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아. 울고 싶으면 울어. 우린 밤마다 누가 들을까 눈물도, 웃음도 참아야 했잖아. 나한테는 그러지 마. 혹시 내가 죽으면, 장례식장에선 펑펑 울어 줄래? 나도 누군가가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거 꼭 알려 줘. 그리고……. 내 아가가 울 때, 네가……. 네가 옆에 있어 줘. 내 아가는 내 얼굴도, 내 목소리도, 내 냄새도, 아무것도 모를 거잖아. 그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난 알아. 기억도 없는 부모 때문에 얼마가 가슴이 아픈지 나는 아는데…….

"사랑에 조건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하진 못하겠다. 솔직히 말해서 너도 좋은 조건은 아니야. 조실부모했고, 나이 많은 잔소리쟁이 형과 웬만한 시어머니보다 더할 것 같은 무서운 형수가 있잖아. 시집살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지난번에 우리 레스토랑에 네 형 부부랑 함께 온 네 조카며느리 얼굴도 해쓱하더라. 아무튼 얼굴 반반한 거 말고는 성격도 별로고, 재산도 나보다 적잖아. 능력이야 뭐, 나도 좀 더 노력하면 비슷해지겠지만."

사람들은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탓할 거리를 찾아요. 우리가 잘못되면 내 조건을, 건영이를 탓하게 되겠죠. 어쩌면 나도 그럴지도 몰라요.

"내가 말했잖아요. 예전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의 예전이란 당신이 말하던 그 아주 괜찮은 연애를 하던 그때입니다. 나의 예전이란 그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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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누가 나한테 이런 밥상을 줬던가.
계란후라이니, 나물이니, 국이니 그런 게 올라온 밥상은 여기에 갇히기 전까지는 보질 못했었다.
이가 아플 정도로 딱딱하게 눌은밥에 간장만 부어 줘도 다행이었다. 숟가락 모가지에 시래기라도 한 줄기 걸리는 선짓국이면 호강인 삶이었다.
살다 보니 목구멍에 고기가 걸리는 일도 있다. 기침 멈추려고 오란씨를 들이키는 일도 있다.
거짓말 같게도 전부 눈앞의 이 깡패 새끼 집에 갇혀서 생긴 일이었다

"미아장 팔려 갔을 때, 나도 죽을 생각 안 한 거 아냐. 딱 죽어 없어지고 싶었어."
발걸음을 맞추며 이춘희를 돌아보았다. 이춘희는 앞만 보고 걸었다.
"근데 억울해서 죽을 수가 있어야지. 이대로 죽으면 창녀로 죽는 건데. 날 모르는 남도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는 서울 어디 창녀촌에서 창녀가 죽었다더라 이렇게 들을 거 아냐.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죽는 것도 분한데 그렇게 죽을 수는 없어. 난 그렇겐 안 죽을 거야."
"……."
"우리 엄만 미아장보다도 못한 쪽방에 여자들을 넣어 놓고 팔았어. 그 여자들 상대로 일수도 놓고. 그러다 죽었어. 동네 사람들 다 그 지독한 마담 년이 죽었다고 말하더라. 웃기지. 엄마 딴엔 쪽방 주인이 인생 제일로 대단한 출세였을 텐데."
이춘희가 발을 멈추었다. 나를 향해 돌아섰다.
"난 뭐가 돼서 죽을 거야. 뭐라도 돼서 죽을 거야."
"……."
"화투 공장에서 20년 동안 화투짝만 갈아도 되니깐, 악착같이 돈 벌어서 살 거야. 살아서 뭐라도 될 거야. 뭐라도 돼서, 시 쓰고 죽을 거야. 지금은 못 죽어."

나는 늘 어떻게 해서든 살았다. 욕먹고 맞으면 우는 대신 더한 욕과 침을 뱉었다.
돈 받고 몸 파는 여자들과, 그 여자들을 돈 주고 사는 남자들을 등쳐 먹었다.
깡패 새끼들한테 맞으면 성한 눈깔에 지글지글 끓는 연탄재를 처넣어서라도 병신을 만들었다.
내가 살면서 만난 모든 인간들을 보면 알지. 쓰레기는 쉽게 죽는 법이 없다.
그렇게 잘만 살아 놓고 이제 와서 나 죽여 봐라, 하고 순순할 수는 없어. 죽을 때 죽더라도 경숙이한테 진 빚은 갚아야지.
깡패들 빚은 안 갚아도 경숙이한테는 뭔 짓을 해서라도 갚아야 한다. 걘 나한테 그만한 고마움을, 사는 동안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애였다.

죽음은 상상으로는 세상 제일 무섭다가도 막상 눈앞까지 오면 그렇지가 않다.
죽기 직전까지 맞아 보고, 굶어 죽기 직전까지 굶어 보고, 얼어 죽겠지 싶을 추위에 홀딱 벗고 자 보면 안다.
나처럼 남한테 빼앗길 것도, 남이 탐낼 만한 것도 가져 본 적 없는 년한테 죽음은 더는 무서움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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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 차곡차곡 벌목된 나무를 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몸이 베어질 때 나무의 기분은 어떨까. 충분히 자랐음을 알리는 건 나무지만, 나무를 베어 가는 때는 사람이 정한다. 나무는 모르는 때에 덜컥 잘려 떠나야 한다. 어쩌면 세상 모든 끝이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니 네가 떠난 것도, 너와 헤어진 것도 특별한 끝이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언니란 이는 몸으로 죽어 가고, 나는 마음으로 죽어 간다. 불쌍한 인간들끼리 서로 원하는 걸 교환하는 거, 따지고 보면 잘된 일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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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황제궁 옆 마로니에 농장 7 (완결) 황제궁 옆 마로니에 농장 7
정연 / 연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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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속에 성공한 도시 농부 헤이즐의 일상. 동화 같은 스토리처럼 적당한 모험과 예쁜 마무리 였다. 7권까지 느긋한 일상 힐링 만화를 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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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황제궁 옆 마로니에 농장 6 황제궁 옆 마로니에 농장 6
정연 / 연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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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음모와 느긋한 썸으로 이들의 슬로우라이프 엿보기 한다. 후반 등장한 ‘로맨스 요정들‘이랑 나름 흑막이 어찌 연결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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