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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 4백 년 전에 부친 편지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6년 9월
평점 :
가을이 되면, 읽으리라 마음 먹었던 책이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그 바람에 팔랑이는 책. 이 책을 잡는 순간부터 다 읽기 전에는 덮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원이 엄마의 편지' 로 시작되는 이 책은 도입부 부터 나를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4백년 전에 부친 편지라... 그들에게는 어떤 슬픈 사연이 있는 것일까.
그들의 사연을 짚어보기 전에, '능소화'라는 꽃을 본 적이 없어 이 꽃에 대해 궁금해졌다. 나는 본디, 어떤 것을 하든 근원부터 짚고 넘어가는 스타일이라 좀 피곤하다 -;
아무튼 검색을 해보니, "금등화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이다. 옛날에는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양반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꽃말은 ‘명예’, ‘자랑’, ‘자만’ 이다. 전설에 의하면 땅을 기어가는 가련한 꽃이었던 능소화가 소나무에게 ‘나도 먼 곳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하자, 능소화의 아름다움에 반한 소나무가 쾌히 승낙하여 나무나 담을 붙잡고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 고 되어 있었다.
표지를 보았을 때, 꼭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인 것 같은 자태같아 예쁘게 생긴 꽃이겠다. 이름도 예쁘니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알아보니 주홍빛깔에 귤색 수술로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질 때 꽃잎이 떨어지는 것 아니라 꽃 전체가 툭, 하고 떨어진다고 한다. 실제 본 적은 없지만,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꽃이니 만큼 사연을 들여다 보지 않더라도 마음이 조금 아련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와 등장인물이 실존인물이라는 것. 이 두가지만 보더라도 흥미를 가지기에 충분했다. 4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은 죽은 사람의 미라, 그리고 편지. 이들은 얼마나 사랑했기에 이렇게 긴 시간이 흘러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일까.
부모의 가슴에 묻힐 아이. 이 아이가 바로 4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았던 이 이야기의 주인공 '이응태'이다. 조선 명종 때 사람으로, 만석꾼인 이요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기 전, 이름을 짓기 위해 스님께 말씀을 드렸으나, 요절할 운명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것과 소화꽃의 독을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자식을 가슴에 묻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그래서 이요신은 자신의 아들을 구해낼 방도를 찾는다. 방도인 즉슨, 소화꽃을 안고 집으로 들어오는 때에 아들을 내쳐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혼례도 올리지 못하고 홀로 늙어 죽을 만큼 박색인 여자. 성질이 사납고 모진 여자와 혼인을 해야 된다는 것. 무인 집안이라, 서로 혼사를 앞다투는 집안인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미신이라 할 지라도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려는 마음으로 집 안뜰에 있는 소화꽃을 모두 뿌리 뽑게 된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총명해 칭찬을 한 몸에 받고 자라는 아이였지만, 아버지의 근심은 갈수록 깊어졌다. 부귀와 공명은 필요치 않다. 단지 아들을 가슴에 묻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 돌아온 응태의 손에 소화꽃이 들려 있었다. 때가 온 것이다. 아버지는 급히 중매쟁이를 불러 박색한 여인을 찾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박색한 여인은 소문으로 인해 박색해진 것이지 소문과는 다른 어여쁜 규수였다. 소문이 그렇게 난 것은 어떤 돌중이 자신의 자식에게 죽었어야 할 운명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 여인을 구하려던 사람이 뜬금없이 주검이 되어 돌아왔고, 그리하여 아이를 밖에 내보내지 않고 아무도 아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뜬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소화꽃은 담에 기대고 핀 것이 아니라 담에 점처럼 뚝뚝 묻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뚝뚝 묻은 꽃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문득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 Page. 74
정혼한 여인은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 마을 어디쯤인가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찾아간 응태. 응태의 집에는 소화꽃이 없었기에-아버지가 다 잘라버렸기 때문-그런 아름다운 꽃을 보는데 얼굴이 희디희고, 검고 큰 눈을 가진 여인을 은연중에 보게 되었다. 그것이 둘의 첫만남이었다. 위의 구절은 응태가 소화꽃을 보고 생각한 것인데, 마치 그 아름다운 여인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첫만남이 운명이 된 그들. 정혼을 하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여인의 댁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버지는 소화꽃을 다 베어버릴 것을 신신당부했지만, 여인은 소화꽃과 함께 자란 시절 때문에 뒷 마당의 소화꽃은 차마 자를 수 없어 응태에서 부탁한다. 그 남아있던 소화꽃이 후에 역신인 '팔목수라'가 그 여인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된다.
