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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년 118

오늘의정진: 窮釋子口稱貧 (궁석자구칭빈)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하나


- 100일 정진, 24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스물 세번째 구절은 

<調古神淸風自高貌悴骨剛人不顧/조고신청풍자고모췌골강인불고

옛적의 신령하고 맑은 바람과 같은 곡조 스스로 높고겉 모습 초췌하나 뼈는 강한 사람은 뒤 돌아보지 아니한다> 였다


불고(不顧)는 좌고우면(左顧右眄이었다

왼쪽으로 돌아 보고 오른쪽을 흘겨보다는 의미이다

살불살조의 심정으로 살아야 함에도 우리는 늘 현실에 타협하고야 만다.

늘 의심해야 함에도 언제나 편안함에 안주하고야 만다.

불고(不顧)는 한 눈 팔며 돌아보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당당하게 걸으라는 말이었다.

수처작주,입처개진(随处作主,立处皆真머무는 곳 마다 주인이 되고서는 곳 마다 진리가 되게 하라는 임제(临济선사의 할과 같은 경책이었다.

그러니 성철 스님께서 하신 거뜰떠 보지 말라고 한 뜻도 결국 같은 맥락이었던 것이다.

수행의 길에서 진리가 아니면 거들떠 보지 마라.’

오직 구도를 향한 마음의심이 신심(信心)으로 변화한다.

 

오늘은 스물 네번째 구절

窮釋子口稱貧(다할 궁해석할 석아들 자입 구저울 청가난할 빈)

궁석자구칭빈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하나

實是身貧道不貧 (사실 실바로 시몸 신가난할 빈길 도아닐 불가난할 빈)

실시신빈도불빈사실 몸은 가난하여도 도는 가난하지 않으리

 

어제의 구절 貌悴骨剛(모췌골강)’과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모체(貌悴)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초췌하다는 뜻이었다

궁석자(窮釋子) 는 궁색한 부처님 제자를 뜻한다

즉 궁색한 부처님 제자는 무소유를 실천하며 남들의 시선으로 보면 걸인과 다를 바가 없다

수행자는 세속적인 부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세속(世俗)의 부(富)가 아닌 탈속(脱俗) ()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희열은 그 어떤 물질적인 만족 보다도 더 크다.

또한 골강(骨剛)  뼈처럼 강한 강건한 정신굳은 마음을 뜻한다고 했다.

결국 수행자는 겉모습은 초췌해 보이고 몸도 가난하지만 , 마음은 강건하여 도가 넘쳐 흐르니 어찌 가난하겠는가? ‘는 뜻으로 갈무리가 된다

 

<일일 소견>

나는 수처작주,입처개진(随处作主,立处皆真처럼 당당하게 살고 있는가?

한 눈 팔지 말고 움츠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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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17

오늘의정진: 調古神淸風自高 (조고신청풍자고) 옛적의 신령하고 맑은 바람과 같은 곡조 스스로 높이고


- 100일 정진, 23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스물 두번째 구절은

<常獨行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상독행상독보, 달자동유열반로

항상 홀로 행하고 항상 홀로 거닐며, 통달한 자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다> 였다.


깨달음은 철저한 고독한 수행의 결과인 것 같지만 사실은 본래 혼자가 아니 였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 안과 밖의 수많은 인연들이 없었다면 어찌 이룰 수 있으랴?

이는 법성게(法性偈)<一中一多中一, 一卽一多卽一(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어, 하나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이 떠오르게 하는 구절이다.

하나와 일체는 둘이 아니다.

오늘은 스물 세번째 구절

調古神淸風自高(고를 조, 옛 고, 신 신, 맑을 청, 바람 풍, 스스로 자, 높을 고)

조고신청풍자고 / 옛적의 신령하고 맑은 바람과 같은 곡조 스스로 높이고

貌悴骨剛人不顧(모양 모, 초췌할 췌, 뼈 골, 굳센 강, 사람 인, 아닐 불, 돌아볼 고)

모췌골강인불고/ 겉 모습 초췌하나 강골한 사람은 뒤 돌아보지 아니한다


본래 청풍(淸風)은 맑은 바람이란 뜻이다.

여기서 신령스러운 청풍은 고아(高雅)한 정신을 상징한다.

調古神淸風自高 (조고신청풍자고)

옛 스럽고 고아한 의미를 담아낸 노래 곡조를 스스로 높여 부른다는 뜻이 된다.

모췌(貌悴)는 겉 모습이 초췌하다는 뜻이다.

골강(骨剛) 은 뼈가 단단하는 뜻인데 여기서는 마음이 단단한 걸 뜻한다.

貌悴骨剛人不顧 (모췌골강인불고)

겉 모습은 초췌해 보이지만 사실 내면이 단단한 자는 뒤 돌아 보지 않는다는 뜻이 되겠다.

