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국가 전략 - 스웨덴 모델의 정치 경제학 논형학술총서 1
미야모토 타로 지음, 임성근 옮김 / 논형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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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사회민주주의 모델 : '선택적 경제정책'과 '보편주의적 복지이념'의 결합
- [복지국가 전략], 미야모토 타로, 1999.


"자네는 굳이 할 작정인가?"

1975년 '임노동자기금안'을 마련하여 들고 찾아간 메이드네르(마이드너)에게 94세의 비그포르스가 한 말이란다.
루돌프 메이드네르는 예스타(구스타) 렌과 함께 1950년대부터 '연대임금정책'과 '임노동자기금' 등을 통해 스웨덴 복지정책에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담고자 했던 경제학자이고,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이 의회 다수당으로서 장기집권하기 시작할 당시부터 한손 총리와 함께 스웨덴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정착시킨 정치인이자 재무장관이었다. 

비그포르스는 엄밀한 의미로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스웨덴 사민주의 정책을 확립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평등주의'와 '보편주의' 이념의 유토피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장의 '혁명'적 '정치'가 아닌 '개혁'적 '정책'의 길에서도 '이상'을 폐기하고 '운동'만을 본 서유럽의 베른슈타인식 개량주의와 달랐다. 

1920년대 스웨덴 사민당 '예테보리 강령' 시기에 비그포르스는 전통적 사회주의 생산수단 사회화 과정에서 국유화 같이 거대한 소유를 넘어 노동자와 시민의 자율적 소유 등의 개념을 포함시키려 했고, 그의 경쟁자이자 이후 사회당 내각의 사회부장관 묄레르는 보다 좌파적 관점에 입각한 '보편주의 복지이념'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1932년 사민당 한손 내각은 재무장관 비그포르스를 앞세워 1938년 '살트셰바덴 협약'을 통해 노사정이 경제성장과 연대임금, 중앙집중적 노사교섭, 정리해고 요건 규정 등의 사회협약의 틀을 정하는데, 바로 '코포라티즘' 시대의 시작이었다. 
인구 1천만의 스웨덴 사민주의 모델의 분기점이다. 

1944년 이른바 '전후 강령'은 한손 총리의 '인민의 집'이라는 상징적 구상을 바탕으로 '나라살림의 계획'의 프로그램을 담게 되는데, 국가 자체를 '계급투쟁'의 전장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가정'으로 상정하고는 경제성장을 통한 부의 축적과 분배, 가족(국민/인민/시민) 모두가 '보편'와 '평등', '자유'의 이름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국가를 만드는 '나라살림'의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후 1960~1970년대 초까지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번영기',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20세기 '극단의 시대'에서도 또 하나의 '황금시대'가 다 지나간 1970년대 초 '위기의 몇십년'(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에 들어서며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에도 위기가 닥치기는 하지만,
명확하게 스웨덴 '복지국가 전략'의 기본정책은,
1) '선택적 경제정책'과,
2)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이었다.


"1950~1960년대에는 새로운 '(선택적) 경제정책'이 완전고용을 정착시켜 '풍요로운 사회'를 실현해 나가는 가운데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1930년대에 제기되었던 복지정책에는 적어도 묄레르의 견해에 따르는 한, '보편주의'적 형식을 취하면서도 수직적인 재분배에 대한 강한 지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1950~1960년대 전개에서는 세대간 혹은 개인의 생애단계(질병/출산/실업/노령) 간의 수평적인 재분배를 강화하면서 철저한 '보편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1930년대부터 사민당이 내걸었던 복지이념은 수직적 재분배를 중시한 것이며, 이 점에서는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을 주도한 묄레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비해 경제정책이 '완전고용'을 실현시켜 연대임금정책 등을 통해서 경제격차가 어느정도 축소됨에 따라서 복지정책은 개인의 생활기회 확대에 중점을 둔 새로운 이념('전후 강령')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 [복지국가 전략], <3-3.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의 전개>, 미야모토 타로, 1999.


일본의 복지정책론자 미야모토 타로 교수는 지난 세기말인 1999년에 위와 같은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을 전반적으로 분석한 [복지국가 전략]이라는 논문을 냈다. 북유럽 사민주의는 세계전쟁과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극단의 시대'였던 20세기 역사(에릭 홉스봄) 속에서도 '이론'과 '이데올로기(이념)'가 아닌 '실용'과 '생활'의 정치로 복지국가를 이루었다. 노사간 '계급투쟁'의 권력자원론은 기본바탕으로 하되, 노사정이 모여 함께 국가살림을 계획하는 '나라살림의 계획'으로서의 '코포라티즘'의 세계를 열었다. 결과는 체제의 '혁명'적 전환이 아닌, '개혁'을 통한 체제 이행이었지만, 체제는 여전히 '자본주의'였고 국가모델 또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복지자본주의'였다.
20세기 초 전투적 '사회민주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또는 '수정자본주의' 내지 '혼합경제' 등으로 불렸다.

1930년대부터 노사정 코포라티즘을 통해 1970년대까지 경제적 번영과 연대임금을 이룬 스웨덴 사회는 노동자 권력의 증대를 기획하며 '체제 이행'을 꿈꾸었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길드사회주의에 가까운 비그포르스였지만, 그의 '예테보리 강령'에서도 그는 '자유'와 '평등'의 '유토피아'를 버리지 않았다. 사회부장관 묄레르의 '보편주의적 평등'과 대치하면서도 비그포르스의 복지정책에는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전제가 붙었다. 그리고 '전후 강령'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국가살림의 계획'을 꾸리고자 했다. 이제 비그포르스가 은퇴하고 그의 후배들인 렌-메이드네르(마이드너)가 제시한 1975년 '임노동자기금'은 '나라살림의 계획'의 소박함을 넘어 '생산수단 사회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었고 하나의 '체제 이행' 계획이었다. 실제로 '임노동자기금'의 설계자 메이드네르는 당시 임노동자기금 관련한 인터뷰에서 "일종의 사회주의로 받아들여도 좋다"고까지 말했다는데, 강화된 노동자 사회권력을 바탕으로 한 사회정책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한편, 이 생산수단 사회화 방안으로서 '임노동자기금'을 상의하러 간 젊은 마르크스주의자 메이드네르에게 늙은 길드사회주의자 비그포르스가 건넸다는 "자네는 굳이 할 작정인가?"라는 염려의 말 자체도 부럽기만 하다. 체제 이행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방안에 대한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이견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나라살림' 차원에서 '체제 이행'이니 '사회화' 논의 자체가 '이단'으로 취급된다.


"원래 중앙정부에 대해서 코뮌(지자체)이 복지공급 주체였던 스웨덴에서 시민부(관청)가  지향한 것은 '시민의 영향력 확대'였다... (복지국가 비판의 우파 자유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등장한 좌파 사민당 개념인) '자유선택사회'와 '보편주의적 복지'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시민에게 공공서비스 자체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움직임..."
- [복지국가 전략], <4-4.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전략>, 미야모토 타로, 1999.


