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4
에밀 졸라 지음, 조성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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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휴... 간신히 끝냈다.


'루공-마까르'가 사람들을 안 불편하게 하는 건 없지만, 이 작품 『대지』는 (푸근함을 주는 제목과 다르게) 그 끝판왕을 보는 것 같다. 에밀 졸라의 등장인물들은 욕설, 간음, 폭력, 학대, 뒷다마는 기본으로 장착하지만, 여기에 이르러서는 존속살인과 근친상간을 패치한다. 광부들이 파업에서 폭동으로 번지는 과정을 그린 『제르미날』보다도, 그 선정성과 폭력성이 압도적으로 자극적이고 세세하다. 


작품은 한평생 땅을 일군 자린고비 노인이 자식 셋에게 재산을 양도하는 데서 시작한다. 노인의 누이는 경고한다. 재산을 나눠주면 자식들의 존경심도 함께 잃는다고. 『대지』는 그렇게 재산을 분할해 준 자식들로 인해 노인이 '서서히 죽어가는' 이야기가 기본 뼈대이다. 『목로주점』의 제르베즈(이 작품의 주인공 '장 루공'의 누이)가 서서히 굶어죽어가는 것처럼, 노인은 그렇게 고통 속에 죽어간다. 재산 분할로 인해 그의 일가가 피튀기는 싸움을 이어가는 것을 모두 지켜보면서 (이 작품에서만은 작가의 이름을 바꿔도 되겠다. '에빌 졸라'). 내 주변에 재산이 많은 친척 일가가 있고, 그들 형제 간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는 모습을 보긴 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이들의 재산분배 과정에 이어지는 이전투구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당대의 풍경들을 카메라로 찍듯 펜으로 그려내는 졸라이기 때문에, 단순히 '욕하면서 보는 작가의 막장드라마'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여기에 등장하는 농부들은 땅에 진심이고, 정직하게 하는 대하는 등 거의 '여자'처럼 사랑하고 아낀다. 그러나 에밀 졸라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의 작품 속 '여자'들은 언제나 폭력과 욕설에 노출되어 있는, 거의 남자에게 매인 존재이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하거나 강인해도 여자들은 그를 취한 남자에게 돌아간다. 처음에는 갖은 사탕발림으로 꾀지만, 갖고 나면 그냥 소유물 취급을 한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게 아니고, 당대의 가부장적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땅을 '여자'로 비유하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땅은 'motherearth'인데, 땅을 물려준 부모를 내내 학대하다 살해하다시피 한 인물들의 행각을 보면,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지 않나 싶다.


이외에도 다양한 차원의 갈등들을 볼 수 있는데, 공업과 농업,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전통농법과 진보적 농법 등이 그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수입되는 값싼 밀 때문에 유럽의 밀값이 하락하고 그것이 도시의 노동자들을 먹여살리기는 하지만 농업인들은 희생되는, 사라져가는 전통농가에 대한 안타까움도 함께 담겨 있다.


번역은 조금 아쉬웠다. 여기서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겠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문장들이 간간히 눈에 들어왔다. '루공-마까르'를 꾸준히 출간해 주는 출판사에 감사할 뿐이고, 20권을 다 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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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4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4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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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에 이어지는 작품.


『813』말미에 뤼팽은 모로코에 파병된 외인부대원으로 '돈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데, 이 편에서는 내내 그 이름을 사용한다. 넘치는 자신감, 초인적 직관, 미녀 밝힘증은 여전하지만, '돈 루이스 페라나'라는 이름으로 변신을 전혀 하지 않는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그 뿐 아니라 공익의 수호자의 면모를 과시하는데, 전편들처럼 도둑질도 하지 않고 총리나 경시청장 같은 고위직들의 신임을 듬뿍 받으면서 거의 자유롭게 활동하는 탐정이 된다.


내용도 굉장히 재미있다. 사건 속에 사건이 있고, 사건 속에 또 다른 사건이 있다. 범인을 잡았다 그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 그래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데드풀' 같은 끝없는 허풍이 이어지다보니, 모리타니 왕국을 프랑스령으로 귀속시킨 게 그 자신이었다는,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갈 법한 부분에서는 살짝 지루해지기도 했지만, 모리스 르블랑의 필력은 『수정마개』가 끝이 아니었던 것. 


