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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자서전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평점 :
수엘라는 어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수엘라의 어머니는 수엘라를 낳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수엘라는 어릴 때 유모인 유니스 폴의 손에 컸지만, 유모를 어머니 대신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대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수엘라가 사는 곳에는 아들만 교육시키고 딸은 교육시키지 않는 부모가 많았지만, 수엘라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인 수엘라 역시 남자애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수엘라는 학교의 유일한 여학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새로운 아내가 생기고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태어나면서 수엘라의 처지가 급격히 나빠진다. 새 어머니의 차별과 배다른 동생들의 냉대를 견디다 못한 수엘라는 아버지에게 부탁해 다른 지역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아버지의 친구 무슈 라버트는 돈만 좋아했고, 그의 아내 마담 라버트는 마치 친엄마처럼 수엘라를 돌봐주고 아껴준다. 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수엘라는 그들의 집을 떠나게 되고, 스스로 벌어 먹고 살기 위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남자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편을 택한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 <내 어머니의 자서전>은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제목은 '내 어머니'의 자서전이지만, 읽어보면 주인공 수엘라 클로데트 리처드슨의 자서전에 가깝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수엘라의 어머니는 수엘라 자신도 본 적이 없고,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진 것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제목이 '내 어머니'의 자서전인 이유는 뭘까. 내 생각에 수엘라는 어머니를 대신해 자기가 자기를 키웠으므로, 수엘라는 수엘라 자신인 동시에 수엘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의 의미는 엄마 없는 소녀가 스스로를 키운 이야기, 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이 소설은 수엘라라는 소녀의 성장담이기도 하지만,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제국주의 시대의 피식민지 국가가 겪는 문제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스코틀랜드와 아프리카 혈통을 물려받은 수엘라의 아버지는 자신의 몸에 백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내세워 백인들의 앞잡이로 일하며 원주민들을 수탈하고 유린한다. 원주민인 카리브계인 어머니는 피지배 계급이라는 이유로 평생 고생하다 일찍 삶을 마감했다. 그들의 딸인 수엘라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느 인종, 어느 민족, 어느 계급으로 구분하는 데 연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수엘라의 자기 중심적인 태도는 가부장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수엘라는 여성인 자신의 몸을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한 도구 또는 재생산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고, 까딱 잘못하면 자기 몸의 주인이 수엘라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큰 희생을 치르고 배운다. 이후 수엘라는 자신의 몸에서 여성성을 지우고 살아 보기도 하고, 여성성을 이용해 여러 남자를 농락하며 살아 보기도 한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다른 소설 <애니 존>, <루시>와 연결된 이야기로도 보이지만, <애니 존>, <루시>에 비해 완성도가 훨씬 높고 이야기 자체의 완결성도 있다. <애니 존>, <루시>를 먼저 읽고 이 작품을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