1975년에 작성되고 1976년 LO(스웨덴 블루칼라 노총) 대회에 제출된 [노동자기금을 통한 집단적 자본형성]이라는 보고서는 기업의 초과이윤으로 조성된 '임노동자기금'으로 기업의 주식을 노동계급이 소유하고 점차로 이러한 노동계급의 '집단적 자본소유'를 통해 노동계급의 사회권력을 강화한다는 '사회주의'적 발상이었다. 당연히 자본가계급과 사용자단체(SAF)는 극렬하게 반대했고 일부 상층 사무직-전문직-화이트칼라 노조(TCO)와 자유주의 정객들은 '노동자'가 아닌 '시민'이라는 탈계급적 용어로 무장한 채 메이드네르가 말한 '노동자 권력 이행'으로서의 '임노동자기금' 문제를 '경제활성화를 통한 자본형성'이라는 문제로 희석시키고 실제로 전환시켰다. 결국 1978년과 1981년 두 차례의 수정을 통해 '시민적 노동자기금' 형태로 1983년에 도입한 이 정책은 1991년 우익 보수정권에 의해 폐기되고 말았다. 
역시 이러한 '노동자 사회권력' 문제와 '체제 이행' 사안이 구체적인 정책의 형태로 논의되는 과정 자체가 경이롭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소유 문제만 거론해도 '자유민주주의'적 '신성'을 모독한 심각한 '이단'이 된다.

미야모토 타로의 이 논문은 스웨덴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전반적으로 분석한 흔치 않은 책이다. 다수의 책이 있지만 그 단편을 그릴 뿐 본격적으로 모델 분석을 시도한 책은 의외로 거의 없다고 하는데, 아마도 지난 세기말의 이야기일 테다. 21세기에는 우리 사회는 크게 변한 게 없어도 북유럽 사민주의를 다룬 보다 대중적인 책들이 많이 소개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스웨덴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의 두 이념으로,
1) '자유선택사회'
2) '보편주의적 복지이념'을 든다. 

'자유선택사회'는 전술한 정책이념으로서 '선택적 경제정책'에 맞물린다. 즉, 경제성장과 초과이윤 달성의 '선택적 경제정책'으로 사회적 부가 축적되고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으로 배분된 부를 통해 '풍요로운 사회'를 일군 스웨덴이 지향한 사회의 상이 바로 '자유선택사회'다. 물론 노동계급의 좌파적 용어는 아니다. 사민당의 좌파정책에 계속 반대해온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중도보수 정당들의 '복지국가비판'에 응답하는 대항개념이다. 노동계급의 권력강화를 넘어 모든 시민(국민/인민)의 '자유'를 강조한 사회의 상이 '자유선택사회'인 것이다. 이 사회의 대전제는 확고하게 '완전고용'에 기초한다. 이 '완전고용'이 무너지면 보편적 복지국가는 없다. 실제로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이 무너지고 새로운 사민주의 전략이 필요하게 된 이유도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위기로 인해 1980년대부터 실업률이 급증한 배경이었다. 우리 사회 우파들이 말하듯 북유럽 복지국가의 위기는 '복지병'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체제 위기로 무너진 '완전고용'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20세기말부터 맞닥뜨린 [복지국가 전략]의 모색과 전환의 배경은 여전히 실업률의 극복과 '완전고용'의 문제다.

여기에 '잠정적 유토피아'와 '나라살림의 계획'이 있는 '인민의 집'으로서 복지국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여전히 남는다. 바로 '보편주의적 복지이념'이 그것이다. 
경제성장과 풍요는 우리 삶에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즉, 인간적인 삶은 '풍요'만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고 '공정'하며 '정의'롭게 분배되고 영위되는 부, '선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복지를 통해서만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체제가 가능하다. 또한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에는 소득과 자산에 따른 누진적 과세가 필수다. 소득비례만이 아니라 누진적 '부유세'를 통해 만인의 복지를 실현하는 사회가 바로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의 정책적 기초다. 


"자네는 굳이 할 작정인가?"라는 메이드네르에 대한 비그포르스의 질문은, 굳이 그러한 방식이 아니어도 '보편주의적 복지이념'과 '잠정적 유토피아'를 견지하는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은 새로운 '체제 이행'을 할 수 있다는 체제의 자부심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20세기 1천만 인구의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이,
21세기 5천만 인구의 남한의 복지국가 모델로 다시금 새롭게 시도될 시간이다.

***

1. [복지국가 전략 - 스웨덴 모델의 정치경제학](1999), 미야모토 타로, 임성근 옮김, <논형>, 2003.
2.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 - 임노동자기금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신정완, <사회평론>, 2012.
3.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모델], 니크 브란달/외이빈 부라트베르그/다그 토르센, 홍기빈 옮김, <책세상>, 2014.
4.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홍기빈, <책세상>, 2011.
5.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1914-1991(
Age of Extremes :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1994), Eric Hobsbawm, 이용우 옮김, <까치글방>, 1997.
6.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최연혁, <쌤앤파커스>,2012.
7. [세계화와 노동개혁], 김인춘 외, <백산서당>, 2005.
8. [세계화시대 노사정의 공존전략], 한국정치학회, 심지연 외, <백산서당>,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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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하 까치글방 131
에릭 홉스봄 지음, 이용우 옮김 / 까치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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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1994) - 에릭 홉스봄
- 불확실한 시대의 '묵시록'


"오직 이러한 도전세력(파시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일시적이고 기묘한 동맹'만이 민주주의를 구했다. 히틀러 독일에 대한 승리는 기본적으로 적군(赤軍)에 의해서 쟁취된 것이었고, 오직 적군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시즘에 맞선 자본주의-공산주의 동맹의 이 시기-기본적으로 1930~1940년대-는 여러 점에서 20세기사의 중심이자 결정적인 시기이다. 여러 점에서 그 시기는 세기 대부분 동안-짧았던 반파시즘 시기를 제외하고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상태였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관계로 볼 때 역사적인 '역설'의 시기이다... 전세계 자본주의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10월 혁명의 가장 지속적인 결과가, 전쟁에서나 평화에서나-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신의 적대자들에게 자극과 공포를 줌으로써 그들 자신을 개혁시키고, 경제계획의 인기를 확립하여 그들에게 개혁절차들 중 일부를 제공해 줌으로써- 자신의 적대자들을 구한 것이었다는 점은 이 '기묘한' 세기의 아이러니들 중 하나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20세기 : 개관>, 에릭 홉스봄, 1994.


19세기 자본주의 근대사 '3부작'인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를 쓴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1917~2012)이 바라본 20세기는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였다. 
'극단(extreme)'의 시대는 또한 '역설(paradox)'의 시대였다. 1914년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과 1939년 개시된 제2차 세계대전의 '세계전쟁' 시대는 러시아 소비에트 '10월 혁명'과 제3세계 '혁명'의 시대였고, 미-소 초강대국 간 '냉전(Cold War)'의 시대였다. 1991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진 후 더이상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새로운 천년기'인 21세기를 앞둔 시기였다.

'장기 19세기(1789~1914)'를 돌아본 [혁명/자본/제국의 시대]의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 역사를 통해 에릭 홉스봄이 내린 결론은 그래도 '희망'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 70년 이상을 살아본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기록하는 이 [극단의 시대]는 한마디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묵시록(默示錄/Apocalypse)'이다.
그리고, 21세기의 사반세기를 지나는 지금도 이 노회한 역사가의 전망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전쟁과 대공황)... 경제붕괴가 없었다면 확실히 히틀러도 없었을 것이고, 거의 확실히 루스벨트도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경제붕괴의 충격을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후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대공황은 서방정부들로 하여금 자신의 국가정책애서 경제적 고려(자유시장)보다 사회적 고려(보호무역)를 우선시하도록 했다... 양대 군사강국-일본(1931)과 독일(1933)-에서 민족주의적이고 호전적이며 매우 공격적인 체제가 거의 동시에 승리한 것이, 가장 영향력 크고 가장 불길한, 대공황의 정치적 결과였다는 점만큼은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문이 1931년에 열린 것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1-3. 경제적 심연 속으로>, 에릭 홉스봄, 1994.