한편, 시간 설정이 특이하다. 사건의 시발점이 된 2억 프랑의 유산을 남긴 모닝턴은 1919년 '인플루엔자'로 앓아 누웠다가 독극물로 사망한다. 나는 그가 1918년부터 대유행한 스페인독감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해설에 따르면 작품은 1914년, 전쟁 중 집필된 것으로, 전쟁 후 일어날 세상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것이다. '미래에 유행성 독감까지 예견했다는 것인가'라는, 나만의 착각에 잠깐 웃음을 지었다.


다만, 뤼팽 장편의 백미라고 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나 전설(『속이 빈 바늘』), 당시의 국제정세(『813』), 정치 스캔들(『수정마개』)에 기반한 에피소드가 없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도둑질을 안 하다보니, 끝모를 예술적 취향도 여기서 멈춘다. 이제 겨우 4권인데, 그럼 다음 뤼팽은 또 어떤 모습을 보일까 궁금해진다.

페레나를 둘러싼 영웅신화는 그 위용을 차근차근 갖추어왔던 것이다. 그 속에는 초인적인 에너지와 기적 같은 담력, 황당무계한 상상력과 기발한 모험심, 그리고 강인한 완력과 냉철한 정신력 등등, 도저히 아르센 뤼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인물의 모든 특징이 고스란이 담겨 있었다. 이를테면, 좀 더 이상화된 업적으로 더욱 위대하게 승화된 아르센 뤼팽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난 아무것도 믿지 않아. 다만 끊임없이 탐구할 뿐이네. 무엇이든 최초로 마련되는 기반 위에다 하나의 가설을 세울 뿐이지.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말이야. 그리고 생각하는 거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서두를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입 밖으로 내기 전에 그 한마디 한마디가 충분히 숙고된 것들입니다. 어느 한가지도 소홀히 흘려버려서는 안 되는 얘기이죠. 왜냐면 얘기 속에 담긴 사실들을 중구난방으로 헤집어 본다고 해서 결코 이번 사건이 해결되는 게 아니며, 오로지 가능한 한 충실하게 갖춰진 이야기를 따르는 가운데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난 신문 따위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냈습니다. 어리석은 정치 놀음이나 지저분한 사건들을 눈으로 섭렵하느라 매일 소중한 30분씩 허비하는 게 그토록 불가피하고 필수적인 일일까요?"

"내 공격을 막아낸 건 당신 자신의 재능만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기적 같은 행운이 당신을 집요하게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머뭇거리는 것도, 생각에만 골몰하는 것도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번에 파악하고 싶었고, 순식간에 깨닫고만 싶었다. 별다른 단서라든가 모호한 추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중대한 순간마다 갈 길을 가르쳐주었던 그 놀라운 직관력 한 방으로 일사천리 꿰뚫기만을 원했다.

핍밥받고, 희생당하고, 삶의 열정을 상실한 사회적 약자들. 그들 모두에 대해 돈 루이스는 한결같이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명철한 지성과 자상한 조언, 경험과 힘을 그들과 함께하고, 필요하다면 직접 시간을 할애해 자기 스스로 나서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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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에너지전쟁 - 과거에서 미래까지, 에너지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대니얼 예긴 지음, 이경남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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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Quest. 새로운 에너지들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뜻하는 것일 게다. 전작인 『The Prize』가 '드레이크 대령'부터 걸프전까지, 현대사회 최대의 에너지원인 석유의 역사를 담았다면, 이 후속작은 그 이후의 2010년 초반까지 석유의 이야기, 그리고 지정학적 약점과 기후변화를 극복하고자 고안된 비재래적(untraditional) 에너지들의 2030년 경까지 전망을 분석하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원들은 다음과 같다.


