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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셀로 열린책들 세계문학 19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권오숙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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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얘기지만, 국가로부터 암건강 관리 안내메시지를 받은 나이에 처음으로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나는 베르디의 '오텔로'를 먼저 보고 원전을 알고 싶어 읽었다.

 

다른 원작을 둔 오페라들이 그러듯, '오텔로'도 캐릭터들의 동기가 좀 약하다. 원작인 희곡 오셀로는 '질투'의 드라마다. 무어인이 백인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여 손수건 하나로 파멸해 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비단 오셀로 뿐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도 역시 질투에 의해 움직인다. 로더리고는 오셀로를 질투해서 살인을 저지르려 한다. 심지어 이아고의 동기도 질투다. 오페라에서는 단순히 무어인 상관이 싫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도 오텔로를 질투한다.

 

"사람들은 그 놈이 내 이불 속에서 내가 할 일을 대신 했다고들 생각하지.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의심만 들어도 확실한 것처럼 보복을 해야해."

 

이제, 캐릭터들의 행동의 동기가 분명해졌다. 오셀로는 질투 때문에 아끼는 부하인 캐시오와 데스데모나를 죽이려 한다. 이아고는 질투 때문에 로더리고를 움직여 캐시오를 죽이려 한다. '아키텍쳐'인 이아고는 이를 이용해 오셀로를 움직이고, 로더리고를 움직이고 캐시오를 움직인다. 보면 볼수록 인간성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역자는 후기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이 작품을 해설하는 데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이 극의 비극성은 오셀로의 질투심에 더해 가부장제 하의 그릇된 여성관이 결합한 것이라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정조를 상실한 여성에 대한 남성 간 연대감 보이고 있다고 강조한다. 문득 동남아-인도에서 가장의 의도에 반하여 결혼하거나,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에 대한 집안 남자들의 폭력이 떠오른다. '명예살인'. 여성의 정조(honor)는 곧 그것을 소유한 남성의 명예(honor)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4벡여 년 전의 셰익스피어와 지금의 인도-파키스탄의 여성관이 별 차이가 없다니. 그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여전히 통용되는 것이라는 말인가.

 

"무식한 인도 사람처럼 제 손으로 제 종족 전체보다도 값진 진주를 버린 자라고."

 

번역은 아쉬움이 없지 않으나, 주석과 맞물려 재미있게 읽었다. 영한 대역본이나 좀 더 시적인 번역본을 읽고 싶다.

[이아고] 예전처럼 2순위가 1순위의 뒤를 따르는 경력순으로 승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천장과 총애에 따라 이루어지니

[이아고] 누구나 다 대장이 될 수 없는 법이고, 또 대장이라고 누구나 진실로 충성스러운 부하를 둘 수도 없는 법입니다. 나리께서도 무릎을 구부리고 충성을 다하는 많은 작자들이 노새처럼 먹을 것만 주면 그저 비굴한 의무를 다하면서 세월을 허비하다 늙어 해고당하는 꼴을 많이 보셨겠죠. 그렇게 충직한 놈들은 회초리질을 해야 합니다.

[이아고] 저는 그를 섬기면서 실은 저 자신을 섬기는 겁니다. 제가 사랑과 충성심으로 그를 따르는 듯 보이지만, 실은 특별한 목적으로 그런 척하는 것은 하늘이 알 터입니다.

아, 혈육이 이토록 배신을 하다니! 세상 아비들이여, 이제부터는 딸년들의 행동만 보고 그 마음을 믿지 말지어다. - P14

[오셀로] 저는 전쟁과 전투에 관한 것이 아닌 이 위대한 세상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변명하는 일에서도 대의명분을 그럴싸하게 꾸며 말할 줄 모릅니다. - P24

[오셀로] 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들 때문에 저를 사랑하고 저는 그녀가 그것들을 동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노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사용한 마술입니다. - P27

내 보물, 네 소행을 보니 또 다른 자식이 없는 게 다행이구나. 네 사랑의 도주를 보고 나는 독재의 필요성을 배워 자식들에게 족쇄를 채우게 했을 테니까. - P29

[공작] 그동안 희망을 두어 왔던 해결책이 어쩔 도리가 없이 되어 최악의 상태를 보게 되면, 슬픔도 끝내야 하는 법이오. 다 끝나 지나가 버린 불운을 슬퍼함은 불행을 더 질질 끌고 가는 짓이오. - P29

말은 말일 뿐, 말이 귀를 통해서 상처받은 가슴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아직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 P30