러시아 소비에트 '10월 혁명'은 "전쟁에 대한 혐오"(같은책, <1-2. 세계혁명>)로 발생한 혁명이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이 일어난 배경은 제국주의 '러-일전쟁'이었고 1914년에 제1차 대전 참전한 러시아 차르체제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끝장났다. 러시아 농촌공동체(미르)를 모태로 한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의 광범위한 '이중권력'의 반전투쟁을 기민하게 지도하며 케렌스키의 '2월 임시정부'를 타도한 볼셰비키 '10월 혁명'은 19세기 내내 세계를 지배했던 자본주의와 그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에 대한 당대의 거대한 대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일시적이고 기묘한 동맹"(같은책, <20세기 : 개관>) 관계를 자본주의와 맺었던 공산주의는 20세기 내내 서방 자유주의 초강대국 미국과 '냉전'을 벌였지만,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인 이들 '제1세계'를 위협한 것은 소련이 지도하던 '제2세계'도,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같은책, <1-7. 제국들의 종식>)과 "전세계에 분포한 혁명지대"(같은책, <3-15. 제3세계와 혁명>)인 '제3세계'도 아니었다. 
"위협은 (좌파가 아닌) 우파로부터만 나왔다."(같은책, <1-4. 자유주의의 몰락>) 즉,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만든 자유주의 세계의 괴물 '파시즘'은 본질적으로는 폭력으로 지배했지만 자유주의 대의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자유주의의 적으로 간주된 '파시즘'은 자본주의 세계 대공황이 낳은 괴물이었다. 홉스봄에 의하면, "1930년대에 '파시즘'은 '미래의 물결'로 보였던 것"이고 대중동원 포퓰리즘으로서 "파시스트들은 반(反)혁명의 혁명가"(이상 같은책, <1-4>)였다. 
에릭 홉스봄에 의하면, 결국 20세기 역사는 '경제대공황'과 '세계전쟁', 그리고 '혁명'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데, 이 모든 '위협'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자체로부터 나온 것이지 결코 제2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초강대국 미국과의 '핵전쟁'으로서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품은 '냉전' 시기 소련은 실질적으로 결코 그런 위협이 되지 못했는데, 소련의 '제2세계'는 단지 미국(레이건주의)과 영국(대처주의)의 보수주의자들이 반대파를 꺾고 집권하기 위한 과장된 '위협'이었다. 소련(스탈린주의)은 이미 1930년대에 '일국사회주의'를 선언하며 '세계혁명'의 의도를 포기한 채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는 것에 그쳤다. 소련은 중국과 베트남, 쿠바 등지의 '제3세계' 혁명을 원칙적으로 반대했고 그들의 자력 혁명 이후에 마지못해 그들의 혁명국가를 지지했다. 

그렇게 본질적으로 20세기 '자유주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그 자체에 내재된 '대공황' 및  '파시즘'과 '전체주의'였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제2세계'는 미국과 서유럽의 '제1세계'와 경쟁했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제2세계'가 파산한 이유는 '냉전'이 아니라 '데탕트(해빙)'였다. 공산주의의 '위협'은 자본주의를 약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자유시장'보다는 '보호무역'과, 작은 '야경국가'보다는 강한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홉스봄은 "냉전의 '역설'은 소련을 패배시키고 결국 파산시킨 것이 결국 '대결'이 아니라 '데탕트'였다는 데에 있었다"(같은책, <2-8. 냉전>)라고 쓰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 모순인 경제적 대공황과 그 상황이 낳은 파시즘으로 인해 위기에 빠졌고, 그 대안 체제로 등장했던 공산주의는 '역설'적으로 '케인스주의' 또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자본주의 '혼합경제'의 모티브가 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했다. 그러므로 "냉전의 종식은 국제분쟁의 종식이 아니라, 한 시대의 종식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낡은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성격과 전망은 전혀 불확실했다."(같은책, <2-8. 냉전>)
즉,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자'로 추정되는 홉스봄이 보기에 인류의 '미래'인 '혼합경제'가 폐기되는 '냉전의 종식'은 또 하나의 '20세기 불확실성'의 시작이었다. 공산주의 몰락 후 힘을 얻은 하이에크나 프리드먼의 '주류경제학'과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니즘의 '신자유주의 정부'는 '자유시장'의 신화를 앞세웠지만 실상은 자국 보호주의로 연명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 천년왕국의 사제들 조차 그 체제를 통제할 수 없었다. 
홉스봄이 말한 20세기의 '불확실성'의 실체가 바로 그것이다.


"위기의 몇십년에 관한 중심적인 사실은 자본주의가 더이상 '황금시대'만큼 잘 기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작동이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기의 몇십년(1973~)은 국민국가가 경제적 힘을 잃은 시대였던 것이다... (경제적) '자유시장'과 정치적 '민주주의' 사이에 선천적인 관계가 전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위기의 몇십년의 역사적 비극은 이제는 생산에서 인간들이 기계에 밀려나는 속도가, 시장경제가 그들을 위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낳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라졌다는 데에 있었다... (포퓰리즘/개인숭배/배외주의 정치세력 등의 부상으로 인한) '배타적 정체성 정치의 비극은... 어떠한 경우에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3-14. 위기의 몇십년>, 에릭 홉스봄, 1994.


1945년 종전 후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 전까지 '냉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황금시대(Golden Age/같은책, <2부>)'를 열었다.  1914년부터 두 차례 세계전쟁으로 '파국의 시대(The Age of Catastrophe/같은책, <1부>)'를 통과한 20세기는 '냉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경제'를 통해 강력한 "공적 권위체"(같은책)로서의 국가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공황주기(콘드라티예프의 대략 10년주기)에 따라 1973년 '오일쇼크'는 이후 이 책이 씌어진 1994년까지 '위기의 몇십년(The Crisis Decades)' 또는 '산사태(The Landslide/같은책, <3부>)'라는 모호한 용어로 명명된다. 
역사가로서 지금 살고 있는 시대를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겠지만, 기존 '장기 19세기(The long nine-teenth century)'의 '응집된 전체로서의 역사'를 통해 힘들지만 '희망의 시대'를 전망하던 이 노회한 역사가의 눈에 당장 본인이 살고 있는 '극단'과 '역설'의 '단기 20세기(The short twentieth century)'는 그 자체로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일종의 '불확실성'의 시대로 보인다고 쓰고 있다.

21세기의 10년 이상을 더 살았지만, 20세기 말에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천년기(21세기)를 향하여"(같은책, <3-19>) 흘러가던 1994년의 에릭 홉스봄은 당시의 '극단'적이고 '역설'적인 20세기를 돌아보며 이렇게 결론짓는다.

