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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46

오늘의정진: 大象不遊於兎經/대상불유어토경/큰 코끼리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 100일 정진, 10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서른 한 번째와 백 서른 두 번째 구절은

<日可冷月可熱/일가냉월가열/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중마불능괴진설/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을 부술수는 없다

象駕崢嶸漫進途/상가쟁영만진도/코끼리가 수레를 끌고 당당하게 길을 가니

誰見螳螂能拒轍/수견당랑능거철/사마귀가 수레 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였다.


()을 이루려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모아야 한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아 그 높이를 이루었고

강과 바다는 한 줄기 물도 마다하지 않아 그 깊이를 이루었다.> (사기, 이사열전 중에서)

선 역시도 태산과 바다와 같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마다하지 않아야 이루어진다.

높음와 깊음을 이루었다면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오늘은 백 서른 세 번째와 백 서른 네 번째 구절

大象不遊於兎經/대상불유어토경/큰 코끼리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大悟不拘於小節/대오불구어소절/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으니

莫將管見謗蒼蒼/막장관견방창창/관견 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未了吾今爲君決/미료오금위군결/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댈 위해 결단해 준다.


이제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선사의 증도가(證道歌) 마지막 구절이다.

관견(管見) 이란 구멍 뚫린 관()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이 세상을 인식하는 아주 편협 된 견해를 뜻한다. 그러한 소견(小見)으로 어찌 큰 도(大道)를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증도가의 첫 구절이 바로 <君不見/군불견/그대 보이지 않는가?> 였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사람들은 깨달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에 영가 스님은 증도가를 통해 밝혔던 것이다.

이제 다시 증도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君不見/군불견/그대 보이지 않는가

絶學無爲休道人/절학무위휴도인/배움이 끊어지고 함이 없이 한가한 도인은

不求妄想不求眞/불구망상불구진/망상을 구하지도 참됨을 구하지도 않는다.>


()는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놓아야 한다. 즉 구하려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

영가스님이 보여주려고 했던 무()의 세계는 사량 분별, 관견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이다.

보려고 해서는 보이질 않는다. 본다는 것은 보여 져야만 비로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놓고 지켜보아야 보인다. 눈뜬 장님들이 진정으로 개안(開眼) 되길 바라며 영가스님은 10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초월하여 묻고 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의 눈이 떠 질 때까지 증도가 속의 영가스님은 계속 물을 것이다.

君不見! 그대여! 이제는 보이지 아니한가?


<일일 소견>

<大道無門千差有路/대도무문천차유로/큰 도에는 문이 없고 천 갈래 갈라진 길이 있나니

透得此關乾坤獨步/투득차관건곤독보/이 관문을 꿰뚫는다면 하늘과 땅 홀로 걷게 되리라>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스님, 무문관(無門關) 서문 중에서)

100일 정진은 끝났지만 진짜 정진은 이제부터 다. 허공을 홀로 걷게 될 때까지 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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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45

오늘의정진: 日可冷月可熱/일가냉월가열/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 100일 정진, 10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아홉 번째와 백 서른 번째 구절은

<大千世界海中漚/대천세계해중구/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 같이 있고

一切聖賢如電拂/일체성현여전불/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다

假使鐵輪頂上旋/가사철륜정상선/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定慧圓明終不失/정혜원명종불실/선정과 지혜 둥글고 밝아 끝내 잃지 않는도다> 였다.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은 불법을 닦는 목적이다. 위로는 보리 즉,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원이 담겨 있다. 중생 제도를 하려면 자비심(慈悲心)이 있어야 한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겪는 아픔인양 느끼는 자비심은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다. 유교에서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이라고 부른다. 이는 어진 마음 즉, () 한 마음에서 나온다. 불교의 자비는 지혜로운 마음에서 나온다. 인과 지혜는 다른 뜻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보리를 구하겠다는 마음은 선정(禪定)이 바탕이 되야 하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은 지혜(智慧)가 바탕이 되야 한다. 그러므로 선정과 지혜는 함께 닦는 것이 바로 상구보리,하화중생이다.


