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Youngwoong Kim님의 서재 (Youngwoong Kim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Mon, 31 Aug 2026 04:22:34 +0900</lastBuildDate><image><title>Youngwoong Kim</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Youngwoong Kim</description></image><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잘 팔리는 이야기, 그리고 좋은 이야기 -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 -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작법 수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77287</link><pubDate>Fri, 28 Aug 2026 15: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772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130175&TPaperId=174772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40/45/coveroff/k72213017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130175&TPaperId=174772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 -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작법 수업</a><br/>이기원 지음 / 오늘산책 / 2026년 07월<br/></td></tr></table><br/>잘 팔리는 이야기, 그리고 좋은 이야기<br>이기원 저,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를 읽고<br>책을 펼치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영업 비밀을 누설하는 책이구나! 비밀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내 마음은 조심스럽게 흥분이 되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 조심하는 사람처럼 각성된 상태로 나는 이 책을 새벽까지 읽어버리고 말았다.&nbsp;<br>'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라는 화려한 제목에 낚인 건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책을 펼치고 단 몇 페이지만 읽어보면 그건 착각 혹은 괜한 의심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정말 제목처럼 나도 더 잘 쓸 수 있겠는걸'하는 생각이 곧 실현될 믿음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뭔가 아주 중요한 무기를 장착하여 업그레이드된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nbsp;<br>이 책은 부제 '스토리의 힘을 키우는 작법 수업'에 아주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작법서를 탐독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나조차도 이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공식화된 메시지는 아주 적확하고 유용했으며 시원하기까지 했다. 물론 주요 타깃은 순수문학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를 향하지만, 이 모두가 스토리텔링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기에 소설을 쓰고자 애쓰는 모든 작가에게도 이 책의 내용은 지극히 유효하다. 특히 어떤 인사이트 한두 개에 의지하여 그동안 글을 써오거나 작중 인물이 하는 말에 이끌려 어느 정도 쓰다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 한치도 진전이 없어 글 전체가 흐지부지해진 경험을 해본 작가들에게는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다.&nbsp;<br>로그라인, 주제, 하이 콘셉트로 서사의 나침반을 삼고, 주인공, 매력, 감정 이입, 딜레마, 적대자, 조력자, 멘토로 서사의 엔진을 삼으며, 영웅 서사와 패러다임 이론 등으로 서사의 구조를 잡고, 핫 버튼을 잘 찾아 눌러서 서사를 완성하여 성공시킨다는 저자의 가르침을 읽고 지지부진하던 내 소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빈틈이 보이는 것 같다. 무엇이 잘못되고 있었는지, 무엇이 빠져있었는지 알 것 같다. 이 책은 빛이 되어 내게 드리워진 어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드러나게 해 준 것이다. 고마운 책임이 틀림없다.<br>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메시지들이 성공할 수 있는 스토리, 즉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이 될 수 있고, 책은커녕 긴 동영상도 집중해서 보지 못하는 요즘 시대 사람들(대중)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서 뭔가 서운하고 아쉬운 감도 있다. 잘 팔리는 이야기, 요즘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이야기가 어떤 건지는 충분히 알겠고 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도 알겠는데,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렇게 쓰면 시대를 초월하여 남는 이야기일 수는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은 여전히 답이 없는 채로 내 안에 남아 있다. 결국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에서 말하는 '잘'은 '돈이 되고 요즘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이라는 뜻이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니, 나의 반가운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다.&nbsp;<br>#오늘산책#김영웅의책과일상&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40/45/cover150/k72213017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404544</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슬기롭게 죽는 법 - [죽음을 배우는 시간 -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69288</link><pubDate>Mon, 24 Aug 2026 19: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6928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65953&TPaperId=174692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178/94/coveroff/893646595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65953&TPaperId=1746928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죽음을 배우는 시간 -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a><br/>김현아 지음 / 창비 / 2020년 07월<br/></td></tr></table><br/>슬기롭게 죽는 법<br>김현아 저,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읽고<br>죽음은 언제나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특히 주위에 죽어가는 사람이나 최근에 죽은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고, 나도 언젠간 죽는다는 걸 알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대부분 우리들의 현실이다. 이 책은 코로나19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짧은 기간에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어가고 있는 시점에 쓰였다. 저자 역시 의사이고 일반인과 달리 상대적으로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가 가져온 '비일상' 앞에서야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2026년 여름이다. 코로나19가 지구를 휩쓸고 간 지 불과 4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다시 인간들은 망각이 일상인 듯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일상 아닌 일상으로, 그 익숙한 거짓된 세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아, 우린 언제쯤 철이 드는 걸까. 죽음을 멀게 느끼지 않고 겸허하고 낮은 마음으로 죽음을 진지하게 배울 수 있기나 한 걸까. 또다시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을 겪어야 가능해질까.&nbsp;<br>누구나 죽음을 겪게 되지만, 아무나 죽음을 공부하진 않는다.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관심을 가져왔지만, 정작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 순서상 죽음 이후보다 죽어가는 과정이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죽음에 대한 무지.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이다. 공부 못하는 걸 그렇게나 부끄러워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죽음에 대해 모른다는 건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죽음이 한 발자국 현실로 침투한다.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준비해야 하는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준비하는 과정이 어떠해야 바람직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비로소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nbsp;<br>저자는 이 시대가 죽음을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점점 더 부자연스러운 사건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의료의 실패로, 의료의 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고 쓴소리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삶을 마치는 것도 모자라 적어도 서울대학병원을 포함한 소위 빅4 병원(서울대학교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정도는 되는 곳에서 삶을 마쳐야 제대로 보냈다는(혹은 보내졌다는) 인식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우리 삶의 어떤 순간에도 죽음은 찾아온다는 것을 이 책의 가장 첫 메시지로 던지는 저자는 이러한 뒤틀린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준비 과정을 현실적으로 차근차근 알려준다. 덧붙여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 나쁜 일들이 일어난다는 거부할 수 없는 묵직한 말을 하면서 병원의 '죽음 비즈니스' 실태를 보여준다. 이어서 "자,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평소에 죽음을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이들도 숨을 죽이고 자리에 앉아 진지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nbsp;<br>웰다잉은 낭만적이지 않다. 이 책 덕분에 죽음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33만여 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지만 그 뜻에 따라 생을 마감한 경우는 725명에 불과했다고 저자는 쓴다. 