"단기 20세기에는 아무도 그 해결책을 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해결책을 가졌다는 주장조차 하지 않는 문제들을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 세기말의 시민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전지구적인 안개를 뚫고 세번째 천년기(21세기)를 향하여 나아갔을 때 그들이 확실히 아는 것은 오직 역사의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 뿐이었다... 20세기는 그 성격이 불분명한 전지구적 무질서(신자유주의)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무질서를 끝내거나 통제할 수 있는 분명한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막을 내렸다... 인간사회의 구조 자체...가 인류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의 잠식을 통해서 이제 막 파괴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외적 폭발과 내적 폭발 둘 다의 위험에 처해 있다. 세계는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실패의 대가는, 즉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경우의 결과는 암흑 뿐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3-19. 새로운 천년기를 향하여>, 에릭 홉스봄, 1994.


과학기술을 진보시키고 대량생산체제를 발전시킨 대량전으로서 '총력전'(같은책, <1-1. 총력전의 시대>)의 20세기 '세계전쟁'을 거치며 발전한 과학기술은 문예 분야에서 '전위예술' 및 혁신적 '모더니즘'의 패퇴와 현실괴리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같은책, <3-17. 전위예술의 사멸-1950년 이후의 예술>)과는 달리 '민주주의'적 '대중소비사회'의 '마법사'가 되었는데, 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의 '마법사'의 '도제'로서 다수 소비대중은 "더 이상 자신의 (과학기술적) 지식 부족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같은책, <3-18. 마법사와 도제-자연과학>)이란다. 과학자가 아닌 소비자 대중 그 누구라도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다면 자동차의 과학원리를 몰라도 운전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20세기의 경제기적은 '자유주의'적 주류경제학의 '자유방임'이 아니라 케인스주의적 '보호무역'과 완전고용 및 수요창출에 기인했다(같은책, <3-19>).
'국민국가'는 약화된 반면, 사회 재분배의 주체로서 '공적 권위체'인 '국가' 자체는 강화된 '단기 20세기'의 세계정치는 '인구 문제'와 '생태학적 (환경)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에릭 홉스봄은 자기통제력을 상실한 20세기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는 더이상 '희망'이 아닌 '암흑' 뿐이라는 '묵시록(默示錄)'으로 이 책을 끝맺고 있다.

19세기를 전공하고 20세기를 관통했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세기간 엇갈리는 '희망'과 '암흑'의 전망은 과연 21세기 후세 역사가들에게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그래도 인류는 살아야 하니 세계의 미래는 '희망'일 수 밖에 없지만, 문제는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이다.

***

1.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1914-1991(
Age of Extremes :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1994), Eric Hobsbawm, 이용우 옮김, <까치글방>, 1997
2. [혁명의 시대](1962), 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1998.
3. [자본의 시대](1975), 에릭 홉스봄, 정도영 옮김, <한길사>, 1998.
4. [제국의 시대](1987), 에릭 홉스봄, 김동택 옮김, <한길사>, 1998.
5. [20세기 이데올로기(Ideologies in the Age of Extremes)](2011), Willie Thomson, 전경훈 옮김, <산처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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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상 까치글방 130
에릭 홉스봄 지음, 이용우 옮김 / 까치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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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1994) - 에릭 홉스봄
- 불확실한 시대의 '묵시록'


"오직 이러한 도전세력(파시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일시적이고 기묘한 동맹'만이 민주주의를 구했다. 히틀러 독일에 대한 승리는 기본적으로 적군(赤軍)에 의해서 쟁취된 것이었고, 오직 적군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시즘에 맞선 자본주의-공산주의 동맹의 이 시기-기본적으로 1930~1940년대-는 여러 점에서 20세기사의 중심이자 결정적인 시기이다. 여러 점에서 그 시기는 세기 대부분 동안-짧았던 반파시즘 시기를 제외하고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상태였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관계로 볼 때 역사적인 '역설'의 시기이다... 전세계 자본주의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10월 혁명의 가장 지속적인 결과가, 전쟁에서나 평화에서나-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신의 적대자들에게 자극과 공포를 줌으로써 그들 자신을 개혁시키고, 경제계획의 인기를 확립하여 그들에게 개혁절차들 중 일부를 제공해 줌으로써- 자신의 적대자들을 구한 것이었다는 점은 이 '기묘한' 세기의 아이러니들 중 하나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20세기 : 개관>, 에릭 홉스봄, 1994.


19세기 자본주의 근대사 '3부작'인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를 쓴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1917~2012)이 바라본 20세기는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였다. 
'극단(extreme)'의 시대는 또한 '역설(paradox)'의 시대였다. 1914년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과 1939년 개시된 제2차 세계대전의 '세계전쟁' 시대는 러시아 소비에트 '10월 혁명'과 제3세계 '혁명'의 시대였고, 미-소 초강대국 간 '냉전(Cold War)'의 시대였다. 1991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진 후 더이상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새로운 천년기'인 21세기를 앞둔 시기였다.

'장기 19세기(1789~1914)'를 돌아본 [혁명/자본/제국의 시대]의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 역사를 통해 에릭 홉스봄이 내린 결론은 그래도 '희망'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 70년 이상을 살아본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기록하는 이 [극단의 시대]는 한마디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묵시록(默示錄/Apocalypse)'이다.
그리고, 21세기의 사반세기를 지나는 지금도 이 노회한 역사가의 전망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전쟁과 대공황)... 경제붕괴가 없었다면 확실히 히틀러도 없었을 것이고, 거의 확실히 루스벨트도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경제붕괴의 충격을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후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대공황은 서방정부들로 하여금 자신의 국가정책애서 경제적 고려(자유시장)보다 사회적 고려(보호무역)를 우선시하도록 했다... 양대 군사강국-일본(1931)과 독일(1933)-에서 민족주의적이고 호전적이며 매우 공격적인 체제가 거의 동시에 승리한 것이, 가장 영향력 크고 가장 불길한, 대공황의 정치적 결과였다는 점만큼은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문이 1931년에 열린 것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1-3. 경제적 심연 속으로>, 에릭 홉스봄, 1994.


러시아 소비에트 '10월 혁명'은 "전쟁에 대한 혐오"(같은책, <1-2. 세계혁명>)로 발생한 혁명이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이 일어난 배경은 제국주의 '러-일전쟁'이었고 1914년에 제1차 대전 참전한 러시아 차르체제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끝장났다. 러시아 농촌공동체(미르)를 모태로 한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의 광범위한 '이중권력'의 반전투쟁을 기민하게 지도하며 케렌스키의 '2월 임시정부'를 타도한 볼셰비키 '10월 혁명'은 19세기 내내 세계를 지배했던 자본주의와 그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에 대한 당대의 거대한 대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일시적이고 기묘한 동맹"(같은책, <20세기 : 개관>) 관계를 자본주의와 맺었던 공산주의는 20세기 내내 서방 자유주의 초강대국 미국과 '냉전'을 벌였지만,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인 이들 '제1세계'를 위협한 것은 소련이 지도하던 '제2세계'도,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같은책, <1-7. 제국들의 종식>)과 "전세계에 분포한 혁명지대"(같은책, <3-15. 제3세계와 혁명>)인 '제3세계'도 아니었다. 
"위협은 (좌파가 아닌) 우파로부터만 나왔다."(같은책, <1-4. 자유주의의 몰락>) 즉,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만든 자유주의 세계의 괴물 '파시즘'은 본질적으로는 폭력으로 지배했지만 자유주의 대의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자유주의의 적으로 간주된 '파시즘'은 자본주의 세계 대공황이 낳은 괴물이었다. 홉스봄에 의하면, "1930년대에 '파시즘'은 '미래의 물결'로 보였던 것"이고 대중동원 포퓰리즘으로서 "파시스트들은 반(反)혁명의 혁명가"(이상 같은책, <1-4>)였다. 
에릭 홉스봄에 의하면, 결국 20세기 역사는 '경제대공황'과 '세계전쟁', 그리고 '혁명'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데, 이 모든 '위협'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자체로부터 나온 것이지 결코 제2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초강대국 미국과의 '핵전쟁'으로서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품은 '냉전' 시기 소련은 실질적으로 결코 그런 위협이 되지 못했는데, 소련의 '제2세계'는 단지 미국(레이건주의)과 영국(대처주의)의 보수주의자들이 반대파를 꺾고 집권하기 위한 과장된 '위협'이었다. 소련(스탈린주의)은 이미 1930년대에 '일국사회주의'를 선언하며 '세계혁명'의 의도를 포기한 채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는 것에 그쳤다. 소련은 중국과 베트남, 쿠바 등지의 '제3세계' 혁명을 원칙적으로 반대했고 그들의 자력 혁명 이후에 마지못해 그들의 혁명국가를 지지했다. 

