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2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2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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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장편 중 양대 걸작과, 단막극, 단편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쾌활함과 넘치는 자신감, 떠벌이는 여전하지만, 고독과 고뇌가 그만큼 깊어졌다. 세상을 지배하는 왕을 자처하지만 운명 앞에서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결정판 1권과 달리, 뤼팽의 대변지 가 '에코 드 프랑스'에서 '그랑 주르날'로 바뀐 점도 눈길을 끈다.


『속이 빈 바늘(기암성)』


'기암성'은 아마 어린이 추리소설 목록에 빠짐없이 포함되는, 뤼팽 시리즈 중 최고의 걸작일 것이다. 어릴 적 TV 인형극으로도 나왔었고(노래 가사까지 기억한다. '루~하 루루 루루하 루팡! 루루루루팡 우하~'), 금성출판사 전집의 책으로도 읽었더랬다. 레몽드와 뤼팽이 결혼하고, 이지도르 보틀레, 가니마르, 셜록 홈즈가 탐정으로 등장했고, 레몽드가 홈즈의 총에 맞아 죽는 정도만 생각난다. 그러하기에 거의 30년 만에 읽는 이 완역본은 처음인 것이나 다름없었고, 실제 처음과 끝을 제외한 중간 부분은 블랙박스였기에 숨죽여 가며 재미있게 읽었다. 이제는 패턴에 익숙해져서 누가 뤼팽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지만(작가도 독자들이 이정도는 알아볼 거라는 건 예상했을 거다) 부수적인 것이고, 노르망디 지역에 로마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거대한 이야기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이 굉장한 흡입력 있었다.


이 작품은 아르센 뤼팽의 흔적을 추적하는 이지도르 보트를레 소년탐정의 모험담이다. 그 이야기자체도 대단하지만, 작가는 이지도르의 입을 통해 자신의 '추리 기법'에 대한 철학을 말하고 싶은 듯했다. 이지도르는 기존의 증거물들을 모아 퍼즐처럼 맞춰가는 수사기법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만약 그 증거물들이 뤼팽이 고의로 뿌려놓은 가짜라면 수사는 미궁에 빠지 셈이라고 본다(이는 셜록 홈즈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며, 역자 해제에서 비슷한 설명이 있다). 그보다는, 눈 앞의 현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논리적으로 완벽히 설명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먼저 상상한 후 그 범위 내에서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지도르도 에귀유 크뢰즈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 후 심기일전하여 만회하긴 했지만.


두번째 뤼팽을 읽어나가면서 느낀 또다른 매력은, (주로) 프랑스의 역사적 사실에서 소재를 찾아, 팩트와 픽션의 경계선상에서 사건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역사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방식이다. 이번에는 '철가면'이라는, 많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왕정기의 정치 사건을 배경으로 하면서, 카이사르, 샤를마뉴, 정복왕 기욤 등 많은 영웅들을 엮어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런 식으로 소재를 개발하는 건 작가의 최대 장기이고, 프랑스인들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거기에 민족주의가 한창이던 제3공화국 시기, '옛 보물들을 발견해서 조국 프랑스에 기부하는 천재 도둑의 영웅적인 모험담'은 슈퍼챗을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불만은 번역의 제목이다. 본문에도 등장하는 '기암성'이라는 말의 프랑스어는 알 수 없으나, 전체를 읽고 나니 국역본 제목은 원제대로 '에귀유 크뢰즈' 또는 '속이 빈 바늘'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에귀유 크뢰즈'라는 용어 자체가 이중 트릭인데, '기암성'이라는 단어는 그러한 트릭을 암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암성'이 아니라 '에귀유 크뢰즈'로 부르기 운동을 나 혼자서라도 전개해야겠다. '강백호'를 '사쿠라기'로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숙제이겠지만, '폭풍의 언덕'이 아닌 '워더링 하이츠' 제목의 번역서가 최근 출간된 사례를 보면 불가능은 아닐 거라 본다(일단 이 글에 해시태그부터 달겠다).


