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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2

오늘의정진: 或是或非人不識/  혹시혹비인불식/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은 알지 못하고


- 100일 정진, 7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한 번째와 여든 두 번째 구절은

<默時說說時默/  묵시설설시묵/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大施門開無壅塞/ 대시문개무옹색 / 크게 베푸는 문을 열으니 옹색함(막고 또 막음)이 없다

有人問我解何宗/ 유인문아해하종/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이해하냐고 묻는 다면

報道摩訶般若力 /보도마하반야력/ 마하반야바라밀의 힘이라고 대답하리라> 였다.


마하반야밀이란 무엇인가? 바로  대지혜(大智慧) 와 대자비(大慈悲) 이다. 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이며 그 깨달음이란 바로 대지혜와 대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선불교가 부처님께서 전해주신 가르침이 아님에도 불교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은 궁극의 깨달음이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교의 본질이 바로 지혜와 자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고의 지혜는 말이 없는 가운데 있고, 최고의 자비는 무차별(無差別)에 있다. 머무름이 없고 상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지므로 무주무상(無住無相)이다.

이것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의 힘이다.


오늘은 여든 세 번째와 여든 네 번째 구절

或是或非人不識/  혹시혹비인불식/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은 알지 못하고

逆行順行天莫測/ 역행순행천막측/ 역행,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함이여

吾早曾經多劫修/ 오조증경다겁수/ 내 일찍이 많은 겁을 지나며 수행했나니

不是等閑相狂惑 /불시등한상광혹/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니로다.


시비에 휘말리고, 분별에 미혹되는 것이 보통 중생들의 일상이다. 항상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과거 미래 현재, 삼세를 통털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생을 그렇게 돌고 돌며 또 돌아왔던 것일까

지옥에서 부터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을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했던 것일까? 모든 업은 분별에서 생겨난다. 미혹하기 때문이다. 미혹은 밝고 투명하지 않게 만든다. 수행은 밝고 투명해야 한다. 그래서 청정함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행자의 청정은 바다와 같아서 온갖 물을 받아들인다고 선지식들 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다. 바닷물은 맑고 깨끗한 청수든, 하수구의 오염된 물이든, 정화조의 똥물까지도 받아들인다. 세상의 모든 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 들어 간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을 받아들이고 온갖 생명이 잉태하는 곳이다. 생명의 기원이자 종착점이다

그렇게 보면 밝고 투명한 것 만이 청정이 아니라는 말씀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육도 윤회 또한 어쩌면 수행의 방편이지 않을까

육도 윤회 끝에 결국엔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이란 뜻이다. 지옥고에 허덕이는 것도 수행이고, 짐승 같은 삶을 살아도 수행이 되고, 맨날 싸움만 일쌈는 아수라 같은 삶도 수행이 되고, 인간과 천상에서 삶 또한 수행이 되는 것이다

미혹은 어쩌면 우리의 모든 삶이 수행인줄 모르고 사는 것이 아닐까?


<일일 소견>

수행이 힘든 것이 뜬 구름을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깨달음이란 실체를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잡으려 하지 말자. 그냥 지켜만 보자

지켜보기가 수행의 시작이다. 그래서 수행은 견()이고 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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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1

오늘의정진: 默時說說時默/  묵시설설시묵/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 100일 정진, 76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아홉 번째와 여든 번째 구절은

<不離當處常湛然/  불리당처상담연/ 지금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즐기는)하니

覓卽知君不可見 / 멱즉지군불가견 / 찾은 즉 그대는 보지 못함을 알겠노라

取不得捨不得/ 취불득사불득/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不可得中只麽得 /불가득중지마득/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였다.


"수처작주,입처개진 (隨處作主,入處皆眞) 머무는 곳 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이 바로 진리다" 라고 선언했던 임제의현(義玄: ?~867) 선사가 떠오른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이요 끝이라' 고 하나님은 선언하셨다

나의 본래 면목을 마주한 순간 우주의 중심은 바로 내가 된다. 진리는 하나인데 하나님의 영성과 부처님의 불성이 서로 다른 것인가?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다.


오늘은 여든 한 번째와 여든 두 번째 구절

默時說說時默/  묵시설설시묵/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大施門開無壅塞/ 대시문개무옹색 / 크게 베푸는 문을 열으니 옹색함(막고 또 막음)이 없다

有人問我解何宗/ 유인문아해하종/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이해하냐고 묻는 다면

報道摩訶般若力 /보도마하반야력/ 마하반야바라밀의 힘이라고 대답하리라.


임제의현 스님이 깨닫기 전, 그의 스승인 황벽희운(黃壁希運 ?~850) ) 선사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임제는 스승의 법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임제는 스승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意) 인지요?" 그러자 황벽은 임제를 두들겨 팼다. 임제는 아팠지만 그 까닭을 몰랐다. 단지 어떤 이유가 있을 꺼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또 얻어 터졌다. 임제는 억울했지만 스승에게 반항 한번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악으로 깡으로 다음날 또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얻어 터졌다. 임제는 억하심정(抑何心情)에 스승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스승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황벽은 대우(大愚)선사를 찾아가라고 권유했다

대우선사를 찾은 임제는 자신은 황벽선사의 가르침을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대우선사는 웃으며 말하길 "그대의 스승이 그대를 위해 그렇게 노파심(老婆心)으로 간절히 말 해줬는데, 그대는 아직도 허물을 찾는가?