그렇게 본질적으로 20세기 '자유주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그 자체에 내재된 '대공황' 및 '파시즘'과 '전체주의'였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제2세계'는 미국과 서유럽의 '제1세계'와 경쟁했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제2세계'가 파산한 이유는 '냉전'이 아니라 '데탕트(해빙)'였다. 공산주의의 '위협'은 자본주의를 약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자유시장'보다는 '보호무역'과, 작은 '야경국가'보다는 강한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홉스봄은 "냉전의 '역설'은 소련을 패배시키고 결국 파산시킨 것이 결국 '대결'이 아니라 '데탕트'였다는 데에 있었다"(같은책, <2-8. 냉전>)라고 쓰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 모순인 경제적 대공황과 그 상황이 낳은 파시즘으로 인해 위기에 빠졌고, 그 대안 체제로 등장했던 공산주의는 '역설'적으로 '케인스주의' 또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자본주의 '혼합경제'의 모티브가 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했다. 그러므로 "냉전의 종식은 국제분쟁의 종식이 아니라, 한 시대의 종식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낡은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성격과 전망은 전혀 불확실했다."(같은책, <2-8. 냉전>)
즉,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자'로 추정되는 홉스봄이 보기에 인류의 '미래'인 '혼합경제'가 폐기되는 '냉전의 종식'은 또 하나의 '20세기 불확실성'의 시작이었다. 공산주의 몰락 후 힘을 얻은 하이에크나 프리드먼의 '주류경제학'과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니즘의 '신자유주의 정부'는 '자유시장'의 신화를 앞세웠지만 실상은 자국 보호주의로 연명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 천년왕국의 사제들 조차 그 체제를 통제할 수 없었다. 
홉스봄이 말한 20세기의 '불확실성'의 실체가 바로 그것이다.


"위기의 몇십년에 관한 중심적인 사실은 자본주의가 더이상 '황금시대'만큼 잘 기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작동이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기의 몇십년(1973~)은 국민국가가 경제적 힘을 잃은 시대였던 것이다... (경제적) '자유시장'과 정치적 '민주주의' 사이에 선천적인 관계가 전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위기의 몇십년의 역사적 비극은 이제는 생산에서 인간들이 기계에 밀려나는 속도가, 시장경제가 그들을 위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낳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라졌다는 데에 있었다... (포퓰리즘/개인숭배/배외주의 정치세력 등의 부상으로 인한) '배타적 정체성 정치의 비극은... 어떠한 경우에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3-14. 위기의 몇십년>, 에릭 홉스봄, 1994.


1945년 종전 후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 전까지 '냉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황금시대(Golden Age/같은책, <2부>)'를 열었다.  1914년부터 두 차례 세계전쟁으로 '파국의 시대(The Age of Catastrophe/같은책, <1부>)'를 통과한 20세기는 '냉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경제'를 통해 강력한 "공적 권위체"(같은책)로서의 국가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공황주기(콘드라티예프의 대략 10년주기)에 따라 1973년 '오일쇼크'는 이후 이 책이 씌어진 1994년까지 '위기의 몇십년(The Crisis Decades)' 또는 '산사태(The Landslide/같은책, <3부>)'라는 모호한 용어로 명명된다. 
역사가로서 지금 살고 있는 시대를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겠지만, 기존 '장기 19세기(The long nine-teenth century)'의 '응집된 전체로서의 역사'를 통해 힘들지만 '희망의 시대'를 전망하던 이 노회한 역사가의 눈에 당장 본인이 살고 있는 '극단'과 '역설'의 '단기 20세기(The short twentieth century)'는 그 자체로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일종의 '불확실성'의 시대로 보인다고 쓰고 있다.

21세기의 10년 이상을 더 살았지만, 20세기 말에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천년기(21세기)를 향하여"(같은책, <3-19>) 흘러가던 1994년의 에릭 홉스봄은 당시의 '극단'적이고 '역설'적인 20세기를 돌아보며 이렇게 결론짓는다.

"단기 20세기에는 아무도 그 해결책을 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해결책을 가졌다는 주장조차 하지 않는 문제들을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 세기말의 시민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전지구적인 안개를 뚫고 세번째 천년기(21세기)를 향하여 나아갔을 때 그들이 확실히 아는 것은 오직 역사의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 뿐이었다... 20세기는 그 성격이 불분명한 전지구적 무질서(신자유주의)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무질서를 끝내거나 통제할 수 있는 분명한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막을 내렸다... 인간사회의 구조 자체...가 인류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의 잠식을 통해서 이제 막 파괴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외적 폭발과 내적 폭발 둘 다의 위험에 처해 있다. 세계는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실패의 대가는, 즉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경우의 결과는 암흑 뿐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3-19. 새로운 천년기를 향하여>, 에릭 홉스봄, 1994.


과학기술을 진보시키고 대량생산체제를 발전시킨 대량전으로서 '총력전'(같은책, <1-1. 총력전의 시대>)의 20세기 '세계전쟁'을 거치며 발전한 과학기술은 문예 분야에서 '전위예술' 및 혁신적 '모더니즘'의 패퇴와 현실괴리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같은책, <3-17. 전위예술의 사멸-1950년 이후의 예술>)과는 달리 '민주주의'적 '대중소비사회'의 '마법사'가 되었는데, 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의 '마법사'의 '도제'로서 다수 소비대중은 "더 이상 자신의 (과학기술적) 지식 부족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같은책, <3-18. 마법사와 도제-자연과학>)이란다. 과학자가 아닌 소비자 대중 그 누구라도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다면 자동차의 과학원리를 몰라도 운전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20세기의 경제기적은 '자유주의'적 주류경제학의 '자유방임'이 아니라 케인스주의적 '보호무역'과 완전고용 및 수요창출에 기인했다(같은책, <3-19>).
'국민국가'는 약화된 반면, 사회 재분배의 주체로서 '공적 권위체'인 '국가' 자체는 강화된 '단기 20세기'의 세계정치는 '인구 문제'와 '생태학적 (환경)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에릭 홉스봄은 자기통제력을 상실한 20세기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는 더이상 '희망'이 아닌 '암흑' 뿐이라는 '묵시록(默示錄)'으로 이 책을 끝맺고 있다.

19세기를 전공하고 20세기를 관통했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세기간 엇갈리는 '희망'과 '암흑'의 전망은 과연 21세기 후세 역사가들에게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그래도 인류는 살아야 하니 세계의 미래는 '희망'일 수 밖에 없지만, 문제는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이다.