여담으로, 강원도 동해시의 한 해변에는 '추암' 또는 '촛대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원뿔형의 '에귀유 크뢰즈'와는 달리 이 바위는 진짜로 위로 일자로 솟아 있다. '추암'은 '송곳바위'라는 뜻이니 '에귀유'이긴 한데, '크뢰즈'인지 여부는 모르겠다. 생성원리는 같을까? 추암에 대한 자료가 없어 확인할 길은 없다.




『813』


2014년 '까치'판으로 한 번 읽고 이번이 두번째인데, 그때에는 대충 읽고 되팔아서, 뜻밖의 인물이 뤼팽이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속이 빈 바늘』과 마찬가지로 처음 읽는 것과 같은 셈.


지금 보니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작품이다. 뛰어난 순발력으로 매 순간 위기를 헤쳐나가는 스킬, 인간(그리고 독자들) 심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사람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솜씨가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동시의 인간 뤼팽의 한계도 드러나는데, 모든 상황을 완벽히 통제하는 듯한 그였으나 『속이 빈 바늘』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좌절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사람들의 인생마저 조작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안되는 걸 보면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떠올랐는데, 막판에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게 증명되었다). 


또, 이전 편에서는 뤼팽의 행적을 다른 탐정들이 추적하는 형식이었는데, 이 편은 반대로 '보이지 않는 살인범'을 뤼팽이 한편은 두려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하면서 추적하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다시 말해 '도둑'이 아닌 '탐정' 역할이 크게 부각된 첫 작품 같은데, 실제로 그는 초반을 제외하고는 물건을 거의 훔치지 않았다.


아마도, 작품의 '국뽕'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전의 역사를 소재로 삼았던 이전 편과 달리, 동시대의 국제정세를 다루고 있는 점에서 눈길이 가는데, 프-독-영 간 모로코 식민지분쟁이 그를 매개로 해결되고, '알사스-로렌 지역' 영토분쟁에 대한 작가(그리고 프랑스)의 입장이 그의 입을 통해 대변되었으니, 주인공이 도둑질만 하고 다녔다면 좀 그렇지 않았겠나(공무원 사칭도 중범죄이긴 하다). 이 작품은 프랑스 판 '독도는 우리땅'인 셈이다.


한편으로, 작품을 통해 19세기 말에 있었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반성, 사형제 폐지 등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보이지 않게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 선배 문인 빅또르 위고가 『사형수 최후의 날』, 『레 미제라블』 등 작품을 통해 사형제 폐지를 강하게 주장한 바 있는데, 18세기도 아니고, 1차 대전을 앞둔 시점에 기요틴으로 사형을 집행했다는 게 충격적이기도 했다.


에피소드마다 바뀌는 뤼팽의 로맨스는 여기서 이르러 막장을 타는데, 피살자의 부인에게 연정을 품는다는 것이다(외국에서는 흔한 일이면 말고... 007이 여기에 영향을 받았나?). 그러다가 마침내 사랑하는 여자마다 죽는다는 말을 되뇌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한다(이것도 '섹스한 여자는 모두 죽는다'는 제임스 본드 법칙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불행히도 운명이 나보다 더 강하더구나."


마지막으로, 오역은 아니지만 지적하고 싶은 게, 『속이 빈 바늘』에서 '縣'으로 번역했던 행정구역이 여기에서는 '道'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앵드르 현, 크뢰즈 현, 몽토네르 도). 각기 다른 사람이 번역한 전집이라면 모를까, 한 사람이 번역한 '전집'의 바로 앞뒤 작품이 다른 것은 아쉽다.



『아르센 뤼팽의 어떤 모험』

별다른 반전은 없고,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가벼운 꽁트이다.



「암염소 가죽옷을 입은 사나이」


역자 해제 전에 작품 먼저 읽었어야 했다.


