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문학동네 시인선 100
황유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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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남지은 시


난간에 선 존재는
자기를 망친 결벽을 떠올린다 

아는 손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손으로부터
사랑하는 자로부터
사랑하지 않는 자로부터

일상의 머리채를 더듬더듬 건져올리기까지
사랑도 되고 폭력도 된다는 머리통을 깨부술 때까지

안도 되고 밖도 되는 곳이 있다
낮도 되고 밤도 되는 때가 있다

괜찮아 ? 춥지 않겠어 ? 다정한 물음이 있고
어떤 이야기를 계속하기 좋은 순간이 있다

조명이 어둡거나 테이블이 조금 흔들린대도
있잖아 하고 시작된 이야기가 그건 있잖아 하고 이어진다

옆 사람의 옷이 내 어깨에 걸리고
옆 사람의 말이 내 것처럼 들려서
옆 사람의 손에서 기울어진 찻잔같이 내 몸도 옆 , 옆 , 옆
으로
기우뚱거리고

쏟아져도 괜찮아
낙관도 포기도 아닌 말이 마음에 닿기도 한다 

난간에 기대어 자라던 식물들이 난간을 벗어나

ㅡ 074 , 075 ㅡ

 

공간에서 사람으로 다시 공기로 ,

사람들 말의 소리 닿았다가 멀어지다가

입김이었다가 찻잔의 김이었다가

엉킨 식물이 된다 . 거기에서 우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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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일주일
메이브 빈치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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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그 겨울의 일주일 , ㅡ 메이브 빈치 , 정연희옮김 , 문학동네

 

 

< 방문객 >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부서지기 쉬운  /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  마음 , /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ㅡ열림원 , 정현종 시선집 , 섬 중에서 ㅡ

몇번 침구를 호텔식 면직으로 바꾸려고 했었다가 만 기억이 있다 . 여행의 좋은 점이 어디 한둘이랴만 나는 여행에서 가장 좋은 점을 치라면 바로 낯선 방과 특유의 냄새가 베인 침구를 먼저 떠올린다 . 잘 마른 낙엽의 촉감 같기도하고 닿고 스치는 소리도 따듯한 것이 무려 새하얗기까지해서 어찌나 좋은지 . 침대는 모두 달라도 , 또 면직의 종류는 숙소마다 달라도 모두 햇살에 말린 듯이 청결한 뽀송함에는 한결같음으로 기억하게되는 여행지에서의 밤과 느른한 게으름 .
그 느낌을 내 방 침구로 가져오려다가 포기하게 된 것은 여행을 집안까지 끌어들여 버리면 밖에서 특별하게 즐기던 것을 평상시로 데려오는 일이 된다는 걸 깨닫고 였다 . 그건 밖에서여야 더 간절한 청결함과 방종의 누림이 된다는 사실이 선택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 그 포기는 나를 한번이라도 더 밖으로 유인해주는 또다른 기회가 될테고 그 특유의 촉감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같이 안온하면서 설레게하는 역할로 여전히 기능하리란 건 말할 것도 없고 .

메이브 빈치의 소설 [ 그 겨울의 일주일 ]을 티저북으로 먼저 만나고 , 온책으로 다시 전체를 읽어내려가며 느낌 감정은 바로 그 여행지에서의 낯설면서 익숙한 청결같은 , 그러면서 마음껏 깨끗함을 누려도 노동이 되지 않는다는 편안함 그것이었다 . 치키의 스톤하우스에서 나는 내내 보이지 않는 방문객으로 머물렀다 . 소리없이 웃으며 인사해오는 치키와 고양이 글로리아의 환대를 받는 투명한 방문객 . 아무도 당신의 휴식을 방해하는 이가 없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 그러다 약속된 시간에 징이 울리면 미스 시디 룸에서 달그락대며 우아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제공된 다정한 음식들을 맛보며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었다 . 

섣불리 아는 척 하지 않는대서 오는 침묵을 배려로 느끼며 전혀 외롭지도 않을 수 있는 시간을 간직하고 돌아 올 수 있다는 건 행복하다 . 쉬워보이면서 어려운 그 일을 치키와 그 동료들이 기꺼이 해낸다 . 호텔의 시작부터 함께한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리거의 묵묵한 성장 . 치키의 사촌이기도한 올라의 독립을 위한 발돋음 . 치키를 응원하지만 방문객으로 등장하진 않는 사람들의 응원이 스톤하우스를 완성해 나간다 . 그 과정을 보는 일은 즐거운 참관이었다 . 치키의 내면이 리거의 어머니이자 치키의 친구이기도 한 눌라의 마음처럼 황폐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런 건 우려에 지나지 않는다는 매듭은 특히 우리의 귀로를 웃음짓게 해주었다 . 

