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자로 걸어라

   o 발끝이 정면을 향하게 11자로 걷는다.

   o 무릎과 무릎을 스치면서 발끝이 정면을 향하게 곧게 내딛는다.

2. 용천을 지압하듯이 걸어라

   o 바르게 서서 몸을 1도 정도 앞으로 기울인다.

   o 용천에 버튼이 달렸다고 생각하고 지압하듯 꽉꽉 눌러보라.

   o 마음속으로 '용천지압!'을 외면서 발가락까지 힘을 주며 걷는다.

3. 꼬리뼈를 말고 걸어라

   o 척추의 제일 아랫부분인 꼬리뼈를 살짝 말아준다.

   o 꼬리뼈 말기가 어려우면 엉덩이를 앞으로 살짝 밀어붙이고 걸어보라.

4. 정면을 바라보고 신나게 걸어라

   o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턱은 살짝 당겨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걷는다.

   o 팔은 자연스럽게 흔든다.

5. 자신의 몸을 느끼면서 걸어라

   o 발바닥(용천)-단전-가슴-정수리(백회)가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으로 걷는다.

   o 걸으면서 불편한 곳은 없는지 몸의 느낌에 마음을 집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행복의 조건 : 스스로를 위한 배려 → 솔직하라

즐거움의 조건 : 너와 나를 위한 배려 → 상대방의 관점으로 보라

성공의 조건 : 우리 모두를 위한 배려 → 통찰력을 가져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클림트 [Gustav Klimt, 1862.7.14~1918.2.6]

오스트리아의 화가로 유겐트 양식의 우두머리이다. 1900∼1903년에 제작한 빈대학교의 벽화는 생생한 표현으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동양적인 장식양식에 착안하고 추상화와도 관련을 가지면서 템페라·금박·은박·수채를 함께 사용한 다채롭고 독창적인 기법을 구사했다.

빈 출생. 빈의 미술공예학교를 나온 뒤 역사주의 특히 매커드의 감화를 받아 괴기·장식적인 화풍을 전개하였다. 유명한 부르크극장의 벽면장식에서는 모든 유파를 절충한 양식이 보이나 1898년경부터는 독자적인 장식 패턴을 구사하여 상징의 주제를 찾아냈다. 유겐트 양식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1900∼1903년에는 빈대학교의 벽화를 제작하였는데 그 표현이 너무나 생생하여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고독에 묻혀 자기 스타일에 파고들었다. 동양적인 장식양식에 착안한 점, 추상화와도 관련을 가지면서 템페라·금박·은박·수채를 함께 사용한 다채로운 기법은 그의 독창적인 기법이다.

대표작에 《프리차 리들러 부인》(1906),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1907) 등 초상화와 《부채를 든 여인》《입맞춤》(1908)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

묘한 매력의 클림트의 그림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국의 중앙정보국

구분 : 정보기관, 설립연도 : 1947년, 소재지 : 미국 버지니아주 맥린, 규모 : 4개국

설립목적 : 국가적 비밀첩보 활동, 주요활동 : 정책제공, 정보수집, 특수공작

 

미국중앙정보국이라고도 한다. 1947년 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 하에서 국가안전보장법에 의하여 설립된 대통령 직속 국가정보기관이다. 1942년에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미국에 조직된 여러 정보수집기관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기 위해 설립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미국전략사무국)를 그 전신으로 한다.

OSS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첩보요원을 통해 작전지역에 관한 대외정보 수집, 역선전 역 정보 등의 활동을 벌이며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45년 종전과 함께 해체되었는데, 트루먼 대통령은 이 요원을 기반으로 1946년에 국가정보원을 설립했으며, 이듬해인 1947년에 NSC(National Security Council:국가안전보장회의)를 설립하고 그 산하에 CIA를 발족시켰다. 설립목적은 국가적 정보수집 및 특수공작을 수행하는 데 있다.

조직은 작전부·과학기술부·정보부·집행부 등 4개 부서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비밀공작 업무는 작전국에서 관장하며, 과학기술부는 임무수행을 보조하는 과학적·기술적 설비와 장치를 개발 관장한다. 정보부는 공개적·비공개적 정보를 취합 분석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며, 집행부는 행정기능의 수행을 포함하여 요원 시설 정보 및 정보원()을 보호하는 보안국을 운영한다. 그밖에 정보연구센터와 전자기록공개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CIA의 주요임무는 ① 안전보장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정책정보 제공, ② 정보담당 각 기관의 조정, ③ 정보의 정리·평가·검토·분배 기능, ④ 국가안전보장회의가 명하는 정보활동 수행, ⑤ 수집 곤란한 특수정보 수집 등이며 그밖에 특수공작을 수행한다.

1953년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한 대통령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에 의해 임명된 국장 앨런 W. 덜레스(Allen W. Dulles)의 활약으로 그 조직이 확대되기 시작하여 30여 년 동안에 능력·자금·조직면에서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으로 발전했다. 1953년 이란의 모사테크 총리 축출, 1954년 과테말라의 좌익정부 전복 등은 당시의 CIA의 주요 활동으로 꼽힌다.

1960년대까지 전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비밀첩보활동을 전개해왔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 언론과 의회의 공격대상이 되면서 활동이 위축되었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예산과 인원이 대폭 축소되었다. 특히 1973∼1974년에 있었던 워터게이트 사건 CIA 전직 요원이 연루된 것이 밝혀짐에 따라 그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다.

또한 1974년에 ‘정보자유법’이 개정되면서 미국언론기관들의 CIA 내막 폭로가 잇달았고, 그 때문에 다른 국가들이 CIA와의 정보협력을 기피했으며, CIA 요원들의 신원공개 등으로 인해 CIA 활동이 부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활동이 위축되어 이란에서의 미국인 인질사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에 대해서도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1981년 대통령에 취임한 로널드 윌슨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정보원 신원공개금지법’ 등을 통해 국가기밀 및 CIA 요원의 활동을 보호하고 예산증대, 신규직원채용 등으로 CIA를 활성화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1984년 의회는 ‘중앙정보국 정보법’을 통과시켜 비밀유지를 강화하고 ‘클라크 수정안(앙골라에 대한 CIA의 개입을 금지함)’을 폐지함으로써 CIA의 활동을 본격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1990년대 초반에는 동유럽의 민주화에 따라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CIA의 기능 전반에 관한 공개토론이 전개되기 시작했으며, 1993년 2월 CIA는 정치첩보활동에서 경제첩보활동으로의 역할 전환을 밝혔다. 현재 CIA는 각국의 경제정책·전략과 첨단기술의 개발상황분석 외에, 자국 기술의 불법유출방지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본부는 미국 버지니아주() 맥린에 있다.

출처-네이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약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본문  

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 3,000필 등 세폐()와 정병()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마부태()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을 내려, 후금과 결전()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대장()으로,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 윤방()과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비·원손()·봉림대군(인평대군()을 비롯한 종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격문()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 등 주화파()와 김상헌() 등 주전파()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의 예()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册)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중국황제의 생일)·정조()·동지()·천추(: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 등의 사절(使)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과 혼연을 맺어 화호()를 굳게 할 것, ⑧ 성()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1639)부터 일정한 세폐()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에 따라 소현세자·빈궁()·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출처-네이버

김훈의 '남한산성'의 역사적 배경인 병자호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