*리디셀렉트로 읽음

**이번 권을 읽으면서 전권 종이책 소장욕구를 강하게 느꼈다. 다만, 다른 리뷰에서 지적된 오역이 전자책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 보류.

"...나는 우선 사건의 일반적인 개념부터 찾아내려고 한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일반적인 개념에 부합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가설을 하나 상상하지요. 그래서 적당한 가설이 떠오른 다음에야, 주어진 자료와 사실들이 그 가설에 들어 맞는지 검토한답니다. 『속이 빈 바늘』

"그렇다면 나는 안심이고.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줬던 단 한 사람이 오늘 나의 이 모습을 못 알아본다면, 이제부터 지금의 이 모습을 보게 될 그 누구도 진짜 나의 모습을 못 알아볼 테니까 말이야." 『속이 빈 바늘』

"1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난 거나 같아. 아르센 뤼팽은 남들 1년 살 때, 10년은 사니까." 『속이 빈 바늘』

"나는 오로지 진실의 입장에서만 입을 열 것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목청껏 소리 높여 외치는 기쁨을, 아니 그 어쩔 수 없는 욕망을 말입니다. 진실은 언제까지나 그것을 더듬거리며 발굴해낸 자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움트는 법, 그것은 언젠가 수줍음을 떨친 채 파릇한 몸짓으로 뛰쳐나올 것입니다!..." 『속이 빈 바늘』

"...아무리 대중의 짓궂은 호기심이라 해도, 파렴치한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의 벽을 함부로 유린하는 게 다반사라면 우리 시민의 안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고도 진실을 좀 더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둥 운운하시겠습니까?..." 『속이 빈 바늘』

"... 이 아르센 뤼팽이 조국 프랑스에 얼마나 많은 걸작 진품을 기부해왔는지 깨닫게 될 것이네. 하긴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자행한 짓과 하나 다를 것도 없지..." 『속이 빈 바늘』

"...왼쪽에 있는 건 런던 직통 전화지. 런건을 통해서는 미국과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까지 거머쥘 수가 있지! 그 모든 지역의 숱한 회계원들이나 중개인들, 정보원들, 선전꾼들이 다 내 휘하에서 움직인단 말일세. 그야말로 국제적인 그물망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세계 시장인 셈이지..." 『속이 빈 바늘』

"...에귀유 크뢰즈는 그 자체가 곧 ‘모험‘을 의미하네. 그것을 차지하고 있는 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모험 속에서 살아야 해. 하나 그것이 내 수중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나의 과거는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네. 그리고 미래가 시작되는 거지. 내가 레몽드의 시선에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평화와 행복의 미래 말일세..." 『속이 빈 바늘』

"문제는 그 모든 게 말뿐이라는 거요! 대중은 행동을 원합니다, 행동을! 단 하나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건 범인을 붙잡아서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813』

"...실은, 너무 흥미롭고 또 내 격에도 맞는 사건인 것 같아, 지난 4년 동안 책과 내 충견 ‘셜록‘ 사이에서 아늑하게 지내던 보금자리를 모처럼 털고 나서기로 했답니다." 『813』

"...나는 제일 큰 부자보다 더 부자라네. 왜냐면 그 부자의 재산이 모두 내 것이니까. 마찬가지로 이 세상 어느 권력자보다도 나의 권력이 더 강하지. 그 권력자가 나를 위해 일을 하니까 말일세." 『813』

"...내가 자네보다 한 수 위일 수밖에 없는 비결을 제발 명심 좀 하게나. 난공불락의 육체에 불굴의 영혼 말이네!" 『813』

"실제로 범죄자 인체측정과에서 찾아낸 아르센 뤼팽의 색인표에는 지금의 당신 인상과 전혀 닮은 데가 없는 기록만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오."
"이거 점점 더 오리무중인걸."
"설명도 그렇고, 제반 치수도 그렇고, 지문 역시 완전히 달라. 결정적인 건, 사진상으로 전혀 닮지가 않았다는 거요! 따라서 이제는 우리 앞에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밝힐 것을 요청하오." 『813』