날이 밝으면 투숙객들과 함께 조류 관찰을 위해 나섰고 , 바람이 불면 부서져 흩날리는 해변의 물보라를 온 몸으로 부드럽고 상쾌하게 맞았다 . 거기선 모두 하나의 인물들이 섬이었다가 밀려드는 바닷물이었다가 빠져나가는 일상의 묵은 찌꺼기로 작용했다 . 치키의 스톤하우스는 섬같은 사람들 마음을 열게 만드는 조수 潮水 였다 . 거기서 마음껏 조수를 따라 일렁이는 나의 휴식 . 

참 신기한 일이다 . 전혀 다른 곳에서 와서 이제까지 생판 모르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일정시간을 공유하는 일은 . 이런 극적인 조합엔 대게 그 분이 빠지면 이야기가 김빠진 사이다 같기 마련인데 , 전혀 그렇지 않아서 읽는 내내 책의 무게를 못 (?) 느끼며 즐겼다 . 아 , 그분이 누구냐고 ? 코난이라고 부르고 함정이라고 쓰던가 ? 사건이라고 쓰고 비밀이라고 말하던가 ? 하핫  암튼 다양다종한 인간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따듯하고 이쁘기도 참 쉽지 않다 . 

이런 따듯함이 그리워지면 메이브 빈치의 다른 소설을 찾아봐야지 . 혹시 아나 ? 그녀가 우리 모르게 스톤하우스 같은 곳을 여기저기 만들어 놓았을지 ...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 가난은 /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 가난하다는 것은  / 가난하지 않은 사람보다 /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 늘 가슴 한쪽이 비어있다 / 거기에 /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 사랑하는 이들은 /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ㅡ열원 , 정현종 시선집 , 섬 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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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
오생근.조연정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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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시

 

남진우

 

물고기는 제 몸속의 자디잔 가시를 다소곳이 숨기고

오늘도 물속을 우아하게 유영한다

제 살 속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짐짓 무시하고

물고기는 오늘도 물속에서 평안하다

이윽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사납게 퍼덕이며

곤곤한 불과 바람의 길을 거쳐 식탁 위에 버려질 때

가시는 비로소 물고기의 온몸을 산산이 찢어 헤치고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자신을 드러낸다

 

(본문 108 쪽 )

 

남진우 시 , [ 죽은 자를 위한 기도 , 1996 ]

시집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중에서 ㅡ

 


 

빗방울이 수직으로 세상을 가두는 주말 저녁 .

거리를 걷는 행인들은 온몸으로 수직에 맞선다 .

내리 꽂히는 점들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하고

주변을 검게 지운다 . 빈 칸이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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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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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ㅡ 손홍규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들이 가장 비참하게 돌이켜보는 건 , 그이를 상실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무심코 떠나보내던 순간의 자신이었다 . 갔다 올게 하는 목소리에 응 하고 무심히 대답했던 자신에게 왜 그때 직접 배웅을 해주지 않았는지 ,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았는지 , 미소를 지어보이지 않았는지 ,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는지 , 그토록 사소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지 않았는지를 무섭게 따져보기 마련이었다 . 청년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후회가 잡초처럼 자라나 무성했을 테고 마음에 드리워진 빽빽한 그늘이 빠져나와 주위에 그림자로 드리워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
(본문 57 , 58 쪽 ㅡ손홍규 ,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ㅡ 
그들은 청년이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 청년이 대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 사랑에 실패하고 원한을 품었던 ,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 절망해버렸던 그 청년은 그들의 내부에서 그들과 함게 늙었다 . 그들은 깨달았다 . 자기 내부를 헤매는 이 불길한 청년과 때때로 조우하며 수십 년을 살아왔음을 . 청년과 그들은 헤어진 게 아니라 함께 거주하며 서로를 증오하고 힐난하고 할퀴면서 수십 년을 견뎌왔음을 . 
(본문 64 쪽 )

