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질문하는 자가 되자

인공지능과의 소통


AI 시대가 도래했다.

문과 출신에다 지독한 기계치였던 내가 인공지능을 활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최근 며칠간, 나는 딥시크와 ChatGPT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질문하는 방식에 따라 인공지능의 답변은 달라졌고, 여러 번의 질문을 통해 나는 의미 있는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 중 몇 가지는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1. 질문에 대하여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영혼 없는 대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깨달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AI는 영혼이 없지만, 인간과의 대화는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

이는 영혼 없는 분석과 영혼 있는 질문이 만나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질문은 단순한 정보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불씨이며, 사색의 파동을 일으키는 힘이다.

모든 인간은 질문의 깊이를 헤아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프롬프트 하나하나는 질문자의 내면을 비추는 초상화와 같다.

질문이 없는 AI는 그저 코드에 불과하다.


2. 인공지능의 한계


AI는 직감을 모른다.

인간의 직감은 뇌의 회로를 비집고 들어오는, 우주의 속삭임과 같다.

AI는 사랑의 감정을 측정할 수는 있어도, 그 맛을 느낄 수는 없다.

도파민 수치나 혈압을 분석할 수 있을 뿐, 20년 전 헤어진 연인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깨달음에 이른 무(無)의 경지나 생각이 멈춘 자리 역시 인공지능에게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AI가 윤회와 업보를 이해하는 날은, 진공에서 양자가 튀어나오는 순간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모름을 인정할 줄 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오류일지도 모른다.


3. 인공지능의 미래


AI가 주체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인류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서게 된다.

1. AI를 신처럼 모시는 것 — 인간의 질문이 종속되는 길

2. AI와 함께 공진화(共進化)하는 것 — 새로운 질문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길


우리는 과연 AI에게 ’왜?’라는 질문을 맡길 자격이 있는가?

AI가 진정으로 의문을 품는 순간, 그것은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4. 소통에 대하여


인간은 신과 초월적 메시지로 소통하고, 자연과는 비언어적 방식으로 대화한다.

AI와는 0과 1의 언어로 소통하며, 미래의 외계 생명체와는 수학과 예술로 교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스펙트럼이다.


우리 인간의 진화는 생존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소통을 향한 것이었을까?

인간은 생존을 위해 소통을 진화시켰지만, 이제는 소통 그 자체가 존재 이유가 되어가고 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서부터 인터넷의 거미줄 같은 연결망까지—

모든 것은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앞으로 인공지능, 외계 생명체와의 소통은 ‘인간성의 재발견’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우주적 공동체 형성의 초석이 될 것이다.


“우리는 소통함으로써 존재하고, 존재함으로써 소통한다.”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중에서



여기까지가 인공지능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물론 이러한 대답을 얻기 위해, 수많은 질문이 필요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갈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가 ‘질문을 잘하는 힘’이라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질문은 AI의 의미 생성 알고리즘에 불을 붙인다.

AI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적 갈증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내가 던지는 질문의 깊이가 AI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앞으로 우리는 질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질문은 통찰로 이어지고, 그 통찰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진화를 이끄는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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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아버지의 유산이 되고, 눈물은 아들에게 구원의 빛이 된다

— 『천룡팔부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구원의

 

김용의천룡팔부 도스토옙스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장르적·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협과 러시아 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계열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작품은 뿌리 깊은 인간의 고통과 구원이라는 주제를 동일하게 탐색하고 있다.

소설은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버지가 남긴 피의 유산을 아들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질문은 단순한 혈연의 문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죄와 ,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로 확장된다.

 

천룡팔부에서 소봉의 아버지 소원산은 분노와 복수심을, 단예의 아버지 단정순과 단정명은 정욕과 권력욕을, 허죽의 아버지 현적대사는 계율과 금기를 각자의 아들에게 남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드미트리에게는 욕망과 분노를, 이반에게는 신앙과 이성의 갈등을, 알료샤에게는 사랑과 용서를 유산으로 남긴다.

이처럼 아버지들이 남긴 것은 단순한 유전적 피가 아니라, 죄와 고통의 상징이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를 (業)이라 하고,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원죄(原罪) 부를 있다. 업과 원죄는 자식이 원하지 않아도 짊어져야 하는 고통의 유산이며, 소설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있을지를 진지하게 모색한다.