이 모든 것은 언젠가는 나의 상임 전기 작가께서 나 자신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작성하여 출간하게 될 매우 독특한 이야기에서 낱낱이 다루어질 것임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손 대대로 매우 흥미롭게 읽을 프랑스 역사의 멋진 한 페이지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813』

"자, 잘 봐라! 지금 난 경찰에 몸담고 있다. 할 수 없지 않은가. 원래 우리 같은 범죄 전문가나 대도(大盜)는 다 경찰 쪽으로 돌아서게 되어 있는 법이지." 『813』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처형당한 것도 아니잖소? 대중의 증오에 내던져진 건 어디까지나 말레이히라는 이름이오. 정확히 범인의 이름 말이오. 그럼 됐지, 뭘 더 바랍니까?" 『813』

"...불행히도 운명이 나보다 더 강하더구나..." 『813』

"전 프랑스인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긴 황제의 심기에 찬물을 끼얹기 충분한 대답이었다.
"당신을 구속하던 끈이 모두 제거된 상태라더니..."
"그것만큼은 제거될 수가 없는 끈입니다, 폐하." 『813』

바다가 날 원치 않았든 마지막 순간에 내가 바다를 원치 않았든, 하는 수 없이 이제는 모로코 놈들의 총알이 그보다 더 관대한지 알아보는 수밖에! 더구나 그게 더 멋지지 않겠어? 프랑스를 위해 적을 무찌르는 뤼팽 말이야!" 『813』

요즘 시대처럼 예술만으로 벌어먹기 힘든 세상에선, 그때그때 칭길 줄도 알아야 한다! 『아르센 뤼팽의 어떤 모험』

상황은 서로 현저히 다르지만, 비슷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같은 유형의 범죄사건이 우연히 반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네. 하지만 자네뿐만 아니라 다른 보통 사람들이 그걸 꺠우치려면 누군가 나서서 눈을 뜨게 해주어야 했지. 이를테면 내가 쓴 편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거야..." 「암염소 가죽옷을 입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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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1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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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뤼팽은 어릴 적『기암성』과 『수정마개』 , 그리고 (이 결정판을 통해 안 것이지만) 홈스가 처음 등장한 단편 하나를 읽은 게 전부였던 걸로 기억한다. 


세계 최초의 뤼팽 집대성인 만큼, 결정판 1권은 거의 역자가 센터에 섰는데, 본인이 쓴 서문을 비롯하여 각종 해설이 초반을 빼곡히 차지한다. 당연히 그에게는 자격이 있으리라.


첫 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아르센 뤼팽의 출발일 뿐 아니라, 작가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기법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는 역자의 설명도 있고(과연 그렇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작품에서는 자신을 뤼팽이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자 서술자로 소개하기도 한다. 모리스 르블랑 자신이 뤼팽의 행적을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프리퀄 격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도 소개된다. 셜록 홈스에 대한 경의가 곳곳에 배어 있으며 그의 첫 등장도 여기서부터이다. 무엇보다 대도가 체포되고 탈출하는 방식으로 전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단숨에 대중의 시선을 잡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두번째 권, 「뤼팽 대 홈스의 대결」은 홈스와의 대결을 담은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재미있게 읽었다. 대도와 명탐정 간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전개가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누구도 우위에 두지 않는 결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뤼팽의 난봉질도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만, 왓슨이 얼빵하게 행동하는데다, 심지어 그를 忠犬에 비유하는 점이 아쉽고(르블랑이 자신을 뤼팽의 왓슨 역할로 자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홈스가 왓슨을 무시하거나 여자를 향해 총을 겨누는 등 행동이 원래의 캐릭터를 충실히 살린 것인지 의심스럽다. 홈스가 아니라 에를로크 숄메스라는 핑계를 댈 수는 있겠지만.