지금은 나아졌을지는 몰라도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은 10퍼센트대로 올라왔다고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4년 전(혹은 더 과거)에는 겨우 0.2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알다시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나중에 아파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문서로 남겨두는 법적 효력이 있는 공식 문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정부가 지정한 공식 등록기관을 방문하여 작성해야만 하고, 건강한 사람을 포함한 만 19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문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그대로 실천 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는 병원 측에서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법적인 책임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 환자의 가족들과의 반대나 소통의 부재, 임종기와 말기에 대한 모호한 기준으로 인한 판정의 연기 등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병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죽음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되고 말며, 생사결정권을 병원에 넘겨주게 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쓴다. 참고로 나는 인공호흡기를 단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br>연명치료와 완화의료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꼭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연명치료는 죽음의 각 단계에 나타나는 증상들을 모두 치료해야 하는 질환으로 보는 반면, 완화의료는 이 모든 증상을 죽음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그 과정에서 환자가 통증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것을 최소화하는 치료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흔히 완화의료라고 하면 환자를 포기하는 치료 정도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큰 오해라고 한다. 존엄한 죽음, 사람다운 죽음, 아름다운 죽음 등 웰다잉은 연명치료에 있지 않고 완화의료 쪽에 기울어져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br>사람들의 인식의 개혁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당사자나 그 가족들만이 아닌 병원 관계자들까지 모두 죽음을 질병이 아닌 삶의 마지막 단계라고 보는 자연스러운 관점을 견지했으면 한다. 존엄한 죽음은 결코 방치한 죽음이 될 수 없다.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행위는 결코 죄를 짓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와 맞물려 이제는 어느덧 죽어가는 부모를 향한 효도의 정석이 되어가는 듯한 빅4 병원 중환자실행은 결코 바람직한 마무리가 될 수 없다. 이런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문화가 자리 잡기를 간절히 소망한다.&nbsp;<br>참고로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의 엔딩노트가 에필로그로 달려 있다. 지금은 건강한 저자가 자녀에게 쓴 유언 같은 글이다. 연명치료 여부, 장례 절차,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 등이 특정한 양식 없이 기술되어 있다. 나는 아직 유언장을 써본 적이 없다. 올해엔 이 엔딩노트를 참고로 하여 나도 이런 글을 한 번 써볼 생각이다.&nbsp;<br>#창비&nbsp;#김영웅의책과일상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3178/94/cover150/893646595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1789469</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공포와 광기와 집착 - [블랙 달리아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68762</link><pubDate>Mon, 24 Aug 2026 13: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687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9920&TPaperId=174687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6/54/coveroff/898273992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9920&TPaperId=174687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블랙 달리아 1</a><br/>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종인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br/></td></tr></table><br/>공포와 광기와 집착<br>제임스 엘로이 저, ‘블랙 달리아’를 읽고<br>AI나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을 뭔가 대단한 지식인 것처럼 잘도 꾸며 지껄이는 (쉽게 돈 벌려고 하는 수작 그 이상도 이하도 절대 아닌) 수많은 바람 같은 유튜버들보다 나는 책을 가까이하고 많이 읽고 깊은 통찰도 이끌어내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의 조언을 나는 늘 귀담아듣는다. 그동안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여러 북튜버 채널도 많이 접했다. 그런데 솔직히 그들의 가벼움에 질려 대부분은 한두 번 보다가 구독을 다 끊어버렸다 (뭐가 목적인지 모호했다. 책 많이 읽었다는 걸 자랑하려는 건지, 읽고도 저 정도밖에 소화해내지 못하는 건지, 등등이 항상 의아했다. 결국 돈 때문에 저러는 건가 하는 결론으로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팟캐스트 ‘책걸상’은 지금도 즐겨 듣는다. 다른 북튜버 채널들과는 질이 다르다. 3년이 넘게 펀딩에도 참여하고 있다. 책걸상은 진짜 책을 제대로 읽고 저자의 의도는 물론 자신의 해석을 찐으로 나누는 (오프라인 독서모임에서나 가능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잘 형성되어 있다. 조금 꼰대스러운 진행자 한 분 때문에 가끔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어쨌거나 책 읽고 나누는 문화를 어떻게든 지키고 확산하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의 결과 내가 이끄는 오프라인 독서모임의 결은 책걸상의 분위기와 가장 많이 닮아 있다.&nbsp;<br>진행자 중 YG님이 수차례 추천하신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를 이번 주말에 드디어 읽었다. 아니, 흡수해 버렸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마침 하루 전까지만 해도 천병희 역의 ‘오뒷세이아’ 원전을 읽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영화를 두 번 보고, 나름대로 그것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스스로를 위해 긴 글을 썼던 탓인지 머리를 좀 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차였다. 그리고 내 생각은 한때 내가 사랑했던 추리소설(범죄소설)을 읽어볼까 하는 데까지 옮겨갔다 (내가 안경을 쓰게 된 이유가 추리소설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블랙 달리아’라는 말이 나왔던 데다 그 대사를 듣자마자 ‘아차 내가 사놓고 아직 그 책을 안 읽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책장에 파묻힌 이 책을 손에 들었었다.&nbsp;<br>두 권으로 나뉜 이 책의 분량은 약 600페이지 정도다. 그러고 보니 ‘오뒷세이아’와 비슷한 분량이다. 그러나 읽는데 소요된 시간은 훨씬 짧았다. 당연한 말일까. 나는 빨려 들어갔다. 한국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은 편이 아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가장 흡입력이 뛰어났던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보다도 더 훌륭했다고 말해야겠다. 어지간한 책들과 마찬가지로 초반에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느라 조금 더딘 속도였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페이지가 날아가듯 넘어갔다.&nbsp;<br>끔찍한 살인사건. 공포와 광기와 집착, 그러나 그것들을 다 합친 무게에 전혀 걸맞지 않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이없는 살인 동기와 살인자의 정체. 나는 허를 찔린 듯했고 작가 제임스 엘로이의 천재성과 필력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nbsp;<br>살아있는 상태에서 한 사람의 신체(시체 아님 주의)를 훼손하고, 내장을 다 꺼내어 포름알데히드 병에 넣어 보관하고, 피를 다 뽑고, 그것도 모자라 허리 부근에서 시체를 두 동강 내어 길거리에 버린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공포에 휩싸였고 동시에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소설 끝까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살인자의 정체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nbsp;<br>이것이 인간이지, 이것이 인생이지,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하는 생각을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던 것 같다. 잔인함과 이해할 수 없음, 모순과 이율배반성 때문도 있지만, 그것들보다는 진실이 가진 그 가벼움에 경악했기 때문이다. 저 정도의 끔찍한 사건이라면 뭔가 거대하고 함부로 이해하기 힘든 음모라도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내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추론은 유리잔 깨지듯 박살 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인간과 인생의 진미를 맛본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 제임스 엘로이의 천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br>최근에 읽은 스티븐 킹의 ‘빌리 서머스‘보다도 강렬했던 느와르풍의 이 소설은 솔직히 아무에게나 권하고 싶진 않다. 충분히 기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풍성한 독서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성에 대한 광기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고 작품의 중심 결을 따라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미국의 1940년대 상황도 체감할 수 있으며, 그야말로 다채롭고 다양한 인간군상을 음미하며 뜻밖의 성찰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블랙 달리아’는 실제로 1947년 미국 엘에이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써 가장 끔찍한 미제 살인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지어진 것이다. 작품으로부터 전해지는 공포의 무게감도 아마 실제 살인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니 시간 나면 한 번 봐야겠다.<br>#황금가지&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6/54/cover150/898273992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5466</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신 같은 인간, 인간 같은 신 - [오뒷세이아 - (영화 &amp;lt;오디세이&amp;gt; 원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63499</link><pubDate>Fri, 21 Aug 2026 12: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6349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130359&TPaperId=174634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8/68/coveroff/899129015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130359&TPaperId=1746349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뒷세이아 - (영화 &lt;오디세이&gt; 원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a><br/>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09월<br/></td></tr></table><br/>신 같은 인간, 인간 같은 신<br>호메로스 저, '오뒷세이아'를 읽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오디세이'를 보고<br>고전은 존재만으로도 독자를 압도시키는 아우라가 있다. 