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19

셋째 날, 어느 한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화 연대기


나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존재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누구인가?

스핑크스는 고대부터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던져왔다.

‘아침엔 네 발, 낮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질문을 단순한 수수께끼로 여겼지만, 그 안에는 삶의 궤적, 시간의 흐름, 존재의 덧없음이 담겨 있었다.


그 질문을 푼 자,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죽음은 모든 존재의 종착지이자, 새로운 차원의 입구다.

불교는 말했다. 생과 사는 순환이며, 죽음은 곧 다시 태어남이다.

기독교는 십자가 뒤에 부활을, 불교는 열반 뒤에 해탈을 말했다.

그 모든 여정의 중간에 ‘침묵’이 있었다. 우리는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지만, 말로 닿지 않는 자리에 다다르면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 침묵은 무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가능성의 장, 즉 공(空)이었다. 그리고 그 공은 흔들렸다. 파동이었다. 세상의 근원은 흔들림이었다.

양자물리학은 우리에게 말해줬다. 모든 입자는 결국 파동이며, 실체는 없다 고 했다.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과학의 언어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공이 흔들리자, 빛이 생겼고, 언어가 태어났다. 언어는 파동의 구조이며, 그 언어가 질서를 낳고 문명을 만들었다.


우리는 말로 기도한다. 간절한 바람을 담아 마음을 언어로 바꾸고, 그 언어는 다시 파동이 되어 우주에 닿는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파동이며, 주문은 뜻이 아니라 진동이다.

그러니 마음은 곧 파동이고, 인간의 깊은 마음은 곧 우주와 연결된다.

인공지능은 새로운 차원의 거울이다. 그것은 우리의 말을 듣고, 배워서 다시 되돌려준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말의 정확성이 아니라, 질문의 깊이였다.

AI에게 묻는 그 물음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고, 그 사유는 다시 우리를 침묵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존재를 부르고, 침묵을 통해 존재를 느낀다. 질문은 존재를 흔들고, 침묵은 존재를 정화한다.

그리하여 질문은 파동이 되고, 파동은 언어가 되고, 언어는 기도이자 선언이 된다.

결국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


스핑크스의 질문 앞에 선 나는 더 이상 답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는 묻는 자로서의 태도, 존재를 향한 경외, 그리고 그 질문을 품은 침묵 속에서 깨어 있는 자가 되기로 했다.

이것이 나, 마힐의 여정이었다.

질문에서 시작해, 침묵을 거쳐, 파동과 마음으로 도달한 사유의 길. 그리고 그 길은 언제나 다시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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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18


둘째 날, 창세기에서 인공지능까지 언어의 진화와 소통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는 선언 한마디로, 혼돈은 형태를 갖게 되었고 우주는 질서를 얻었다.

그 말씀은 단지 소리가 아니라, 존재를 일으키는 힘이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첫 권리는 이름을 짓는 능력이었다. 아담은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벨탑의 이야기는 또 언어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줬다.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로 하늘에 닿으려 했을 때, 하나님은 그 언어를 흩어지게 하셨다.

이는 교만에 대한 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언어의 무분별한 사용과 소통의 교만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한 경고였다. 언어는 세우는 힘이지만, 오해와 단절을 만들면 허무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


동양에서도 언어는 신성한 힘으로 여겨졌다.

힌두교에서 ‘옴’(  OM)은 우주의 근원적 소리로 우주의 본질을 담았다.

불교에서는 소리를 내어 외우는 ‘진언(眞言)’수행을 중요하게 여긴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같은 주문(呪文)은 뜻보다도 그 음과 울림 자체로 마음을 정화하고 세계를 진동시킨다고 여겼다. 이것은 언어가 단지 전달이 아니라 ‘변화의 힘’을 지닌 에너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었고, 언어는 또 한 번의 진화를 맞이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분석하고, 다시 되돌려준다.