불고(不顧)에서 고()는 돌아 본다, 돌 보다,  반성하다는 등의 의미를 지녔다.

그런데 무엇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일까?

이미 지나 간 일이나, 생각들 일까? 후회하지 않는다는 의미 인가?

명확하지 않다.


성철(性徹1912~1993) 큰스님께서는  부분에 대해서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해석하셨다.

앞서 모췌(貌悴) 즉 ' 모습이 초췌하다'는 뜻은 '일체 번뇌 망상이 끊어졌음'을 의미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골강(骨剛) 뼈가 단단하다는 것은 마치 '진여(眞如) 뼈가 아주 단단하다' 뜻이라고 하셨다.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져 이제는 완전히 진여가 드러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스님 역시도 불고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은 설명을 하신다.

모든 망정이 끊어진 상태라 아상(我相), 인상(人相) 모두 없어진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거들떠 보지 말라는 뜻인데 그런데 도대체 거들떠 보지 말라는 뜻일까?

불고(不顧) 무엇을 돌아보지 말라, 혹은 거들떠 보지 말라는 것인가?


영가현각((永嘉玄覺665~713) 스님은 구절을 넣었을까?

무엇을 불고(不顧) 하는가?

무엇을 불고 하는가? 무엇을 거들떠 보지 않는가?

초췌한 겉모습을? 뼈와 같이 단단한 내면을?

이제 구절은 화두(話頭) 되어진다.

<일일 소견>

화두(話頭)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의심(疑心)이다.

이 의심이 점점 커져야 한다. 무엇을 불고하는가? 무엇을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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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없는데이터 2025-01-17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익숙함 속에서 의심을 발견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올려주신 글을 읽으며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환경은 너무나 익숙하고, 그 익숙함 속에 ˝의심˝은 종종 묻혀버리곤 하죠. 하지만 이 문장을 통해 익숙함 속에서도 의문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배웁니다. 결국, 의심은 새로운 통찰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감사합니다.

마힐 2025-01-17 16:07   좋아요 0 | URL
dbTlla 님의 썸내일이 바뀌셨군요. 잠깐 의심(?) 했습니다. ㅎㅎ
dbTlla님 말씀 처럼 익숙함은 우리를 편하게 하지만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지요.
나이를 먹을 수록 익숙함에 익숙해 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함 보다는 의심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깨달음의 여정 길에서 도반을 만난 듯 기쁘고 감사 합니다. _()_

맥락없는데이터 2025-01-18 09:47   좋아요 1 | URL
함께 걸어갈 수 있어 저도 참 감사하고 기쁩니다. 마힐 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도반으로서의 인연, 소중히 여기며 앞으로도 서로에게 좋은 인연이 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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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16

오늘의정진: 常獨行常獨步(상독행상독보) 항상 홀로 행하고 항상 홀로 거닐며


- 100일 정진, 2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스물 한 번째 구절은

<鏡裏看形見不難, 水中捉月爭拈得/경리간형견불난, 수중착월쟁념득

거울 속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물 속의 달을 잡아 보려하나 어찌 집을 수 있을 것인가> 였다.


거울 속 형상이든, 물 속의 달이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거울 안에 있지 아니하고,  물 속에 있지 아니하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오직 심안으로 보여 져야 한다.


오늘은 스물 두번째 구절

常獨行常獨步(항상 상, 홀로 독, 행할 행, 항상 상, 홀로 독, 걸을 보)

상독행상독보 / 항상 홀로 행하고 항상 홀로 거닐며

達者同遊涅槃路 (통할 달, 사람 자, 같을 동, 놀 유, 개흙 열, 소반 반, 길 로)

달자동유열반로/ 통달한 자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에서 부터 죽을 때 까지 나는 나만을 경험한다.

남이 내 대신 태어나 줄 수 없고, 아파해 줄 수 없고, 배고파해 줄 수 없다.

죽음 조차도 오직 나 혼자만의 경험이다.

그러니 삶은 오직 나 혼자만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수행(修行) 이란 무엇인가?

역시 오직 홀로 닦고 행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 공부는 남이 대신 해줄 수가 없다.

나의 깨달음은 나의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경지가 아무리 높고 좋다 하여도 내 것이 아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임제의현 (義玄 ? ~ 867) 선사(禪師)는 수행의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없애라고 했다.

아무리 부처님께서 위대하고 높다고 하여도 내가 깨친 바가 아니라면 없애야 한다.

'남의 길을 따라가지 말라!  나만의 길을 찾아라!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을 남김 없이 전부 없애 버려라!

철저하게 자신만을 남겨라!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라!' 살불살조는  임제선사의 할() 이다.

()은 그런 의미 이다.  


오로지 나 홀로만 남겨야 한다. 나 혼자 잘 났다는 게 아니다.

