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시작한지 한 달이 넘어서 리뷰를 쓰기가 힘들다. 어디든 들고 다녔으나, 읽은 것이 아니라 책장을 넘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다 끝내고도 리뷰를 쓰지 못해 이틀을 더 기다렸다. 지난 팝송을 들으면 그 당시의 상황과 함께 사람들이 따라온다. 노래와 함께 과거의 추억이 넘어 오듯이, 나중에 이 책을 기억할 때, 큰 슬픔도 함께 기억될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

책을 읽기 시작한 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계속 책을 들고 있었고,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밀란 쿤데라의 은유와 상징을 너무나 사랑한다. 한 달이라는 기간 때문에, 전체 줄거리를 마음으로 느끼지 못함이 너무 속상하지만, 내 심금을 울린 마법의 은유는 너무도 많아 빼곡히 적어 두었다. 나중에 두고 두고 읽어도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는 보석같은 문장이 너무도 많다. 줄거리가 진부해도 난 충분히 작가의 언어에 심취했다.

Chantal이라는 한 여인은 나이들어감에 대한 서글픔과 고통으로 인해 정체성 상실의 겉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곧, 체코 태생으로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여, 체코와 프랑스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과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밀란 쿤데라는 아닌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Chantal의 애절함과 절규는 너무나 가벼운데 내게는 절대 가볍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내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Men don’t turn to look at you any more.)’ 인정의 욕구가 담긴 이 가벼운 문장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던져질 때 듣는 사람에게도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해서는 안되는 말이지만, 나는 같은 여자로서 충분히 공감이 된다. 불특정 다수로부터의 시선이 사랑하는 한 사람의 시선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으며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는 뜻이 아닐까?

가볍고 경박하다 치부해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이다. 그렇게 정체성이란 실체가 혼자서 존재하기 어렵고 애초부터 타인의 시선과 인정을 먹고 살도록 기본값이 설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난 그동안 무수히 많이 이를 부인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가시적 결과와 보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나, 실상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나를 기억해 주지 않으며, 나를 바라봐 주지 않기에 순간 순간 모든 것이 흔들리고 깊은 좌절감에 빠진 적이 있었다.

정체성(Identity)이란 단어는 내게 넘을 수 없는 산과 같아서 평생 답을 못 찾을지 모른다. 사실 나도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인지 모르며, 사람들이 나의 진가를 보아 주기를 기대하는걸로 보아, 나 역시 타인의 생각에 매우 신경쓰고 있다. 남자들의 시선을 신경쓰고, 익명의 편지에 설레는 그녀 Chantal의 가벼움이 내 모습일 수 있어 슬펐다.

이름을 불러주길 기대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달라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하다. 남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 애쓰지 않는 사람들이 부럽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확인된 정체성의 기반은 언제든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걸 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함을 얻고, 인정의 욕구에 목말라 하지 않으며,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현재 모습 그대로 ‘괜찮다 사랑스럽다’ 말할 수 있는 그날이 올까?

이 책에서 3가지 종류의 권태가 나온다. passive boredom, active boredom, rebellious boredom. 내가 나를 정의하고, 나다움을 자신있게 말하는 그 날을 위해 지금은 active boredom을 극복하자. 무언가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내 안에 열정과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며, ‘왜’ 하는지를 잘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나의 정체성을 세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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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6 0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erendipity 2022-03-16 0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 ㅜ
 

중학교 2학년 정도되는 Holling Hood의 성장 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나 이면에 역사, 정치, 문학을 소재로 담고 있는 1967-68년대 배경의 소설이다. 청소년 문학이라 하기에는 소재가 무거운 감이 있고 분량도 많지만, 작가의 위트와 재치로 중간 중간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부분이 많다. 작가의 위력은 대단하다. 화가난다고 해서 반드시 목소리를 높이거나 얼굴을 짜푸리지 않아도 나의 분노를 세련되게 표출할 수 있는 법이 있음을 배운다.

