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 예술가의 초상
에밀 졸라 지음, 권유현 옮김 / 일빛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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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는 어느 광고 카피처럼 '과학'이다. 현실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을 통해 '날 것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성향이다.

 

'루공-마카르 총서'의 열 네번째인 '작품'은 그의 이러한 생각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미 상도즈의 입으로 그의 '루공-마카르 총서'를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이것이 그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점을 뚜렷이 하고 있다. 또 마지막 상도즈와 봉그랑의 대화에서 낭만주의에 대한 회의와 과학이 바탕되는 근대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작품'에는 그의 자연주의 작가적 요소가 풍부하다. 일단 주인공들이 불쌍하다. 끌로드 랑티에는 운좋게 거부를 만나 자신의 꿈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어머니 제르베즈처럼 비참한 생활을 이어간다. 아무도 그의 그림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살롱에서는 번번히 낙선한다. 끌로드는 그러한 세상의 냉대에 낙심하지만, 미친 듯이 그림, 오직 그림에만 몰두한다.

 

끌로드의 크리스틴의 누드화를 그리던 중 그녀와 사랑에 빠져 마침내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점점 자신의 그림에만 끌려 그녀를 소홀히 하게 된다. 크리스틴은 끌로드가 자신보다 자신을 그린 그림을 더 사랑한다며 좌절한다. 자신을 그림이 연적이 된 것이다. 끌로드는 한 술 더 떠 대두증 증세를 보이다 죽은 자신의 아이의 시신을 그리는 엽기적인 행각마저 벌인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애초 의도와 멀어진 미완성작을 바라보며 목을 멘다.

 

'작품'은 또한 미술이라는 양식에서 작가의 신념인 '과학'을 찾으려 했다. 인상파 화가들이 그림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빛'이다. 빛의 각도에 따른 사물의 변화, 보색이론 등 그림을 과학적으로 그리려는 당시 화가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이는 낭만주의를 털어내고 근대로 향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강하게 표출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졸라는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 등 대한 자신의 생각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 그는 비단 미술 뿐 아니라 음악까지 깊은 관심을 보인 작가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작품'은 '비참하다'는 면에서 작가의 다른 소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의 비참한 생활, 그리고 종국에 비극적인 결말 등 여전히 그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졸라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진실을 가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 사람이다. 마치 사회고발을 하듯 프랑스 제2제정기의 여러 측면을 그린 그의 다른 작품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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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을 표현하지 않는 예술이 있단 말인가? 여자 모델을 앞에 세워두고, 자기가 느끼는 대로 그리는 것이 예술이 아니겠는가? 홍당무 한 단, 그래 홍당무 한 단이면 어떤가! 직접 관찰하고,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개인적인 필치로 단순하게 그린 홍당무 한 단이 항상 일정한 틀에 맞추어 제작되는 잎담배 색깔을 한 파리 미술학교의 그림 따위보다 낫지 않은가? 독창적으로 그려진 한낱 홍당무가 혁명을 잉태할 수도 있다.

- 61쪽

 

"...이제 필요한 것은 태양인 것 같아. 실내가 아닌 야외의 대기. 그래서 밝고 젊은 그림, 진짜 빛 속에서 움직이는 사물과 사람들이 필요할지도 몰라... 그런 것이 우리가 그려야 할 그림일 거야. 우리 시대에 우리의 눈이 바라보고 만들어내야 하는 그림은 그런 것이어야 할 것 같아."

- 65쪽

 

"아! 인생! 인생이여! 그것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되돌려 놓는 것, 그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 거기에서 영원하면서도 변해가는 진실한 아름다움만을 보는 것, 그것을 거세하면서 고상하게 만들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피하는 것, 소위 추함이라는 것도 오직 여러 특성들 중의 두드러진 현상임을 이해하는 것,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인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신이 되는 유일한 길이야!"

- 134쪽

 

"나는 지금까지 자네들에게 여러 번 말해왔지. 언제나 데뷔할 때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그리고 기쁨은 저 산꼭대기에 도달할 때 있는 것이 아니고, 올라가는 것 자체, 앞뒤 생각 없이 오르는 데에 있다고."

- 301쪽

 

아내라는 것이 사랑하는 여자의 정열을 쇠약하게 만들고, 이 결혼이라는 형식이 사랑의 감정을 죽여버린 것 같았다.