[이아고] 우리에게는 날뛰는 감정과 음욕의 자극과 끓어오르는 정욕을 식혀 줄 이성이 있지요. 나라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제가 보기엔 음욕의 곁가지이거나 어린 가지에 불과합니다. - P34

이 끔찍한 일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하려면 지옥과 밤의 도움을 받아야 해. - P36

너무 기뻐 가슴이 벅차오.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심장이 만들어 내는 최대의 불협화음이 되게 하소서! - P47

훌륭한 내 사랑, 내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파멸이 내 영혼을 붙잡아 가기를! - P76

[이아고] 사람은 모름지기 겉과 속이 같아야죠. 그렇지 않은 자들이 정직한 체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 P78

좋은 평판은 우리 영혼의 가장 소중한 보석입니다. - P79

가난해도 만족하면 부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해질까 늘 염려하는 자는 아무리 부자여도 겨울처럼 가난합니다. - P80

[이아고] 위험스러운 억측은 원래 독약과 같아서 처음에는 구미에 맞지 않는 것을 잘 모르지만 혈액에 조금만 작용하면 유황 광산처럼 타오르지. - P87

도둑맞은 자가 도둑맞은 것을 모를 때, 모르는 채로 놔두면 그자는 아무것도 도둑맞지 않은 거지. - P88

[에밀라아] 남자의 본심은 한두 해만에 나타나지 않아요. 그들은 모두 위장이고 우리 여자들은 모두 음식에 불과해요. 그들은 게걸스레 우리를 먹고, 배가 부르면 뱉어 버리죠. - P98

질투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소용없어요. 그들은 이유가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질투심이 많아서 질투하는 것이죠. 질투심은 스스로 잉태되어 태어나는 괴물이에요. - P100

죄를 지으면 혀를 놀리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 P138

[이아고] 오늘 밤은 내가 아주 일어스든가 아주 파멸하든가 하는 밤이다. - P140

그자의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다 목숨을 지녔다 해도 내 복수심은 채워지지 않아 - P144

[오셀로] 아, 견딜 수가 없구나! 아,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거대한 일식과 월식이 생겨서 암흑이 엄습하고 놀란 지구도 이변에 입을 벌리는 듯하다. - P144

이는 달의 궤도 이탈 때문이다. 달이 평소보다 지구에 더 가까이 다가와서 인간들이 돈 거야. - P145

내키시면 명예로운 살인이라고 말씀해 주시오. 이 모든 짓을 증오심이 아니라 명예심으로 했으니.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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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뜨겁게 - 버트란드 러셀 자서전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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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인생을 불꽃처럼 살 수 있다면...

 

저 유명한 첫 문장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 두꺼운 책은 열정 그 자체이다. 물론 대부분 자서전이라는게 내가 뭘 잘했고, 비난에 대한 변명이 대부분이며, 이 책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이 지점에서 모 대통령의 자서전이 떠오른다...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해서 그런 거라고...).

 

예컨대 그의 첫번째 열정인 '사랑에 대한 갈망'은 평생 여러번의 결혼과 외도에 대한 변명은 아닐까. 물론 기독교적 결혼관에 대한 저항이나, 여성의 성적 해방에 대한 그의 주장은 타당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이, 그것이 매우 일관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연애관을 정당화하는 데서 출발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러셀의 행동은, 아마도 그가 매우 많은 말과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상당 부분에서 모순을 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무저항주의를 절대적으로 신봉한 바도 없고, 그렇다고 절대 거부한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단지 '양적 변화와 강조점의 이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다. 뭔 말인가? 심지어 그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라고도 했고, 그걸 수없이 말했다고 하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비폭력주의자, 평화주의자, 저항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그의 변명에 불과한가, 아니면 유명인사인 그를 따라다니던 미디어의 농간인가.

 

그리고, 그는 비판적 지식이었지만, 고국을 매우 사랑했다. 나치가 인간을 짐승처럼 간주했다고 비난하면서, 영국인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했지만, 식민지 개척기 영국의 군인들과 종교인들과 인류학자들이 원주민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학자들과 큐레이터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마지막 태즈메이니아인들의 사체를 강탈했다. 그들은 사체를 해부하고, 무게를 재고, 측정하여, 그 분석 결과를 학술지에 실었다.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은 1976년경에 이르러서야 1백년 전에 죽은 최후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트루가니니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도록 내놓았다. 영국 왕립외과대학은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 표본을 2002년까지 보유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마지막 과업은, 이 책의 마지막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반전운동이었다. 입장이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그는 전쟁 반대, 그리고 고통의 대변을 위해 평생을 두고 달려왔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열정적인 행동주의자였는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로서의 러셀이 인류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나로서는 평생 모를 것이다. 그러나 문필가이자 행동가로서의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자서전 한 권만으로 대중에게 영원히 각인될 것이다.