***

1.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1914-1991(
Age of Extremes :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1994), Eric Hobsbawm, 이용우 옮김, <까치글방>, 1997
2. [혁명의 시대](1962), 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1998.
3. [자본의 시대](1975), 에릭 홉스봄, 정도영 옮김, <한길사>, 1998.
4. [제국의 시대](1987), 에릭 홉스봄, 김동택 옮김, <한길사>, 1998.
5. [20세기 이데올로기(Ideologies in the Age of Extremes)](2011), Willie Thomson, 전경훈 옮김, <산처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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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지음 / 논형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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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은 위작(僞作)인가?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논형>, 2022.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통치기간은 391년부터 491년까지 정확히 백년 간이다. 광개토왕은 391년 18세(374년생)로 등극하여 21년을 통치하고 412년 39세에 사망하며, 장수왕은 412년 19세(394년생)로 등극하여 80년을 통치하고 491년 98세로 사망한다. 광개토왕이 '굵고 짧은' 응축의 역사를 펼쳤다면 장수왕은 '가늘고 긴' 발산의 역사를 펼친다."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서문>, 이석연/정재수, 2022.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의 <고구려본기> 제8권 '영양왕'편에는 고구려 영양왕 11년인 600년도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왕명을 받아 [유기] 1백권을 모아 [신집] 5권으로 요약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고구려 역사서는 현재에 전하지 않는다. 당나라 장수 이적은 고구려 멸망 후 평양성에 있던 고구려 사서 일체를 불태웠다는데, 김부식 또한 신라 이전 역사서 중 대부분의 주체적인 열국의 역사서들을 없앴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도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승자'만이 '기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 선생은 일제의 왕실도서관에서 촉탁사서로 근무하던 10여년 간 일제가 약탈해 간 우리 역사서들을 발췌하고 필사하였다. 신라 문인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과 1995년 순차 공개 후 지금까지도 진위 논란이 있다는데, 박창화 선생의 또 다른 필사본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고구려왕조실록' [유기(留記)] 100권의 발췌본일 수도 있단다. 
역사는 그 누가 지우려 한다 해도 모조리 없앨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대를 이어 지켜나가기 때문이다. 설령 이적과 김부식이 분서를 했다고 해도 망국의 열신들이 그 역사서들을 보존하기 위해 분투했을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던 일제는 만주를 포함한 우리의 강역을 측정하고 역사를 추적하며 그 과정에서 사대주의사관의 [삼국사기] 이전 역사서들을 약탈해 갔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도 반환되지 않은 일제왕실도서관의 그 자료들 중 고구려와 백제 등의 주체적 역사서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남당 박창화 선생의 필사본 [고구려사략]은 [삼국사기]와 다른 시각을 전하며 그 내용은 '광개토대왕릉비'와 같다고 한다. 
[고구려사략]의 원본이 고구려의 주체적 역사서 [유기]로 추정되는 이유다.


1. '정복군주' 광개토왕 고담덕


"영락 10년 신라구원은 한반도 왜잔국(부여백제)이 광개토왕에게 무참히 깨진 영락 6년 왜잔국 정벌(396년)을 배경으로 한다. 그 결과로 왜잔국의 주류세력이 일본열도에 급히 망명하여 야마토정권을 수립하고(397년), 이를 뒤따르던 옛 부여백제(왜잔국)의 삼한백성(궁월군과 120현민)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위해 한꺼번에 경남 남해안에 집결한다(400년).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삼한백성의 소요사태를 진압하고 신라를 구원한다. 이후 야마토는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를 압박하고 또한 협상을 통해 삼한백성의 엑소더스를 완결한다(402년). 다만 이 과정 속에 백제(한성백제)는 옛 왜잔국(부여백제)의 삼한 땅을 얻기 위해 전지태자를, 신라는 삼한백성의 엑소더스를 보장하기 위해 미사흔왕자를 각각 야마토에 볼모로 보낸다."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1-2-2. 광개토왕의 정복사업>, 이석연/정재수, 2022.


[유기]는 일종의 '고구려왕조실록'이었을 것이라 한다. 원래는 [대경]이라는 왕의 기록이 광개토왕 대에 [유기]라는 이름으로 대략 70권에 이르렀고,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또 다른 전성기인 영양왕 대에는 100권에 이르니 영양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신집] 5권으로 요약하라 명했다. 이적과 김부식이 불태웠으나 남은 이 고구려의 기록들은 일제의 식민화 과정에서 약탈되어 갔을 의혹이 짙다. 
남당 박창화 선생의 필사본을 '소설'로 보기에는 그 내용이 광개토대왕릉비가 전하는 역사와 너무도 동일하기에 그 원본이 [유기]일 가능성 또한 높다는 것이다.

헌법학자 이석연, 역사작가 정재수 선생은 남당 박창화 선생의 [고구려사략]과 '광개토대왕릉비'를 토대로 '영락대제기'와 '장수대제기'를 다시 돌아보는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2022)을 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류 '사대주의' 역사관을 벗어나 대륙의 제국 고구려의 기상을 다시 세우고자 '정복군주 광개토왕'의 정복사업과 유물, '수성군주 장수왕'의 치세 및 외교와 유물 등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시조 추모왕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영락'을 연호로 한 '영락대제'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을 기록한다. 때는 광개토왕 사후 2년 동안 내부 권력투쟁을 통해 왕위계승을 확정한 장수왕에 의해서 414년에 국내성에 세워진다. 

이 책에 의하면 압록강변의 국내성은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다. 북부여에서 독립한 '주몽(추모)'의 졸본성(환도/해성)과 유리(유류)왕의 위나암성(철령), 그리고 장수왕이 천도한 5세기의 한반도 평양성이 역대 고구려의 수도였다. 길림(집안)의 국내성은 수도가 아니라 왕릉의 집합도시인 네크로폴리스(nekropolis : 死者의 도시)였다.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부터 아버지 소수림왕, 삼촌인 고국양왕을 비롯하여 광개토왕 본인은 물론 아들 장수왕의 무덤과 이들을 지키는 수묘인 일가들의 도시였던 것이다. 