- 378쪽

 

"... 비난은 건강에 좋언 것이야. 인기가 없는 것은 사람을 튼튼하게 하는 학교란 말야. 바보들의 조소 이상으로 사람을 유연하고 강하게 해주는 것은 없거든. 한 작품에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쳤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해. 즉, 즉각적인 정당한 보상, 성실한 평가 따위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그 어떤 기대도 없이, 오직 피부 아래에서 심장이 뛰듯이 아무런 욕심없이 일을 해왔다고 말할 수 있으면 족한 거야. 그러면 언젠가는 세상의 인정을 받으리라는 환상으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죽게 되는 것이지..."

- 432쪽

 

"자네 혹시 이런 생각 해본 적 있어? 어쩌면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공정한 심판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야. 인간이란 현재 모욕을 받고, 인정받지 못해도, 다가올 공정한 미래를 믿기 때문에 위로받는 법인데. 마치 신앙심 깊은 사람이 모든 사람이 공정한 보상을 받는 내세를 굳게 믿음으로써 현재의 추악함을 견디듯이 말이야."

- 522쪽

 

"...우리 세대는 뱃속까지 낭만주의에 젖어 있어서 아직도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들이 아무리 우리의 몸을 씻어보아도, 강렬한 현실 속에 몸을 담아보아도 얼룩은 끈질기게 남아 있고, 세상의 모든 세척제를 다 써보아도 그 냄새는 없어지지 않을 거에요."

- 585쪽

 

"빛에 대한 새로운 견해, 과학적인 분석으로까지 밀고 나간 진실에의 열정, 그토록 독창적으로 시작된 혁신운동이 우물쭈물하다가 손재주 좋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을 잃고 만 것에 화가 나지 않으세요? 이 모두가 목표 달성에 필요한 인간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 587쪽

 

"자, 일하러 가시죠"

- 5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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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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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나에게는, 버트런드 러셀 자서전과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 이은 역대급 첫 문장이다. 이 작품의 대한 리뷰의 상당수가 나처럼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하지 않을까. 첫 문장이 내용 전체를 암시하는 작품이 종종 있다. 까뮈의 이방인은 그 절정이다.

 

사차원적 인간. 모든 것에 무관심한 인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인간. 그런 인간을 까뮈는 '이방인'이라고 불렀다. 이방인 '뫼르소'는 그렇게 주변 사람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점차 소원해져 간다.

 

사건 전개방식은 다소 충격적이다. 엄마가 죽었다.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친구를 만나 이야기 하고, 장례식에 참석한다. 다시 친구와 만남. 그리고 살인. 그리고 재판. 그 재판 결과.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이 짧은 중편에서 모두 연결된다. 작가는 일상적인, 소소한 것들을 점진적으로 큰 이슈로 발전시켰다. 이 점이 충격적이었다.  

 

흔히, '이방인'에는 '부조리'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가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작품에서는 한 번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 137쪽

 

내가 주목한 점은 '이방인'에 나온 사형제도에 대한 작가의 시각인데, 뭔가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아 그 진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작품 중 '단두대에 대한 고찰'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았는데, 그걸 읽으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사형 집행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으며, 요컨대 그것이야말로 사람에게는 참으로 흥미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어째서 그때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 128쪽

 

'이방인'의 스타일처럼, 무관심한 듯한 어투의 짤막짤막 문장으로 리뷰를 써봤다. 원체 쉽지 않은 문장에 이런 식으로 리뷰를 쓰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이방인'은 한 번 읽은 것만으로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씌어진 것 같다. 그 껍질을 벗겨내려면 그의 다른 작품도 함께 읽어봐야 할 듯하다.

 

일러스트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래픽노블의 거장의 작품이라 하지만 일본만화 그림에 익숙한 나에게 이해하기 좀 어려웠다. 작품을 읽는 이해를 돕고자 이걸 선택하긴 했는데, 그것과는 별 관계 없다. 글씨가 작아 읽기 오히려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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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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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 17쪽

 

소리 내어 읽고 싶게 하는, 뒤를 읽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첫문장. '롤리타'는 어린 소녀에 성적 취향을 갖는 중년 남성(험버트 험버트)의 수기 또는 변론 형식으로 전개된다.(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롤리타에 대한 연민을 수시로 이 첫문장처럼 애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기가 포르노그라피 같은 성애 묘사 때문이 아닌 것처럼, '롤리타'의 매력 역시 포르노그라피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언어유희이다. 나보코프는 '배트맨'의 리들러와 같다. 곳곳에 작가의 말장난이 있다. 그야말로 '언어의 마술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아직 내가 (또는 번역자조차) 찾아내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행기'이다. 1부는 롤리타와 연인이 되기까지 과정, 2부는 롤리타와 또는 험버트 혼자 한 미국 여행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1부는 단숨에 읽었지만, 2부는 여전히 매력적인 문장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흥미가 떨어졌다. 그러나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545쪽)' 이라는 나보코프의 지론처럼, 이 작품을 다시 읽는다면 2부의 참맛도 알게 되지 않을까.