셋째 권, 「아르센 뤼팽, 4막극」은 본 결정판을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희곡이라고 한다. 희곡은 거의 읽지는 않는데 이 형식의 추리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쥐덫』이후로는 처음이라, 대도의 행각을 관객 앞에서 시각적으로 어떻게 그려낼지는 분명 흥미를 자아내는 점이다. 그 외에도 이 희곡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서 처음 소개되는 루팽의 주변 인물들이 몇 명 있기 때문이다. 


책의 출간연도가 1900년대 초반인 점을 고려하여, 그 시대의 기술, 문화, 유럽의 역학관계 등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게 좋았다. 일례로, 초반부터 뤼팽이 '수퍼카'를 끌고 다니고, '택시'도 등장하는 반면, 말과 마차도 함께 거리를 다닌다. '가스등'이 있는가 하면 '전등'도 보급되어 있다. '전화'와 '전보'가 공존한다. 잠수함 관련 국뽕 에피소드도 소개된 점은 1차대전의 전조를 느끼게 한다.


전반적으로 아쉬운 점은, 의외로 번역이라 하겠다. 세계 최고의 뤼팽 덕후의 성과물인 만큼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누구보다 높고 오역도 거의 없을 거라 생각된다. 향후 몇십년간 우리나라에서 이 권위를 능가하는 번역본이 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 포털을 검색해 봐도 번역에 대한 불만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 개인에 한한 문제이길 바라지만) 아쉽게도 나는 역자의 번역이 쉬이 읽힌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페라의 유령』과 조르주 심농의 작품 하나가 그랬다. 「뤼팽 대 홈스의 대결」이라는 제목이 그의 번역에 대한 나의 불편한 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아닌가 한데, 「뤼팽 대 홈스」(이게 원제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또는 「뤼팽과 홈스의 대결」이 맞지 않나? 이런 번역들이 암암리에 있다면 몰입에 방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를로크 숄메스'를 '홈스'로 표기한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역자는 '영미권에서도 '뤼팽 대 홈스'라고 번역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했으나, 내가 알라딘에서 'Lupin'을 검색한 결과 '홈스'로 한 표기는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본식 역어들을 그대로 계승한 점이 안타깝다. 'Gentleman-thier'라면 '괴도신사'가 아니라 '신사도둑'이라고 해야하지 않겠나. 그의 본질이 '도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둘의 뉘앙스는 완전히 다르다. 일본식 역어나 기존의 오역 제목들이 역자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세계최초 결정판'임을 자부했다면 좀 더 신경써줬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 문학 번역계가 함꼐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어쨌거나, 어린시절 추억을 곱씹을 수 있어 보는 내내 즐거웠다. 읽어볼 마음이 생기도록 이렇게 멋진 전집을 출간한 역자와 출판사에 고마움을 표한다. 일단은 좋아했던 「수정마개」까지는 보고 열 권을 모두 읽을지 결정할 생각이다.


*리디셀렉트로 읽음

무엇보다 아르센 뤼팽을, 그 태양처럼 빛나는 열정과 자신감뿐 아니라 고독과 실존의 그림자까지도 사랑하여, 그가 펼쳐 보인 파란만장한 모험들 하나하나에 흔쾌히 동참해온 친구들, 그리고 동참할 준비가 된 모든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전집을 펴낸 것 같아, 한없이 기쁘다.