천연가스. 천연가스는 저렴하면서도 탄소배출이 적어 어느 정도 석탄과 석유를 대체할 만한 에너지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주된 생산지가 러시아와 중동으로, 다소 서방과 불편한 나라이기 때문에 석유와 마찬가지로 지정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노르트스트림2 승인 문제를 두고, EU, 러시아, 미국 간 갈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원자력. 지정학적 문제를 극복하고 한 국가의 에너지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에너지원이다. 문제는 체르노빌, 후쿠시마 같은 사례들 떄문에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다는 것. 그럼에도 프랑스나 중국은 원자력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전기. 토머스 에디슨을 시작하여 새뮤얼 인설로 이어지는 전기의 역사는 그레첸 바크의 『The Grid』와 상당 부분 내용이 겹친다. 아마도 바크가 이 책을 많이 참조하지 않았을까?


태양력과 풍력. 두말할 것 없이 지금 우리 세기에 가장 각광받는 에너지원이다. 태양력은 오일쇼크를 겪은 카터 시대부터 주목 받았으나, 낮은 효율 때문에 그의 재선 실패와 함께 잊혀지는 듯 했으나, 기후위기를 겪으면서 되살아났다. 신재생에너지는 특히 석유기업이 다음 사업으로 투자를 많이 하기도 한다. 마이클 셸런버거는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서 '석유회사들이 태양력과 풍력 업체를 지원하면서 원자력을 몰아내려 한다'고 기술했는데, 이걸 말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태양력과 풍력이 문제가 많다고 보지만, '에너지의 분권화'를 이루려면 꼭 필요한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에너지 효율화, 에너지 효율화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제3의 에너지원이다. 언제나 석유가 풍부한 미국과 달리, 석유가 한 방울도 생산되지 않는 일본에서는 에너지 문제 극복을 위해 하이브리드 차량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프리우스' 같은 명품이 탄생했다. 프리우스는 피터 자이한의 애차이기도 하다.


바이오에너지. 브라질은 사탕수수를 가공함으로써 바이오에너지 강국이 되었다. 석유와 바이오에너지 두 가지 에너지원으로 구동되는 차량이 존재하는 사실이 놀라웠는데, 


전기차. 토머스 에디슨이 고안했으나 포드의 내연기관 차량에 밀려 역사속으로 사라진 전기차는 최근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전기차의 핵심은 배터리 기술인데, 한국의 LG화학과 중국이 배터리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 책을 그때 읽었더라면 LG화학에 투자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올해 에너지 관련 책을 7권 가량 읽은 것 같은데, 이 책이 모두 정리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대니얼 예긴의 글쓰기는 담담하면서도 굉장히 흡입력 있다는게 최대 강점이다. 담담하다는 것은 내가 직전까지 즐겨 읽었던 작가들, 제러미 리프킨의 지나친 좌파적 이상주의도, 피터 자이한의 극단적인 미국 중심 성향을 모두 배제하고 에너지 전문가의 관점에서 팩트만을 기술하고 있다. 당연히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제 그의 다음 책은 10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를 대신할 만한 에너지 책들에 대한 나의 Quest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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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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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림 구 역본으로 읽은 지 8년 만.

이번 독서에서 새로 발견한 점을 몇 개만 적어본다.


1. 선동가들에 휘둘린 노동운동에 대한 경고

처음 읽었을 때에는 마지막 문장에 매료되어 노동운동이 싹트고 있음을 알리는 혁명소설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것은 한 단면일 뿐이다, 외지에서 온 어설픈 혁명가의 심리도 함께 비판함으로써 선동의 위험성도 함께 다루고 있다. 랑티에는 막장을 단 한 번 경험하고는 그 비참한 생활에 증오를 품는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에 대해 탐독하면서 혁명을 꿈꾸고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다. 공제조합을 설립을 주도해 돈 좀 만지고, 멋도 부리고, 인기에 취해 국회의원을 꿈꾸기까지 그의 변화하는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르주아를 증오하지만 부르주아를 닮아가고, 그럼에도 그 현실을 부정한다. 조지 오웰에 앞서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끄집어낸 것이다.