텍스트를 초월하여 입에서 입으로, 또 노래로 전해져 온 이 오래된 이야기들은 스스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힘과 무게를 지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설령 취향에 맞지 않는다든지, 재미가 없다든지, 기타 여러 면에서 유용하지 않다는 이유로 실제로 널리 읽히지는 않더라도, 고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불멸성을 가진다. 이를 단순히 고전에 대한 사람들의 무분별한 경외심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두려움 어린 존경은 당대에 힘을 가질 수는 있어도 숱한 세대를 거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고전의 유용성을 따진다거나 읽을 가치가 없다거나 하는 식으로 고전을 폄하하는 자세는 옹졸한 나르시시스트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가슴으로 몸으로 느껴지는 그 아우라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두 손 높이 항복하며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고전을 읽는 것. 이것이 고전에 대한 바람직한 자세라고 나는 믿는다.<br>십 년간 멀리하다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개봉을 핑계로 나는 돌아온 탕자처럼 천병희 역의 ‘오뒷세이아’를 마침내 읽었다. 영화를 먼저 봤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영화를 봤다. 샌드위치 사이에 낀 독서는 먼저 본 영화가 원전과 어디가 다른지 알게 해 주었으며, 독서 후 다시 본 영화는 감독이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이 글은 이 두 가지 관점을 담는 하나의 엉성한 그릇이 될 것이다. 참고로 ‘오뒷세이아’는 ‘오뒷세우스의 노래 혹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리고 ‘오디세이'라는 표현은 우리나라 표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것이고, ‘오뒷세이’는 고대 그리스어 원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 방식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는 ‘오뒷세이’, ‘오뒷세이아’를 사용한다.&nbsp;<br>원전과 영화<br>읽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를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책과 영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되기에 잠깐이라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전체 분량을 IMAX 카메라로 찍은 놀란 감독의 이 영화는 인간의 보는 행위를 극대화시킨 효과를 톡톡히 냈기에 그 차이 역시 극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놀란 감독의 영화를 거의 대부분 봐왔지만 ‘오디세이’는 그중에서도 압권이었다. 가상현실이나 우주공간 같은 공상과학 배경이 아닌 인간의 태곳적 모습들을 신과 거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가감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포세이돈의 분노를 선원의 목숨을 가차 없이 앗아가는 폭풍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의 무자비하고 원초적인 본질은 인간의 나약함을 그대로 폭로했으며, 그 배후에 있는 신의 존재를 믿고 거기에 의지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었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것. 하지만 인간은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궁금해하고 그것의 존재를 신화화시키기도 하고 구원을 소망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자연과 초자연을 모두 묶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지구상 유일한 존재도 바로 인간이라는 것. 압도적인 영상과 음향 효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금 성찰하게 해 주었으며, 그 덕분에 내 안의 교만이 수그러들고 낮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책만으로는 결코 잘 느낄 수 없었을 부분이었다.<br>1-4권: 텔레마코스의 여정 (아버지 오뒷세우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아타케를 떠남), 혼돈의 이타케<br>책과 영화 모두 이야기는 오뒷세우스가 아닌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에서 시작한다. 장소는 그들의 고향 '이타케'이고, 작품 속 현재는 트로이 전쟁을 위해 오뒷세우스가 고향을 떠난 지 이십 년이 지난 시점이다. 십 년간 치러진 트로이 전쟁은 이미 십 년 전에 그리스 연합군 (아가멤논의 미케네, 메넬라오스의 스파르타, 아킬레우스의 프티아, 네스토르의 퓔로스, 그리고 오뒷세우스의 이타케 등)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전쟁이 저 유명한 트로이 목마로 인해 승리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트로이 목마를 고안해 낸 인물이 오뒷세우스였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서 오뒷세우스를 묘사할 때 항상 붙는 수식어구 중 하나도 '지략에 뛰어난'이었다. 오뒷세우스는 용맹스러운 전사인 동시에 뛰어난 지략가였다. 오뒷세우스가 집을 떠난 지 이십 년이 되었다는 것은 트로이 전쟁으로 십 년, 그리고 전쟁 후 아무도 행방을 모르는 방랑 생활로 또 십 년이 지났다는 말이다.&nbsp;<br>트로이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대부분의 참전 용사들은 귀향하지 못했다. 아가멤논의 경우는 귀향하고 나서 아내에게 살해당하며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귀향의 의미와 완성에 대해서 다시 묻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책에서 등장하는 주요 귀향 용사는 메넬라오스와 네스토르 정도다. 이들 둘은 이야기의 발단 부분에 해당되는, 즉 텔레마코스가 오뒷세우스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서 텔레마코스를 환대하며 도움을 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오뒷세우스가 살아있는지에 대해서는 전무했다.<br>이미 이타케에서는 오뒷세우스가 자리를 비운 지 이십 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왕비인 페넬로페를 차지하기 위해 안티노오스를 비롯한 백 명이 넘는 권세 있는 자들이 구혼자로 늘 오뒷세우스의 성 안을 차지하여 시끄럽게 하고 음식과 포도주를 거덜 내며 혼돈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페넬로페의 시녀들과 몸을 섞기도 했으며, 호시탐탐 텔레마코스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짜고 있었다. 빈 왕좌를 이십 년간 지켜내고 있는 오뒷세우스의 아내와 아들의 상황은 이처럼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nbsp;<br>페넬로페는 오뒷세우스가 이십 년 전 떠날 때 텔레마코스가 턱에 수염이 자라 성인이 되었는데도 자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재혼을 하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페넬로페의 시아버지, 그러니까 오뒷세우스의 아버지인 라에스테르를 위한 수의를 3년간 낮에 짜고 밤에 도로 푸는 작업을 반복하며 구혼자들을 속이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나 시간은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흘렀고, 속임수는 들통나고 말았으며, 어느덧 텔레마코스의 턱에는 수염이 자라났다. 텔레마코스가 갓난아기 때 오뒷세우스가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는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기다리면서도 그가 살아있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확실한 결론을 내려야 어머니를 재혼시키고 벌레 같은 구혼자들을 내쫓아 평화를 찾을 수 있으며, 본인도 정당하게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nbsp;<br>영화 속에서는 이 정체된 듯한 상황이 텔레마코스가 이타케를 떠나게 만든 원인이었다. 하지만 원전에서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의 적극적이고 치밀한 개입이 있었다. 신의 직접적인 개입 여부가 원전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텔레마코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만이 아니라 배를 구하고 선원을 모집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테네였고, 적들인 구혼자들의 방해를 줄이기 위해 출항하는 날 구혼자들을 깊은 잠에 빠뜨린 것도 아테네였으며, 오뒷세우스의 오랜 친구인 멘토르의 모습으로 여정 내내 텔레마코스의 옆을 지키고 보호하며 인도한 것도 아테네였다. 원전의 육 분의 일에 해당되는 1-4권까지가 텔레마코스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데, 거의 모든 여정이 아테네 여신의 주도 하에 일어났다. 그러나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아테네의 개입이 배제되어 있었다. 대신 영화에서 젠데이아가 분한 아테네는 오뒷세우스의 환각처럼 나타나 때로는 조언을 하고 때로는 대화 상대가 되어주며 때로는 죄책감을 부각시키고 성찰을 종용할 뿐이었다. 놀란 감독이 영화에서 신의 직접적인 개입을 가능한 배제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른 신은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는 책보다 훨씬 '인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원전처럼 신이 다 주도했다면 영화는 지금 버전의 감동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원전 '오뒷세이아'와 다른 관점으로 영화 '오디세이'를 인간의 대서사로 그려낸 놀란 감독의 판단은 옳았던 것 같다.&nbsp;<br>페넬로페의 남편을 향한 사랑과 지조가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였다. 당연하게 느껴지면서도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텔레마코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불분명한 생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재산과 평화가 외부와 내부에서 모두 무너지고 있는 꼴을 계속 봐야 한다는 건 끔찍한 게 분명해 보였다. 영화 속에서 페넬로페로 분한 앤 해서웨이와 텔레마코스로 분한 톰 홀랜드는 이러한 부분들을 탁월하게 연기한 것으로 보였다. 원전을 읽기 전과 후, 두 번 영화를 봤지만 원전의 두 인물을 아주 잘 살려냈다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원전에서 모자란 부분을 영화가 보충하여 완성도를 높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nbsp;<br>책에서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몰래 이타케를 떠나 퓔로스와 라케다이몬으로 가는 여정을 거친다. 그곳에서 각각 트로이 참전 용사이자 귀향에 성공한 네스토르와 메넬라오스를 만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생사는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영화에서는 텔레마코스가 퓔로스를 생략한 채 곧장 스파르타로 가서 메넬라오스와 그의 아내 헬레네를 만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참고로 라케다이몬이 스파르타다.