홀로 행하고, 홀로 거닐고, 수행은 오로지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철저하게 홀로() 수행을 완성하게 되는 순간, 이 홀로()는 홀연히 변한다.

이제까지 혼자 행하고, 혼자 걸었지만,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혼자는 변하게 된다.

홀로()는 함께() 로 되는 것이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함께() 열반의 길(涅槃路)에서 노닐게() 된다.

깨닫기 전에는 나 혼자 열심히 수행해서 깨닫는 것 인줄 알았는데 깨닫고 난 후에는 나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깨달음이란  '' 라는 존재를  철저히 알게 되는게 아닌가?

나의 시초(始初)인 부모님이 없었다면 나는 이번 생에 태어나지 조차 못 했을 것이다.

현재 나와 인연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어쩌면 그들과는 이미 전생에서 부터 이어져온 인연들 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몸속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도 많고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세포들.

그 세포들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생명이다

나는 본래 혼자가 아니었다.  

세포들이 나를 지탱해 주지 않는다면 내 어찌 움직일 수나 있었을까?

결국 세상은 나 혼자 사는게 아니다

수행 또한 그렇다.


나 혼자 잘 해서 깨닫게 된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그게 아니었단 것이다.

다시 말해 부모가 없었다면 내가 어찌 태어 날 수 있었으며, 도반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흔들리지 않고 수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도량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스승을 뵐 수 있었겠는가?

이 모두 함께가 아니었다면 어찌 나 혼자 깨칠 수 있겠는가?


常獨行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상독행상독보 /달자동유열반로

항상 홀로 행하고 항상 홀로 거닐지만 / 통달하게 된 자는 함께 열반의 길에서 논다.


홀로가 함께로 될 때, 비로소 깨달음과 열반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함께 함을 알게 될 때 그 길이 바로 열반의 길이라.


<일일 소견>

깨달음이란 철저한 홀로 속에서, 본래 함께 하고 있음을 아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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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15

오늘의정진: 鏡裏看形見不難 (경리간형견불난) 거울 속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 100일 정진, 2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스무 번째 구절은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정오안득오력, 유증내지난가측

오안을 맑혀 오력을 얻음은 , 오직 깨우쳐 증명할 뿐 헤아리기는 어려워라> 였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육안으로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오안(五眼)으로 봐야 한다.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이라는 오안의 근본 바탕은 마음()이다.

육안을 넘어서 심안(心眼)으로 관()해야 한다.


오늘은 스물 한 번째 구절

鏡裏看形見不難(거울 경, 속 리, 볼 간, 형상 형, 볼 견, 아닐 불, 어려울 난)

경리간형견불난 / 거울 속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水中捉月爭拈得(물 수, 가운데 중, 잡을 착, 달 월, 다툴 쟁, 집을 념, 얻을 득

수중착월쟁념득/ 물 속의 달을 잡아 보려하나 어찌 집을 수 있을 것인가


불교에서 '보는 것(')은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깨닫기 위해 필수적인 수행의 단계가 바로 보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가 싶다.

먼저 팔정도(八正道)의 첫 번째가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이다.

<증도가>에서 첫 구절도 '군불견() 으로 그대 보이지 않는가' 로 시작했다.

<반야심경>에서도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에서도 보는 것이 핵심 구절이었다.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증도가에서 본다()는 것은 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냥 눈에 들어와 보여지는  상태라고 했다.

또 다른 본다는 뜻의 간()은 견()과는 달리 '보려는 의지'가 포함 되어 있다.

하지만 간은 피상적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 ()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는 것이 아닌 그 속을 보다 깊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보여져야 볼 수 있다.


불투명한 창문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을 내가 창문 밖에서 아무리 보려 해도 그 사람이 누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불투명한 창문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창문을 열어 버리면 그 창문 뒤의 사람이 확연히 드러나 그 사람이 누군지를 바로 알게 된다.

이처럼 진리를 본다는 것은 창문이 열려서 보여 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보여져야 하는 경지'는 그냥 보는 행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다.

이번 구절은 이런 맥락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거울 앞에 내가 서면 거울은 나를 비춘다. 거울을 보는 간()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나를 볼 뿐이다. 하지만 거울의 입장에서는 나를 드러내어 보여준다.

즉 견() 이 된다. 나는 거울을 보는데 거울은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슨 말 장난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본다'는 하나의 뜻이 서로 다른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 속엔 달이 없다. 달은 밤 하늘에 떠있다

그런데 우리는 강물에 비춘 달이 달 속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으면 우리는 물 속에 달이 있다고만 생각하고 살 것이다.

'달을 가르키면 달을 봐야 하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다' 는 말 처럼 우리는 본질을 보지 않고 엉뚱한 것을 본다.

우리는 본질(本質) 보다 현상(現像)에 사로 잡혀있다.