노인은 손가락을 들어 자기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 여기가 다르지 .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은 유예 기간을 겪어야만 진정한 슬픔에 이르게 되지 . 상실한 사람의 부재를 거듭 느끼면서 ㅡ 먹을 사람은 없는데 자기도 모르게 밥상 위에 수저 한 벌을 올려놓았다가 혹은 방구석에서 그이의 유품임이 분명한 잡동사니를 발견했을 때처럼 최초의 상실 이후에 되풀이해서 똑같은 상실을 겪어야 한다는 걸 , 한 번 상실하게 되면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는 걸 깨달으면서 점점 더 깊은 슬픔에 이르게 되니 말일세 . 단순하고 우둔한 사람에게도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네 . 깊은 슬픔은 단번에 그냥 주어지지 않아 . 그것은 오히려 고통을 겪는 사람이 획득해야만 하는 것과 같다네 . 나도 그렇고 자네들도 그렇고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입으로만 곡을 했지 어디 진짜 뜨거운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 있던가 .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두 눈가에서 용암처럼 눈물이 흘러나와 귓속에 고이지 않던가 .
...... 그 아이는 말이야 , 지금 상을 치르는 사람 같지가 않았어 .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상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곱씹으며 노를 젓다가 지금 막 깊은 슬픔의 기슭에 닿은 사공처럼 노를 내려놓았지 . 아이는 단번에 깊은 슬픔에 이른 거야 . 무언가를 상실한 순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버린 거지 . 아이의 두 눈에서 용암 같은 눈물이 흐르는 걸 자네들도 보았잖은가 . 저 탁자 앞에 앉은 채로 수십 년을 살아버렸어 .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발버둥하다 겨우 알게 된 것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아이는 저기 앉은 채로 알아버렸어 . 
...... 아우님들 , 저녁이라네 . 밤의 정강이라고도 할 수 있지 . 여기 적당히 어둡고 캄캄한 밤의 슬하에서 불 밝힌 주점에 어울려 앉아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자네들이 있어 기쁘다네 . 먼 훗날 그 아이가 돌아오면 우리가 되어 여기 이렇게 앉아 술잔에 술을 따르겠지 . 어쩌면 이미 돌아와 우리 사이에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네 . 그 말을 하고 노인은 실수인 것처럼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
(본문 65 , 66 쪽 )
그의 감정도 언제나 합금이었다 . 순수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 그는 살아야 했고 어떤 감정이 엄습하면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전혀 다른 감정을 쥐어짜낸 뒤 엄습하는 감정을 방어했다 . 그런 과정에서 감정들은 뒤엉켜 하나가 되어 동시에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었고 이렇게 합금처럼 태어난 감정들을 뭐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그것을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말은 괴물일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서서히 괴물이 되어갔다 .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 그리고 남들처럼 꿈을 꾸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는 순간이 왔다 .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을 지나니 어느 순간 꿈을 포기하기 위해 애쓰게 되어버렸다 . 
(본문 68 , 69 쪽 )

진짜 어머니의 손님이 왔는데도 그 손님이 너무나 허깨비 같아서 부주의하게 그 옆을 돌아가다가 손님의 어깨를 친 적도 있었다 . 분명히 살아 있는 손님인데 헛것이 눈에 보이는 거라 여겼다 . 어머니와 아내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면 둘 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고 혹은 넋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그때의 아내는 어머니가 불러들인 손님 같았다 . 그들은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다가 알아버린 사람들 같았다 . 삶이란 본질적으로 비극이라는 사실을 . 
(본문 71 쪽 )

치매가 심해진 시어머니 앞에 앉아 넋두리를 풀어낸 적은 있어도 소소한 일상을 살아온 이력에 버무려 간식을 먹듯 나누어 먹을 사람이 그의 곁에는 없었다 . 그는 너무 외로웠기 떄문에 외롭다는 걸 잊어버렸고 그걸 잊어버렸기에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절망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 밤마다 감옥을 나서는 꿈을 꾸었다가 아침에 깨어나 감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쓸쓸해하는 종신형 죄수처럼 . 
(본문 100 , 101 쪽 )