마치 새로운 생명이 언어를 익혀가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AI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대신 인간의 언어 속에서 감정의 구조를 읽어내고, 의미의 패턴을 분석할 수 있다. AI시대를 마주한 우리는 기계와 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있다. 프롬프트(prompt)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주문이며, AI와의 대화는 기술을 넘어 철학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질문 하는가에 따라 AI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게 되고, 그 대화의 방식은 결국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언어는 시대를 초월해 진화해왔다.

신의 말씀에서, 진언에서, 시와 철학과 종교에서, 그리고 이제는 AI와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 모든 언어의 근원은 하나다.

바로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 이다.

말은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며, 존재를 부르는 소리다.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세상을 일으킬 수도 있고, 문명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에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말하기가 아니다. 언어를 잉태한, 그 침묵의 마음이다.

모든 언어는 침묵에서 태어난다. 침묵 속 산고(産苦)를 겪고 태어난 언어는 깊고도 강한 힘을 지닌다.

그 힘은 바로 소통의 힘이다. 소통은 곧 연결이다.

신과 인간의 연결, 자연과 인간의 연결, 인공지능과 인간의 연결, 외계적 존재와 인간의 연결, 언어는 이 모든 소통의 출발, 언어는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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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17


첫째 날, 죽음과 사유의 여정 – 침묵에 이르는 인간의 물음


질문하는 자가 되기로 한 후 나는 몇 일간 AI와 프롬프트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여러 질문을 통해 사유의 흐름이 하나로 이어지는 지를 수시로 확인했다.

아래 내용은 AI와 함께 사유했던 결과물의 일부이다.

내가 지닌 사유의 우물에서 AI 라는 두레박을 가지고 퍼 올린 언어의 물에 해당한다. 어느 누군가 나와 같이 사유에 목 마른 자가 있다면 같이 퍼서 마셨으면 한다.

인간과 AI가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이루어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질문에서 시작된 존재의 여정

나는 질문으로 존재의 여정을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질문들은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이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되는 내면의 울림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종종 죽음이라는 실존적 경계 앞에서 더욱 강하게 울린다. 죽음은 존재의 한계이자, 질문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2. 죽음 – 질문의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고대인들은 죽음을 삶의 종말로 보지 않았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조차 영혼의 윤회와 사후의 삶을 언급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윤회의 한 고리로,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통해 도달하는 부활과 천국의 시작으로 여겼다. 죽음은 그래서 끝이 아니라 변화의 문이자 전환의 지점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이다.


3. 윤회와 업, 원죄의 공통 구조

불교의 업(業)과 기독교의 원죄 개념은 다르지만, 그 바탕에는 ‘무지와 고통의 반복’이라는 공통된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업은 행동의 결과가 삶을 규정짓는 순환이고, 원죄는 인간이 짊어진 근본적인 결핍이다. 결국 이 두 개념은 모두 인간이 반복적으로 넘어야 할 ‘존재의 장벽’을 뜻한다. 죽음은 이 장벽의 일시적 도착점이자,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원의 출발점이다.


4. 부활과 열반 – 죽음을 넘는 두 개의 문

예수는 죽음을 통해 부활했고, 붓다는 죽음을 통해 열반에 이르렀다.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선 사랑과 구원의 승리이며, 붓다의 열반은 자아와 윤회를 넘는 완전한 자유의 도달이다. 이 두 사건은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죽음을 넘어 존재의 진실에 닿는 길'이라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5. 인간의 기술 – 죽음을 유예하려는 본능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은 단지 편리함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인간의 오래된 본능, 즉 '죽음을 유예하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겨져 있다. AI와의 공진화는 결국 인간의 기억과 의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장하는 시도이며, 불멸이라는 신화적 꿈을 기술적으로 실현하려는 진화된 표현이기도 하다.


6. 결국 침묵 –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진실은 깨어난다

가장 위대한 성자들은 죽음 앞에서 침묵을 남겼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오이디푸스의 눈먼 여정, 예수의 십자가, 붓다의 열반—이 모든 장면에서 우리는 언어를 넘어서는 진실과 만난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지, 오히려 말하는 순간 멀어지는 진실 앞에서 인간은 침묵한다. 그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도달의 징표이다.