본디 소화꽃은 하늘의 꽃이라고 한다. 하늘에 있는 정원에서 훔쳐온 꽃이 지상에 퍼져 있는 것이다. '팔목수라' 라는 역신은 이 소화를 훔쳐 인간세상으로 달아난 자를 찾으러 다니는데 이것이 바로 응태의 부인이다. 만약 뒷마당의 소화꽃마저 잘라버렸다면, 둘은 오래도록 어여쁜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에 그 꽃을 베어버리지 못한 여인이 원망스러웠다.
소화꽃은 눈을 멀게 하는 독을 품고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가시가 돋혀있듯 모든 아름다움 안에는 독이 있기 마련인가보다. 둘을 만나게 해 준 소화꽃이 나중에는 이별까지 안겨 주기 때문이다.
"원이야, 어머니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너는 이제 네 어머니의 하나뿐인 위안이다. 네가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
내가 이제 너를 믿고 먼길을 가려한다. 아비가 많이 미안하구나. 내가 너를 안아 무등을 태우려고 했건만........
원이야, 내게 남은 날이 없구나. 너와 함꼐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가려 했건만.... 미안하구나" -Page. 152
자식과 어여쁜아내. 그리고 부모를 앞세워야 하는 응태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이 여인을 지키고 싶었던 사람. 그저 심성곱고, 착하디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기에 더 마음이 아픈지도 모르겠다.
함께 누우면 언제나 저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 Page. 159
당신이 떠난 줄 알지만 저는 자주 놀랍니다. 낮은 발소리에도 놀라고 낙엽 뒹구는 소리에도 놀랍니다.
나뭇잎이 공연히 떨어지고 발소리가 저 혼자 날 리 있겠습니까.
저는 잎 지는 소리에 당신이 왔음을 압니다. - Page. 179
꽃 귀한 여름날 그 크고 붉은 꽃을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주세요.
저는 붉고 큰 꽃이 되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처음 당신이 우리 집 담 너머에 핀 소화를 보고 저를 알아보셨듯,
이제 제 무덤에 핀 능소화를 보고 저 인줄 알아주세요. 우리는 만났고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 Page. 202-203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한 자 한 자 새겨놓은 편지를 보고 있자니 참 어여삐도 사랑했구나. 어차피 운명이었다면, 오래도록 행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늘을 거역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는 하나 둘의 사랑의 확신 때문일까. 꽃을 보고 처음 만났듯 죽어서도 그 꽃을 통해 인연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이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이 사주는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죽어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중략)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은 사람이나 죽지 않는 사주 입니다. - Page. 41
응태의 사주이다. 이런 사주를 가졌기에, 4백년이 지나고 발견되어서도 썩지 않았었나보다. 그렇다면 정말 타고난 운명이라는게 있는 것도 같다. 그런 사람에게 남긴 편지라 부인의 편지도 남아있었던 것일까? 죽어서도 죽지 않는 사주이기에, 둘은 헤어진 것이 아니겠지. 부인 여늬의 무덤에 자리 잡았던 능소화를 보고, 응태는 다시 알아보았겠지.
꽃잎이 따로 떨어지지 않고, 그 모양 그대로 툭 떨어지는 소화꽃. 그 모양새가 꼭 남편과 헤어질 수 없음을. 꽃잎으로는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여늬같아서 더 애처로운 꽃으로 기억될 것만 같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허구적으로 지어낸 이야기 라고는 하나, 편지라는 단서가 있고 무덤도 있기에 어쩌면 이들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기위해 저자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퇴색되고 변질되어 가는 '사랑'의 본디 의미를 되찾게 해주었고, 엄마 무릎을 베고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처럼 그 다음엔 어떻게 됐을까. 가 너무 궁금했던 책.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