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시를 향하여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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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살인은 사건의 끝일 뿐, 모든 것은 한참 이전에 시작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면서, 초반에는 각 인물들의 서로 다른 시점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다. 그 중에는 범인이 자신의 살인계획을 완성하는 장면도 있다. 그들이 9월 가을의 어느 날, 강을 사이에 둔 저택과 호텔에 모여들고 살인이 발생한다. 


그런데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만 다섯 권 연속으로 읽어서 그런가? 결말이 이렇게 싱거울 수 없다. 사건의 전개는 긴박감이 넘치고 트릭은 촘촘한 듯 하지만 허술한 부분이 여럿 눈에 띈다.


먼저, 트레브스 씨의 죽음이다. 적극적으로 살인을 했든 아니든, 범인에게는 그에 대한 살의가 있었다. 본인이 계획을 세우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김전일' 식으로 치면) '예술 범죄'을 꿈꾸던 범인이다. 그러던 그가 우발적으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애초에 계획에도 없던 거니 별다른 트릭도 없었다.  


'다른 시각,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인이 이루어진다'는 설정 역시, 돌이켜보면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나일강의 죽음』 같은 경우에도 여러 곳에 있던 인물들이 사건 지점인 이집트로 모여든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여기에서는 인물들 각자가 '시간'이 좀 더 넓게 몇 달에 걸쳐 표기되고, '말레이시아' 등 더 멀리서 왔다는 것 정도? 


가장 실망스러운 건, 암시가 암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작품의 '탐정' 역할인 래틀 총경은 수사 초반에 에르퀼 푸아로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살인자로 하여금 계속 말하도록 하라.' 이것이 그의 원칙 중 하나야. '그게 누구든 진실을 털어놓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결국엔 더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인범이 밝혀지고, 총경이 다른 인물과 사건의 전모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데, 그 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총경님은 참 대단하세요……. 지금처럼 말을 많이 하는 건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에요.

이 대사 때문에 나는 또다른 반전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대로 끝난다(전자책으로 읽었기 때문에 남은 페이지 수도 몰랐다). 총경은 범인에게 특별히 말을 많이 시키지도 않았다. 저 말을 한 인물이 '찐'범임을 암시하는 엔딩도 아니다.


며칠 전 읽은『끝없는 밤』은 지루했지만 그를 보상할 만한 짜릿한 결말을 선사했다. 이 작품은 반대로, '애거서 크리스티 Top 10'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큰 기대를 갖고 재미있게 읽어내려 갔지만 허무하게 끝났다. 작가는 헌사에서 이책이 (아마도) 악명 높은 비평가를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의 실제 비평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나라면 악평을 썼을 것 같다.


덧붙여, 번역에 대한 불만도 있는데, 원서의 제목은 『Toward Zero』이지만, 본문을 읽어보면 0이 시간(0시 또는 자정)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모든 이들이 '살인'이라는 '결말'을 향해 한점(또는 원점)으로 모여드는 공간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원서 초판의 표지만 봐도 그렇다. 나만의 캠페인 같은 건데, 고전문학의 번역에서 (아마도 일본식) 옛 역어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에서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말을 더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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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예고합니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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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가 인상 깊었다.


첫째, 전후 영국의 자그마한 시골마을의 모습이다. 마을에서만 발행되는 신문은 마을의 모든 소식을 공유한다. 집 뒷뜰에는 오리, 돼지 등을 키우거나 작물을 경작한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지낸다. 집 문을 잠가두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드나들 수 있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기보다는 물물교환을 한다(불법이지만). 국사 교과서에 묘사된 고조선 시대의 풍습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모습도 전쟁을 전후로 각 나라 사람들이 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불신감이 커진다. 서로를 알고 지낸다고는 하지만 그의 신분은 확실하지 못하다. 신분증은 위조도 하기 쉽고. 그렇기에 특히 범죄에 취약하며, 수사기관은 애를 먹기 일쑤이다. 작가가 이전의 시골 마을의 생활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독자들은 ― 특히 빽빽한 아파트에 사는 지금의 우리들은 ― 아름답다고 여길 법하다.