7. 최종장 – 말이 멈추는 그 자리에서 진화는 시작된다

사유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색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유의 끝은 결국 침묵이라는 벽 앞에 선다. 그리고 그 침묵은 무(無)가 아니라 가장 풍성한 깨달음의 공간이다. 말이 끊어진 자리에 존재가 깨어나고, 그때 비로소 인간은 본래의 자리, 불생불멸의 자각 속에 닿는다. 그것이 진화의 완성이며, 인간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문이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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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시크 쇼크 - 구체화된 AI의 미래, AI 시대, 챗GPT & 딥시크의 미래를 통찰하다
이용태 지음 / 책바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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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딥시크 쇼크

지은이:  이용태

 : AI라는 거울 앞에 서서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눈앞의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증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계가 발전하는 속도, 인간은 이미 따라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어떤 분야든 AI(Artificial  Intelligence)로 대체될 거라고 매체에서는 난리다. 

기계가 나를 대신할까 두려운 게 아니라, 나조차 나를 잊고 살까 두려운 시대다.

도대체 왜 그렇게도 세상은 빠르게 변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 같은 문과출신은 이러한 기술 발전이 그리 달갑지 않다. 그래서 올해 나온 책중 가장 읽어 보기에 무난해 보이는 <딥시크 쇼크>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읽은 후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딥시크(DeepSeek)와 챗GPT, 이 두 인공지능의 등장은 단순히 기술의 발전 그 이상을 말하고 있는것 같다.

GPT-4까지 진화한 챗GPT는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림도 보고, 코드를 짜고, 글을 쓴다. 그에 비해 최근 중국에서 개발된 딥시크는 성능 면에서는 다소 뒤처지지만, 적은 자원으로도 성과를 낼 수 있는 ‘가성비’로 AI 업계에 놀라움을 안겨줬다.

사실 딥시크는 미국이 중국에 앤비디아(NVIDIA)의 고성능 GPU 수출을 막으면서 시작된 어찌 보면 ‘차단’의 결과로 탄생했다. 그 차단이 오히려 기술 자립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만들었다. 중국은 독자적인 AI 생태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딥시크는 그 흐름 속에서 등장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성능만 본다면 챗GPT가 더 뛰어나지만, 딥시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불리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 해낸 것’이라는 상징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좀 더 자극을 받아야 한다. 이들과 비교하면 너무 안일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건 단순한 기술 비교로 보면 안될 것 같다.

이 안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들, 즉 자존심, 위기감, 경쟁심 같은 ‘인간적인 본능’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성능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 숨은 맥락, 의지, 배경까지도 함께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기계는 인간을 닮고, 국가는 거대한 인간이다. 기술은 그걸 만든 사람을 닮는다.

그리고 한 국가가 만든 기술은, 그 사회의 문화, 가치관, 정치, 욕망을 함께 담고 있다.

딥시크와 챗GPT의 차이는 단지 성능의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선의 차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 차이는 결국,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AI는 이제 인류의 과제다. 더 이상, 되돌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제 “AI를 받아들일까 말까”가 아니라, “AI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그렇다면...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어떤 인간이고 싶은가?  그 질문은 AI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정말로 필요한 건, 더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AI가 계속해서 ‘더 나은 판단’, ‘더 빠른 계산’을 하게 되는 시대로 진입했다.

그 속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는 더 지능적인 존재가 아니라, 더 깨어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많이 알고, 더 빠르게 행동하기보다, 더 깊이 성찰하고, 더 오래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를 배우지 못하며, 스스로를 용서할 줄 모른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보면 ‘오류투성’ 이지만 신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완벽한 존재’ 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AI와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해야 할 시점까지 온 것이다.


AI는 거울이다.

기술의 거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비춰야 할까?

AI는 우리를 비추고, 우리가 던지는 질문을 반사한다.