 

"나를 결정하는 건 나의 내면이 아니라 나의 행동이다."

(It's not who I am underneath, but what I do that defines me.)

(영화 '배트맨 비긴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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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유령이야기 - 한글판 + 영문판 (오리지널 스크립트 수록) 한정 판매 세계문학의 숲 28
찰스 디킨스 지음, 정은미 옮김 / 시공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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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선물'이라는 초역이 아니라면 특별히 이걸 살 이유는 없는 듯하다. 번역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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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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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아시모프.

 

중학교 시절, 문제 지문에 나온 '과학에세이'로부터 그를 알았고, 영화 '바이센테니얼맨'과 '아이로봇'에서 그가 보여준 세계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로봇계의 법칙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파운데이션'은...

이제 막 1권을 읽었는데, 솔직히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심지어 '파운데이션'이라는 것이 출판사인지, 공동체인지, 재단인지, 국가인지조차 불명확하다. 그런데 매력적이다.

 

Life Work라는 것이 있다. 작가가 일생을 두고 완성한 작품을 말한다.

'파운데이션'은 아시모프의 라이프워크이다. 그의 평생에 걸친 그의 모든 세계관을 담고 있고, 아마 '로봇'까지 다루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 읽은 작품에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게 있다.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이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그의 모든 생각을 담아내고 죽을때까지 완성하지 못한, 그러나 흠뻑 빠져들게 하는 작품. 불새가 상징하는 바를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여러 번 읽어달라는 뜻일 게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쇠퇴해 가는 은하제국과, 그에 저항하는 학자 '해리 셀던'이 '심리역사학'에 기반해 만든 '파운데이션'의 이야기이다. SF는 물론이거니와 정치, 종교, 문화 등 다양한 것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는 좀 어렵다. 내가 SF라는 장르를 거의 읽지 않아 어렵게 느끼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적어도 초기 3부작은 읽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라이프워크'로 음미하면서 읽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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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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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후 미국산 오렌지, 포도의 수입이 크게 늘어 국내 과일재배 농가가 큰 타격을 입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7일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3월 15일 한미 FTA 발효 후 연말까지 미국산 오렌지 수입액은 1억4800만 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3.4% 급증했다. 오렌지는 3월부터 8월까지 계절관세가 적용돼 기존 50%였던 관세가 30%까지 떨어졌다. 오렌지의 뒤를 이어 수입이 급증한 것은 체리였다. 작년 3월5일~12월31일 수입액이 8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78% 증가했다. 포도 수입도 21.6% 늘어 같은 기간 수입액이 2600만 달러에 달한다.

<강원도민일보> 2013.3.8 연합뉴스기사 인용

 

평소 같았으면, ‘그렇군’하면서 넘어갔을 기사인데, 직전날 저녁,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다음을 읽었기에 기사가 매우 생생하게 다가왔다.

 

 

사람들이 강에 버려진 감자를 건지려고 그물을 가지고 오면 경비들이 그를 막는다. 사람들이 버려진 오렌지를 주우려고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몰고 오지만, 오렌지에는 이미 휘발유라 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감자를 바라본다. 도랑 속에서 죽임을 당해 생석회에 가려지는 돼지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인다. 산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 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 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 간다.

- 2권, 255쪽

 

 

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오렌지와 체리와 포도가 불태워졌을까. 지구 반대편에, 아니 미국 내에서조차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음에도 말이다. 존 스타인벡이 그려낸 1930년대의 미국사회의 모습이, 지금은 글로벌사회에서 진행 중이다.

 

 

“... 사람이 땅뙈기라도 조금 갖고 있으면, 그 땅이 바로 사람이고, 그 사람의 일부고, 그 사람을 닮아가는 법인데, 사람이 자기 땅을 걸으면서 땅을 관리하고, 흉작이 들면 슬퍼하고, 비가 내리면 기뻐하고, 그러면 그 땅이 바로 그 사람이 되는데. 그 땅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이 더 커지는 법인데. 농사가 잘 안 되더라도 땅이 있어서 사람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인데. 원래 그런 건데”

-1권, 78쪽

 

 

분노의 포도는 ‘땅’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황무지를 일군 동부의 농부들이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고 대공황이 되면서 자신들이 개간한 땅을 잃고 쫓겨나 서부 캘리포니아로 찾아가 노동착취도 당하고 파업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지만, 그 와중에도 인간애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주제이다. 스타인벡의 자연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휴머니즘을 그려나가는 방식은 아름다우며, 이것이 현재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로 우뚝 설 수 있는 힘이라고 여겨진다.