오늘은 백 서른 한 번째와 백 서른 두 번째 구절

日可冷月可熱/일가냉월가열/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중마불능괴진설/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을 부술수는 없다

象駕崢嶸漫進途/상가쟁영만진도/코끼리가 수레를 끌고 당당하게 길을 가니

誰見螳螂能拒轍/수견당랑능거철/사마귀가 수레 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해가 식어 버리고, 달이 타오르는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진리는 소멸되지 않는다.

마구니가 아무리 나를 시험에 들게 해도 나의 의지는 더욱 굳세어 지기 때문이다.

<立行不求無魔, 行無魔卽誓願不堅/입행불구무마, 행무마즉서원불견

수행하는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 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 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으로 삼으라 하셨다.> (보왕삼매론 중에서)

이렇게 보면 마구니는 나의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데 필요한 조력자이다.

코끼리의 수레는 무겁고 당당하게 길을 간다. 사마귀가 아무리 사납게 길을 막는다고 해도 코끼리가 끄는 수레를 막을 수는 없다. 사마귀가 수레를 막아서는 것을 그 누가 볼 수 있는가?

밝은 진리를 마구니가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코끼리 앞을 막는 사마귀 같은 처지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본래 지닌 지혜와 선정의 힘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다. 결국엔 언젠가는 밝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 모두 불법의 바다에 이르고야 말리라는 보살의 서원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일 소견>

증도가 100일 정진이 끝나간다. 내일까지 해야 완전히 끝이 난다. 이번 정진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묵묵히의 재발견이다. 묵묵히 행함에는 힘을 모아 축적하는 것임을 알았다. 묵묵히 조용하게, 묵묵히 그냥, 묵묵히 지켜보는 등 묵묵히는 내공이 쌓이는 과정이었다.  

지금까지 묵묵(默默) 하게 마음의 묘목을 심었다면 이제부터는 잘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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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44

오늘의정진: 大千世界海中漚/대천세계해중구/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 같이 있고

- 100일 정진, 10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일곱 번째와 백 스물 여덟 번째 구절은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 하오니

信受之者皆相應/신수지차개상응/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로다

了了見無一物/료료견무일물/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亦無人兮亦無佛/역무인혜역무불/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였다.


지금껏 나라고 여겨 왔던 육체, 생각, 관념 등이 본래 공함을 알게 되면 라고 부를 것이 없다.

나는 본래 공하며, 나는 본래 없다. 그러니 무아(無我). 무아임을 안다면 참 나는 곧 드러난다.

태초부터 항상 참 나가 나를 이끌어 왔었다. 참 나가 있다는 것을 나의 껍데기에 가려져 알지 못했다.

무명업식(無明業識)을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중생과 부처가 각각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본래부터 중생도 없었고, 부처도 없었다.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중생이었던 것이다.

참 나는 찾는 것이 아니고 참 나를 믿는 것이다. 현재 의식이 참 나를 믿는 만큼 의식과 참나는 서로 상응한다. 그것을 이름 지어 부를 수 없으니 무일물이요, 참 나요, 부처요, 주인공이요, , 영성, 아버지라 했던 것이다.


오늘은 백 스물 아홉 번째와 백 서른 번째 구절

大千世界海中漚/대천세계해중구/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 같이 있고

一切聖賢如電拂/일체성현여전불/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다

假使鐵輪頂上旋/가사철륜정상선/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定慧圓明終不失/정혜원명종불실/선정과 지혜 둥글고 밝아 끝내 잃지 않는도다.