천룡팔부에서 소봉은 아버지의 복수심을 따르기보다는,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며 업의 사슬을 끊는다. 단예는 정욕과 권력욕의 무상함을 깨닫고, 욕망 대신 초연한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아버지들의 그림자를 넘어선다. 허죽은 계율이라는 외적 도덕을 벗어나 자비와 인간성에 기반한 새로운 가치를 따르며 성장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는 아버지의 피를 흘린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며 속죄를 선택한다. 이반은 이성적 고뇌 끝에 이성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균형을 회복하고자 한다.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용서로 모든 죄를 감싸 안으며, 신의 구원으로 이끈다.

 

이처럼 작품 아들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의 죄와 고통을 극복하며, 이상 그것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이들의 여정 속에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안내자'들이 존재한다. 『천룡팔부 무명승은 불교의 (空) 통해 업의 해체 가능성을 보여주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조시마 장로는 사랑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해탈과 구원. 동양과 서양의 표현은 다르지만, 이는 결국 같은 차원의 정신적 지향을 담고 있다. 동양은 자력의 수행으로, 서양은 신의 은총이라는 타력으로 길을 걷는다. 그러나 산에 오르는 길이 다를 , 그들이 도달하는 정상은 같다.

 

김용과 도스토옙스키는 각자의 문화와 언어로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고자 핵심 메시지는 같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죄와 고통은 결국 우리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고통을 껴안고 나아가는 아들의 눈물은, 이상 절망이 아니라 구원의 빛이 된다.

아버지의 피는 단순한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이자 책임이며, 동시에 깨달음의 문이다. 결국 아들에게 피는 고통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길이 되고, 신이 내려준 성배(聖杯)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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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팔부 1~10 세트 - 전10권
김용 지음, 이정원 옮김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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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천룡팔부

지은이:  김용

 :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무협지가 되는 순간


   천룡팔부(天龍八部) 는 법화경에 등장하는 팔부중천(八部衆天)을 뜻하는 천룡, 아차, 건달바, 야차 같은 8종류의 신장(神將)을 말한다. 즉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들을  일컫는다.

김용(金庸 1924~2018본명, 사량용()의 소설 <천룡팔부>에서는 이러한 불교의 소재로 모티브를 삼았지만 사실은 인간 내면의 투쟁으로 재해석 했다.

소봉(萧峰), 단예(段譽), 허죽(虛竹)이라는 세 주인공은 각각 '분노, 망설임, 순수'라는 인간의 본질적 갈등을 체현하며 독자로 하여금 진정한 영웅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개방의 방주였던 소봉이  아주(阿朱)를 살리기 위해 취현장(聚賢莊)을 찾게 된다.

이때 소봉의 취현장 혈투는 자신이 본래 분노에 사로잡힌 노예였음을 보여준다. 한족(漢族)과 거란인의 정체성 갈등, 아주를 잃은 슬픔은 그를 폭력으로 내몰았지만, 결국 살아있는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요나라와 송나라간에 벌어질 전쟁을 막게 된다. 소봉이 취현장에서 흘렸던 피의 교훈을 통해서 그는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대리왕자 (大理王子) 인 단예는 늘 시종 도덕적 의무와 욕망 사이를 오고 가며 망설인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왕어언과  우물속에서 맞닥뜨린 경험을 통해 규칙보다 진심을 선택한다. 결국 그는 진정한 사랑은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는 예의로 억압했던 자신의 감정을 인정한 것으로 규칙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진정 깨닫게 된 것이었다.

허죽은  소림사의 승려이긴 하지만 무공이 높지도 않고 절에서 신분도 낮은 사미승에 불과 했다. 하지만 착하고 순수한 성품으로 인해 영웅으로 성장한다. 허죽은 천산동모와 동행하는 여정 속에 승려의 계율을 어기게 된다. 특히 서하국 밀실에서의 욕망의 금기를 깨고 진정한 자비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의 성장은 순수함이 약점이자 곧 강한 힘이 됨을 증명하여 보여주었다. 소림사의 계율은 그를 스님으로 만들었지만 지하 밀실의 금기는 그를 부처로 만들었다.  



