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요소를 더해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재일코리안 2세로 태어나 조총련 활동가 부모 슬하에서 오빠 둘을 북한으로 보내고 외동딸 아닌 외동딸로 살았던 저자의 생애를 알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러므로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를 읽기 전에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부터 읽어보기를 권한다.


미영은 1964년 오사카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코리안 여성이다. 조총련 활동가인 부모의 뜻에 따라 일본의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조선학교에 다니며 조선말을 배웠지만, 같은 나이대의 일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패션과 유행에 관심이 많고, 문화와 예술에 조예가 깊어 장차 극단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고교 졸업 후 미영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조총련 계열 학생들이 다니는 도쿄의 조선대학교에 진학한다. 하지만 미영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졸업 후 당이 배치한 직업에 종사하며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라는 소리를 들어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학교 행사에서 김일성 찬양 영화를 보던 미영이 그 영화의 구성이며 내용이 얼마 전에 본 레니 리펜슈탈이 만든 히틀러 찬양 영화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냉소하는 대목이다. 일본에 사는 데다가 문화 예술 애호가라서 일반인보다 훨씬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미영의 눈에는 조총련 사회가 주입하는 사상의 모순과 한계가 뻔히 보인다. 반면 미영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은 미영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조총련 사회의 관습이나 문화에 세뇌되어 그것의 비합리성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채도 거부하지 못한다.


미영을 보면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반면, 미영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을 보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통해 주입된 생각이나 태도를 극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 하는 생각이 드는, 기묘하고 복잡한 장면이었다.


이 소설은 미영의 대학 4년간을 그린 성장 소설인 동시에 구로키 유라는 일본인 남성과의 연애를 그린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다. 미영은 조선대학교 근처에 있는 무사시노 미술대학 학생인 구로키 유와 만나는데, 이는 일본인과의 교제를 금기시하는 학교 분위기와 어긋나는 일이었다. 미영은 일본에 살면서 일본인과 사귀는 걸 금지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면서도, 미영이 "나는 미영이 자이니치든 조선인이든, 그런 건 신경 안 써"라고 말하는 유에 대해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인간에게, 그리고 관계에 있어 역사란, 사회란, 정치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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