모든 물질은 성주괴공, 생주이멸(成住壞空, 生住異滅)을 반복한다. 우주 또한 물질이니 태어나고, 지속되다, 무너진다. 우리 우주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존재는 없다. 태양이 아무리 뜨겁다 하나 결국 별성도 수명이 다 하면 꺼지게 된다. 우리의 우주가 아무리 광대해도 파도 치는 바다의 물 거품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다. 지구상에 출현했던 그 위대한 성현들도 그저 스쳐갔을 뿐이다. 우주에서는 윤회의 수레바퀴만 돌고 있다. 그 가운데 본래 남이 없고 죽음도 없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있다. 그것은 오직 선정과 지혜로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붓다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밝혀 윤회에서 벗어나는 법을 안내했다. 선정은 정()이요, 지혜는 혜().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 증도가를 지은 영가스님이 공부한 종파는 천태종이다. 천태종의 종지(宗旨)가 지관수행(止觀修行)이다. 지관수행은 바로 정혜쌍수를 닦는 수행이다. 선종에서 화두를 타파하여 얻는 것도 사실 선정과 지혜가 아니던가? 그러니 정혜를 얻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수행을 해야 한다. 내가 경전을 봐도 정혜를 얻고, 내가 절을 해도 정혜를 얻게 되고, 기도를 해도 정혜를 얻게 된다. 누군가에게 감사함을 가져도 그 또한 정혜를 닦는 것이고,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내거나 선행을 베푸는 것도 정혜를 닦는 것이다. 본래 우리는 정혜를 닦아야만 하는 존재로 생을 거듭했던 것이다.


<일일 소견>

광대한 우주도 무너지는데 어찌 나의 작은 세계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정되고 영원한 것은 없음을 잊지 말자. 본래 진리는 둥글게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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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4-05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진 100일 수행, 축하드려요.
뭔가를 100일동안 꾸준히 한다는게 쉽지 않은데 이루셨군요^^

2025-04-05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25-04-05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일 축하해요. 꽁시꽁시.

마힐 2025-04-05 22:50   좋아요 0 | URL
씨에씨에! 단쓰 워 하이 메이 지에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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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43

오늘의정진: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 하오니








- 100일 정진, 9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다섯 번째와 백 스물 여섯 번째 구절은

<粉骨碎身未足酬/분골쇄신미족수/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셔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一句了然超百億/일구료언초백억/한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 뛰어넘도다

法中王最高勝/법중왕최고승/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河沙如來同共證/하사여래동공증/강 모래 같은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 했도다> 였다.


법화경에는 삼계화택(三界火宅)’이라고 하여 불타는 집을 비유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부자가 사는 집에 크게 불이 났다. 때마침 아버지는 집 밖에 있어 위기를 벗어 났으나 그 집의 아이들이 아직 집 안에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집 안에서 신나게 놀고 있느라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급한 아버지는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고자 꾀를 내어 아이들이 놀고 있는 집안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여기 양이 끄는 마차, 사슴이 끄는 마차, 소가 끄는 마차가 있는데 이걸 너희들에게 주겠다." 그러자 아이들은 수레를 얻고자 얼른 집에서 뛰어나왔다. 아버지는 기쁜 나머지 실제로 하얀 소가 이끄는 마차를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비유에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방편(方便)을 썼듯이 부처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방편을 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화경에서 부처의 방편은 본질적인 진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지만 또한 진실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는 방편이 각각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래는 지금껏 수많은 방편으로 수행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여래의 은혜가 어찌 크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은 백 스물 일곱 번째와 백 스물 여덟 번째 구절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 하오니

信受之者皆相應/신수지차개상응/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로다

了了見無一物/료료견무일물/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亦無人兮亦無佛/역무인혜역무불/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내 여의주란 나의 근본 마음을 뜻한다. 믿는 다는 것은 나의 근본 마음, 즉 '참 나'를 믿는 것이다.

근본 마음은 본래 밝아 있지만 들여다보면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한다. 무일물(無一物)이란 내가 없음을 말한다. 내가 없으니 상대도 없다는 뜻이다. 중생이 있으니 부처도 있는 것이고 내가 없으면 부처도 없게 된다. 그런데 무아(無我)라고 하면 '내가 없음' 이라고 하지만 여기서의 ', ()' '고정된 나'를 말한다. 따라서 무아는 고정된 나 라는 상()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분들은 무아와 참 나의 모순됨을 설명하려는 분들이 계시던데 그럴 필요가 없다. 무아와 참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자 해석에 치우치면 둘의 관계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뜻으로 보면 무아가 곧 참 나임을 알게 된다. 내 주인공 참 나는 여의주와 같고, 나는 본래 고정되지 않으니 무아인 것이다.