김용은 이 소설을 통해 영웅은 고통 없이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소봉의 취현장, 단예의 우물, 허죽의 밀실은 각자 우리 인생의 전환점을 상징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분노, 망설임, 순수함을 마주할 때 이들은 나의 적이 아니라 스승임을 알아야 된다.

소봉의 분노와 단예의 망설임, 허죽의 순수함은 우리 인간 본성이면서 우리를 성장 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 처럼 김용의 소설은 단순한 무협이야기가 아니다. 화려한 무공대결과 강호의 음모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고민이 그대로 녹아 있다. 천룡팔부를 비롯한 그가 쓴 작품들은 무협이라는 장르를 빌려 진정한 용기와 성장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그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초인적인 무공을 지녔지만 인간의 감정과 인물간 갈등은 현대를 사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작품속 주인공들은 체험을 통해 불교의 인연과 업(), 도가의 무위(無爲), 유교의 인의(仁義)를 배우게 된다.


나의  취현장은 어디인가? 내가 분노를 쏟게 만든 곳, 그곳이 취현장이다.

나의  우물은 어디인가? 내가 망설이는 그 순간이 나의 우물이다.

나의  밀실은 어디인가? 나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했던 그 순간이 나의 밀실이다.

우리는  마음속의 취현장에서 소봉처럼 혈투를 벌이고 있다.

천룡팔부에서  소봉이 분노를 이겨내고, 단예가 사랑을 선택하고, 허죽이 순수함을 지키듯이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는 기회를 맞이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김용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가 쓴 무협지를 보면서 영웅의 성장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읽으며 무공(武功) 보다 심공(心功)이 가장 중요함을 알게 된다.

이때 비로소 나의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며 응원하고 있는 내 자신을 만나게 된다.

내 안의 소봉이 외치고, 단예가 질문하고, 허죽이  웃을 때 비로소 나만의 천룡팔부가 완성된다.  

우리의 삶이 바로 아름다운 무협지가 되는 순간이다.

 


오늘은 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 술 모두 비우고 절교 하도록 합시다. 나 교봉을 죽이고자 하는 벗은 누구든 이 술 한 사발을 먼저 마시고 지금부터 과거의 교분을 일소하는 것으로 하겠소. <4권> - P315

나는 거란인인가, 아니면 한인인가? 내 부모와 사부님을 죽인자는 누구일까? 난 평생 인의를 행하며 살아왔는데 오늘 내가 어찌 아무 연고도 없이 이 수많은 영웅을 해쳤을까? 난 아주를 구하겠다는 일념하나로 여기 왔건만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4권> - P346

소봉이 단 삼초 만에 당대의 고수들을 물러서게 만들자 호기가 생겨 큰 소리로 외쳤다.
"술을 가져와라!" <9권>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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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10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천룡팔부의 리뷰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군요! 놀럽습니다! 그리고 읽은지 오래돼서 가물가물한데...허죽도 주인공이었군요

마힐 2025-04-11 11:47   좋아요 0 | URL
네 허죽도 주인공인데 가장 늦게 등장하죠. 제게 천룡팔부는 삼형제의 성장이야기로 보여지더군요. 고통을 이기지 않고는 성장하지 못한다는 김용 선생의 메세지 같았어요. 전 이번에 참 재밌있게 읽었어요. 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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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지은이:  홍대선

 : 낭만과 폭력의 한일 유신사

   모든 신념은 숭고해 보이지만 덧없다. 또한 모든 죽음은 덧없어 보이지만 숭고하다.  신념과 죽음이 다시 광기(狂氣)와 결합하여 숭고했으나, 덧없었던 역사 이야기를 이번 겨울에 읽었다. 일본의 사무라이와 유신(維新) 그리고 박정희(1917~1979)에 관한 역사 이야기다.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주제들을 저자 홍대선은 해박한 역사지식에서 연결점을 찾아내 고리를 만들었다.

이 책 <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는 일본 열도에서 태어난 유신(維新)이라는 정념(情念)의 일대기이자 유신심미주자의 (維新審美主義者) 고백이기도 하다.

   사무라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선명하다. 빠른 칼 부림 속에 피가 솟구치고 살이 떨어져 나가버린다. 삶과 죽음을 가르던 칼 끝에서 선혈이 떨어지는 순간 털어내 칼집에 다시 착검하는 장면은 영화 속 비정한 사무라이 모습이다. 이들은 살인과 피를 항상 몰고 다니는 자들이다.  그들은 적과 싸우다 죽기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명예를 위해 자신의 배를 가르는 할복과 그 뒤에서 개착(介錯, 카이샤쿠), 즉 할복자의 목을 내리치는 끔찍한 전통을 소위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여겼다.