&nbsp;<br>영화에서는 저 유명한 트로이 목마로 인해 트로이 성 안으로 잠입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면들이 메넬라오스가 텔레마코스에게 전해준 회상 이야기로 시각화된다. 그러나 뜻밖에도, 원전에는 트로이 목마 관련 전투 장면들이 거의 적혀 있지 않다. 몇 문장 정도로만 잠깐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료를 좀 찾아보니, 영화에서 보여준 자세한 전투 장면들은 호메로스가 아닌&nbsp;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에 등장한다고 한다. 또한 '오뒷세이아'에서 바라본 트로이 목마는 지략과 승리의 이미지였지만, '아이네이스'는 트로이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 그러니까 전쟁 패배자들의 시선으로 쓰였기 때문에 트로이 목마는 승리의 찬가가 아닌 기만과 학살, 문명 파괴의 이미지를 띤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멧 데이먼이 분한 오뒷세우스가 마치 극심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듯 끊임없이 죄책감에 힘겨워하는 성찰의 영웅으로 그려지는 이유도 '오뒷세이아'가 아닌 '아이네이스'의 영향인 것이다. 놀란 감독은 두 원전을 잘 조합하여 명작을 만들어낸 듯하다.<br>5-8권: 오뒷세우스가 칼립소에게서 떠나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 도착하는 여정<br>원전에서 그리는 오뒷세우스의 간략한 여정은 다음과 같다.&nbsp;<br>이타케 &gt;&gt;&gt; 트로이 &gt;&gt;&gt; 키코네스족의 섬 &gt;&gt;&gt; 로토파고스족의 섬 &gt;&gt;&gt;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섬 &gt;&gt;&gt;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섬 &gt;&gt;&gt; 식인 거인 라이스트리고네스족의 섬 &gt;&gt;&gt; 마녀 키르케의 섬 &gt;&gt;&gt; 하데스의 지하 세계 &gt;&gt;&gt; 세이렌의 바다 &gt;&gt;&gt;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의 해협 &gt;&gt;&gt;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 &gt;&gt;&gt; 요정 칼립소의 섬 &gt;&gt;&gt; 파이아케스족의 섬 &gt;&gt;&gt; 이타케<br>여기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외눈박이 거인 이야기, 마녀 키르케 이야기, 세이렌의 노래 이야기, 요정 칼립소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도 그랬다.&nbsp;<br>영화에서 놀란 감독은 원전에 나온 오뒷세우스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고 다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시간상 그렇게 할 수도 없었을 테고, 또 그렇게 했다가는 영화만의 장점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영화에서는 로토파고스족의 섬과 요정 칼립소의 섬을 합쳐놓은 것 같다는 것인데, 칼립소가 오뒷세우스에게 기억을 잃게 만드는 로토스 꽃을 먹이는 것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파이아케스족의 섬을 영화에서는 완전히 생략했다는 점이다. 원전에서는 파이아케스족의 전적인 도움으로 오뒷세우스가 이타케에 안전하게 도착하게 되지만, 영화에서는 칼립소에게서 떠난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족의 섬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곧바로 폭풍우에 시달리며 이타케로 가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로 보여주기에는 오뒷세우스가 간신히 신의 도움으로 고향에 도착하도록 만드는 것이 항해에 능한 파이아케스족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거라는 판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로서는 충분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nbsp;<br>그러나 파이아케스족을 영화에서 생략한 것은 아주 큰 이야기 흐름에 차이를 가져왔다. 원전의 9권부터 12권까지가 오뒷세우스의 회상 장면들이고, 오뒷세우스 여정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회상을 듣는 사람이 원전에서는 파이아케스족의 알키노오스 왕인 반면, 영화에서는 칼립소로 나오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전보다 칼립소에게 더 큰 비중을 둔 것이다. 그 덕에 영화는 로토파고스족의 섬에 상륙하는 장면도 생략할 수 있었고, 파이아케스족의 섬에 도착하는 것도 생략할 수 있었으며, 그 섬에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알키노오스 왕과 그의 딸 나우시카 공주를 포함한 많은 인물들을 모두 생략할 수 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칼립소로 분한 샤를리즈 테론을 지나가는 행인 정도로만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참고로 원전에서는 칼립소 이야기를 길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오뒷세우스가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면서도 7년이란 긴 세월 동안 칼립소와 함께한 오뒷세우스의 내면에 대해 원전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데 반하여 (솔직히 원전을 읽으면서 낮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울다가 밤에는 칼립소와 함께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이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기억상실도 없는 오뒷세우스가 정신분열이라도 앓는 건지 의아했다. 자발적인 행동이었다면 그건 분명히 외도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로토스 꽃에 의한 기억상실이라는 설정을 가져와 개연성을 높여주어 오뒷세우스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 측면이 있었다. 원전의 이야기를 각색한 이 부분 역시 놀란 감독의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br>칼립소와 함께한 7년을 마치고 칼립소의 도움을 받아 그 섬을 떠나게 되는 이유에 있어서도 원전과 영화는 다르게 표현했다. 원전에서는 역시 신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다. 오뒷세우스가 바다를 떠돌게 된 것은 오뒷세우스가 포세이돈의 아들 거인 폴리페모스의 외눈을 찔러 멀게 만들어 포세이돈의 분노를 샀기 때문인데, 포세이돈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올림포스에서 신들의 회의가 열렸고 아테네의 강력한 설득에 힘입어 제우스가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칼립소에게 보내어 오뒷세우스를 즉시 놓아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제우스나 헤르메스 같은 신들의 모습과 그들의 개입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천둥 소리나 번쩍이는 번개 같은 자연 현상으로 칼립소만이 무언의 메시지를 받는 듯한 모습을 살짝 보여줄 뿐이었다. 그리고 오뒷세우스가 떠나도록 돕는 이유도 신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오뒷세우스를 향한 칼립소의 연민과 사랑, 그리고 오뒷세우스가 구구절절 과거를 회상하다가 끝내 고향 이타케와 아내 페넬로페를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nbsp;<br>9-12권: 오뒷세우스의 회상<br>앞서 언급한 오뒷세우스의 여정 대부분은 원전의 9-12권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오뒷세우스의 회상에서 비롯된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오뒷세우스 일행은 아가멤논의 대원들과 다른 항로를 선택해 독자적으로 고향에 돌아가기로 한다. 원전과 달리 영화에서는 이 부분에서 오뒷세우스의 모험심과 함께 오만함을 잘 표현했다. 아가멤논과 함께 했다면 십 년의 방랑은 없었을 것이었다. 또한 대원들을 모두 잃는 비참함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영화는 오뒷세우스의 오만한 선택과 그로 인해 잃는 많은 것들,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오뒷세우스의 심리를 탁월하게 잘 표현했다. 원전에 없던, 혹은 약했던 개연성을 끌어올린 효과를 충분히 낸 것으로 보인다. 원전에서 그린 오뒷세우스는 지략에 뛰어난 신과 같은 존재였지만, 영화에서는 ‘성찰하고 고뇌하는 인간 영웅’으로 오뒷세우스를 그려놓은 것 같았다.<br>영화 속 키코네스족의 섬에서 약탈까지 하며 식량을 구하는 장면은 오뒷세우스의 오만함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이는데, 원전보다 짧고 생략한 부분이 많지만 핵심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보였다.&nbsp;<br>로토파고스족의 섬에 들러 대원들이 로토스 꽃을 먹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되어 그 꽃을 먹지 않은 오뒷세우스가 대원들을 배 안에 강제로 묶어서 섬을 떠나는 장면은 영화에서는 완전 생략되었다.&nbsp;<br>퀴클롭스족의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섬 장면은 영화에서 극적으로 잘 보여준 것 같다. 원전과 영화의 큰 차이점이라면 ‘아무도 아니’라는 이름으로 오뒷세우스가 자기 이름을 폴리페모스에게 알려준 장면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폴리페모스가 오뒷세우스에게 이름을 묻기는커녕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 나중에 눈이 찔리고 나서야 거인은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기도를 하는데, 그제야 대원들은 이 거인이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원전에서는 오뒷세우스에게 눈이 찔린 폴리페모스가 괴성을 지르며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동료들이 누가 그렇게 했냐고 물을 때 폴리페모스는 ‘아무도 아니’라고, 즉 Nobody라고 대답하여 도움을 받지 못하는 해프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략에 능한 오뒷세우스를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었던 것이다. 원전에서 발견한 코믹스러운 장면이기도 했다.&nbsp;<br>이후 원전에서 오뒷세우스는 일행을 데리고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섬에 들러 아이올로스로부터 바람 주머니를 선물로 받는다. 그 안에는 항해에 도움을 받기 위한 여러 바람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대원들은 그 안에 보물이라도 들어 있을 거라고 오해한 나머지 오뒷세우스가 잠이 든 사이 함부로 주머니를 열어버리는데, 그 바람에 온갖 바람이 다 나와 폭풍우가 몰아쳐서 고향에서 더 멀어졌으며 다시 아이올로스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아이올로스는 다시 돌아온 오뒷세우스에게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매정하게 떠나라고 한다. 영화에서는 완전히 생략된 장면들이다.&nbsp;<br>식인 거인 라이스트리고네스족의 섬에 도착하여 무참히 살육당하는 장면은 원전의 메시지를 영화에서도 잘 살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압도적으로 큰 거인들이 은빛 갑옷으로 무장하여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오뒷세우스의 대원들을 집어던지고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은 충분히 공포를 느낄 만했다. 원전에서도 오직 오뒷세우스가 탄 배 한 척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이 섬에서 몰살당한다.&nbsp;<br>마녀 키르케의 섬에서 먼저 올라간 대원들 모두가 키르케가 약을 탄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하는 장면도 영화는 원전을 잘 살려놓았다. 특히 키르케로 분한 사만다 몰튼의 신들린 듯한 연기는 공포를 연출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원전과 다른 부분도 있었다. 