Vietnam War(55-75), Robert F. Kennedy의 암살(68), Martin Luther King의 암살(68)등의 무거운 소재를 통해 어린 Holling과 누나 Heather는 전쟁과 인종차별에 대항하며, 위압적인 아버지의 사고로부터 벗어나려는 힘겨운 싸움을 한다. 어린 Holling은 반전운동을 하는 누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족간에도 이념 및 정치 성향이 달라 의견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특히나 어린 나이에는 부모의 사고에 매몰될 수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상이 주입될 수 있다. Holling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부모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자식들에게 순종을 강요할 수도 있다.

알아도 하지 않는 것이 있고, 몰라서 못하는 것도 있다. 요즘처럼 큰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미성숙과 무지가 얼마나 위험한지 크게 느낀다. 연령에 상관없이, 무지함을 벗기위한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여 있거나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고 지낼 수 있고, 틀린 것을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무지함이 정치나 교육 분야가 아닐 수도 있다. 심지어 나 자신의 정체성 조차 모르거나 틀리게 알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겁도 난다.

역사와 정치라는 무거운 소재 외에 고전 문학 소재가 있다. 수요일마다 다른 학생들은 카톨릭 종교를 가지고 있어 미사를 드리러 성당으로 가지만, 유일한 장로교 신도(prebyterian)라는 이유로 학교에 남아 Mrs. Baker 선생님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 처음에는 수십개의 칠판 지우개 털이 등의 일을 시키시더니, Shakespeare의 문학을 읽게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Holling이 Shakespeare 문학을 즐기게 되고, 둘 간에 이어지는 문학 토론이 이 책의 백미이다.

The Merchant of Venice, The Tempest, The Tragedy of Macbeth, Romeo and Juliet, The Tragedy of Hamlet등의 책을 읽고 선생님이 주는 과제를 풀거나 에세이를 쓰고 대화를 나누곤 한다. 심지어 주인공은 크리스마스 전날 The Tempest 연극에 참여하여 멋진 공연까지 하게 된다. 대문호 세익스피어의 주옥같은 문장은 매마른 내 가슴에 단비를 뿌리곤 했다. 시간이 되면 고전을 다 섭렵하며 불모지가 된 내 감성에 열정의 불을 당겨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의 문장은 같은 내용이지만 역시나 요즘 표현과는 많이 다른 독창성과 깊이가 있는 듯하다.

역사, 정치, 문학, 가정교육 등을 모두 읽을 수 있는 청소년 문학이었다. 우리는 어린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거나 색깔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 우려하거나 자제시키려 하는 것 같다. 물론 60년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이 책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가족의 건축 사업을 위해 무조건 얌전히만 행동하라고 강요한다. 심지어 경제 관념과 관심도 그러하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나라도 어린 시절부터 금융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는걸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정치와 경제 관념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피력하는데 적절한 나이와 타이밍이 꼭 어른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 역시 돈, 즉 경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 속물일 수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공무원이기에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는 정치 색깔은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무서운 속도로 바뀌고 있는데, 우리의 생각은 변화되지 않아서 내적 갈등, 외적 충돌이 많은 것이 아닌가 싶다. 한쪽만 보고 있어서 다른 쪽을 보려면 자신의 깨어 있는 사고와 의지, 그리고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듯하다. 내 주변에 누가 있는가, 그들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나는 어떤 책과 언론을 접하는가에 따라 나는 과거, 현재, 미래에 머물러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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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San Nicolas Island에서 1835년에서 1853년간 홀로 살았던 Karana 라는 인디언 소녀에 관한 실화이다. ‘혼자’라는 단어 속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외로움, 두려움, 기다림’ 이라고 하면 너무 고전적인 표현이 될 것인가? 요즘엔 1인 가구가 늘어난다고 하니, ‘편안함, 자유, 고요’ 이런 단어가 연상된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까?