 

 

 

민음사 刊 ‘위대한 개츠비’의 해설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1910년대를 알고 싶다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캐리를, 1920년대는 위대한 개츠비를, 1930년대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읽으면 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짧은 소설이 20년대를 축소해 담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노의 포도가 대공황기 소작농들의 어려운 삶이 작가의 예리한 관찰로 파헤친 것만은 틀림없다.

 

 

작품에는 멋들어진 문장이 많다. 진한 인간애로 감동을 주는 장치를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애를 드러내는 방식에도 품격이 있다. 나는 인간애를 극명하게 표현한 작가와 작품을 좋아하는 편인데, ‘분노의 포도’는 그 모양새가 조금 떨어진다. 요즘 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어머니가 고기를 좀 사고. 추가로 설탕을 사려하는데, 돈이 부족해 점원과 티격태격하다 결국 점원이 자신의 돈으로 미리 지불하고 나중에 갚으라고 하자 어머니가 말한다.

 

 

“좋은 걸 한 가지 배웠네요. 항상 배우고 있죠. 매일. 사람이 곤란해지거나 다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땐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라는 것. 남을 도와주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뿐이니까. 그런 사람들뿐이에요.”

- 2권, 312쪽

 

 

빅또르 위고의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인데, 위고는 반전의 기법으로 순식간에 독자들에게 파고든 반면(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주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분노의 포도’에서는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맞는 말이고 어디가서 써먹기는 좋기는 한데, 설정이 다소 억지스럽다. 작품 말미, 아이를 사산한 로저샨이 굶어 죽어가는 사내를 만났을 때 한 행동은 또 어떠한가.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 뒤로 돌아가서 머리를 받쳤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건너편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한데 모이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2권, 473쪽

 

 

죽어가는 사내에게 젖을 먹인 그녀는 순식간에 성모마리아로 변신한다. 그녀의 남편은 저만 살겠다고 도망가고 아이는 사산해 버려 말도 못할 고통을 토해내던 그녀가, 마지막에 어머니와 눈빛 교환만으로 성모가 된다는 것은 생뚱맞기까지 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결말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낸 장치가 아닌가 한다. 앞서 작품 전반부가 주로 '땅'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중반부터는 ‘모성’을 그리고 있다. ‘톰 조드’와 ‘짐 케이시’가 만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하고, 남자들이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어오고 하는 모습에서 남성들의 이야기인 듯 하지만, 점차 해체되는 가족에서 중심을 잡는 역할은 어머니가 하고 있다. 서양사회에서 ‘땅’은 곧 ‘어머니’이다(mother earth). 즉 전반부에서는 ‘땅’을, 후반부에서는 ‘어머니’를 강조함으로써 주제를 일관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마지막에 딸에게 ‘모성’을 물려줌으로써 ‘죽은 아기’를 대신해 새로 생긴 ‘가족’을 돌보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따뜻한 인간애와는 별개로, 이 작품에는 인종주의적 편견이 곳곳에 숨어 있다. 땅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농민들은 그 땅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닌 ‘인디언들과 싸워서 얻어낸 땅’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스타인벡은 자본이 몰아낸 농민들의 마음 속에 익어가는 ‘분노의 포도’는 정확히 관찰했지만, 농민들이 몰아낸 인디언들의 마음 속 ‘분노의 포도’는 간과한 것이다. 흑인에 대한 경멸도 볼 수 있는데, 이런 점들 때문에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물론, 인종주의가 여전히 만연한 1930년대이기에 작가의 문제만으로 볼 수는 없지만, 바로 이것으로 (위에 언급한 대로),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 미국의 모습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존 스타인벡의 이중적 모습은 뉴스를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베트남전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는가 하면 ‘찰리와 함께 한 여행’은 가보지도 않은 곳을 서술한 ‘소설’이라는 주장도 있다.)

 

 

작품은 천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두껍지만 읽기는 어렵지 않다. 그만큼 작가의 '썰'을 풀어가는 능력이 뛰어나다. 조드 일가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에, 등장인물 때문에 애먹는 나로서는 상당히 소화하기 수월했다. 게다가 뛰어난 문장력. 매우 담백하다. 찰스디킨스의 문장 같은 시적인 아름다움은 없지만, 읽기가 매우 편하다.

 

 

번역도 상당히 좋았다. 지루함 없이 읽을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났고, 오타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아 민음사 세계문학 중 가장 집중력을 갖고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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