영화와 달리 원전에서는 오뒷세우스도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키르케에게 가기 전에 전령의 신 헤르메스로부터 키르케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 약초를 먼저 섭취하여 면역이 생겼기 때문에 오뒷세우스는 돼지로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대원들을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부분은 원전과 영화가 같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오뒷세우스와 일행이 키르케의 조언을 듣고 즉시 섬을 떠나 하데스로 가게 되지만, 원전에서는 키르케와 오뒷세우스가 연인으로 1년을 머물게 된다. 그렇게나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 오뒷세우스가 키르케와 1년을 연인으로 지냈다는 건 솔직히 원전을 읽으면서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만나게 될 칼립소에서 극대화된다). 오히려 영화에서처럼 즉시 하데스로 가는 설정이 좀 더 개연성이 높게 느껴졌다.<br>하데스(저승)로 가게 된 이유는 그곳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야지만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전에서는 테이레시아스뿐 아니라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와 어머니도 만나 대화를 나눈다. 영화에서는 원전 ‘오뒷세이아’나 ‘일리아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인 시논을 하데스에서 가장 처음 만나게 한다. 시논 역시 ‘아이네이스’에 버림받고 속은 그리스인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놀란 감독은 시논을 통해서도, 특히 저승까지 가서도 오뒷세우스에게 죄책감을 가중시키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놀란 감독이 그려낸 오뒷세우스는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성찰하는 인간 영웅임이 틀림없다.<br>영화 속 하데스는 괴기스럽고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검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죽은 자들이 만들어내는 음습한 분위기와 피를 마셔야 비로소 진실을 말하게 되는 설정도 원전을 더욱 입체적이고 효과적으로 표현해 낸 것으로 보였다.<br>이후 향하는 곳은 세이렌의 바다인데, 아마도 영화를 보기 전이나 원전을 읽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에피소드일 것이다. 특히 수많은 문학 작품에 인용되거나 강력한 메타포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전 그대로를 잘 재현한 것을 보였다. 대원들은 귓속에 밀랍을 발라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반해, 오직 오뒷세우스만 돛대에 몸을 묶어 세이렌의 노래를 모두 들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잘 연출했다. 그런데 원전에서는 세이렌 에피소드가 너무 짧게 소개하고 끝내버려서 의외였다. 사실 세이렌의 노래를 어떻게 표현할지 몹시 궁금했는데, 놀란 감독은 오뒷세우스의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이를 대신할 뿐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이렌의 노래에 감히 누가 곡조를 붙인단 말인가. 그랬다가는 아마 아무리 뛰어난 음악이라고 해도 본질을 훼손했다는 평을 피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세이렌의 노래 내용은 원전에서는 오뒷세우스를 치켜올려 그의 영웅심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는데 반해, 영화에서는 또다시 오뒷세우스의 죄책을 가중시키는 역할이었다. '가장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 그리고 '이미 가졌으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노래했다고 영화 속 오뒷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가 끝난 뒤 대원들에게 말하는 장면은 멧 데이먼의 심리 묘사가 출중했음을 보여주었다.&nbsp;<br>스킬라와 카리브디스의 해협을 지나는 장면도 영화는 원전을 잘 살려서 시각화했다. 소용돌이로 빠지면 모두가 죽지만, 스킬라라는 머리가 여섯인 괴물에게로 가면 대원 여섯 명만 죽는다는 사실을 오뒷세우스는 키르케로부터 들어서 미리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 놀란 감독은 대원들 스스로가 스킬라에게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만들었고, 키르케의 말대로 여섯 대원이 잡혀 먹었다. 여기에서 어설픈 공리주의를 끄집어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원전에서는 오뒷세우스가 일방적으로 카리브디스가 아닌 스킬라 쪽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아마도 놀란 감독이 이런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대원들이 앞장서서 스킬라 쪽을 선택하게 했던 게 아닌가 싶다.&nbsp;<br>태양신 헬리오스의 섬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소를 잡아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키르케와 테이레시아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대원들은 굶주린 나머지 소를 잡아먹고 만다. 한 달 동안이나 바람이 계속 섬 쪽으로만 불어 떠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만 고기를 먹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소를 먹지 않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모든 대원은 예언대로 그 섬을 떠날 때 폭풍우를 만나 몰살당한다. 원전에서는 태양신 헬리오스가 제우스에게 소를 먹은 자들을 처벌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고, 제우스가 폭풍우로 그 기도에 응답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기도는커녕 헬리오스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예언이 이루어진 것, 죽을 운명으로 표현될 뿐이었다. 이 부분에서도 놀란 감독은 신을 배제시켰고 대신 대자연을 신의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nbsp;<br>이렇게 하여 모든 대원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고 오직 오뒷세우스만 돛대 조각을 붙잡고 간신히 살아남아 요정 칼립소의 섬에 당도하게 된다. 칼립소 이야기는 앞에서 다뤘기에 여기에선 넘어가기로 한다.&nbsp;<br>13-16권: 오뒷세우스의 은밀한 귀향<br>아가멤논이 남긴 교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전 대원이 몰살당한 상태에서 오뒷세우스는 금의환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원전에서는 칼립소의 도움으로 파이아케스족의 섬으로 가게 되지만, 영화에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이타케에 간신히 목숨만을 살린 채 당도하게 된다.&nbsp;<br>원전의 후반부인 13-16권은 9-12권까지의 오뒷세우스의 회상을 뒤로하고 다시 작품 속 현재 시각으로 돌아온다. 이타케에 도착한 오뒷세우스는 끊임없는 아테네의 계획과 안내로 곧바로 자신의 성으로 가지 않고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에게로 간다. 아테네는 오뒷세우스의 외모를 거지 노인으로 바꾸기도 하고 우람하고 젊게 보이게 바꾸기도 하며 오뒷세우스를 지속적으로 돕는다. 에우마이오스는 원전에서나 영화에서나 오뒷세우스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에우마이오스는 변장한 오뒷세우스를 처음에도 알아보지 못했고 나중에 성으로 가서 스스로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오뒷세우스가 스스로 오뒷세우스임을 밝힌 후 확실한 증거로 어린 시절 멧돼지 송곳니에 찔러 허벅지에 남은 흉터를 보여주었을 때 에우마이오스는 눈물을 흘리며 주인을 알아보았다. 영화에서는 에우마이오스가 장님으로 나오는데 (이 역시 단번에 오뒷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한 에우마이오스를 배려한 놀란 감독의 각색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테네 여신의 도움도 가능한 배제해야 했으니 말이다) 오뒷세우스가 자기의 활로 도끼 구멍을 12개 통과하는 시범을 보인 직후 구혼자들을 제거할 때 즈음에야 텔레마코스에게 확인을 받으며 오뒷세우스의 정체를 알게 된다.&nbsp;<br>반면 오뒷세우스가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오뒷세우스를 가장 먼저 알아본 존재가 있었으니 자신의 늙은 사냥개 아르고스였다. 아르고스는 마지막 주인을 보고 곧바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에서도 이를 잘 살린 것으로 보인다.<br>한편 아테네는 여전히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 머물던 텔레마코스의 꿈속에 나타나 구혼자들의 암살 매복을 경고하고 이타케로 복귀하면 성으로 가지 말고 곧장 에우마이오스에게로 가라고 지시한다. 이미 에우마이오스에게는 거지 노인으로 변장한 오뒷세우스가 먼저 와 있었다. 흥미롭게도 부자 상봉이 성이 아닌 돼지치기 오두막에서 이십 년 만에 일어나도록 아테네가 계획한 것이었다. 물론 텔레마코스는 오뒷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아테네가 잠시 오뒷세우스의 외모에 변화를 주어 신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는데, 그 변화를 알아챈 텔레마코스는 그가 혹 신인가 하여 두려워했지만 오뒷세우스는 자기가 아버지임을 스스로 밝힌다. 그리고 오뒷세우스와 텔레마코스는 구혼자들을 어떻게 몰살시킬지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착수한다.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짧게 다루고 넘어간다.&nbsp;<br>17-20권: 오뒷세우스의 복수 준비<br>이제 아버지 오뒷세우스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힘을 합쳐 그동안 빈 왕좌를 지키던 페넬로페를 농락하며 성을 평화를 어지럽혔던 구혼자들을 몰살시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원전과 영화 모두 텔레마코스가 먼저 성으로 가서 구혼자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성안에 있는 모든 무기들을 창고에 넣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모든 문을 걸어 잠그도록 명한다. 그리고 텃세를 부리던 진짜 거지 이로스가 변장한 오뒷세우스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장면 또한 원전과 영화에서 모두 다루었다. 다만 원전에서는 아테네 여신이 오뒷세우스의 근육을 한층 더 부풀려 이로스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장면이 적혀 있으며, 오뒷세우스가 이로스를 한 방에 죽일지 살짝만 때릴지 고민하는 장면도 적혀 있다. 오뒷세우스가 변장한 신분을 끝까지 유지하며 인내하기 위해 후자를 택하게 되지만, 이로스는 그 한 방을 맞고 턱뼈가 부러졌다.&nbsp;<br>이방인을 환대하는 풍습에 따라 변장하여 거지처럼 보이는 오뒷세우스는 페넬로페와 대담하는 기회를 가진다. 지략에 능한 오뒷세우스는 정체를 숨기면서 자신을 크레타에서 온 이방인이라고 소개하며 오뒷세우스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며 거짓말을 또 유창하게 한다 (오뒷세우스가 지략에 능하다는 말을 달리하면 거짓말에 능하다는 말도 될 것 같다). 페넬로페는 남편의 소식에 또 눈물을 흘린다.&nbsp;<br>한편 페넬로페의 명령에 따라 이방인의 발을 씻기러 온 시녀 에우리클레이아는 오뒷세우스의 상처 입은 다리의 흉터를 알아보고 그 거지 행세를 한 이방인이 오뒷세우스임을 알아본다. 깜짝 놀란 그녀의 입을 오뒷세우스가 곧바로 다물게 했지만 말이다. 이 긴장되는 상황은 원전이나 영화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진짜 정체가 누구나 알아봄직한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닌 숨기고 싶은 치부일지도 모르는 작은 흉터로 인해 탄로 난다는 이 설정은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nbsp;<br>21-24권: 오뒷세우스의 복수와 이타케의 평화 회복<br>다음날 페넬로페는 오뒷세우스의 활을 들고 나와 활시위를 걸고 활을 쏘아 열두 개의 도끼 구멍을 통과하는 시합을 선언한다. 시합의 우승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원전의 내용을 영화가 잘 표현했다. 