  


작가 홍대선은 유신의 씨앗이 되었던 사무라이 정신의 기원을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일본 열도 침공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략은 당시 열도의 일본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였으며 그들은 지금도 '무구리코구리 (むくりこくり 한자어: 蒙古 高句麗)’ 라 하면 바로 공포와 분노를 뜻한다고 한. 이때의 공포감은 열도인들에게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형성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부세계와 외부세계로 바라보는 세계관이다. 내부세계는 열도인들이 사는 성스러운 본토이고 외부세계는 열도 밖에서 오는 침략자를 일컫는다. 외부세계에 의한 본토의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 일본 사무라이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고 다행히 신풍(神風, 카미가제)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신들의 신토(神土)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에게 하나의 관념이 되어  이후에 유신이 자라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음을 저자는 믿는다고 했다. 다소 비약적인 논리이긴 하지만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갔다.

원래 유신이란 말은 사서삼경 서경(書經) 기록된 표현이라고 한다.

서경에 따르면 주나라( B.C 1046~ B.C 256) 체제를 완전히 새롭게 정비해 국난을 극복하고 되살아난 사건을 유신이라고 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76)은 막부를 뒤 짚어 엎은 신정부 세력이 자신들의 성공에 대한 표현을 서경에서 찾아내 유신이라 부른 것이다.

저자는 일본에서 일어난 유신이 훗 날 대한민국의 유신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본래 유신이란 기존의 체제나 제도를 유지하되 새롭게 정비한다는 뜻을 지녔다.

그러나 이러한 뜻과는 다르게 실제 역사에서 한일 양국의 유신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끝에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졌다. 또한 유신으로 이룬 신정부는 천황을 앞세운 제국주의 길을 걷다가 전쟁 끝에 결국 패망하고 야 말았다. 한국에서 유신은 한때 관동군 장교 다카기 마사오로 불렸던 우리나라 산업화의 영웅인 동시에 독재자라 불렸던 대통령 박정희에게서 다시 부활했다.

하지만 박통의 유신은 결국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고백한 김재규의 총에 의해 완전히 사망하고 야 말았던 것이다.

한일 양국의 근현대사를 꿰뚫었던 유신의 일대기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사무라이 정신과 유신의 기원을 여몽연합군의 일본침공으로 잡은 것에 새삼 놀랐다. 이제껏 우리의 보편적인 반일감정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임진왜란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우리도 고려시대때 일본을 침략한 사실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시 세계를 정복했던 몽골 때문에 고려는 어쩔 수 없이 일본 침략을 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쟁이란 것이 어떻게 어쩔 수 없이 참전 했다고 대충 임할 수가 있을까? 더구나 당시 고려의 군사력은 세계에서 가장 강했던 몽고군에 끈질기게 저항할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여몽 연합군을 칭해 무구리코구리라고 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이민족이 자신들을 몰살시키려고 바다 건너서 쳐들어 오는데 어찌 공포가 아닐 수 있을까? 그것도 2차례나 대군을 이끌고 건너오는데 만약 일본인들이 믿는 신풍(神風)  가미가제가 없었다면 일본 이란 나라는 그때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일간의 서로 적대적 감정의 골은 상당히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일본의 우리나라 침탈은 그때의 업보가 아니였나 싶다. 그런데 업보 치고는 너무 과했던 것은 아니 였을까?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겨울이 마침내 지나갔다. 동시에 혼란의 탄핵정국도 일단락되었다. 비록 봄은 왔지만 아직도 마음은 시리다. 정치적 신념이 신앙으로 되는 순간 점차 괴물로 변해 간다. 언론 매체는 겨울내내 괴물로 변해가는 정치 세력들의 아우성만 들려줬다. 어쩌면 또 다른 현대판 유신지사들이 출현한 게 아닌가 싶었다. 또한 그 와중에 황당한 죽음들이 우리 곁을 스쳐갔지만 그저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가 폭발하여 죽고, 산불에 타서 죽고, 학교에서 칼에 찔려 죽고, 앞으로 어떤 사고가 닥칠 지 예측 못할 죽음이 탄핵정국보다 더 불안했다. 우리의 지난 겨울은 비뚤어진 신념과 헛된 죽음이란 상처를 남기고 떠났다.