겉 표지와 Lois Lowry 작가의 서두를 읽고, 전자의 감정으로 시작했다. 사실, 내 마음 속에 혼자는 외로움이란 생각이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책 전반에 펼쳐지는 씩씩하고 용감한 소녀 Karana의 생존기는 경외감을 불러 일으킨다. 나중엔 평화로움까지 느껴지게 한다. 어쩌면 섬에 살았던 인디언 소녀의 목소리가 아니라, 제 3자인 작가의 목소리로 전개된 이야기라서 그녀의 감정이 절제되어 표현되었을 수도 있다. 문명의 세계와 동떨어진 채 오래 살아서 구조된 후에도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책 전반에 그녀의 감정적 혹은 심리적 묘사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50명 넘게 살던 인디언들은 수달 채집을 위해 섬에 들어온 러시아인들에게 대부분 피살을 당하고 일부 소수는 다른 배에 구조되던 중 Karana는 거센 파도때문에 승선하지 못한 동생 Ramo를 구하려다 둘만 섬에 남게 된다. 동생이 야생 개에 물려 죽게 되고 홀로 섬에 남게 된다. 신변 보호를 위해 무기제작, 안전한 은신처, 뗏목, 식량 저장, 물고기 잡기 등을 하며 높은 언덕에 올라가 구조선이 오기를 기다린다.

홀로 남아 무서운 야생 개나 여우로 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던 Karana의 마음 속에 외로움과 슬픔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외로움’이란 단어는 현대의 물질적 풍요 혹은 그로 인한 권태가 주는 사치품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내가 당장 동물의 위협이나 식량이 없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물학적 기본권과 매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면 외로운 감정과 씨름할 시간은 따로 없을 것이다. 많이 가지고 있고, 어쩌면 다 가지고 있음에도 뭔가 비어 있는 듯한 공허감은 감사를 잃은 교만함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가진 것을 잃었을 때, 지혜를 통해 문제해결력을 찾고 평정심과 용기를 발휘하며 Karana 처럼 잘 대처해 나갈지 의문이다. 없음에서 풍요를 얻은 환경은 적응하기 쉽지만, 반대가 될 경우에는 진짜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며 진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외딴 섬에서 18년간 홀로 생존했던 그녀의 이야기는 생각거리를 던진다.

유의미하고 목적있는 삶에 대한 고민 혹은 공허감과 외로움에 대한 무서움도 내가 한가하고 여유로울 때 내 머리속으로 들어와 나를 괴롭힌다. 정작 하루가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을 때는 생각할 시간도 없이 쓰러져 잠이 들기도 한다. 결국 내 마음의 빈약함과 가난은 교만함이 키운 사치이므로 감사를 회복하라는 신호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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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of Green Gables(빨간 머리 앤)’와 항상 비교되는 순수하고 맑은 소녀의 성장 소설이다. 역시나, 순수를 만나고 나면 때묻은 내 마음을 만지게 되고, 내가 입고 있는 먼지를 덜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고민해도 돌아갈 수 없다는걸 알아도, 책을 덮을 때 만큼은 나도 모르게 내가 맑아진듯한 착각을 하기도한다. 물론 주인공 Rebecca가 한없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빨간 머리 앤’과 첫번째 차이점은, 일단 영어가 훨씬 어려웠다. 1903년에 발간되기도 했지만, 언어의 깊이가 다르고, Rebecca는 글쓰기에 있어 신동과 진주(prodigy and pearl)라 불리는 문학소녀라서 마음을 울리는 주옥같은 문장이 매우 많았다. 그녀의 아름답고 주옥같은 시나 산문을 읽으며, 언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새삼 느낀다. 말 한마디가 치명적 실수를 부를 수도 있고, 주변을 은은한 향기로 물들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언어 사용의 중요성에 대하여 절감하게 된다.

두번째 다른 점은 Rebecca의 재정적 후원자인 Adam Ladd와 지적 후원자인 선생님 Miss Emily Maxwell 2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Adam은 Mr. Aladin이라 칭할 만큼 Renecca가 어려울 때마다 요술처럼 나타나는 백마탄 왕자 역할이라 현대판 신데렐라같은 비현실적 요소가 있다. 이것이 흥미를 더하기도 하지만 개연성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힘들 때마다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사용하는 상상을 하는 것은 희망 고문이다.