이 말 한마디에 임제는 전율을 느끼며 크게 깨닫게 되었다

임제가 말하길 "원래 황벽의 불법은 별거 없구나". 

이에 대우선사는 임제의 멱살을 잡으며 "뭐라 했는가? 조금 전까지 모르겠다고 했으면서 이제는 별거 아니라니? 도대체 뭘 알았다는 건가?" 

임제는 그 자리에서 대우선사의 갈비뼈를 주먹으로 한방 갈겼다. 이에 대우는 크게 웃으며 "그대의 스승은 황벽이다. 나와는 관계가 없다

임제는 곧 바로 대우선사를 떠나 다시 황벽에게로 돌아왔다. 이에 황벽은 "아니, 왜 다시 돌아왔느냐?"하고 물었다

이에 임제는 "스승의 노파심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황벽은 임제가 달라졌음을 눈치 챘다. "내 다음에 대우를 만나면 한방 먹여 주리라

그러자 임제는 "뭐 다음이 따로 있습니까? 지금 당장 먹여 주죠" 하며 스승 황벽에게 바로 한 방을 갈겨줬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것이 바로 선의 종취(宗趣) 이자 반야바라밀의 힘이 아니 겠는가?


<일일 소견>

무엇이 불법의 대의 입니까? , 무엇이 불법의 대의..., 무엇이 불법...,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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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0

오늘의정진: 不離當處常湛然/  불리당처상담연/ 지금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즐기는)하니


- 100일 정진, 7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일곱 번째와 일흔 여덟 번째 구절은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與吾靈覺何交涉 / 여어영각하오섭 /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不可毁不可讚/ 불가훼불가찬/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니

體若虛空勿涯岸 /체약허공물애안/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였다.


강을 건넜다면 배는 더 이상 타지 않아도 된다.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했다면 그동안 도를 닦는데 필요했던 수구(數句)와 비수구(非數句) 같은 개념도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 또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여태껏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썼던 모든 수행법이 사실은 다 방편이었다. 방편이 좋았다 나빴다 평가하고 분별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깨달은 이의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배가 없이 어찌 강을 건너고 수행 없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방편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법이며 도가 아닐까?


오늘은 일흔 아홉 번째와 여든 번째 구절

不離當處常湛然/  불리당처상담연/ 지금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覓卽知君不可見 / 멱즉지군불가견 / 찾은 즉 그대는 보지 못함을 알겠노라

取不得捨不得/ 취불득사불득/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不可得中只麽得 /불가득중지마득/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담연(湛然)이란 맑고 청정하다는 뜻과 평안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리는 항상 나를 떠나서 있지 않는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진리의 자리이다. 그래서 선지식들 께서는 나 이외의 다른 곳 찾아 헤매지 말라고 경책하셨다.

이에 관련된 어느 선사의 탐춘(探春) 이란 시()가 있다.


<盡日尋春不見春 (진일심춘불견춘)-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어도 봄을 보지 못하고

芒鞋遍踏朧頭雲 (망혜편답롱두운)- 신발이 다 닳도록 언덕 위의 구름 따라다녔네.

歸來偶過梅花下 (귀래우과매화하)- 이제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

春在枝頭已十分 (춘재지두이십분)- 봄은 이미 매화가지 위에 한껏 와 있었구나.>


나는 늘 분별 망상에 가려져 있다. 분별과 망상심은 언제나 항상 나의 마음에 꽉 차 있어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으로는 내 본 뜻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소리를 뱉고 야 만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사실이 그렇다. 어리석음을 자각하게 된다면 마음을 우선 쉬어야 한다.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분별심과 망상심에 끄달리지 말고, 밖으로 허덕이지 말며, 그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보지 못하는 가운데 볼 수 있고, 가질 수 없는 가운데 가지게 되고,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얻는 도리가 생긴다.


<일일 소견>

스스로가 어리석다는 것부터 아는 것, 담연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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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9

오늘의정진: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 100일 정진, 74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다섯 번째와 일흔 여섯 번째 구절은

<一地具足一切地/  일지구족일체지/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나니

非色非心非行業 / 비색비심비행업 /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로다.

彈指圓成八萬門/ 탄지원성팔만문/ 손가락 튕기는 사이 팔만 법문 원만히 이루고

刹那滅却三祗劫 / 찰나멸각삼지겁/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도다> 였다.