남당 박창화 선생의 [고구려사략]과 국내성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의 7대 외적 중 '백잔(百殘)'과 '왜잔(倭殘)' 등이 나온다. '백잔'은 고구려가 원래 같은 핏줄이었던 백제를 비하하는 말이고, '왜잔'은 '왜적'과 비슷해 보이나 실상 백제다. 그 외 '비려', '백신', '신라', '가라(임나)' 등도 나오는데, '비려'는 부여의 잔여세력, '백신'은 이후 여진족의 조상 숙신족, 나머지는 '신라'와 '가야(임나/가라/아라)' 등이다. 그 중 '왜잔'은 일본 열도의 '왜적'이 아니라 전술했듯 충남 이하의 백제 세력이다. 즉, 백제는 4세기 말 아신왕 때에는 지금의 서울 하남지역인 '한성백제'와 충남과 전라도 일대를 아우르는 '부여백제'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4세기초 백제 근초고왕 시기였던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에는 고구려가 위나암성을 중심으로 서북방 정벌을 시도했으나 성과가 크지 않았다. 그러던 중 4세기말 광개토왕의 첫번째 정벌이 '비려' 정벌이다. '비려'는 고조선 이전 '고리국'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부여족 일파들이다. 광개토왕에게 쫓겨난 '비려' 사람들이 바로 '부여기마족'인데 이들이 한성백제의 아래로 이주하여 '부여백제'로 정착한다. 이 '부여백제' 세력이 바로 '왜잔국'이다. 이들이 토벌된 후 충주 '중원고구려비'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다시 고구려에 의해 쫓겨난 '부여백제' 지배층은 일본 열도로 건너가 '야마토' 정권을 세웠고 이 '야마토' 세력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아마도 패잔세력으로서 일본 후쿠오카와 오사카 등지로 건너가 7세기 후기에 '일본'을 세운 '야마토(大和)' 정권일 것이다. 한편, 광개토왕이 그 다음으로 정벌한 '백신'은 신라 정권의 뿌리였을 수도 있는데, 내물왕 때부터 시작된 신라의 '김'씨 정권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손인 숙신 세력이 내려와 석씨 정권을 몰아내고 김씨 세습왕조를 세운 결과다. 한참 후 여진족의 국명이 '금(金)'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용의주도한 광개토왕은 '백신'을 먼저 토벌하고는 신라를 복속시킨다. 또한 광개토왕은 5만의 정병을 남쪽으로 보내 진짜 '왜구'인 일본의 '왜적'을 진압하면서 '고구려-신라' 연합 대 '부여백제-가야-왜' 연합의 전선을 형성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요동과 한반도를 둘러싼 '고구려-한성백제-신라'의 주류세력과 '비려(부여기마족)-부여백제-가야-왜'의 패잔세력의 거대전선이다.

요동은 물론 한반도 일대, 나아가 일본 본토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정복군주' 광개토왕의 정복사업은 그러나 재위 20여 년만에 멈춘다.


2. '수성군주' 장수왕 고거련


"장수왕의 대외정책 '4대 원칙'이다. 1) '원자교지(遠者交之)', 멀리 있는 자와 교류한다, 2) '근자공지(近者功之)', 가까이 있는 자는 공격한다, 3) '접자할지(接者割之)', 붙어있는 자는 떼어낸다, 4) '이자근지(離者近之)', 떨어진 자는 가까이 둔다. 이 원칙은 대외정책의 전술적 핵심가치들이다. 또한 기록은 전략적 비전도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 '이수계정(以守繼征), 이화계수(以化繼守)', 즉 수성함으로써 정복을 이어가고 치화함으로써 수성을 이어간다... 장수왕의 미션('부국강병':富國強兵)은 광개토왕의 미션과도 일맥상통한다. 광개토왕의 미션은 '국부민은(國富民殷)'이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부유하다. 다만 지향점은 다소 차이가 있다. 광개토왕은 '부유한 백성(民殷)'에, 장수왕은 '강성한 군대(強兵)'에 방점을 둔다. 장수왕의 수성은 외교와 정복을 병행한 '능동적 수성(守城)'이다."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2-1. 수성군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2022.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의 이름은 '거련'이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부터 태조왕 전까지는 북부여(해모수)와 동부여(해부루)의 왕족인 '해'씨였다. 태조왕부터 마지막 보장왕까지는 '고'씨였으니 광개토왕은 고담덕이고 장수왕은 고거련이었다. 남당 선생의 [고구려사략] <장수대제기>에 의하면 98세까지 산 장수왕 고거련은 늙을 수록 아버지 고담덕이 아닌 삼촌 고용덕을 닮아갔다고 하는데, 광개토왕 담덕의 둘째 부인 평양왕후와 담덕의 동생 용덕이 사통한 결과 장수왕 거련이 태어났을 것이란다. 또한 어느 스님이 바친 동자모양 산삼을 광개토왕 대신 아들 거련이 먹은 게 장수의 비결이라고도 하는데, 본인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안 광개토왕이 다른 태자를 세웠으나 그 탑태자가 요절하면서 천익이라는 장수왕 삼촌이 찬탈했던 2년 동안 장수왕 거련이 이를 타도하고 실력자로 부각되면서 고구려의 제위를 잇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서들을 인용한 [삼국사기]는 장수왕 기록을 조공의 역사로 남긴다. 모든 역사서는 자국 중심으로 서술되므로 고구려 장수왕이 중국 5호16국 및 남북조와 교류한 중국과 [삼국사기]의 기록은 '조공'의 기록이 된다. 반면에 마찬가지 논리로 [고구려사략] <장수대제기>는 '조공'이 아닌 '외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수성군주' 장수왕은 '수성'만 한 게 아니라 '정복'을 이어갔다.
이것이 바로, "이수계정(以守繼征), 이화계수(以化繼守)", 즉 "수성함으로써 정복을 이어가고 치화함으로써 수성을 이어간다"는 장수왕의 대외정책 전략이다. 장수왕은 광개토왕과 달리 '남하정책'을 폈다지만 그래도 중국의 북연을 흡수했고 몽골의 선조인 '지두우'와 '실위'를 분할하고 정복하기도 했으며 5천 킬로미터 서방의 '선선(누란)'과 외교를 하기도 했다.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은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년)를 국내 정치세력의 정리 및 국내외 지리적 여건 등 네 가지 요소로 들고 있다. 그러나 4~5세기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해 요서와 요북 및 서북 등지의 북방 유목민들이 지속적으로 중국쪽으로 남하한 것처럼 요동의 다민족적 고구려 세력이 한반도로 남하한 것 또한 이 시기 소빙하기 기후변화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상의 스님이 광개토왕 담덕에게 바친 동자승 모양 산삼이 의심스러워 친아들이 아닌 장수왕 거련에게 먼저 먹였을 수도 있겠다. 처음 산삼을 먹은 거련이 정신을 잃자 담덕은 그 스님을 죽이려 했는데 곧 나아질 거라는 말에 지켜보니 거련은 멀쩡해졌고 나중의 일이지만 담덕은 39세에 죽은 반면 거련은 98세까지 장수했다. 

이 책이 강조하는 고구려의 새로운 역사를 저자들은 책의 말미에서 '태왕차자릉비'를 통해 상징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집안고구려비'를 잇는 '태왕차자릉비'의 유적물 일체를 통해 [유기]로 추정되는 [고구려사략]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태왕'의 '차자', 즉 둘째아들은 '광개토왕 담덕'(태왕)의 차자 '장수왕 거련'이 아니라 '소수림왕'(태왕)의 둘째아들인 '용덕'이다. 
광개토왕 담덕의 동생 용덕은 장수왕 거련의 친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

남당 선생의 필사본들은 정식 역사가 아니라 한문소설가 박창화 선생의 창작물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단다. [화랑세기]가 그렇고, [유기]의 요약본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사략] 또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광개토대왕릉비'와 '태왕차자릉비' 등의 유물유적이 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유적물과 일치한다는 기록으로서 남당 박창화 선생의 유작을 재차 생각하며 다시금 물어본다.

과연, [고구려사략] 또한 '위작'인가.

***

1.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논형>, 2022.
2. [고구려 고고학],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3.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역사평설, <김영사>, 2002.
4. [삼국사기(三國史記)](1145),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5. [고구려왕조실록] / [백제왕조실록] / [신라왕조조실록], 이희진, <살림>, 2016~2017.

* 추신 : 좋은 내용의 책인데, 오자가 좀 많은 편이니 저자 및 출판사의 관심과 수정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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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디퍼런트 - 사람과 숫자 모두를 얻는, 이 시대의 다른 리더
사이먼 사이넥 지음, 윤혜리 옮김 / 세계사 / 202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리더는 가장 나중에 먹는다"
- [리더 디퍼런트], 사이먼 시넥, 2014.