원전에서처럼 영화에서도 모든 구혼자들이 다 활시위를 거는 것조차 실패했고, 마지막으로 거지 행세를 하던 오뒷세우스가 성공하게 되는데, 말하지 않고도 자신이 오뒷세우스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nbsp;<br>한편 원전에서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이 모두 실패함을 보고 마지막으로 거짓 행세를 한 오뒷세우스에게 기회를 주라고 말한 뒤, 이후 일들은 텔레마코스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듣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 잠이 든다. 아테네가 페넬로페의 눈꺼풀에 달콤한 잠을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살극을 페넬로페가 직접 보지 못하게 만든 아테네 여신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에서는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을 모두 죽일 때 페넬로페는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nbsp;<br>활시위 거는 것에 성공하고 도끼 구멍도 모두 통과시킨 오뒷세우스는 이후 구혼자들을 몰살시키기 시작한다. 첫 제물은 안티노오스였다. 그는 구혼자 중에서 가장 권세 있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영화에서도 가장 간교한 인물로 그려졌다. 다만 영화에서는 안티노오스가 첫 제물이 아니라 중간 즈음에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말이다. 안티노오스로 분한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보는 내내 나도 저 자식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로 말이다.&nbsp;<br>또한 이 몰살극은 원전에서는 오뒷세우스와 텔레마코스, 그리고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와 소떼를 보살피는 필로이티오스, 이렇게 네 명이 함께 힘을 합쳐 실행했지만, 영화에서는 오뒷세우스가 거의 혼자 싸우는 설정으로 표현했다. 영화에서는 필로이티오스의 존재 자체도 생략했다. 뿐만 아니라, 이 몰살극 역시 원전에서는 아테네 여신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화에서 신과 사람의 도움 없이 오뒷세우스 혼자서 싸워 거의 모두를 죽인다는 설정은 솔직히 현실성이 좀 떨어져 보였다. 오뒷세우스의 영웅화가 좀 지나치게 보였던 부분이었다. 나에게는 이 영화의 유일한 티 같이 느껴졌다.<br>피의 복수가 끝나고 원전에서는 페넬로페가 남편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이미 복수극 전부터 알아보는 설정으로 나오지만, 원전에서는 나름 널리 알려진 '침대 시험'으로 인해 알아보게 된다.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침대는 예전에 오뒷세우스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살아있는 올리브 나무를 그대로 이용해 침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무의 뿌리를 뽑지 않는 한 이동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페넬로페는 그 침대를 끌어내어 사기꾼일지도 모르는 오뒷세우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라고 시녀에게 명령한다.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오뒷세우스는 깜짝 놀라며 말도 안 된다고 말하면서 둘만 아는 침대의 비밀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이로써 페넬로페는 그가 사기꾼이 아니라 진짜 남편 오뒷세우스임을 확신하게 된다. 확실한 증거 없이 아무도 믿지 않는 페넬로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모습이 없었다면 이십 년간 빈 왕좌를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nbsp;<br>영화에서는 복수의 성공과 오뒷세우스 귀향의 완성을 보여주면서 텔레마코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오뒷세우스는 페넬로페와 함께 배를 타고 미지의 서쪽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하지만, 원전은 전혀 다른 마무리를 선보인다. 오뒷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구혼자들의 혼령이 하데스로 내려가는 장면이 등장하고, 오뒷세우스는 아버지인 라에스테르를 찾아가 눈물 어린 재회를 한 뒤 안티노오스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구혼자들의 무리가 일으킨 군사들과 짧은 전투를 벌인다. 라에스테르, 오뒷세우스, 텔레마코스, 삼대가 함께 한 전투는 싱겁지만 승리로 귀결되는데, 라에스테르가 던진 창이 안티노오스의 아버지를 정확히 맞혀 죽였고, 제우스가 벼락을 떨어뜨렸으며, 아테네 여신이 전투를 멈추고 서로 화해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타케는 마침내 평화를 맞이하게 된다.&nbsp;<br>이타케의 평화 회복 역시 신의 적극적인 개입을 배제할 수 없었다. 오뒷세우스의 모든 여정에 있어서도 신의 개입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었다. 원전은 철저히 신의 개입으로 인해 역사가 움직이고 변화를 맞이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나는 인간이 그저 신의 장난감처럼 사용되는 것 같은 인상도 받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바로 이 점, 즉 신의 개입 여부가 원전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놀란 감독은 신을 지우는 작업을 철저히 수행했던 것 같다. 인간 오뒷세우스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오뒷세우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아테네 여신만은 간간이 보여주었지만, 그조차도 오뒷세우스의 죄책감이 깃든 환각인지 헷갈릴 수 있도록 교묘하게 표현해 놓았다. 대신 거대하고 원초적이며 인간을 거뜬히 초월하는 힘을 가진 자연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는데, 아마도 놀란 감독은 이 대자연을 신을 대신해서 그려놓았던 게 아닌가 싶다.&nbsp;<br>영화를 보면서 원전에서도 나온 환대(크세니아)라는 개념을 더욱 명징하게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원전만 읽으면 환대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저 당연한 문화처럼 여겨지고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환대는 조건 없는 환대다. 나그네 혹은 이방인이 오면 그 어떤 것도 먼저 묻지 않고 그의 발을 씻기고 음식을 대접하여 배부르게 한 이후에 어떤 사람이며 어디 출신이며 어떤 가문인지를 묻는 문화다 (물론 잠자리도 제공한다). 놀란 감독은 영화에서 이것을 '제우스의 법'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게 만드는데, 이 법을 대대적으로 깬 장본인이 바로 오뒷세우스라는 설정은 오뒷세우스의 죄책감의 중추를 이룬다. 트로이 목마는 위장이었다. 제물로 위장하여 트로이인들의 환대를 이용하여 성 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자의 조건 없는 환대를 이용하여 자신의 실리를 취하는 것. 이것이 오뒷세우스가 스스로 성찰하여 죄책을 느끼는 핵심이었다. 지략에 능한 오뒷세우스는 타자의 환대를 이용해 타자의 죽음을 꾀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전쟁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바로 그 선택 때문에 많은 것들을 잃어야만 했다. 영화는 계속해서 오뒷세우스를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며 성찰하는 인간 영웅으로 그리는데, 그 시작이 전쟁을 승리로 가져다주고 오뒷세우스를 위대한 영웅으로 등극시킨 트로이 목마였다는 것은 기막힌 역설이자 놀란 감독이 노린 가장 강력한 한 수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는 오펜하이머를 떠올리게 했다. 그 역시 원자폭탄을 발명해서 전쟁 승리를 가지고 왔지만, 많은 이들을 학살한 파괴자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고,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놀란 감독만의 영화 세계가 그리는 중심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br>글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 느낀 게 있다. 원전에서 오뒷세우스는 신 같은 인간으로 표현된다. 그를 수식하는 어구 중에도 '신 같은'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신들도 오뒷세우스에 대해서는 다른 인간과 다르게 보고 대한다. 왜 그랬을까 싶은 의문이 책을 읽고 영화를 두 번 보고도 사라지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신은 공평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가리고 선택하는 신. 자기 맘대로 감정에 치우쳐 함부로 사람의 목숨도 좌지우지하는 신. 이런 존재가 진짜 신이라면 나는 차라리 무신론자가 되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 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을 '신 같은 인간, 인간 같은 신'으로 지은 이유다.<br>#숲#김영웅의책과일상&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8/68/cover150/899129015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86827</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뒤늦은 실감 - [서성이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42515</link><pubDate>Mon, 10 Aug 2026 11: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4251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62130735&TPaperId=1744251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4/93/coveroff/k36213073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62130735&TPaperId=1744251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서성이다</a><br/>장강명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08월<br/></td></tr></table><br/>뒤늦은 실감<br>장강명 저, ‘서성이다‘를 읽고<br>밀려드는 감정이 아닌 차오르는 감정은 실감하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는 걸까. 아니 어른이 되고 나서 인간은 실감이란 걸 제대로 할 수나 있는 걸까. 어른 인간은 이미 와 버린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성이라는 여과지를 통해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걸 이성이라고 부를 수나 있는 걸까. 사람을 무뎌지게 만드는 이성 따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지부조화일까. 혹시 감정 불능은 아닐까. 혹시 소시오패스는 아닐까.<br>소설가 장강명은 어느 날 인지적 벼락을 맞는다. 불치병인 교모세포종이라는 뇌종양이 아내의 머릿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흐드러졌던 벚꽃이 다 졌던 2025년 4월 말이었다.&nbsp;<br>소설 속 안시찬은 장강명의 분신이다. 현실세계의 장강명과 소설 속 안시찬은 황망한 아내의 뇌종양 소식에 당황해한다. 아내를 둔 남편이라면 그 누가 당황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 모든 남편들은 아마도 소설 속 3일이라는 시간 동안 마치 모든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것처럼 응급실과 병원을 오가며 아드레날린이 치솟은 채 안시찬에 빙의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그랬다. 길지 않은 분량 탓도 있겠지만, 자정을 넘기고도 페이지 넘기는 동작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이미 팟캐스트 ‘암과 책의 오디세이‘를 자주 들어서 그들의 서사를 거의 다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nbsp;<br>소설은 장강명 작가 본인과의 거리 두기를 위해서인지 3인칭 시점으로 쓰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소설은 주인공 안시찬의 심경을 보다 객관적이고 절제된 문체로 묘사한다. 