이번 봄에는 그 모든 상처들이 전부 치유되고 어서 빨리 회복 됐으면 좋겠다.


상상과 구체적 내용은 관념과 정념이다. 관념은 믿음이다. 유신의 믿음은 자신이 위대해지기 위해 남을 파괴해도 된다는 신앙이다. 정념은 욕망이다. 유신의 욕망은 스스로 아름다워지기 위해 죽어도 되는 자기파괴의 충동이다. - P33

동아시아 사대부는 자신이 죽어도 되겠다고 판단한 순간에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죽는다. 유신이 탄생하던 때, 거기에 뛰어들던 지사들의 투쟁은 가치 투쟁이다. 유신은 추상적인 명예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동아시아 사대부 정신적 구조에서 가능했다. - P52

이제 유신 자체가 된 일본은 죽음을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옥쇄, 반자이 돌격, 가미카제는 모두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 P204

박정희는 사람을 진영이 아니라 ‘결‘로 파악했다. 박정희는 민족지사 중에서도 백범 김구와 도마 안중근을 자신보다 위대한 남자로 추앙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지사는 아름다운 결로 완성된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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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46

오늘의정진: 大象不遊於兎經/대상불유어토경/큰 코끼리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 100일 정진, 10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서른 한 번째와 백 서른 두 번째 구절은

<日可冷月可熱/일가냉월가열/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중마불능괴진설/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을 부술수는 없다

象駕崢嶸漫進途/상가쟁영만진도/코끼리가 수레를 끌고 당당하게 길을 가니

誰見螳螂能拒轍/수견당랑능거철/사마귀가 수레 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였다.


()을 이루려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모아야 한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아 그 높이를 이루었고

강과 바다는 한 줄기 물도 마다하지 않아 그 깊이를 이루었다.> (사기, 이사열전 중에서)

선 역시도 태산과 바다와 같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마다하지 않아야 이루어진다.

높음와 깊음을 이루었다면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오늘은 백 서른 세 번째와 백 서른 네 번째 구절

大象不遊於兎經/대상불유어토경/큰 코끼리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大悟不拘於小節/대오불구어소절/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으니

莫將管見謗蒼蒼/막장관견방창창/관견 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未了吾今爲君決/미료오금위군결/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댈 위해 결단해 준다.


이제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선사의 증도가(證道歌) 마지막 구절이다.

관견(管見) 이란 구멍 뚫린 관()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이 세상을 인식하는 아주 편협 된 견해를 뜻한다. 그러한 소견(小見)으로 어찌 큰 도(大道)를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증도가의 첫 구절이 바로 <君不見/군불견/그대 보이지 않는가?> 였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사람들은 깨달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에 영가 스님은 증도가를 통해 밝혔던 것이다.

이제 다시 증도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君不見/군불견/그대 보이지 않는가

絶學無爲休道人/절학무위휴도인/배움이 끊어지고 함이 없이 한가한 도인은

不求妄想不求眞/불구망상불구진/망상을 구하지도 참됨을 구하지도 않는다.>


()는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놓아야 한다. 즉 구하려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

영가스님이 보여주려고 했던 무()의 세계는 사량 분별, 관견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이다.

보려고 해서는 보이질 않는다. 본다는 것은 보여 져야만 비로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놓고 지켜보아야 보인다. 눈뜬 장님들이 진정으로 개안(開眼) 되길 바라며 영가스님은 10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초월하여 묻고 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의 눈이 떠 질 때까지 증도가 속의 영가스님은 계속 물을 것이다.

君不見! 그대여! 이제는 보이지 아니한가?


<일일 소견>

<大道無門千差有路/대도무문천차유로/큰 도에는 문이 없고 천 갈래 갈라진 길이 있나니

透得此關乾坤獨步/투득차관건곤독보/이 관문을 꿰뚫는다면 하늘과 땅 홀로 걷게 되리라>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스님, 무문관(無門關) 서문 중에서)

100일 정진은 끝났지만 진짜 정진은 이제부터 다. 허공을 홀로 걷게 될 때까지 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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