거울에 내 모습이 보인다고 해서,  물 속에 달이 보인다고 해서  

거울이 내가 아니고, 물 속의 달이 달이 아니다.


제대로 잘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수행에서 ''은 정말로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이 아니라 근원과 실체를 볼 수 있는 ''이 되야 하는 것이다.

땅 속에 가려진 나무 뿌리를 눈으로 보지 못해도 나무의 근원이 뿌리임을 알 듯이 내 마음도 그렇다

나의 근원이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근원이 바로 나의 불성이고, 참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볼려고 해서 보는 게 아니라 저절로 드러나져야 한다.

저절로 보여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견(見) 이다.


<일일 소견>

천 개의 호수에 잠긴 달은 천 개나 되지만

하늘의 둥근 달 하나만 호수에 잠기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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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14

오늘의정진: 淨五眼得五力 (정오안득오력) 오안을 깨끗히 하여 오력의 힘을 얻는 것은


- 100일 정진, 2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 아홉 번째 구절은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육반신용공불공, 일과원광색비색)

여섯가지 신통 묘용 공하면서 공하지 않고, 한 덩이 둥글고 빛나는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였다.


깨닫기 전에 이미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타심통(他心通), 천이통(天耳通), 신족통(神足通)등의 오신통(五神通) 얻었다 해도 () 아니다.

거기에 누진통(漏盡通) 해져야 이상이 없는 깨달음, 진정한 무상정각(無上正覺) 이루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스무 번째 구절

淨五眼得五力 (깨끗할 정, 다섯 오, 눈 안, 얻을 득, 다섯 오, 힘력)

정오안득오력/ 오안을 깨끗히 하여 다섯 가지 힘을 얻는 것은

唯證乃知難可測(오직 유, 증명할 증, 이에 내, 알 지, 어려울 난, 옳을 가, 잴 측)

유증내지난가측 / 오직 증득해야 알 뿐 헤아리기는 어려워라.


<금강경(金剛經)> 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에서는 오안(五眼)에 대하여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로 언급되어진다.

오안은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눈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육안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육안을 통해 보이는 대상을 시각 정보화 하여 뇌로 전달되고 뇌에서는 정보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만든다.

우리는 사실 보는 대상의 본질을 보는게 아니라 뇌에서 만들어낸 시각정보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안으로 인식할 있는 범위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수가 없다.

인간이 진화의 과정 형성된 생리학적 구조로 인해 우리의 시세포는 가시광선(可視光線) 있기 때문이다.

우리 육안으로 있는 가시광선은 빛의 전체 스펙트럼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적외선, 자외선, X, 감마선 같은 넓은 영역의 빛은 육안으로 결코 수가 없다.

그러나 천안(天眼)부터는 인간의 육안을 초월한 경지의 단계이다.


천안, 혜안, 법안, 불안 이라는 순서로 육안으로 없는 영역을 보는 것이.

그것을 모두 합쳐서 심안(心眼)이라고 한다

그렇다. 마음의 이다.

육안이 현상계의 () 있다면 천안(天眼) 색과 무색(無色) 보며 또한 넘어 인과(因果) 있는 눈이라 한다.

어제 설명했던 천안은 천안통의 신통처럼 천리 밖을 내다 있으며 전모(全貌) 속속들이 있다.

하지만 아직 대상의 본질을 뚫어 있는 경지는 아니다.

혜안(慧眼) 되어야 모든 대상의 실체와 본질은 본래 () 하다는 것을 있다

그러나 아직 만물만생을 비추어 있는 경지는 미친다.

법안(法眼) 만물만생을 두루 비추어 있고 그들을 또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여 있는 경지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이르렀어도 이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 움직임 없는 움직임, 무위(無爲)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마지막 불안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든 우주적인 영역으로 비추어 봄을 자유자재(自由自在) 있다.

이처럼 육안을 넘어 심안으로 있는 오안의 힘이 바로 오력(五力)이자 오신통(五神通) 가진 힘이다.

이러한 경지는 범부가 아무리 생각으로 헤아려 볼래도 알 수가 없는 경지이다.

오직 몸소 깨우쳐 증득(證得) 해야만 하는 경지인 것이다.


바로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의 법성게(法性偈) 속의 한 구절 '證智所知非餘境(증지소지비여경)'  처럼 오직 깨친 지혜로 알일 일뿐 다른 경계로 알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정오안득오력, 유증내지난가측

오안을 맑혀 오력을 얻음은 , 오직 깨우쳐 증명할 뿐 헤아리기는 어려워라.


깨달음과 신통력은 오직 체험을 해야 알 수 있다.

그러니 올바른 길을 인도(引導)하는 참 된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


<일일 소견>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고 길을 가듯 가는 길 헤메도니

언제 내 눈이 떠지고, 언제 내 걸음 내 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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