소설 속 이야기의 발단은 아내에게 생긴 이상 증상이었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남편 안시찬이다. 제목에 등장한 ‘서성이다’의 주체도 안시찬일 것이다.&nbsp;<br>이 작품은 팟캐스트 ‘암과 책의 오디세이’와도 초점을 달리하여 날벼락같은 아내의 암 소식을 접하고 그것을 현실로 인지하기까지 남편 안시찬의 서성이는 내면을 조명한다. 그 내면은 불안과 공포, 체념과 자기 비하, 성찰과 자기 합리화 등이 마구 뒤섞여있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을 통해 주인공은 이미 먼저 와서 몸을 장악하고 있었던 슬픔과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지울 수 없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실감하게 된다.&nbsp;<br>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현실에서 터지고, 하필 그것이 내 것일 때 아마도 대부분은 감정과 이성의 부조화를 경험하지 싶다. 사건의 규모와 그것을 인지하는 나의 제한된 능력, 그리고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나의 작은 그릇 등으로 인해 이미 내면은 난장판이 되기 마련이다. 여기에 평소 억눌러왔던 감정들(죄책감이나 후회와 미련 같은)마저 끼어들게 되면, 그야말로 죽고 싶은 마음,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감정들을 처리하고 뒤늦은 실감을 하는 동안에도 고통만은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안과 밖 모두를 침투하고 장악한다. 이 부분에서 장강명은 말한다. 자격을 묻지 않고 찾아오는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는 건 기만이라 생각하지만, 사람들을 진정으로 묶어주는 것은 고통이라고.<br>사람들을 진정으로 묶어주는 고통의 파괴력은 곧 연민이라는 인간다움으로 연결될 것이다. 장강명은 도스토옙스키를 그의 작품 속에서 (이번 작품에도 마찬가지로) 자주 소환하여 무신론과 허무주의의 연장선에서 인물의 부정적인 내면을 궤변 식으로 토로하곤 하는데, 고통과 연민은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코어에 해당된다고 보는 내게 이 문장은 참 마음에 들었다. 무신론과 허무주의의 겉옷을 입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마음을 마침내 읽어낸 것 같아서,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이제야 제대로 이해해 준 것 같아서 감사함도 느꼈다.<br>이 세상 모든 남편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교모세포종 2차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회복 중인 김새섬 그믐 대표가 완치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br>#현대문학&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장강명 읽기1. 책 한번 써봅시다: https://rtmodel.tistory.com/1256&nbsp;2. 먼저 온 미래: https://rtmodel.tistory.com/20233. 재수사: https://rtmodel.tistory.com/22204. 서성이다: https://rtmodel.tistory.com/2232<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4/93/cover150/k36213073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849346</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과학과 신앙, 하나만 선택할 필요 없다 - [과학과 하나님 -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할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28498</link><pubDate>Sun, 02 Aug 2026 17: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2849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62130409&TPaperId=1742849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92/61/coveroff/k66213040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62130409&TPaperId=1742849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과학과 하나님 -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할까?</a><br/>존 레녹스.케이티 모건 지음, 홍병룡 옮김 / 아바서원 / 2026년 07월<br/></td></tr></table><br/>과학과 신앙, 하나만 선택할 필요 없다<br>존 레녹스, 케이티 모건 공저, '과학과 하나님'을 읽고<br>손에 딱 잡히는 판형에 걸맞게 한 시간 채 걸리지 않아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 독자의 시선은 달라지는 법이기에 나는 책을 읽은 후에는 읽기 전에 놓친 게 없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도 그 오랜 습관을 좇아 책을 덮고 앞표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nbsp;<br>왼쪽 위에는 이중나선 구조의 DNA가 보이고, 오른쪽 위에는 토성 같아 보이는 띠를 두른 행성 하나가 그려져 있다. 각각 생물학과 천체물리학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는 기원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기원 말이다. 오래전부터 이 문제는 과학만이 아니라 종교도 깊이 관여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이 문제는 질문으로 남았다. 과학은 무에서 유로의 생성을 설명할 수 없고, 종교는 이성을 초월하는 신앙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이해가 깊은 얕든, 종교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기원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nbsp;<br>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 과학은 일반계시 영역인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설명한다. 신앙은 특별계시 영역인 성경을 읽고 믿는 자들의 반응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연과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두 개의 책으로 고백한다. 저자가 한 분이시기에 두 책 사이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과학을 통해 자연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경이를 느끼며 찬양할 수 있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수용하여 삶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양립 가능하며 서로가 상호보완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br>그러나 과학이 아닌 '과학주의'의 등장과 순수한 신앙이 아닌 하나의 폭력적이고 전제군주적인 주류 세계관으로의 변질로 인해 (이를 편의상 '신앙주의'라고 하자) 과학과 신앙 사이에는 마치 거대한 틈이 생겨난 것처럼 오인되었다. 과학주의는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우기는 세계관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에 과학과 신앙은 과학주의와 신앙주의라는 두 세계관의 대립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주의의 오류는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또한 과학을 통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신앙은 틈새의 신 논리로 인해 과학이 더욱 발전하면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말 거라고 보는 시선, 그리고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의 불안과 공허를 달래기 위해 창조해 낸 정신승리의 도구 같은 것으로 보는 시선에서도 비롯된다. 반면 신앙주의의 오류는 과학주의가 아닌 과학을 적으로 삼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적인 신앙관과 직결되며, 믿음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비합리적이고 반지성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데에서도 비롯된다.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학과 신앙의 대립은 알고 보면 과학주의와 신앙주의의 대립인 것이다. 과학과 신앙은 대립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것은 존 레녹스의 일관된 메시지이기도 하다 (저 유명한 '주전자 비유'를 떠올려보라).<br>사족이 길었다. 앞표지로 돌아가자. 행성 바로 아래에는 피사의 사탑이 보이고, 그 아래 중간쯤에는 한 사람이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모두 갈릴레오를 상징하는 듯하다. 피사의 사탑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무게가 다른 두 공을 동시에 떨어뜨려 자유낙하 실험을 했다고 알려진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이 실험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여기에선 중요하지 않다. 실험이 아닌 실험자 갈릴레오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존 레녹스는 갈릴레오의 이단 재판 사례를 언급하며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갈릴레오와 의견을 달리 한 사람들은 교회 관계자들만이 아니라 먼저는 대다수 다른 과학자들이었다는 진실을 공개한다. 즉,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처럼 보이는 갈릴레오 사건은 과학자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빚어진 사례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갈릴레오는 이단 재판 전후 상관없이 평생 하나님과 성경을 믿었다.&nbsp;<br>앞표지 왼쪽 중간에는 성경으로 보이는 책이 펼쳐져있다. 종교, 신앙, 하나님 등을 상징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맨 아래쪽엔 저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따온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을 상징하는 두 손이 그려져 있다. 내게 이 그림은 마치 존 레녹스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성을 주셔서 과학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탐구하여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양하길 원하신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근원적인 사실을 다시 한번 짚는 역할도 한다.&nbsp;<br>이 책에는 존 레녹스 특유의 쉬운 설명으로 과학, 신앙, 믿음, 기적, 증거 등의 개념들을 짚어가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불필요한 오해를 풀어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의 부제는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할까?'인데, 그에 대한 결론으로 저자는 과학과 신앙은 양립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가 여러 책에서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 책은 특히 아기자기한 사이즈와 어울리게 독자들이 좀 더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호기심이나 의문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부터 손에 들어도 손색이 없겠다 싶다.