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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꾼 ㅣ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평점 :
운명론을 믿는 노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노름꾼‘을 다시 읽고
귀국하며 새로 장만한 책으로 이 작품을 재독 했다. 3년 전 썼던 초독 감상문을 읽고 그때와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 문장이 노름꾼의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거라 여기는 듯하다.
"이쯤 해서 자리를 떴어야 했는데 나는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운명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또 그녀를 혼내 주고 약 올려 주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이다."
이상한 느낌. 운명.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구. 이 세 가지는 주인공을 계속해서 도박장에 붙잡아 두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 일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문장은 도스토옙스키가 파악한 '노름꾼이 노름을 지속하는, 혹은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듯하다. 노름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내가 3년의 공백을 두고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사실은 노름 경험과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이 노름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인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때 노름은 단지 도박장에 갇힌 행위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깃든 여러 중독 행위로 확장될 수 있다. 우리는 도박장에 가지 않을 뿐 노름꾼과 비슷한 마음과 행동으로 일상을 살아갈 때가 있지 않은가. 여러 중독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돌아보자). 뭐랄까. 운명이랄까, 계시랄까 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을 느끼고, 또 그것을 확신하게 되는 과정이 노름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노름의 시작은 물론 그것의 무한반복은 적어도 운명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결국 잃고야 말 그 많은 돈을 보란 듯이 탕진할 수가 있겠는가. 이성을 넘어서는 그 무엇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생각이고, 나는 그 힘을 운명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그 운명이라는 힘도 조금 더 뜯어봐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는 확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하나를 택하면 하나를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의외로 인간은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한 채 늘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들고 있다. 나는 이런 모순적인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흥미롭다고 보는데,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과 판단을 가능하게 만드는 중추적인 힘도 바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은 노름꾼의 콘텍스트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운명 말고도 주인공의 노름에 대한 신념이라고 볼 수 있는 독특한 해석에도 내 시선이 머물렀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세대를 거듭하며 돈을 모아 마침내 자본주의 체계의 피라미드 상층부에 자리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주인공은 비웃는다. 갑의 위치에 선 자본가들의 이면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문제점을 찾아내면서 말이다. 다음과 같다.
"1백 년 아니 2백 년이나 이어져 내려오는 기질, 노력과 인내, 지혜와 청렴함, 강인함과 검소함, 그리고 지붕 위의 황새란 말입니다!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관점에서 온 세상을 판단하기 시작하고 죄 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자신들을 조금이라도 닮지 않은 사람들을 당장에 처형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차라리 러시아 식으로 추하게 놀아나는 것이 나을 성싶고, 그게 아니면 룰렛으로 돈벌이를 하고 싶습니다. 다섯 세대 후의 호프 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게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 자신이 자본을 위해서 필요하다거나 아니면 자본에 종속되는 어떤 존재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제가 무척이나 허풍을 떨었다는 점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저의 신념이 그러니까요."
말도 안 되는 논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궤변 같은 주인공의 논리에서 나는 잠시 감탄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느니 노름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고수하겠다는, 일견 고결한(?)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약한 자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자기들의 부와 권력을 더욱 부풀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치명적인 오류는 아마도 주인공이 지적한 것처럼 그들이 자연스레 획득하게 되는 '갑질권'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갑질을 하는 자들도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자본주의 피라미드 체제에 성실하게 되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을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 갑이 되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이는 갑의 위치에 있어도 을과 다름없이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린 꼴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반면, 룰렛으로 돈벌이를 하는, 한낱 노름꾼에 지나지 않는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노예가 되는 것에 저항하는 듯하다. 진지하게 저 단락을 읽고 있노라면, 아주 잠깐이지만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자본주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노름을 선택하는 자유인이라니… 과연 그걸 자유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럴 순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노예를 비웃는 주인공 역시 노름이라는 주인을 섬기는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더 강해지기만 한다. '운명의 힘' 같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논리에 몸을 천박하게 내맡기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성실히 자본주의에 부역하는 사람이나 노름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이성마저도 노름에 종속시키는 사람이나 결국엔 모두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리는 꼴이 아닐까.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인간은 어떤 면에서든 노예가 되는 길을 피할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재미있게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주인공을 보면 그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역시 우리의 주인공은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전형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 노름꾼은 우리의 모습이자 나의 모습으로 확장된다.