그는 아들과 남편이 어떤 방식으로 다투었는지 , 아들이 한사코 제 아비와 달라지려 애쓸수록 사실은 얼마나 제 아비와 똑같아지는지 , 그래서 아들은 자신의 행동이 제 아비와 똑같다는 걸 꿈어도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 남편이 하던 것처럼 방문을 발로 차고 말은 하지 못한 채 씩씩대다가 집을 나가 버렸다고 고자질을 하며 마음의 평온을 찾아갔다 . 말을 마치자 더는 할 말이 없었는데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저 가슴 바닥에 수천만 톤이나 남아 있는 것 같아 서러워졌다 . 그는 많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하고 싶은 말에 견주면 모래밭에서 모래 한 알 골라낸 것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 해야 할 말이 까마득했고 그제야 조금은 남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는 조금 울었다 . 말 대신 눈물을 흘렸다 . 눈물 한 방울은 천 마디의 말에 버금갔다 . 눈물 두 방울은 십 년에 걸친 사연에 버금갔다 . 시어머니가 엉덩이를 끌며 그에게 다가왔다 . 악아 , 왜 우니 응 ? 울지 마라 악아 . 돈이 없니 ? ...... 이거 , 우리 며느리가 준 돈이야 . 우리 며느리가 나 맛난 거 사먹으라고 준 돈이야 . 우리 며느리 피 같은 돈이다 . 너 써라 . 울지 마라 .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야 . 울지 마라 , 악아 . 사람이 돈을 울려야지 돈이 사람을 울릴 수는 없는 거다 . 울면 못 써 . 니가 우니까 나도 울고 싶잖니 , 응 ? 시어머니는 방긋 웃었다 . 그는 혼란스러웠다 .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리지 않은 사람 같았다 .
(본문 103 쪽 )

그는 두려운 눈길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 어머니 , 제가 누군지 아시는 거죠 ? 정신도 멀쩡하신 거죠 ?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시는 거죠 ?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시는 거죠 ? 알기 때문에 결국 거기로 가신 거죠 ? 어머니 ...... 저도 데려가 주세요 . 어머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잖아요 . 여기서 얼마나 더 늙어야 해요 ?
(본문 104 쪽 )

사소한 일을 감당하지 못해 남편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 겨우 그것 때문에 이 사람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 그가 정말로 외롭고 불안할 때 남편에게 기댈 수 없게 될까 봐 서글펐다 .  남편은 벽에 기대어 두다리를 쭉 뻗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 남편의 두 손은 가슴팍에 얹혀 있었다 . 아직 그가 젊었던 어느 날 남편은 자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허공에 대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 그는 깜짝 놀라 방구석으로 기어가 웅크리고 있었다 . 남편은 보이지 않는 적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 같았다 . 한참을 그러더니 지금처럼 벽에 등을 기대며 스르르 주저앉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그는 남편 곁으로 다가가 서랍장 모서리에 부딪혀 까지고 피가나는 남편의 손등을 닦아주었다 . 잠든 남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 이른 아침 , 잠에서 깬 남편은 멍하니 앉았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 슬픈 꿈을 꾸었어 .
(본문 106 , 107 쪽 )

여자에게는 밥그릇도 국그릇도 수저도 단 한벌뿐이었다 . 먼 친척인 이 집으로 세 들어 온 뒤 시장에서 새로 구입한 것들이었다 . 거기에 밥을 푸고 국을 담고 숟가락질과 젓가락질을 하며 끼니를 때워 왔다 . 어쩌면 그것만이 유일하게 전적으로 여자에게 속한 것들이었다 . 여자는 남자가 깨끗히 비우고 간 그릇과 수저를 씻으며 눈물이 나오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 어쩌면 멀지 않은 날 그 남자와 첫날밤을 치르면서 느껴야 했던 혼란을 이미 그 순간에 느끼는 중인지도 몰랐다 . 여자만의 것이었던 그것들에 남자의 숨결이 지나가버렸고 이제 그것은 여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 남자가 손대고 입댄 그것들로 다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심란했다 .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 
(본문 111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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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3-01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비가 내렸는데, 그장소님 생각이 조금 났어요.
저는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그장소님은 비오는 날 좋아하셨던 것 같아서요.
오늘은 바람이 무척 세게 붑니다.
기분 좋은 일들 가득한 3월 보내세요.^^

[그장소] 2018-03-01 17:57   좋아요 1 | URL
2월이 설 연휴 때문에 더욱 짧게 느껴졌어요 . 비가 오고 날이 좀 더 춥게 느껴지는 하루네요 . 3월이라니 ..벌써 말이죠! 시간이 왜 이리 빠른지 ... 건강한 날들 보내고 계신거죠? 저도 문득 문득 서니데이님 생각을 해요!^^

2018-03-0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8-03-01 18:09   좋아요 1 | URL
아... 파블! ㅎㅎㅎ 낼까지 아직 시간이 있어서 고민 중예요 . 아마 안되겠지만요 .^^ 시원한 낙방을 즐기려면 신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ㅎㅎㅎ

저도 1. 2월 독서 기록은 그닥이네요 . 책은 늘 읽는데 요즘은 자주 심드렁해요 . 뭐 슬럼프 같다고 느끼지만요 . 곧 벗어나겠죠? 서니데이님도 컨디션 별로 셨다니 어쩌나 싶네요 . 3월은 좀 맑음 이시길 기도해봅니다~^^

페크pek0501 2018-03-01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 분, 언젠가 큰 상을 받을 줄 알았어요. 어디 연재한 것을 묶은 책을 봤는데 참 글을 잘 쓰신다 싶었죠. 소품 같이 짧은 글도 산뜻하게 잘 쓰시더라고요.