희망을 갖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Rebecca의 매력은 긍정적 언어와 적극적 행동이 일치하며, 이것이 어려운 시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까다로운 이모들의 도움으로 힘겹게 졸업을 하고, 보장된 취업 자리가 있었으나 엄마의 간병으로 기회를 놓친 상황이 된다.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살아 있다는 것이 모든 것을 보상해 준다고 표현하며 미안해하는 엄마를 위로하기까지 한다. (Wasn’t it good to be alive? To be alive makes up for everything.)

역경(ordeal)과 성격(personality)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Rebecca의 또 다른 매력은 시련과 고난에도 변치 않는 순수와 활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어려움을 겪고 나서도 분노와 폭력의 언어에서 자유함을 얻고, 구름 속에 가리워진 희망을 보며 타고난 본연의 활력과 열정을 유지하는 것은 책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성격이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 왔던 나는 Rebecca를 보며 비결을 묻고 싶어진다.

불가피한 삶의 멍에로 인해 꿈이 좌절된 상황에서도 그녀는 항상 ‘푸른 4월의 옷을 입은 희망(Hope clad in April green)’이 다음과 같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다.

“나와 함께 나이들어 가자,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Grow old along with me,
The best is yet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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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 책이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문화마다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 놀랐다. 죽음이란 단어는 생각하는 것 조차 우울하게 하고 분위기를 가라앉게 하기에 금기어 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 본 연속극에서도 말기환자에게 가족들이 거짓말을 하며 환자를 속이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만큼 죽음은 회피해야 하는 부정적 단어였다.

그러나, 책을 통해 서양인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사뭇 놀라게 되었다. The Last Lecture, When Breath Becomes Air 등등의 책들을 읽으며 죽음에 대처하는 적극적인 방법에 매우 놀랐다. 시한부 삶임을 알았을 때, 마지막 순간까지 체계적으로 준비해서 남은 기간 정말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아프다고 누워서 삶을 비관하고 만남을 기피하고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었다.

의사로부터 숫자를 직접 들은 말기 환자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죽음에 대해 더 잘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심리학 책에서도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는 표현을 여러 번 읽었다. 죽는다는걸 알기에 어쩌면 하루 하루를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동기부여를 받게 되는지도 모른다. 물리적인 나이듦이 아니라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죽음도 있다.

4명의 여동생과 실직한 아버지를 둔 시골의 Jess에게 옆집으로 이사 온 Leslie는 단순한 친구 이상이었다. 그녀로 인해 태어나 처음으로 기대감을 안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었으며, 소심하고 용기없는 Jess에게 그녀는 마음의 벽을 허물고 넓은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여동생을 괴롭히는 덩치 큰 아이를 혼내주기 위해 Lesli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You have to stop people like that. Otherwise, they turn into tyrants and dictators. (그와 같은 사람을 막지 않으면, 그들은 언젠가 폭군이나 독재자가 될 수도 있어.)

불의에 용감하게 맞설줄 알고, Jess와의 비밀 장소로서 마법의 왕국인 Terabithia를 같이 만들고, 거기서 우정을 나누었던 영혼의 친구 Leslie가 익사하게 된다. 죽음은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아무 예고도 없이 너무나 일찍 찾아오기도 한다. 어린 Jess가 친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놀라운 것은 작가가 암투병을 하고, 아들의 친한 친구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을 때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작가가 슬픔이 커서 책 쓰기를 망설일 때, 결국 아들 친구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고 결국은 책을 쓰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죽음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면해 나가야 하는 것이기에 아픔이 있지만 돌파해 나가겠다는 작가의 의지라 생각한다. 작가의 강한 의지력에 경의를 표한다.

Jess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에 친구 Leslie외에 음악 교사 Miss Edmunds가 있다. 모두가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할 때, 그의 보석 같은 재능을 인정해 주며 그를 진흙 속의 진주라며 격려한다. (You are the proverbial diamond in the rough.) 그 선생님으로 인해 Jess는 늘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축복은 아니며, 교사는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도 있는 매우 영향력이 큰 존재이다.

나에게도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에 내 가슴을 뛰게하고 두근거리게 한 두 분의 선생님이 있다. 그 두 분을 생각하니 Jess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멀리 있어도 그 분만 보이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던 나의 중고교 시절의 행복한 과거를 상기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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