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닐 게이먼 베스트 컬렉션 + 북펀드 부록(북케이스)
닐 게이먼 지음, 정지현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3월
평점 :
미출간


반가워서 소장을 위해 펀딩 구매. 출간까지 기간이 넉넉하니까 완성도 높은 책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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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에서 ‘보물‘ 까지.

머릿수를 믿고 일을 벌일 때 사람의 마음은 빛을 잃는다.
어디가 밝은 곳인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어두워도, 탁하고 소란스러워도, 사람들이 모이는 방향으로 우르르 달려가고 만다. 다함께 달리다 보면 어깨가 부딪히고, 누군가가 누군가의 발을 밟고, 쓰러진 사람의 등을 밟고, 고함 소리가 나고 주먹을 휘두른다. 상대방의 얼굴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붙잡아 흔들고, 걷어차고, 욕설을 퍼붓고, 욕설을 듣는다. 그저 거기에만 몰두해서 본래 무슨 이유로 싸움이 시작되었는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어디에 불만이 있는지, 중요한 사실은 뒤에 남는다. - P320

누구 잘못인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나? 꾹 참아 왔는데 무엇 하나 보답받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 재앙에는 끝이 없다. 마루미는 히다카 님에게마저 버림받고 말았다.
갖가지 분노가 교차해 둑이 무너지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넘쳐난다. 눈앞에 있는 붉은 한텐이 밉다. 겁쟁이들만 모여 있는 주제에 입으로만 떠들어 대는 누비 한텐이 눈에 거슬린다. 바다에 나가지 못하는 우리를 곁눈질하며 뻔뻔스럽게 연기를 피워올리는 염색집 놈들이 얄밉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날뛰는 것일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왜 드잡이를 시작한 것일까. 화재가 번진다. 소방원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이들이 울고 있다.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길가에 넝마 꼴이 된 사람들이 쓰러져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마치 농민 봉기라도 일어난 것 같은 상황이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번져 가는 화재에 쫓겨 몸만 달랑 챙겨서 도망치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큰북 소리가 계속 울린다. - P323

"보물 ─ ."
"그래. 이 세상의 소중한 것, 귀한 것을 나타내는 말이지. 이 글자 하나 속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호는 습자본을 조심스럽게 손에 들어 얼굴을 가까이 대고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 글자는 호라고도 읽는다."
"호."
"그래. 그러니 네 이름이다. 가가 님께서 주신, 네 이름이다."
이 세상의 소중한 것. 귀한 것.
"그것은 네 생명이 보물이라는 뜻이다. 너는 가가 님을 잘 모셨다. 일도 잘했고. 가가 님은 네게 그 이름을 주시고, 너를 칭찬해 주신 거야."
오늘부터 너는 보물



다.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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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는 와타베가,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뭔가 더럽고 무겁고 싸늘한 것을 봉당에 두고 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호가 온 지 겨우 이틀 만에 몰라볼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해 주었다. 헌데 지금은 희미하게 썩은 냄새를 풍기는 것이,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뭔가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 P180

우사의 마음은 둘로 갈라졌다. 갈라져서 깔쭉깔쭉한 면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음의 절반은 그런 것 때문에 계속해서 훌쩍거리지 말라고 호에게 고함을 치려 하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호의 머리를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전부 지어낸 이야기다. 고토에 님은 정말로 가지와라 미네에게 살해되었다. 너는 분명히 미네를 보았다. 나쁜 존재에게 속은 것이 아니다. 너야말로, 정말로 진실을 보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함께 네게 거짓말을 들려준 것이다.
네가 나쁜 존재에게 속았다고 들려주려면 이 세상에는 나쁜 존재가 있고 저주나 재앙을 가져온다고 주장해야 했다. 너는 거짓말의 근거인 거짓말을 또 짊어지고 이렇게나 괴로워하고 있다 ─.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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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몸을 잔뜩 숙이고 중심을 잡으며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 두려움은 애써 몰아냈다. 딴생각을 하다가 자칫 균형을 잃으면 앞으로 고꾸라지게 된다. 거센 바람이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물어뜯었다. 맨살이 드러난 다리에는 수많은 얼음송곳이 날아와 꽂혔다.
언덕을 반 이상 내려갔을 즈음, 허리를 펴고 속도를 늦췄다.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고 미끄러져 언덕 아래 호수에 빠지면 끝장이다. 바람은 더욱 성난 듯 날뛰었고, 추위는 더욱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이제는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따끔거렸다. 아니, 따끔거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피부를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겨우 마을 어귀에 다다랐는데 다리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집인데…. - P54

"엄마가 죽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아빠까지 사고를 당했으니 어린 네가 얼마나 힘들겠니."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던 미알리크 촌장이 나를 보았다. 어느새 미소를 머금은, 그림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건 인자한 미소가 아니라 만들어진 미소였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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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죽었는데, 세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눈이 오고, 바람이 휘몰아치고, 두꺼운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린 채 걸음을 재촉했다. 가족인 우리조차 달라진 게 없었다. 아빠는 공장에 나가고, 나는 학교에 다녔다.
한 가지 달라진 게 있긴 했다. 나는 매일 아침 얼음 관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학교에 잘 다녀오라며 입 맞춰 줄 수 없는 엄마를 보며 눈물을 조금 흘렸다.
마을의 얼음 관들도 예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라우라 아줌마네 집 앞의 할아버지도, 실라네 할머니도, 한때는 우리 엄마처럼 살아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예전에는 조각상이나 장승을 보는 것처럼 별 느낌이 없었는데….
어른들이 말하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마을’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유도. - P13

엄마는 다른 조각상들과 달리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나는 철창에 매달려, 그 사이로 얼굴을 밀어 넣고 엄마를 바라봤다. 화려한 얼음 분수 옆에 서 있는 엄마는 어떤 조각상보다도 아름다웠다. 엄마는 죽어서 에니아르가 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니었을까? - P23

촌장과 동굴지기를 제외하고 망자의 동굴에 들어가본 사람은 없다. 망자의 동굴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많은 얼음 관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얼음 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얼음 관은 눈의 결정처럼 잘게 부서져 하늘로 올라간다.
어떤 이는 우리 마을에 전해오는 동굴 전설의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 나는 전설이 아니란 걸 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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