 

첫 문장이 매력적인 작품은 많다. 그러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모두 뇌리에 남는 것은, 이전까지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밖에 없었다. 여기에 '롤리타'를 추가해야겠다. 경이롭기까지 한 나보코프의 언어 구사능력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며.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 497쪽

 

2013.3.24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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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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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의 사실, 우리나라에 그다지 작품이 많이 번역된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적과 흑' 단 한편만은 주요 고전 목록에 꼭 들어있다. 

 

민음사, 문학동네, 열린책들 중 열린책들의 번역본을 선택한 이유는 '번역이 좋다'는 평이 주류를 이루어서이다. 민음사 것을 조금 읽었지만 힘들었다. 역자가 우리나라 제일의 스탕달 권위자인 것 같긴 해도 '번역은 결국 우리말을 잘 해야 한다'는 상식에 비추어 봤을 때, 열린책들의 이 역본은 상당히 준수했다.

 

쥘리앵 소렐은 '나쁜 남자'이다. 나폴레옹의 혁명적 기운을 숭배하는 야심찬 젊은이다. 고귀한 신분의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면서 신분상승의 굳건한 의지를 보이지만 결국은 그 사랑 때문에 파멸의 길에 들면서, 자신을 가로막은 귀족과 귀족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와 사랑을 한 마틸드. 후작의 딸로서 굉장한 프라이드를 가졌지만 귀족청년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기운을 쥘리앵에게서 보고 그를 선택한다. 억센 성격으로 끝까지 쥘리앵을 끝까지 구명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지막을 함께 한다.

 

소렐의 첫사랑 레날부인. 온순한 성격의 독실한 신도인 그녀는 그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찾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파멸의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이 소설의 특징이라 하면 극도로 섬세한 심리묘사이다. '사실주의의 효시'라고 하지만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연애감정의 미묘한 싸움, 요샛말로 하는 '밀당'이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모 연애강사가 자신의 저작을 이 작품보다 위에 두었을 정도로, 이 책은 연애심리의 고전인가보다.

 

이 책은 열린책들이 제공하는 아이패드 앱으로 읽었다. 무료인 '그리스인 조르바'에 이어 두번 째인데, 처음엔 주석이 활성화가 안 되었지만 여러번의 업데이트 끝에 잘 읽을 수 있었다. 시력감퇴의 문제만 없다면 상당히 뛰어난 앱이다. 그 서비스가 언제까지 제공될 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2013.7.7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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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에밀 졸라 지음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199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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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혁명적 기운을 보여준 작품.

 

에티엔 랑티에는 기계공으로 몽수 탄광에 찾아온다. 비참한 근무환경 속에서 탄광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던 그는 러시아 출신 공산주의자 수바린을 알게 되고, 국제 노동자연맹(인터내셔널)의 사상에 경도되어 탄광근로자들을 독려(또는 선동)하여 파업을 주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희생하는데, 심지어 정부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시위대는 결국 탄광으로 돌아가지만, 이들의 모습은 많은 노동자들에게는 희망을, 고용주들에게는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들 노동자들이 싹을 틔움으로써 그들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고한다(싹트는 달=제르미날).

 

작품의 기본적인 구도는 졸라의 다른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인간관계, 해피엔딩이라고는 모르는 전개방식이 그것이다. 여기에 소름끼칠 정도로 치밀한 탄광에 대한 묘사는 '역시 졸라'라는 감탄을 자아내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졸라의 다른 작품들('목로주점'.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에 비해 이 작품이 다른 점은, 바로 '희망'을 노래한다는,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작가의 시각이다.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에티엔의 어머니)는 비참하게 굶어죽는다.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의 드니즈는 백화점 사장의 사랑을 얻어 결혼하지만, 전통상인들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르미날'에서 그는 무수한 노동자들이 피를 뿌렸으므로, 그들의 분노를 충분히 보여주었으므로 정부도, 부르주아들도 감히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제르미날'이 에밀 졸라 제일의 걸작로 꼽히는 게 아닌가 한다.

