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수를 믿고 일을 벌일 때 사람의 마음은 빛을 잃는다.
어디가 밝은 곳인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어두워도, 탁하고 소란스러워도, 사람들이 모이는 방향으로 우르르 달려가고 만다. 다함께 달리다 보면 어깨가 부딪히고, 누군가가 누군가의 발을 밟고, 쓰러진 사람의 등을 밟고, 고함 소리가 나고 주먹을 휘두른다. 상대방의 얼굴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붙잡아 흔들고, 걷어차고, 욕설을 퍼붓고, 욕설을 듣는다. 그저 거기에만 몰두해서 본래 무슨 이유로 싸움이 시작되었는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어디에 불만이 있는지, 중요한 사실은 뒤에 남는다. - P320
누구 잘못인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나? 꾹 참아 왔는데 무엇 하나 보답받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 재앙에는 끝이 없다. 마루미는 히다카 님에게마저 버림받고 말았다.
갖가지 분노가 교차해 둑이 무너지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넘쳐난다. 눈앞에 있는 붉은 한텐이 밉다. 겁쟁이들만 모여 있는 주제에 입으로만 떠들어 대는 누비 한텐이 눈에 거슬린다. 바다에 나가지 못하는 우리를 곁눈질하며 뻔뻔스럽게 연기를 피워올리는 염색집 놈들이 얄밉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날뛰는 것일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왜 드잡이를 시작한 것일까. 화재가 번진다. 소방원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이들이 울고 있다.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길가에 넝마 꼴이 된 사람들이 쓰러져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마치 농민 봉기라도 일어난 것 같은 상황이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번져 가는 화재에 쫓겨 몸만 달랑 챙겨서 도망치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큰북 소리가 계속 울린다. - P323
"보물 ─ ."
"그래. 이 세상의 소중한 것, 귀한 것을 나타내는 말이지. 이 글자 하나 속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호는 습자본을 조심스럽게 손에 들어 얼굴을 가까이 대고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 글자는 호라고도 읽는다."
"호."
"그래. 그러니 네 이름이다. 가가 님께서 주신, 네 이름이다."
이 세상의 소중한 것. 귀한 것.
"그것은 네 생명이 보물이라는 뜻이다. 너는 가가 님을 잘 모셨다. 일도 잘했고. 가가 님은 네게 그 이름을 주시고, 너를 칭찬해 주신 거야."
오늘부터 너는 보물
寶
의
호
다. - P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