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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2

오늘의정진: 大丈夫秉慧劍 대장부병혜검 /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 100일 정진, 6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여섯 번째 구절은

<是以禪門了却心시이선문료각심/그러므로 선문에서 마음을 물리치고

頓入無生知見力돈입무생지견력/태어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가도다.


()에서는 말이나 글자가 그다지 필요가 없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 라 한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즉 사람의 마음을 곧 바로 가리킨다.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마음의 성품을 바로 보면 부처를 이루게 된다.

그렇게 마음 하나 깨우치면 바로 태어남이 본래 없음을 단박에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은 마음으로 곧장 들어가는 문() 이다.


오늘은 예순 일곱 번째 구절

大丈夫秉慧劍/ (큰 대, 어른 장, 사내 부, 잡을 병, 지혜 혜, 칼 검  )

대장부병혜검 /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般若鋒兮金剛焰/ ( 돌릴 발, 반야 야, 칼끝 봉, 어조사 혜, 쇠 금, 굳셀 강, 불꽃 염 )

반야봉혜금강염 / 반야의 칼날 이요, 금강의 불꽃 이로다.


불자라면 오계(五戒)를 수지(受持) 하도록 하고 있다.

오계는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음주(不飮酒), 불망어(不妄語) 이다.

오계중 첫번째가 불살생(不殺生)의 계이다. 남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불교의 첫번째 계율이 불살생인 이유는  생명의 소중함을 실천하는 것이고  이 생명들이 r곧 부처의 또 다른 모습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체대비라고 한다.

동체대비(同體大悲)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한 몸인 듯 함께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즉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의 생명으로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비(慈悲)이다.


칼은 남의 생명을 헤치는 도구이다. 날카로운 금속의 예리함으로 닿는 모든 것을 동강 내버린다. 고대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살상을 저지른 도구가 바로 칼이었다. 장수는 칼로 적들을 베어버린다. 생명이 따뜻함을 상징한다면 죽음은 차갑다. 전장에서는 죽음처럼 차가운 칼의 속성에 빗대어 냉병기(冷兵器)라고 부르기도 한다. 칼은 따뜻한 생명의 기운을 차갑게 만들어 버리는 도구인 것이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지만,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듯이, 칼도 마찬가지로 남을 해치려 한다면 살인 무기가 되지만 의사가 칼을 쓰면 남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 이누야사에 나오는 셋쇼마루가 쓰는 칼 천생아(天生牙)는 한번 휘두르면 백명의 목숨을 살린다.


이처럼 불교에서 칼은 생명을 죽이는 칼이 아니라 깨달음을 가로막는 무명(無明)을 베어버리는 용도로 쓰인다. 탐진치(貪瞋癡), 즉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지배하는 나의 업식을 지혜의 칼로 베어버리는 것이다. 이때 수행자는 대장부가 되는 것이다. 대장부가 쥔 지혜의 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만나는 모든 장애물들을 거침없이 베어 버린다.

금강은 다이아몬드처럼 가장 강한 물질을 상징한다. 반야는 지혜를 상징한다. 금강경(金剛經)의 원래 제목이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密多經)이 바로 이런 뜻에서 나왔다. 금강경의 영어 제목이 바로 ‘Diamond Sumatra’ 이유도 바로 이와 같다. 그래서 불교는 지혜와 자비를 함께 추구하는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일일 소견>

길가에 서있는 메마른 나무 가지에 연두 빛이 보인다. 봄은 이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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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

오늘의정진: 是以禪門了却心학시이선문료각심 / 그러므로 선문에서 마음을 물리치고


- 100일 정진, 66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다섯번 째 구절은

<損法財滅功德 손법재멸공덕 / 법의 재물 덜고, 공덕을 없앰은

莫不由斯心意識 막불유사심의식 /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였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않고 서는 법의 재물이나 공덕을 가지고 있다 해도 유한하다. 

아직도 상()이 남이 있는 탓이다.

무아(無我)’, 라는 상이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


오늘은 예순 여섯번 째 구절

是以禪門了却心/ (바를 시, 써 이, 고요할 선, 문 문, 요달할 료, 물리칠 각, 마음 심)

시이선문료각심 / 그러므로 선문에서 마음을 물리치고

頓入無生知見力/ ( 조아릴 돈, 들어갈 입, 없을 무, 날 생, 알 지, 볼 견, 힘 력 )

돈입무생지견력 / 태어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 가도다.