둘째, '평범한 사람이 갖는 살의'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원한 때문에, 돈을 갈취할 목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악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공익' 목적으로, 혹은 '순리대로' 나에게 올 수도 있었던 막대한 재산을 갖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 당사자는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얼마 전 재관람한 '본 슈프리머시'에서, 한 CIA 간부는 자신의 악행이 '애국'에 기반한 것이었다며 항변한다. 이처럼 '대의'라는 명분하에 이루어지는 범죄를 우리는 지금도 얼마나 많이 보고 있는가. 상식적으로 윤리와 도덕, 법에 어긋난는 것들은 모두 단죄해야 함에도,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며, 많은 지지자들이 억지를 부리는가. 


한편, 이야기가 전개되는 기법은 '김전일'과 상당히 닮았다(나는 마플 시리즈가 처음이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범인이 블라인드 처리되어 등장하고, 피살자에게 다가가 그를 살해하고, 사건에 관계된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플이 범인을 지목하거나, 함정을 파서 범인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도록 유도한다. 


등장인물도 워낙 많고, 그들의 과거도 복잡하며, 사건이 발생한 집 구조가 그림으로 주어지지 않아 앞으로 몇번씩 돌려 다시 읽는 등 애를 좀 먹었지만 보람있는 작업이었다. 이제 웬만한 추리소설에서 범인은 예상범위를 거의 벗어나지 않지만, 트릭이 궁금해서 읽는 것이니... 그런데, 이 작품은 추리문학으로서도 상당하지만, 맨 처음 언급한 것처럼 1940년대 영국 시골의 모습을 후세의 우리에게 전해 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워낙 오랫동안 집필 활동을 했기에(1920년대~1970년대), 앞으로도 그의 작품 속 변화해 가는 영국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큰 재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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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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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크로이드 살인사건 × 나일강의 죽음


워낙 다작의 (막장드라마) 작가이다보니, 상황설정 등이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재활용하는 것 같다. 혹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쓰게 되거나. 다만 풀어내는 방식은 다르다. 이 작품은 정통 추리소설보다는 도스또예프스끼 류의 심리소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가져온 제사(題辭)가 어떻게 쓰일 지는 중반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알려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 


문제는 끝까지 읽어나가는 과정이 지루하다는 것. 이 작품은 맨 마지막 단 두 장(章)을 위한 것이다. 그 인고의 과정을 견디는 자가 마지막에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는 생각이 들면서 중도 포기를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무려 3,500원이나 대여료를 결제했기에 인내했고, 결실은 달콤했다. 완독 후 처음부터 표시한 주요 문장이나 장면들을 돌려 보면서, 곳곳에 숨은 복선과 암시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마지막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루함은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막장코드(이 정도면 '크리스티 코드'라고 불러도 좋겠다)에 읽는 과정은 따분했지만(그래서 인기는 없을 것 같다), 역시 대가가 쓴 만년의 걸작이다. 작가 스스로 꼽은 '베스트 10'이라 할 만하다.

매일 밤 그리고 매일 아침
어떤 이는 불행의 운명으로 태어나고,
매일 밤 그리고 매일 아침
어떤 이는 달콤한 기쁨의 운명으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달콤한 기쁨의 운명으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끝없는 밤의 운명으로 태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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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는 동안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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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의 유작. '황금가지'가 크리스티 전집을 기획하면서 야심차게 1권으로 내놓은 책이다. 보통 크리스티의 원투펀치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오리엔트 특급살인』이 꼽히지만(이 두 작품은 정말... 30년 가까지 지난 지금도 소름이 끼치게 하는 그런 대담한 결말의 작품은 흔치 않다), '황금가지'는 이 책으로 기존 전집과 차별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9편의 단편 작품집인데, 모두가 추리소설은 아니다. 푸아로가 둘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환상문학에 가깝다.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대중이 씌운 굴레가 얼마나 지겨웠을까.「꿈의 집」,「칼날」, 「외로운 신」,「벽 속에서」, 「빛이 있는 동안」이 그런 굴레를 벗어나고자 한 작품 같은데, 글쎄, 이 중 「벽 속에서」 정도만 괜찮았고 나머지는 곧 잊게 될 것 같다. 보물찾기 모험극인 「맨 섬의 황금」도 별로였다.