<일일 소견>

어제 저녁 설겆이를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묵묵히'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묵묵히 라는 말에 하나하나 쌓아가는 축적의 힘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들뜨지 않고, 초조 하지도 않고, 그냥 묵묵히 내가 하는 것은 그대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축적이 되는 거였다. 마음 하나, 행동 하나 묵묵히행 할 때 바로 내공이 쌓이는 중이라는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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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42

오늘의정진: 粉骨碎身未足酬/분골쇄신미족수/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셔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 100일 정진, 9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세 번째와 백 스물 네 번째 구절은

<不思議解脫力/불사의해탈력/불가사의한 해탈의 힘은

妙用恒沙也無極/묘용항사야무극/묘한 작용 항하사 같아 다함이 없고

四事供養敢辭勞/사사공양감사로/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양하랴

萬兩黃金亦銷得/만량황금역소득/만냥의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다> 였다.


  유마경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경전 중에 하나이다. 내용인즉 유마거사가 어느 날 병에 걸렸다. 유마거사가 병에 들어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은 부처님은 제자들을 시켜 병 문안을 가보라고 권하신다. 그런데 사리불, 목건련, 마하 가섭 같은 쟁쟁한 10대 제자는 물론 미륵보살, 지세보살 같은 대 보살들도 유마거사에게 병 문안 가기를 꺼려한다. 이유 인즉 과거에 그들 모두는 유마거사에게 각자의 견해를 설파당하여 말 문이 막힌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난감함 때문에 아무도 병 문안 가기를 나서지 않게 되자 후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직접 나서서 병 문안을 가기로 한다. 문수보살이 간다고 하자 그제서야 10대 제자뿐만 아니라 보살들 그리고 천상계의 천인들까지 따라나서게 된다. 사실 유마거사의 병은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이에 대한 심오한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이 유마경의 핵심이다. 증도가에서 유마거사가 언급된 점을 볼 때 영가스님에게 유마경이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 보인다.


오늘은 백 스물 다섯 번째와 백 스물 여섯 번째 구절

粉骨碎身未足酬/분골쇄신미족수/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셔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一句了然超百億/일구료언초백억/한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 뛰어넘도다

法中王最高勝/법중왕최고승/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河沙如來同共證/하사여래동공증/강 모래 같은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 했도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분골쇄신을 한다 해도 부처의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 불가사의 하고 오묘한 무상의 지혜를 이미 수많은 부처가 증득 했다. 이는 오직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깨친 지혜로만 알 수 있지 다른 경계로는 알 수가 없다.

   영가스님은 천태종 문하의 수행승이었지만 조계산에 머물던 육조 혜능 선사에게서 깨달음의 인가(認可)를 받았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천태종 계열의 스님임에도 불구하고 선종사(禪宗史)에서 영가스님의 위상은 너무나 높다. 영가스님이 혜능 선사를 찾아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남종선 계열의 스님 한 분이 영가스님이 있던 절에 왔다가 영가스님의 식견이 남 다른 것을 알았다. 그 객스님은 영가스님한테 바로 조계의 육조스님을 찾아가 보라고 권유했다. 만약 그때 영가스님이 혜능 선사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면 영가스님의 명성과 그가 쓴 증도가는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일일 소견>

누군가 만일 첨단 CG기술로 불교의 경전을 영상화 시킬 수 있다면 <법화경> <유마경> 두 경전의 소재를 사용했으면 좋겠다. 부처님을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과 대()보살들 그리고 다른 우주의 부처님까지 등장하는데 그 인원과 스케일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계를 비롯하여 천상계 그리고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우주적 부처님까지 지구에 와서 설법을 펼치는데 시공간의 한계가 없다. 두 경전은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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