어제 심의식을 다루면서 마음은 모두 8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했었다.

성철 스님은 마지막 제8야뢰야식을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풀이하셨다. 깨달음의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업식(業識)에 의한 뿌리 깊은 분별을 뽑아내야 된다는 의미이다. ()물리치다는 뜻으로 해석하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마음 심()을 제8야뢰야식, 무명업식으로 봐도 맞지만 우리의 근본 마음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각()은 현대 중국어에서 쓰는 (que) 오히려'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히려 마음을 요달해야’, 즉 마음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마음을 물리치고' '마음을 요달하고' 라는 뜻은 분명이 겉으로 볼 때는 완전히 상반된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모두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수행의 목적은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일 소견>

오직 마음만 지켜볼 뿐이다.

마음 이외에는 모두가 신기루 같이 사라지는 것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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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8

오늘의정진: 損法財滅功德 손법재멸공덕 / 법의 재물 덜고, 공덕을 없앰은


- 100일 정진, 6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네 번째 구절은

<學人不了用修行학인불료용수행 / 배우는 사람은 마치질 못해서 수행을 하나니

眞成認賊將爲子진성인적장위자 / 참으로 도둑의 아들이 됨을 인정하는 꼴이다.> 였다.


산 골짜기에 있는 물이 바다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곡절을 거쳐야 비로소 도달하게 될 까?

우리의 수행도 그와 같아서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헤메야 하는 것일까?

파도는 바다를 떠나지 않듯이, 우리의 중생심은 부처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수행은 비록 도둑의 아들에서 시작했지만 마침내 부처의 아들로 여정을 마칠 것이다.


오늘은 예순 다섯 번째 구절

損法財滅功德 / (덜 손, 법 법, 재물 재, 멸할 멸, 공 공, 큰 덕)

손법재멸공덕 / 법의 재물 덜고, 공덕을 없앰은

莫不由斯心意識 / ( 없을 막, 아닐 불, 말미암을 유, 이 사, 마음 심, 뜻 의, 알 식 )

막불유사심의식 /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부처의 아들이 되었다면 당연히 부모인 부처로 부터 상속을 받는 재물이 생긴다.

부처에게 물려 받는 유산인 셈이다. 부처에게 받는 유산이란 법의 재물과 공덕이다. 법은 다르마(Dharma) 라 부르고, 즉 진리를 뜻한다. 공덕(功德)은 선()을 쌓음으로 생기는 결과물이다. 이러한 유산은 물질적으로 물려 받는 세속적인 유산과는 전혀 다르다. 법의 재물과 공덕은 무위세계에서 상속되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심의식은 쉽게 말하면 마음을 통칭하는데 심(), (), () 각각 모두 마음을 뜻한다.

불교에서 모든 것을 마음 하나로 퉁 치지만 사실은 깊이에 따라 달리 구분한다. 그렇게 인간의 의식을 8개로 나누었는데 가장 마지막이 제 8식이다. 이를 '아뢰야식' 이라고 부르는데 현대 심리학에서는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심은 바로 이 근본 마음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의는 8식중 7식에 해당하는 '말라식'으로 우리의 마음중에서 항상 분별하고 집착하는 마음에 해당한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자의식' 이라고 부르는 영역이다.

   식은 8식중에 6식에 해당하며, 육식은 눈, , , , , 뜻을 지닌 의식을 말한다.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접하는 대상을 인식하는 영역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부르는 그냥 '의식'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심의식이라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부처의 유산인 법재와 공덕을 까먹게 된다는 뜻이 된다.

   ()의 깨달음은 부처의 유산을 받아 법의 재물을 얻고 공덕을 쌓는 것을 넘어선다. 궁극의 깨달음은 바로 열반에 드는 것이다. 완전한 열반에 이른 경지를 적멸(寂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절학(絶學) 과 같은 의미라고 본다. 적멸이라는 불교의 용어를 도교식의 용어인 절학으로 풀이했던 것이다. 붙여진 이름과 용어는 달라도 그 뜻이 같음을 알 수 있다.


<일일 소견>

보이는 재물이나 보이지 않는 재물도 결국 유한하다.  유한함은 무상(無常)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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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7

오늘의정진: 學人不了用修 학인불료용수행 /배우는 사람은 마치질 못해서 수행을 하나니


- 100일 정진, 64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세번 째 구절은

<捨妄心取眞理사망심취진리 /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取捨之心成巧僞취사지심성교위 /버리고 취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룬다.> 였다.