2. 탐욕적 자본가가 아닌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고발

작품은 노사 간 대립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작가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본가들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광부들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CEO(엔보 씨),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진취적 기업가이되, 역시 아버지의 입장에서 광부들을 감싸는 탄광주(드뇔랭), 조상이 물려준 돈을 투기하지 않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선도 베푸는 연금생활자(그레구아르 부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탐욕적 자본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실제로는 탄광 현장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광부들에게 전가하고 그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혁명을 일으킨 광부들도 그리 과격분자는 아니다. 파업이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자본가의 집에 일하는 하녀는 말한다. "하지만 참 이상하네요, 저 사람들은 절대로 나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순종하던 사람들이 선동에 휘둘려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면, 선동가들도 그들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3. 국가, 그리고 자애롭기만 한 나라의 존엄

작품에서 국가의 역할은 중재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자본가의 편에서 폭력적인 민중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장랭은 폐쇄된 탄광을 지키던 소년병을 이유없이 살해한다. 한편, 마외네 집에서 팔고팔아 더 이상 팔 게 없게 되었을 때(『목로주점』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다), 황제와 황후의 초상만이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자애로운 미소로 가족을 내려다본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이 부분이 특히 오늘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게 느껴졌다. 소탈하고 자애로운 모습만 보여주는 지도자는 그림에 불과할 뿐 국민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에너지

작품에서 석유는 작품에서 '등유'로 기능하는, 아주 초기의 모습을 보여준 점이 눈에 띄었다. 이후 1차 대전을 전후로 석유가 세계를 움직이는 에너지원이 된다. 그럼에도 석탄은 여전히 화력발전 등 국가 에너지의 주요 원천이다. 80년대 영국의 대처 정부는 광산노동자 파업에 단호히 맞서 이른바 '영국병'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공부가 필요하다).


'제르미날'은 혁명력에서 '싹트는 달', '파종월' '牙月' 등으로 번역되며, 3~4월을 가리킨다. 30대 초반에 읽었을 때에는 노동운동과 혁명만을 다룬 것 같았던 이 작품은 이렇게 다층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물론 작품의 결론은, 광부들은 얻은 것 없이 탄광으로 돌아갔지만,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싹이 트고 있음을 자본가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들의 삶은 점차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을 노동현실을 보면, 아직 갈 길은 멀다. 그러나, 두번째 독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를 묘사하는 데 절묘한 균형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었다. 그 동력은 작가가 장기를 발휘하여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언어와 행동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데 있다. 역시 Zola 위대한 작가이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 한 사내가 짙은 어둠 속을 뚫고 허허벌판에 난 도로 위를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마르시엔과 몽수를 잇는 포장도로가 사탕무밭을 가로지르며 10킬로미터에 걸쳐 곧게 뻗어 있었다. - P9

르 보뢰는 깊은 땅 속에 납작 웅크린 음험한 짐승처럼 한껏 몸을 움츠리면서 거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치 인간의 육체를 집어삼켜 속이 더부룩한 것처럼. - P26

갱도는 그런 식으로 채탄부들이 내리는 적치장의 깊에 따라 왕성한 식욕으로 인간 가축들을 집어삼켰다. 결코 달래지지 않는 허기를 드러내며, 세상 사람들 모두를 소화하고도 남을 것 같은 거대한 창자를 끊임없이 꿈틀대면서, 갱도는 인간 가축들로 채워지고 또 채워졌다. - P48

그는 갱 속으로 다시 내려가 고통받고 싸우기를 원했다. 그리고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본모르 영감이 들려준 사람들의 이야기와, 땅속에 웅크린 채 인간을 포식하고 있는 신을 떠올렸다. 만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은 정체도 모르는 그 신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 - P117

광부는 목에 낀 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맥주를 마셔야만 한다. 그렇게 시작해서는 나중에 문제가 생길 때까지 술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누구를 탓하려는 말은 아니지만, 광부들이 충분한 보수를 받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152

아! 젊음이란! 아무리 먹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탐욕스러운 시절이 아닌가! - P193