이 얼마나 기괴한 여행이란 말인가! 그래도 시작은 꽤 좋았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보다 더 신나는 기분으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도대체 왜 한정된 모습만을 가져야 하는 거지? 늘 똑같은 성격을 굳이 왜 고집해야 하느냔 말일세. 어차피 내가 저지른 행위들만으로도 충분히 나라는 사람이 떠오를 텐데 말이야." (중략) "‘이자가 아르센 뤼팽이오!‘하고 분명히 얘기할 수 없으면 더 좋지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이건 아르센 뤼팽이 저지른 일이다!‘라고 확실히 명심하는 것이니까."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 저들은 내 윗도리 안감까지 뜯어보고 신발 밑창까지 훑어내는가 하면 이 보잘것없는 벽면도 여차하면 두드려대면서도, 누구 하나 이 아르센 뤼팽이 훨씬 손쉬운 은닉처를 고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더라고요! 바로 그런 맹점 때문에 내가 편해요." 「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

"... 마치 내 맘대로 섞은 카드 패처럼, 나한테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이미 하나 조성되어 있었다오. 다름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언제 나의 탈출이 현실로 드러날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당신을 포함해서 숱한 사람이 빠져버린 그 엄청난 미몽(迷夢)에다 결국 나는 나의 자유를 판돈으로 내건 거나 다름없었소. (후략)"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

"...보드뤼든 다른 누구든 되어본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오. 개성을 마치 셔츠를 갈아입듯 바꾸고, 외모와 목소리, 눈빛, 필체 따위를 맘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 말이오! 하지만 문득 그 모든 모습 가운데서 진짜 자기 자신을 못 알아볼 때가 있어요. 그땐 몹시 서글퍼진다오. 지금도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요. (후략)"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

"...도둑질이란 얼마나 쉬운가 말이야! 왜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손쉽고도 안정된 직업을 마다하는지 모르겠어. 약간의 기술과 머리만 있으면 이보다 더 매력적인 일도 없을 텐데 말이야. 이처럼 편하고 이처럼 견실한 직업이 또 어디 있겠어? (후략)" 「흑진주」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 당신이 알아낸 것은 무시하세요. 현재를 떠나 부디 과거를 돌아보세요. 저는 간밤에 당신이 본 사람이 아니라, 그 옛날 당신의 시선이 머물렀던 존재입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옛날에 당신이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저를 바라봐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제가 그렇게도 변했나요?" 「셜록 홈스, 한발 늦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그자를 신뢰하는 겁니까?"
홈스가 감탄한 듯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조건 신뢰합니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옳지요? 그가 원하는 일은 모든 게 성취되고, 당신은 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 있겠죠?"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뤼팽 대 홈스: 금발의 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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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엠
앙리 뮈르제 지음, 이승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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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어려웠던 때가 다들 있다. 20대부터 승승장구하던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어려움을 뚫고 부와 명성을 거머쥔 이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이 책 '보헤미안의 생활정경', 일명 '라 보엠'은 자유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유라는 건 각 분야 네 예술가(보헤미안)의 삶이 돈에 얽매이지 않고 지극히 자유분방하다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건 각자의 연인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게, 배경이 19세기 중반의 파리였음에도 그 사랑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연인이 만나고 함께 살고, 그러다 싸우거나 구속됨에 지쳐 헤어져 다른 연인을 만나지만 서로를 잊지 못해 돌아오곤 한다. 동시대인 프랑스 제2제정 시기를 다룬 에밀졸라의 '목로주점'이 여자가 전남편과 현남편 둘과의 기묘한 동거를 묘사하고 있다. 지금의 프랑스인들도 결혼보다는 동거를 선호한다고 하는데, 이미 이 이전부터 프랑스는 연인들의 동거가 일반화 되었던 것 같다.

 

나아가, 두 여자 주인공의 당당함이란! 그들은 서로 닮은 듯 다른 캐릭터이다. 먼저, 미미는 캐시미어 등 비싼 물건을 사줄 수 있는 재력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 푸른 눈에 반한 폴 자작의 마차에 몇 번이고 오른다. 반면, 뮈제타는 그 매력에 남자가 줄을 서기 때문에 입맛대로 고른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건 언제나 마르셀이라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한다.

 

'80프랑짜리 코르셋 안에 심장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아요...'