취사(取捨) , 버리고 취함은 수행자가 조심해야 할 선택 행위이다.

처음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신참자라면 수행과 관련하여 버리고 취할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공부가 되었다면 자신의 공부를 이끌었던 취사심(取捨心) 마저 놓아 버려야 한다.

강을 건넜다면 뗏목을 다시 들고 다닐 필요가 없듯이, 취사심도 가질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잊지 않는다면 어떻게 가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길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 가야 할 뿐이다.


오늘은 예순 네 번 째 구절

學人不了用修行/(배울 학, 사람 인, 아닐 불, 마칠 료, 쓸 용, 닦을 수, 행할 행)

학인불료용수행 / 배우는 사람은 마치질 못해서 수행을 하나니

眞成認賊將爲子/ (참 진, 이룰 성, 인정할 인, 도둑 적, 장수 장, 할 위, 아들 자  )

진성인적장위자 / 참으로 도둑의 아들이 됨을 인정하는 꼴이다.


절학(絶學)의 경지, 즉 배움이 끊어진 경지까지 가려면 얼마나 더 닦아야 하는가?

아직 배움을 마치지 못 한 사람은 수행 이랍시고 뭔 가를 더 배워야 한다고 부산을 떤다.

도둑의 아들이란, 아직 덜닦인 수행자를 뜻한다.

다 닦이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도둑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렇다.

듣는 어감이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수행을 마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모두 도둑의 아들들이다.

어쩌면 나는 한평생 마음공부를 하더라도 도둑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지 못 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수행의 완성, 배움이 끊어진 절학의 경지는 너무나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은 계속 되어 져야 한다.

우리의 업식(業識)은 수많은 생을 거쳐오면서 쌓여 왔으므로 그걸 모두 닦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 가듯이, 우리의 마음도 결국엔 깨달음의 바다에 이를 것이다.

도둑의 아들에서 부처의 아들로 바뀌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도둑의 아들은 본래부터 없었던 것이다.

본래 불성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래 가진 불성을 밝히는 것, 그것이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일일 소견>

누가 도둑의 아들이라 불러도, 걸리지 말아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부처의 아들이다' 라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 이제 심지(心地)가 굳어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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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6

오늘의정진: 捨妄心取眞理 사망심취진리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100일 정진, 63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예순 두번 째 구절은 

<棄有着空病亦然 기유착공병역연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나

還如避溺而投火 환여피익이투화 /마치 물을 피하려다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있음()을 버리고 없음()만을 가질 수는 없다.  

마음공부는 양변을 모두 가질 수도버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한 쪽만 취해서는 더욱 안된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공부의 길에서 내 앞에  갑자기 경계(境界)가 닥치면 어찌 할 바를 모를 때가 많다.

어찌 해야 하는가

이럴 때 일수록 중도(中道가 필요하다

'이것이 아니면저것 이다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중도를 이해하면 안된다.

중도는 가운데 길을 가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땅 위를 걷지만 땅에 발을 딛지 않는다

허공을 걷지만 허공에 발을 딛지 않는다

중도는 허공 중에 메달아 놓고 걷는 줄타기가 아니지만 줄타기 보다도 어렵다.

 

오늘은 예순 세번 째 구절

捨妄心取眞理(버릴 사망령 망마음 심취할 취참 진다스릴 리 )

사망심취진리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取捨之心成巧僞/ (취할 취버릴 사갈 지마음 심이룰 성공교로울 교거짓 위  )

취사지심성교위 /버리고 취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룬다.

 

신심명(信心銘)의 첫 구절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有嫌揀擇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오직 가리고 택하는 마음만 꺼리면 된다이 떠오른다.

가리고 택하는 마음은 분별심(分別心)이다.

분별심만 갖지 않는다면 바로 도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증도가(證道歌)에서는 망령된 마음을 버리고진리를 취하는 것 조차도 분별심이라고 규정한다.

망상(妄想)은 버려야 할 것이고 진리는 취해야 한다면 그 또한 아주 교묘한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미 마음에서 망상과 진리라는 분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결국 망상이든 진리든 둘로 보지 않아야 한다.

본래 망상과 진리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도는 둘이 아니 도리를 여실히 깨닫는 것이다.

망상이든 진리든 모두 본래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분별하기 그 이전즉 본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일일 소견>

분별하는 마음은 수행을 한다고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분별하는 그 마음 자체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분별이든 아니든 다시 본래 마음만 지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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