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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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전염병에 대한 관심이 커지다 보니 이에 관련된 책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우선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설 중에서는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였다. 책을 사놓고서 바로 읽지는 못했는데, 그 사이에 《페스트》는 TV ‘책을 읽어드립니다’ 프로에 한번 방송되더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계속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외국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지속된다고 하니 가히 카뮈의 재발견이라 할 만하다.

사실 카뮈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약간의 로망이 있었다.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고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에서 제임스 딘의 반항아적인 모습을 떠올렸고, 그가 말했던 ‘부조리’도 결국은 기존사회의 모순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저항의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방인》은 부조리의 본질을 부각하다 보니 다소 어둡고 난해한 편이다. 반면에 《페스트》는 실천적 행동주의자인 리유를 내세워 ‘페스트’라는 부조리한 현실과 정면으로 승부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제공한다.

이 소설에는 ‘서술자’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서술자’는 이 책의 주인공인 의사 리유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1인칭 ‘나’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서술자’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의사 리유의 시점에 한정하지 않고 주요인물의 시선으로 확장하여 보다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지도로 보면 아프리카 대륙 맨 위의 알제리 (당시는 프랑스 영토)의 조용한 해안도시 오랑에서 발생한 최악의 전염병 페스트에 대한 저항의 연대기이다.

1940년대의 어느 날, 오랑시에서 쥐가 한 두 마리씩 죽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주민들의 원인 모를 사망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거리에는 죽은 쥐들이 넘쳐나게 된다. 의사 리유는 시 당국에다 전염병의 위험성을 알리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않는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 p54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평범한 일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쪽은 대개 휴머니스트들이다. 대비책을 세우지 못하면서 사업을 계속하고 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p55

페스트가 막 창궐하기 시작할 즈음, 치명적인 전염병이 도시에 번지기 시작하는 데도 시민들은 일상의 삶의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 평소의 생활패턴에 매달린다. 이 전염병이 자신을 비극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페스트는 점차 심각해지고 정부는 오랑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오랑의 시민들까지 산 채로 도시에 갇히게 된 것이다.

폐쇄된 도시에서 사람들이 처음 겪은 것은 가족 또는 연인과의 생이별, 그 다음은 귀양살이를 하는 듯한 옛 생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하지만 점차 페스트로 인해 사람이 죽어나도 슬퍼하는 마음은 무뎌지고, 다음 차례가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도 서서히 적응하게 된다.

페스트로 인해 시민들의 희생이 따른 한참 후에야 시 당국은 도시폐쇄의 결정을 내리고 이 몹쓸 전염병을 물리치기 위한 인간 군상들의 응전과 저항이 시작된다.

이 책에는 의사 리유 주변에서 페스트와 대항하여 필사의 항전을 펼치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외지인이지만 보건대를 만들어 리유를 돕는 타루, 오랑시의 말단서기 그랑, 프랑스에서 취재차 왔다가 발이 묶인 신문기자 랑베르, 페스트가 사악한 인간에게 내린 신의 형벌이라 믿던 파늘루 신부 등이다.

그때까지는 자기들의 고통을 한사코 집단의 불행과 떼어서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두 문제를 섞어서 생각해도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 기억도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 p239

어떤 노력으로도 이 불행한 상황을 벗어 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신앙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리유와 그의 친구 타루는 일단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로 한다.

동료 의사 카스텔은 여러 가지 혈청을 통해 면역제 실험을 계속하지만 뚜렷한 진전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판사 오통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입원을 하자 병원은 바로 격리가 되고 비극은 극에 달한다. 아이는 결국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병균에 침식된 채 죽게 되고 이를 옆에서 기도와 함께 지켜보던 파늘루 신부도 큰 혼란에 빠진다.

아이의 죽음을 지켜보던 리유와 주위 인물들에게 파늘루 신부는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라는 말을 한다.

“아닙니다. 신부님.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285p

카뮈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주변에서는 그를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자라고 평하는데 이에 대한 사상이 잘 나타나있는 문장인 것 같다.

그러다 결국, 페스트가 ‘말없이 자신이 나왔던 알 수 없는 어떤 야수의 굴로 들어가며’ (358p)조금씩 줄어들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사망 통계를 작성하는 오랑시의 기록이 차츰 줄어들더니 마침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고 극으로 치닫던 페스트가 기적처럼 사라지게 된다. 10개월여의 봉쇄령이 드디어 풀린 것이다.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사람들을 보면서 리유는 페스트가 끝났더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가르쳐 준 교훈과 흔적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을 남긴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귀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크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지하실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02p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를 통해 공포와 죽음, 이별의 아픔 등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극한의 고통과 절망을 그려내었다. 그래서 《페스트》는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이자 재난 소설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이 책을 덮고서 우리의 코로나 정국과 대비해보니 너무나 비슷한 면이 많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정점을 찍은 느낌이기는 하지만 언제 어떻게 종식될지는 그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인간의 터무니 없는 몰락을 끊임없는 연대와 성실성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카뮈의 제안은 거의 8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시대에도 너무나 유효하고 빛이 나는 것이다.

카뮈가 말하는 ‘성실성’이 무엇인지는 리유의 친구 타루의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하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꼭 필요하단 말입니다.. (329p)

그런데 전염병에 대해 이렇게 핵심을 꿰뚫는 발언을 한 타루는 전염병이 끝나기 직전에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에 마지막 혈청 주사를 빼먹은 탓으로 그만 감염이 되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 한다.

결론적으로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언급은 하지만, 무턱대고 장밋빛 결론을 내거나 희망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모든 부조리에 대한 해결은 우리 각자의 개별적인 노력에 달린 것이다.

최근의 우리 사회에서 다중이 모이는 모임을 아무리 금지해도 개별적인 집회는 반복되고 있다. 또 대구에서는 소규모 집단감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 타루가 말한 긴장의 끈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의지와 정직성의 가치는 지금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그의 부조리한 죽음을 통해 온 몸으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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