"어쩌면 내게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몰라요."
주인공은 운명 같은 힘을 믿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한 발자국 떨어져 보고 있다. 그는 노름을 해야만 하는 확신에 차 있다가도 어느 순간 그것이 틀린 선택이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주관과 객관 사이를 오가며 우리의 노름꾼은 서서히 분열되어 가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까지 하면서 말이다.
"내 마음이 즐거웠다고 할 수는 없다. 나의 삶이 두 쪽으로 쪼개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어제부터 나는 모든 것을 운에 맡겨 버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어쩌면 돈을 주체하지 못해 눈앞이 아찔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또 내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분열된 자아가 걷는 괴리의 외다리는 과연 한 번 발을 디디면 뗄 수 없는 것일까. 사람은 자기 객관화를 할 줄 안다고 해서 스스로 갇힌 우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일까.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은 미스터 에이슬리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당신은 돈을 따는 것 말고는 그 어떠한 목표들도 단념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추억까지도 단념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가졌던 훌륭한 인상들을 모두 잊어버렸어요. 이제 당신의 꿈과 절실한 희망이란 고작 홀수와 짝수, 검은색과 빨간색 그리고 열두 숫자들 같은 것들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어요."
허를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노름으로 돈을 따는 행위를 구원의 길로 여기기 시작한 자의 말로는 이런 것일까. 이렇게 경박할 수 있는 걸까. 목표도 추억도 단념하고 자신의 고유한 장점마저도 잊어버린 채 자신의 모든 인생이 마치 수와 색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믿게 되는 과정은 경박과 천박의 하모니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를 노름꾼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그의 두 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와 함께 작업한 첫 작품이다. 그녀는 아내가 되기 전 속기사로 고용되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일대기를 살펴볼 때 안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과연 도스토옙스키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러 가지가 가능하겠지만, 안나가 바로 곁에 없었다면 도스토옙스키는 노름꾼으로서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이유야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도스토옙스키의 도박벽은 안나를 만남으로써 해결되었고 '죄와 벌'을 시작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까지 그의 말년을 화려하게 수놓을 5대 장편을 쓸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5대 장편을 읽으며 감사해야 할 사람은 도스토옙스키가 아니라 안나일지도 모르겠다.
노름꾼은 운명론을 믿는 노예다. 스스로가 노예라는 사실을 종종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객관적인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노름꾼으로 전락하고 마는 자가 바로 진정한 노름꾼인 것이다. 과연 노름꾼들은 이 커다란 거미와 같은 손아귀에서 탈출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유일한 탈출구를 안나에게서 찾는다. 안나의 의미를 조금 확장시키면 '공동체'라고 할 수 있고, '사랑'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혼자의 힘만으로 노름꾼의 삶을 청산하기는 역부족이다. 운명론을 믿는 노예의 자력갱생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이는 작품 속 주인공이 뽈리냐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작품 마지막에 그가 그녀를 찾아가는 부분에서 나지막한 희망을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구원은 언제나 외부에서 오는 법이다. 반드시 곁에서 누군가가 몸과 마음을 함께 하면서 도와야 비로소 도박벽이라는 정신병이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안나와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의 힘이야말로 진정한 '운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 선택하고 갇히는, 어쩌면 스스로 만든, 운명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늘에서 주어진 운명 말이다. 그것은 곧 사랑이자 은혜이지 않을까 한다. 노름꾼이 노름꾼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방법은 결국 사랑의 힘인 것이다. 이는 노름과 같은 중독에 빠진 영혼들을 향한 우리들의 자세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있지도 않을 막연한 운명을 먼 곳에서 찾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찾아가 갱생의 통로가 되어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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