 

'후렴구는 마르셀이에요...'

 

이러한 당당함으로, 둘은 보헤미안 남친들과 귀족 젊은이들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영국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게 20세기 초이고, 프랑스는 20세기 중반이다. 그런데 투표권과 관계 없이, 이미 100여 년 전부터 프랑스 여성들은 자신들의 권리, 사랑 등을 주장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물론 목로주점의 제르베르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어찌됐든, 진솔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크게 성공을 거두어, 작가인 뮈르제는 안정된 여건 속에서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돌프는 바로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뒤마나 발자크 처럼 돈에 쫓겨 살다 끝난 것 같은데, 그로서는 무척 다행이다.

 

19세기는 프랑스 문학계에 엄청난 작가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였다. 발자크, 빅토르, 알렉상드르 뒤마, 뒤이어 에밀 졸라 등등... 다들 사회문제를 고발하거나 남자들의 모험담을 다루는 등 묵직한 글들을 썼다. 그 틈새로 이렇게 작고 아기자기한, 현대 시트콤의 원형이 될만한 이야기를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은 이 연작소설의 에피소드 몇 개를 재구성한 것인데, 미미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캐릭터들의 특성을 그대로 잘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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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즐긴다 지만지 드라마
빅토르 위고 지음, 이선화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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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금까지 본 오페라가 40편 이상인데, 그 작품의 원작인 문학작품들을 읽어본 게 하나도 없었다. 한때 위고, 졸라, 디킨스 등에 빠져 지냈는데도.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읽었던 작품들은 오페라 작곡가들이 별로 안 땡겨했던 것 같다(푸치니에게 '레 미제라블'의 오페라화 제안이 갔었으나 거절했다고). 내가 즐겨 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오페라의 원작들은 대부분 희곡인 것 같고, 그래서 실러, 괴테, 셰익스피어 등의 희곡 작품들이 오페라 작곡가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절치부심해서 간만에 서양고전문학을 읽어보기로 했고, (비싸지만) 이 작품을 택했다.

 

의외로, 위고의 이 작품과 베르디의 '리골레토'는 거의 내용이 같다. 오페라는 희곡의 마지막 한 장(scene)만을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나는 오페라의 엔딩이 더 마음에 든다). 주인공이 '왕'에서 '광대'로, 등장인물의 이름과 공간만 바뀌었을 뿐, 귀족계급을 까기 위한 목적의식까지 똑같다.

 

희곡은 '레 미제라블'이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봤던 것처럼 위고 특유의 장광설로 빼곡하다. 오페라는 가락이라도 붙어 있지, 이걸 어떻게 다 외워서 말할지 의아할 정도. 당연히, 리브레토의 상당 부분이 희곡의 대사를 차용했지만 대부분 축약되어 있고, 그래서 오페라에서는 동기라든가 이해가 잘 안되던 부분들을 이 작품을 통해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놀라웠던 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이 프랑수아 1세가 남긴 시에 곡을 붙였다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남았을 그 싯구가 베르디의 음악을 타고 지금까지 모든 이들의 뇌리에 남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위고가 했다는 유명한 말, '인생은 꽃, 사랑은 그 꽃의 꿀'이라는 구절을 여기서 발견한 것도 반가웠다. 매우 낭만적으로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프랑수아 1세의 작업용 멘트라는 걸 알고는 환상이 다소 깨지긴 했지만, 역시 위고의 말을 다루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지막으로, 해설이 매우 풍부하다. 박종호의 '리골레토' 해설과 겹치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을 참고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리골레토'를 더 즐기고 싶다면 이 희곡을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곳곳에 문맥이 다소 이상해 오역 스멜을 풍기는 곳이 몇 군데 있긴 해도 전반적으로 번역은 훌륭한 편이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별 하나 삭제.

백작, 이번 연애사는 어떻게든 성사시키고 싶구료. 출생도 불확실하고 부르주아 여자이긴 하지만 미모가 여간 아니거든.