  부처의 지위는 높은 위치에 있으며 권위와 권세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차원이 낮은 미생물에서부터 차원이 높은 인간 그리고 천상계에 사는 천인 까지도 모두 평등하고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고 여긴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부처를 이루고 말 것이라는 서원을 담겨있다. 그래서 불자들은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즉 나와 남이 모두 일시에 부처의 도를 이루자는 뜻을 항상 서원(誓願)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 이야말로 수행자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탄지(彈指), 손가락 하나 튕기는 그 단순한 동작 하나에서도 자비를 담고 있으며 그 자비가 바로 팔만 사천 법문에서 설하고 있는 지혜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비와 지혜가 한 찰나에 이루어지는 순간에 모든 시간의 존재는 무너져버린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경계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오늘은 일흔 일곱 번째와 일흔 여덟 번째 구절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與吾靈覺何交涉 / 여어영각하오섭 /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不可毁不可讚/ 불가훼불가찬/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니

體若虛空勿涯岸 /체약허공물애안/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불교에서 수()의 개념은 방대하다. 찰나라는 아주 짧은 시간부터 겁이라는 아주 긴 시간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불교는 숫자(數字)의 종교가 아닌 가 싶다. 경전을 보다 보면 수없이 많은 숫자와 연결된 불교 용어들을 보게 된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오계, 육바라밀, 육근, 육식, 육경, 33, 32 80종상, 8만 사천 법문, 삼천대천세계 등 대부분의 불교용어는 숫자들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숫자가 가진 의미를 모르고 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을 정도다그래서 불교는 우주의 일체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 일체를 숫자로 표현하는 구절(數句)과 숫자가 아닌 구절(非數句)은 사라져 버린다.  숫자나 숫자가 아님은 깨달음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이건 무언가 가 훼방을 놓거나 칭찬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본성이 본래 비어져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를 자각하는 순간, 그 없음이 단순히 텅 비워 있음이 아닌 텅 빈 충만임 알게 된 것이다. 본체가 허공과 같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그리고 그 본래 마음자리는 확 트여 있어 원래 제한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한계가 없다고 표현했다.


<일일 소견>

한계가 없음은 무한(無限)이다

체가 없으니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니 자유롭다.

그러니 무한은 자유(自由)의 또 다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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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8

오늘의정진: 一地具足一切地/  일지구족일체지/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나니


- 100일 정진, 73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세 번째와 일흔 네 번째 구절은

<一月普現一切水/  일월보현일체수/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一切水月一月攝 / 일체수월일월섭 /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諸佛法身入我性/ 제불법신입아성/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我性還共如來合 / 아성환공여래합/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하도다> 였다.

 

만 강에 떠 있는 달을 건질 수 있는가?

아무리 물 속을 헤집어도 달은 건질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은 여전히 물 속에 잠긴 듯하다.

본래 달은 물속에 있지 않았다. 단지 하늘에 떠 있을 뿐이다.

건질 필요조차 없었다.

하늘의 달이 본체이고, 물에 달이 비춰짐을 모른다면

물 속에서 달을 건지려는 헛수고만 할 뿐이라.

우리의 성품도 그와 같다.

나의 성품이 본래 부처임을 모르고 절에 모셔진 부처만을 모시려 한다면

물속에서 달을 건지려는 헛수고와 다를 바 없으리.


오늘은 일흔 다섯 번째와 일흔 여섯 번째 구절

一地具足一切地/  일지구족일체지/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나니

非色非心非行業 / 비색비심비행업 /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로다.

彈指圓成八萬門/ 탄지원성팔만문/ 손가락 튕기는 사이 팔만 법문 원만히 이루고

刹那滅却三祗劫 / 찰나멸각삼지겁/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도다


부처를 이루면 그 세상 아니 우주의 그 어떤 지위도 포함하는 지위가 된다.

지위란 높고 낮음이 있다는 관념이 있는데 부처는 그러한 지위가 아니다.

차별이 없이 평등하고 모두가 두루하고 원만한 지위에 가진다.

그러한 지위는 형상이 있는 것도 마음에만 존재하는 것도 또한 행의 결과물도 아니다.

보살이 부처가 되기를 발심하고 수행하여 부처를 이루기까지의 시간을 삼아승지겁(三阿僧祗刧) 이라고 부른다. 그게 어느 정도의 긴 시간인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조()라고 부르는 숫자는 1012승에 해당한다. 아승지라는 숫자는 10 56승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한다. 불교에서 일 겁이란 사방이4000리나 되는 돌산에 100년에 한번씩 하늘의 천녀가 내려와 옷 깃을 한번 스치고 올라가길 반복해서 그 돌산이 전부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삼아승지겁이란 시간은 그저 어마어마한 시간의 상징일 것이다. 하지만 선()에서는 부처가 되는 경지의 시간은 한 찰나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단지 손가락 하나 탄지(彈指)만으로도 팔만 사천이나 달하는 경()을 통달하게 되며 삼아승지겁이라는 아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찰나에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일일 소견>

김용의 소설에 나오는 무공비급중에 탄지신공(彈指神功) 이 있다. 황약사가 자주 쓰던 무공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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