그들은 지금 드디어 정의를 실현하게 될 멋진 계획을 세우고, 그를 위한 선전을 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이제 국경 따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 다 함께 들고일어나 한데 모여 노동자들이 마음놓고 빵을 먹을 수 있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었다. - P223

땅속 깊은 곳에서 광부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곡식의 낟알처럼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은 어느 날 아침, 들판 한가운데서 그 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게 될 터였다. 그렇다, 인간들이 자라나는 것이다. 정의를 바로잡을 한 무리의 인간들이. 대혁명 이후로 모든 민중이 평등한 존재가 된 게 아니었던가? - P262

그때부터 에티엔도 점점 달라졌다. 빈곤함에 묻혀 잠들어 있던, 멋과 안락함을 향한 본능이 깨어난 그는 나사 모직 옷들을 사들이고, 고급 부츠도 한 켤레 샀다. 그리고 단번에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탄광촌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자존심의 달콤한 충족을 경험한 그는 처음으로 맛보는 대중적인 인기의 쾌감에 흠뻑 빠져들었다. - P268

이제 한 단계 높은 세상으로 올라선 그는 지적인 만족감과 안락한 삶을 맛봄으로써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부르주아지의 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 P353

파리는 멀이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지만, 혹시 또 아는가? 언젠가는 국회의원이 되어, 화려하게 장식된 회의장 연단에 서서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한 노동자 출신으로서 당당히 연설해 의기양양한 부르주아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 P354

"일부러 혼란을 가중시켜 그 틈에 자기 이득을 챙기려는 자들과는 절대 함께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려는 것뿐일세." - P376

그렇게 머리를 억지로 쥐어짜다보니 더이상의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면서 그는 광신도처럼 자기 자신을 맹신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감성과 양식에서 비롯된 신중함마저 점차 사라지면서 새로운 세상의 실현보다 더 쉬운 일이 없는 것처럼 떠벌렸다. - P446

작업반장들은 하나같이 그런 문제점을 지적한 것을 짜증스러워하면서 똑같은 말로 대꾸했다. 저들이 원하는 건 석탄이니까 지주 보강 작업은 나중에 하면 된다는 거였다. <2권> - P257

땅속에 파묻힌 광부들을 구조하는 일은 그들을 더욱더 열광시켰다. 네그렐은 마지막으로 구조를 시도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를 돕겠다는 지원자는 넘쳐났다. 광부들은 피 끓는 형제애를 내세우며 한달음에 달려와 너도나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들은 파업을 했던 사실도 잊은 채 임금 문제에도 더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동료들이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 순간부터 아무 대가 없이 자기 목숨을 내놓고자 했다. 모두가 그곳에 와 있었다. <2권> - P298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밝고 선명한 초록색 벽에 붙어 있는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 뿐이었다. 그들은 공식적인 자비로움을 과시하듯 발그레한 입술로 미소짓고 있었다. <2권> - P313

싹트는 소리는 뜨거운 입맞춤 소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2권>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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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3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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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마개


어릴 적 뤼팽 작품 중 처음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물론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처음 읽는 걸로 봐야 할 것이다. 


『813』과 유사하게, 뤼팽이 神이 아닌 乙의 입장에서 적을 잡기 위해 숨가쁜 추격전을 펼친다. 적이 손에 잡힐 듯 한데 만만치 않은 통찰력과 힘을 가지는 바람에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 극의 템포를 더욱 빠르게 한다. 보통 몇 달에 걸쳐 사건이 전개되던 전작들과 달리, 이것은 (부하의) 체포부터 처형까지 시간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적과 독자를 속이는, 심리소설로서의 트릭은. 단언컨대 이 작품이 지금까지 읽은 3권의 '결정판' 중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아르센 뤼팽의 고백(단편집)


다시 신의 지위로 돌아온 아르센 뤼팽. 일곱 편의 단편이 고르지는 않지만, '붉은 스카프'와 '아르센 뤼팽의 결혼'은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이제는 그의 작품에서 잊혀진 인물인 줄로만 알았던 가니마르가 다시 등장하는 점도 반갑고, 이전의 작품들의 등장했던 주변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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