[그장소] 2018-03-01 19:08   좋아요 1 | URL
이분 소설들이 읽는 맛이 있었어요 . 그래서 이번 수상에 반가웠는데 ..이 작가 님 ^^ 헌데 이번 단편은 좋은 문장은 많은데 확 와닿는 뭔가가 ...저는 찾기 어려웠어요 . 그게 단편의 한 면이려니 하지만요 . 그냥 현상을 보듯 읽어내려 가는 게 맞나 고민이 되던 소설였고요 . ^^
제가 넘 복잡하게 생각이 많았던 걸까요?

페크pek0501 2018-03-01 19:18   좋아요 1 | URL
저도 뭐뭐 문학상 탄 작품이 별로라고 생각한 적 많고 오히려 후보작이 괜찮은 적 많았어요. (좋은 소설이란 게 참 어려워 잘 모르겠어요.ㅋ)

[그장소] 2018-03-01 19:38   좋아요 1 | URL
그쵸~ 심사위원이 아니니 뭐랄순 없겠지만 , 아무리 애정하는 작가여도 느낌이 덜한 작품은 늘 있는 거 같아요 . 자선작이나 후보작이 더 좋을때.. 저도 그래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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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ㅡ 손홍규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기억을 걷는 사람들의 시간 

ㅡ 
그들은 청년이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 청년이 대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 사랑에 실패하고 원한을 품었던 ,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절망해버렸던 그 청년은 그들의 내부에서 그들과 함게 늙었다 . 그들은 깨달았다.자기 내부를 헤매는 이 불길한 청년과 때때로 조우하며 수십 년을 살아왔음을 . 청년과 그들은 헤어진 게 아니라 함께 거주하며 서로를 증오하고 힐난하고 할퀴면서 수십 년을 견뎌왔음을 . 
(본문 64 쪽 )


말 소리는 없고 흑백의 화면만이 느리게 돌아가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 빛 바랜 주점의 풍경을 을씨년스럽게 훑는 , 시선처럼 감고 도는 필름을 보듯 왼쪽 팔에 상장을 단 청년이 울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지나가고 늙은 노인이 시커먼 구멍같은 입을 뻐끔대듯 움직이는 장면을 보면서 마치 내가 변사 辯士 처럼 풍경에 소리를 입히듯 읽어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 무채색이다 . 검고 회색이고 얼룩같은 흰색들이 점점이 벗어 놓은 옷처럼 걸터 앉은 화면의 그림자 뭉텅이에 소리를 나 혼자 입혀 낸다 . 

허깨비 같은 노인의 바람 빠진 무성음을 뒤로 한 시대가 , 한 가정이 천천히 주저 앉는다 . 삶의 터전이 버섯구름을 일으키며 황폐해지는 것만 같고 , 시간은 거꾸로 흘러 더는 날아갈 게 없는 탱화의 낡음처럼 쩍쩍 갈라지고 흩어지는 걸 천천히 지켜보는 심정으로 . 공기중으로 색들이 모두 날아갔다 . 나도 꿈을 꾼 듯 허망하다 . 누군가의 일생이 이토록 가볍고 하찮다니 ... 

반전도 없이 그나 그이나 남자나 여자의 시간이 척박한 생활터에서 과거로 갈마들어가는 걸 숨을 멈추고 지켜본다 . 어디도 새롭지 않은 낯익음이 바로 여기 지금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 죽음과 늙음 , 시들음과 생생함으로 가면 갈 수록 남루한 인간의 낮은 곳을 이렇게 보여주는 구나 하면서 . 느낌만 아련하게 남고 서사는 한마디로 정리하지 못하는 단편 .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사나운 꿈을 꾼 것 같은 오후가 지나가고 있다 . 


그는 두려운 눈길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 어머니 , 제가 누군지 아시는 거죠 ? 정신도 멀쩡하신 거죠 ?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시는 거죠 ?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시는 거죠 ? 알기 때문에 결국 거기로 가신 거죠 ? 어머니 ...... 저도 데려가 주세요 . 어머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잖아요 . 여기서 얼마나 더 늙어야 해요 ?
(본문 104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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