 

세계문학 열풍인 요즘, 에밀 졸라의 이 위대한 작품이 복간(또는 재번역)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빨갱이 소설 내봤자 좋을 게 뭐 있어라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오르한 파묵도 좋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좋지만 에밀 졸라의 앞에 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밑줄긋기

 

"임금 인상이 가능할 것 같아? 임금은 냉혹한 법에 의해, 노동자들이 마른 빵을 먹고 어린애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최저 금액으로 빠듯하게 고정되어 있어... 임금이 너무 낮게 떨어지면 노동자들이 굶어 죽을 테고, 그러면 새로 써야 할 사람의 수요가 늘어 임금이 올라가게 돼. 임금이 너무 높이 올라가면, 일하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 임금은 내려가게 돼... 이것이 못 먹는 자들의 균형이고, 굶주린 도형장에 내려진 영원한 저주야."

- 1권 169쪽

 

"... 불행하게도 우리가 바라는 것은 회사가 우리에게 신경을 그만 써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역할을 해주는 대신에 우리들에게 우리가 벌어들인 것, 우리의 몫을 되돌려주는 정당함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1권, 257쪽

 

모두들 조용히 용기를 가지고 자기들이 내건 슬로건에 복종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종교적이기까지 한 신념이, 신자들이 갖는 것과 같은 맹목적인 헌신이 있었다. 자기들에게 약속된 정의로운 새 시대를 위해, 그리고 보편적 행복의 쟁취를 위해 서 그들은 그 어떤 고통이라도 참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배고픔은 그들의 머리를 고양시켰다. 이 가난의 환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있어 닫혀져 있기만 하던 지평선이 그토록 드넓은 저편을 향해 열렸던 적이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들의 두 눈이 쇠약함으로 인해 탁해지고 있을 때, 그들은 오히려 그들이 꿈꾸어오던, 그렇지만 이제는 훨씬 가까워져서 마치 실제의 것처럼 보이는, 모든 민중이 형재애로 결합되어 있고 노동과 식사가 함께 공유되는 황금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이상의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 1권, 262쪽

 

에티엔은 회사측이 얻어내려고 하는 이번 폭동의 대가를 눈치챘다. 하지만 싸움을 하면 할수록 한층 더 강해지기만 하는 이 거대한 자본의 꺾을 수 없는 힘, 자기들의 발치에 떨어진 소자본의 시체를 집어 삼킴으로써 더욱 더 살찌는 이 막대한 자본의 힘 앞에서 그는 기가 꺾이고 말았다.

- 2권, 114쪽

 

만약에 군대가 돌연히 민중의 편으로 돌아선다면, 혁명을 쟁취하는 일은 얼마나 손쉬울 것인가! 병영에 있는 노동자와 농민들은 다만 자신들의 출신 성분을 기억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것은 최후의 위협이 될 수 있는 동시에 가장 큰 공포를 불러 일으키리라!

- 2권, 114쪽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이사들은 될 수 있으면 사건을 작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들은 고삐가 풀릴 경우 낡은 세계의 노후한 틀 전체를 완전히 뒤엎어버릴지도 모를 군중의 걷잡을 수 없는 야만성을 정당화시켜주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내일에 대한 공포가 가장 두려웠다.

- 2권, 186쪽

 

라스뇌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폭력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단번에 뒤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단번에 모든 것을 뒤바꾸겠노라고 약속하는 자들은 모두 다 익살꾼이거나 망나니들일 뿐입니다!"

- 2권, 197쪽

 

이제까지 노동은 언제나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여러 세기에 걸쳐 누적된 이 체념 속에는, 그리고 또다시 그들의 허리를 구부리게 만드는 이 규율의 유산 속에서 이미 또 다른 확신이 굳건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불합리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만은 없으리라는, 그리고 비록 신이 없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복수를 내려줄 수 또다른 신이 태어나리라는 가슴 뭉클한 확신이었다.

- 2권, 292쪽

 

태양이 붉게 타오른 젊음의 아침은 즐거운 웅성거림으로 들판을 부풀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싹트고 있었다. 서서히 밭고랑을 가르고 있는 복수의 검은 군대는 다가올 세기의 추수를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돋아나는 이 사람들의 싹은 머지않아 대지를 터뜨릴 것이었다.

 2권,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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