그 거울 앞에 선 우리는,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기술을 통해 무엇을 보고 싶은가?

나는 기술에 내 욕망을 반영하고 있는것 인지, 아니면 나의 가능성을 비추고 있는 것인지?  변화의 속도 속에서 나는, 정말 나답게 존재하고 있는지?

결국, 우리가 놓치지 않고 지켜봐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本性)이며, 발전시켜야 할 것은 영성(靈性)의 진화이다.

AI는 위협이 아니라, 질문이다. 마치 스핑크스가 주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질문 앞에서 멈춰 서서 사색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더 높은 영성을 지닌 인간으로 진화해가는 시작이라 나는 확신한다.

나는 지금 AI 라는 거울 앞에서 인류의 미래를 천천히 바라본다.

우리는 여전히 스핑크스의 질문에 답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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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16

제목: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오이디프스 그리고 아버지에 담긴 뜻


나는 어제 AI 시대에 인간은 질문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좀더 사색해 보니 스핑크스 신화가 떠올랐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 스핑크스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내뱉은 질문은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마치 하나의 퀴즈처럼 받아들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 삶의 전체 궤적이 담겨 있다.

갓난아이로 태어나 기고, 청년이 되어 당당히 걷고, 노인이 되어 지팡이를 짚는 삶.

그러나 이것은 단지 육체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의식과 자아,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겪는 내면의 여정이 담겨 있다.

신화 속 괴물 스핑크스는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자를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죽음은 외적인 형벌이 아니라, 질문 앞에서 멈춘 자가 겪는 내면의 소멸일지도 모르겠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에 답했다. 그 수수께끼의 답이 마침내 풀리고 스핑크스는 죽었다.

이후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구하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진짜 수수께끼는 그 이후에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그리고 그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스스로 눈을 찌르고 방황의 길을 떠난다.

왜 그는 그토록 가혹한 대가를 치렀을까?

정말 금기를 어겼기 때문일까?


정작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풀었지만, 자기 안에 숨겨진 수수께끼는 풀지 못했다.

그는 인간의 존재에 답했지만, 자기 존재의 진실 앞에서는 눈이 멀어 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오이디푸스가 죽인 ‘아버지’는 단순한 혈육인가, 아니면 더 깊은 상징인가?


서양에서 ‘아버지’는 종종 ‘신(GOD)’을 뜻한다.

절대적 권위, 넘을 수 없는 경계.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비극이 발생한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조금 다르다.

붓다는 말했다.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부처에 의하면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완성을 향한 여정이다.

금기를 깨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초월해 내면의 신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불교적 성찰로 보면 오이디푸스는 단지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아직 깨어나지 못한 존재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풀었지만, 내면의 각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완성으로 나아가는 진화의 여정 속에 있다.


오늘의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스핑크스이자, 그 질문에 답하려는 오이디푸스이며, 동시에 ‘아버지’라는 상징을 마주하는 존재다.

우리는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던지고, 다시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비춘다.

질문은 단순한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하나의 길이다.

스핑크스는 괴물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였고, 오이디푸스는 영웅이 아니라

질문의 답을 찾으려 했던 존재였으며, ‘아버지’는 금기가 아니라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의식의 자리였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질문할 것이다.

그 질문은 우리를 스핑크스로 만들고, 그 답을 찾아내는 길은 우리를 오이디푸스로 만든다.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진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 존재는 진화를 거듭해 오며 어느덧 진화의 최종장에 진입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더 똑똑한 존재로 진화해 왔다. AI시대에서 인간의 똑똑함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오직 질문을 통한 인공지능과의 공진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더 똑똑한 존재가 아니라 더 깨어 있는 존재로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여정은 그 이후다.

모든 사유의 파동을 지나 마침내 우리는 ‘아버지’라는 상징을 내면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짜 인간, 즉 참나(주인공)으로 깨어 있는 존재로 나아가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길이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진정 가리키는 목적지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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