반면, 푸아로가 등장하는 두 작품은 정통 단편 추리극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다만, 「바그다드 궤짝의 수수께끼」는 약간 아쉬운 게, 완벽한 범죄라고 완벽한 탐정이 칭찬하고는 있으나, '김전일'의 관점에서 보면....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추리 => 끝. 이런 추리물은 김전일의 범죄자들에게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ㅎㅎㅎ 증거는 있나? 이러면서).


「여배우」는 약간의 트릭이 있는 희곡 같은 작품인데, 제일 좋았다. 앞으로 크리스티의 단편들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매력적인 것들을 발견하는 작업이 될 것 같다.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돌이켜 보니,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상당수가 치정 관계가 깔려 있고 그것이 범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 중년여성 드라마 작가들이 막장코드로 인기몰이를 했지만, 그리도 사람은 거의(?) 안 죽였다. 크리스티는 과감하게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막장력'이 그들보다 한수 위이다. 직전에 읽은 『나일강의 죽음』도 그랬고,「바그다드 궤짝의 수수께끼」 같은 것들은 삼각 로맨스 그 이상을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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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 강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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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때문이라기보다는, 평소에 읽고 싶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스트리밍 서비스를 기다렸는데, 영화를 계기로 대여로 풀려서 냉큼 결제했다. 황금가지가 '쉬운' 출판사가 아니기 때문에 구독으로 읽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지만... 최근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들도 풀렸으니 기대해 본다.


『나일강의 죽음』은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청소년용이 아닌 성인용 책으로 읽은 크리스티 작품인 것 같다. 지금은 없어진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었는데, 이리저리 이사 다니는 사이에 정리가 된 듯. 


각설하고, 오랜만에, 나이가 들어 다시 읽었으니 역시 다른 게 많이 눈에 들어온다. 거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사건은 벌어지지 않고 바람만 잡는다. 대신에 이집트 여행에 대한 깨알 같은 정보들이 있다. 이 경로를 따라가는 관광상품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이미 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고고학에 대한 크리스티의 애정과 지식이 돋보이는데, 그가 고고학자와 재혼한 사실은 어릴적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게 덕후 기질과 관계된 줄은 최근에 알았다. 그리고 푸아로가 자신의 멋진 콧수염과 '회색 뇌세포'에 강한 자부심이 강하긴 한데, 지금 다시 보니 명탐정으로서의 자뻑이 굉장해서 아르센 뤼팽과 비견될 만하다. 아마 많은 작품에서 그런 플렉스를 보게 될 것 같다(푸아로가 등장하는 책이 무려 34권이니, 읽는 사람들도 들어주기 지겨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걸 떠나 이 작품이 명작으로 손꼽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정교한 트릭 때문일 것이다. 범인과 범행동기는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대강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사건의 전반적인 전개와 트릭은 다시 읽으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몇몇 문장들은 가슴에 와 박히는 게 문학적 수준도 상당해 보이고.


요전에 '김전일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추리를 늘어놓는 방식은 크리스티에게서 왔다'는 텍스트를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그렇다. 김전일은 크리스티, 그 중에서 푸아로에 대한 리스펙트로 가득하다. 푸아로는 자신의 추리를 늘어놓는 동안 이어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고 책에 나와 있다). 영화의 전작인 '오리엔트 특급살인'에도 그랬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다룸으로써 독자들의 집중력을 향상시킨다. 범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결말이 좋지 못하다. 


재미있게 읽었으니, 당분간 푸아로에 푹 빠져 살 것 같다. 셜록 홈즈와도, 아르센 뤼팽과도 다른, 혹은 그 둘을 섞은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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