연애사에서 허술한 전략의 보완책은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죠. 위장술 말입니다.

저는 꼬투리 잡는 일에 열중할 테니 폐하께서는 즐기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 참 상서롭지 못한 징조올시다! 왕이 향락에 빠진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지요.

왕께서 누리는 즐거움은 늘 누군가에게서 가로챈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누이건 딸이건 부인이건 유혹으로부터 잘 지켜내십시오. 도락에 빠진 권력자는 해를 끼칠 생각밖에는 안 하는 법이니까요. 그 안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건 백성들 몫 아니겠습니까. 입으론 웃고 있어도 안으로는 온갖 뾰족한 이빨을 숨기고 있지요.

눈을 멀게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지요.

당신은 왕이고 저는 아비입니다. 나이로 보면 왕권을 가져 마땅한 나이지요. 우리는 둘 다 머리에 왕관을 두르고 있지요. 그 누구도 금으로 된 백합 왕관을 쓰고 있는 폐하나 백발을 하고 있는 제게 방자한 시선을 던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 둘 다 처지가 비슷하군. 한 명은 가시 돋친 혓바닥을 갖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뾰족한 날을 품고 있고. 내가 사람들을 웃기는 사람이라면, 저자는 죽이는 사람이고.

인생은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고, 사랑은 그 꽃에서 난 벌꿀이지. 사랑은 하늘에 있는 독수리와 맺어진 비둘기와 같은 것이라오. 사랑은 밀어붙이는 힘에 전율하는 은총과 같은 것이오. 사랑은 가만히 내 손 안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는 그대 손과 같은 것이지.

악마는 자기 식대로 일을 풀어나가지요!

여자는 죽 끓듯 변덕을 부리지.
여자를 믿는 건 미친 짓이라네.
여자는 수시로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과 같으니.

저 자 이름 마리오? 내 이름도 알고 싶지 않소? 저 자 이름은 죄이고 내 이름은 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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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시몬 베유 - 여성, 유럽, 기억을 위한 삶
시몬 베유 지음, 이민경 옮김 / 갈라파고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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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지 프리드먼이 유럽연합의 위기를 진단한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을 읽으면서, 유럽의회 의장을 역임한 시몬 베유의 자서전을 읽은 것은, 우연이지만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유럽연합의 기원을 한 개인의 경험에서 짧게나마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로 다른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국가들)의 통합이란 매우 어렵다. 우리가 교련 수업이나 안보 교육을 받을 때와 같이 '세계는 상시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과 소련의 부상, 전쟁의 참상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출범한 유럽공동체였고, 시몬 베유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시몬 베유는 그 취임연설에서 '평화, 자유, 번영'을 외치면서 초기 유럽 공동체가 나가갈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년이 흘렀다. 거의 내 나이와 같다. 평화가 너무 길어서였을까? 유럽연합은 다시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2차대전 이후) 혐오의 시대가 다시 다가오면서, 그리고 코로나19의 부상으로 유럽은 다시 갈라서고 있다. 2017년 그녀의 사망에 전후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그녀가 꿈꾸던 유럽 모델이 소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일까? 유럽연합을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혐오가 증가함에 따라 홀로코스트와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

 

또한, 이 책은 몇 년 전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나에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와 더불어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임신중단(Termination of pregnancy)' 이 표현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낙태'가 태아에 초점을 둔 성차별적 표현이로, 그녀는 임신중단이라고 명명하고 있다(아니면 역자가 페미니스트로서 그렇게 번역한 것일수도...). 어쨌든 가톨릭 국가에서, 의료인에 의한 임신중단을 합법화-양성화한 것은, 피임과 더불어 여성의 몸을 남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임신중단법을 제창하는 그녀를 향해 '태아를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라고 문명국가 의회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난을 무릅쓰고 말이다.

우리 가족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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