"리더가 된다는 것은 일을 덜 해도 되는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책임을 안는 것이다... 리더는 일을 많이 해야 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그 효과는 쉽게 측정하기도 어렵고 바로바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리더십이란 사람을 향한 '헌신'이다."
- [리더 디퍼런스], <8. 리더가 된다는 것>, 사이먼 시넥, 2014.


미 해병대는 식사 시간에 계급이 제일 낮은 쫄병부터 먹는다고 한다. 지휘관은 가장 나중에 먹는다. '장유유서'가 높은 덕목인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에서는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5만년 전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강한 성인남성들이 사냥해 온 고기를 부족의 노약자들이 먼저 먹었다. 암사자들이 잡아온 먹이를 힘센 숫사자가 먼저 먹는 것과 인간 공동체가 다른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장 나중에 먹는 자가 진정한 리더"(Leaders Eat Last / 같은책, <2-8>)라는 말이다.


미국의 조직운영 강연자 사이먼 시넥(Simon Sinek)은 2014년에 [리더는 가장 나중에 먹는다(Leaders Eat Last / 국역 : 리더 디퍼런트)]라는 책에서 조직의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인간성'을 강조한다. '수치'와 '성과'로 표현되는 조직 목표의 '추상성'을 벗어나서 '인간성' 또는 "사람을 향한 헌신"(같은책, <8-27>)이 '진정한 리더'를 만든다는 것이다.
당장 실적이 안 좋은데 무슨 '인간성'인가 반론의 지점일 수 있겠다. 그러나 저자는 수만년에 걸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온 인류의 '본성'이라는 '장기적' 안목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다른 개체에 비해 힘도 약한 호모 사피엔스가 척박한 자연환경에 맞서 지금의 인류로 진화한 이유는 '공동체'를 통해 '안정성'을 추구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언어나 신화 등의 '인지혁명'([사피엔스], 유발 하라리)을 통해 씨족과 부족을 형성하며 '자기 통제력'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사이먼 시넥에 의하면 수만년 전 우리 조상들이 지금의 우리만큼 똑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환경이 더 험악했을 뿐이다. 장기적으로 인류가 더 잘 살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실적경쟁이 아니라 서로 보듬어주고 헌신하며 지켜주는 '안전망'과 '자기 통제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DNA인 것이다.
사이먼 시넥이 말하는 최초의 핵심어가 바로, '안전망'과 '자기 통제력'이다.

저자는 '진화인류학'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더 나아가 이를 '화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데, '엔도르핀'과 '도파민', '세로토닌'과 '옥시토신' 호르몬 이야기로 이어진다.
'엔도르핀'은 일종의 '진통제' 같은 것으로 웃으며 손뼉치는 등의 행위로 힘든 일을 잠시 잊는 것이고, '도파민'은 힘든 일 중에도 좀더 해보려는 노력을 유발한다. 이 호르몬들은 일종의 "이기적 호르몬"(같은책, <2-6>)으로서 개인의 성취를 촉진한다.
'세로토닌'은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그 힘든 일들을 기어이 해내는 역할을, '옥시토신'은 그런 사람들과의 유대감과 동지애를 이끌어내게 만드는 힘으로서, 이른바 "이타적 호르몬"(같은책, <2-6>)의 영역이다. 
이 두 영역의 조화와 균형으로써 인간은 '코르티솔'(같은책, <2-7>)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 상태를 딛고 공동체를 통해 여러가지의 성취를 해 왔고 그 과정에서 지금의 우리로 진화하고 성장했다. '적당한 스트레스가 필요하다'는 속언처럼, '이타적 호르몬'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는 '이기적 호르몬'이 역시 적절한 '코르티솔(스트레스)'을 이겨내고 때로는 즐기며 모종의 성과를 내게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핵심어가 등장하는데, 바로 '추상성'(같은책, <5장>)이라는 '적(敵;enemy)'이다.


"문제는 인간성을 '추상화'하는 일이 우리 경제에 단순히 나쁜 영향을 주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 [리더 디퍼런스], <4.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사이먼 시넥, 2014.


'물신성(物神性;fetishism)'이라는 사회과학 용어가 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1867)에서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표현하고 은폐하는 자본주의적 관계형태를 이르는 말이다. 모든 것이 '인간 노동'의 산물임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이나 '화폐' 등의 '물(物)적' 관계로서 거꾸로 왜곡되어 나타난다는 의미다. '물신숭배' 또는 성적인 '집착' 등으로 확장되는 개념이다. 
사이먼 시넥에게는 단기적 성과와 숫자에 집착하는 행태가 바로 "'추상적'이라는 적"(같은책, <5장>)에 매몰되는 관계이고 이러한 인간관계는 장기적으로는 우리 공동체에 "치명적"(같은책, <4~5장>)이다.

GE의 회장 잭 웰치는 '주주의 이익 극대화'를 명분으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통해 단기적 성과를 냈지만, GE의 기업문화는 구성원들이 '이기적 호르몬'만 믿는 조직문화가 되어 버렸다. 반면, 코스트코의 공동 창업자 시니걸은 어려운 시기에 직원복지에 더 힘쓰고 그래도 어려우면 정리해고 없이 고통을 분담했다. 단기적인 성과는 못 내더라도 장기적으로 구성원들의 진심어린 '충성심'을 얻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직원이 고객들을 진심으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안정감'과 '자기 통제력'의 인간적 본성과 호르몬 '증명'을 거친 사이먼 시넥은 기업들의 '비교경영학'을 통해 '인간성'을 지킨 조직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주류' 경제학인 시카고학파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은 정치경제체제와 무관한 숫자와 수학으로서의 경제학을 강조했는데, 그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를 좋아했단다. 즉, 단기적이고 '추상적'인 성과를 위해서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는 허용된다는 인식인데, 대단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말은 결국 법망을 피해가는 온갖 '편법'의 학문적 근거가 되었다. 단기적이고 '추상적'인 성과만 중시하는 조직이 '옳은 일'보다는 '편법'의 유혹에 빠지는 근거이기도 하다(같은책, <6-21>).

기업과 군대 같은 거대 조직운영에 관한 강연을 하는 사이먼 시넥이 '반체제' 인사일리는 없다. 고도로 추상화된 수치와 목표로 운영되는 지금의 자본주의를 부정할 수가 없는 저자는 흡사 '원시공동체'적 '본성'을 강조하면서 놀랍게도 '역설'을 발견한다.
'물신성'으로 돌아가는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성'을 강조하다보니,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더 효과적으로 작동"(같은책, <1장>)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엄청난 역설이 하나 드러난다. 이렇게 인간의 바람직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환경에서 오히려 자본주의가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 [리더 디퍼런스], <1. 우리는 안전한 직장을 원한다>, 사이먼 시넥, 2014.


물론, 이 '역설'이 맞는지 여부는 우리가 각자의 공동체 내에서 서로에 대해 얼마나 '헌신'할 수 있으냐 하는 그 실천력이 증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그렇게 이 책의 원제목이 된다.

"리더는 가장 나중에 먹는다(Leaders Eat Last)"는 상징적인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

- [리더 디퍼런트(Leaders Eat Last)](2014), Simon Sinek, 윤혜리 옮김, <세계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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