&nbsp;<br>#아바서원#김영웅의책과일상&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92/61/cover150/k66213040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926181</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흥미로운 그러나 공감할 수 없는 -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28497</link><pubDate>Sun, 02 Aug 2026 17: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2849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12032349&TPaperId=174284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676/59/coveroff/s6121371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12032349&TPaperId=1742849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a><br/>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br/></td></tr></table><br/>흥미로운 그러나 공감할 수 없는<br>스즈키 유이 저,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읽고<br>무명 혹은 신진 작가에게만 주어지는 아쿠타가와 상을 거머쥔 이 유명한 작품은 평론가를 포함하여 여러 매체와 지면에서 칭찬 일색이었다. 그것들을 보고 나는 의문이 들었고 직접 확인하고 싶어 수개월 전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 단순히 이 책이 왜 유명한지가 아니었다. 언론을 도배한 글들은 작품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작가의 젊은 나이와 그의 독특한 이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작품에 대해서는 어디서 베꼈는지 대동소이한 몇 줄로 일축되어 있어 도저히 이 소설이 어떤 작품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량도 길지 않을뿐더러 마침 배송비 무료 혜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주어져 덥석 구매하고 말았다.&nbsp;<br>액자식 구성의 이 소설의 도입부는 흥미를 유발했다. 주인공 격이나 다름없는 도이치 교수가 식사 후 차를 마실 때 티백에 달려있는 글귀 (마치 포츈 쿠키 안에 있는 문구를 떠올리면 될 듯하다)를 읽게 되는 사건이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다. 괴테의 명언이라고 쓰여있었지만, 정작 괴테 전문가인 도이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 사소한 사건이 전체 이야기를 이끄는 주동력이 된다. 그리고 책의 결말 부분에 다다르도록 그 글귀의 출처를 찾아 나서는 도이치에게 저자는 초점을 맞춘다. 이 부분에서 나는 참신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런 도입부로 도대체 어떤 결말을 선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지성적으로는 흥미를 보였지만, 감성적으로는 벌써부터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nbsp;<br>그 글귀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기본적인 서사이지만, 다행히 이 소설은 단지 이 서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찾아가는 과정 중에 그 글귀, 그러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가 도이치의 삶에서 실현되어 가는 잔잔하고도 훈훈한 이야기가 주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 끝에서도 도이치는 끝내 그 글귀의 출처가 괴테인지에 대해서는 묘연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도이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아내와 딸, 사위와 직장동료, 장인과 옛 친구들과의 소통을 통해 도이치는 모든 게 다 연결되어 있다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글귀의 기원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가 그걸 말했든 그 글귀가 도이치 자신의 마음으로 고백되고 입으로 시인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nbsp;<br>여러 소설적 장치들이 치밀하게 짜여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 기술적인 면에서 이 소설은 좋은 점수를 받을 만했다는 데에 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유명인들이 쓴 고전들과 명언들이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기이한 장면들 앞에서 나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여러 언론에서 공통적으로 이 소설이 지적인 유희를 제공한다고 쓰고 있는데 나로서는 오히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이 책에 깊이 빠져들지 못했다. 물론 그것들을 다 미리 알고 있어야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몰라도 된다. 맥락만 파악하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세상이 나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다. 요컨대 내게 이 소설은 핍진성은 높은 편일 수 있겠지만, 개연성은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의 눈으로 봤을 때 이 소설은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 느낌은 수백 년 전에 쓰인 고전소설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낯섦이었다.&nbsp;<br>추천할 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짧아서 다행이었다. 하긴 길었으면 중도포기했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추천한 신형철과 이동진의 코멘트도 내겐 변죽만 울리는 듯했다. 만약 이 책이 아쿠타가와 상을 받지 못했다면 과연 그런 추천사를 쓸 수 있었을까 싶은 의구심까지 들 정도로 말이다.<br>#리프#김영웅의책과일상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676/59/cover150/s6121371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6765918</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입체적인 빌드업이 돋보이는 범죄소설 - [[세트] 재수사 1~2 - 전2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14824</link><pubDate>Mon, 27 Jul 2026 14: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1482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838349&TPaperId=174148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982/34/coveroff/k94283834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838349&TPaperId=1741482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세트] 재수사 1~2 - 전2권</a><br/>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08월<br/></td></tr></table><br/>입체적인 빌드업이 돋보이는 범죄소설<br>장강명 저, ‘재수사’를 읽고<br>"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여는 이 문장들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책을 두 번 이상 정독했지만, 주인공의 사상이 듬뿍 담긴 1부를 여전히 나는 다 이해하지 못한다. 2부를 거울삼아 다시 1부로 돌아왔을 때 그나마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장강명의 ‘재수사’를 펼치자마자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라는 렌즈를 착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결코 예사롭지 않겠구나, 하고 예감했다.<br>설상가상으로 다음 문장이 이어진다. “나는 22년 전에 사람을 죽였다. 칼로 가슴을 두 번 찔러 죽였다.”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살인자다. 스스로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고백한다. 따지고 보면 ‘지하로부터의 수기’ 주인공보다 더 진화한 캐릭터인 것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주인공은 살인을 할 만큼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찌질하고 허세 저는 캐릭터였고, 자신의 독단적이지만 이론적이고, 대단한 것 같지만 가소로운 사상 속에 갇힌 옹졸한 몽상가 축에 속했다. 그런데 ‘재수사’의 주인공은 범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살인을 하고도 태연하게 회고록 따위를 쓰면서 살인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22년이나 지난 현재 시점까지. 이 설정 하나만으로도 나는 소름이 돋았고 긴장이 되었다.<br>뿐만 아니다. 세 번째 꼭지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도 언급된다. 다음과 같다. “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거울상이다. 나는 내가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획 없이 살인을 저지른 뒤 라스꼴리니꼬프가 그토록 되고 싶어 했던 비범인이 되었다. 원치 않게, 서서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이 같은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찍어 살해하고 곧바로 자신이 범인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재수사’의 주인공은 이를 뒤집은 것이다. 주인공은 라스꼴리니꼬프와는 달리 아무런 살인 계획이 없었다. 테스트해 보고 싶은 사상도 없었다. 그저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을 뿐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계획 후 실행으로 자신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여 비극에 휘말렸다면, 이 주인공은 실행을 먼저 해 버린 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비범인이 되어버린(혹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사상은 객관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저지른 범행을 묵인하고 나름대로의 합리화된 변명이 필요했을 테니).<br>라스꼴리니꼬프와 이반 카라마조프를 비교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반 카라마조프는 라스꼴리니꼬프보다도 못했다. 자기가 직접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 때문에 무너졌다.” 그리고 한 술 더 뜨는 문장. “아마 도스토옙스키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어서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무리 대문호라 한들, 살인자에게도 일상이 찾아온다는 진리를 알 수 없었을 테니.” 아… 말문이 막혔다. 주인공의 거침없는 문장들은 분명히 주인공이 ‘지하로부터의 수기’ 주인공보다 더 지능적이며 더 계몽되었으며 더 현실적인 캐릭터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nbsp;<br>총 백 꼭지로 이뤄진 이 소설의 홀수 꼭지는 주인공의 회고록이고, 짝수 꼭지는 주인공이 22년 전에 범했으나 미제로 남은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는 (결국 주인공을 22년 만에 범인으로 잡는) 형사들의 이야기다. 홀수 꼭지는 비교적 짧은 대신 ‘지하로부터의 수기’ 1부만큼은 아니지만 난해한 편이고, 짝수 꼭지는 소설 전반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축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장단의 리듬의 타며 읽어가도록 설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nbsp;<br>그런데 이 리듬을 과연 독자들이 얼마나 잘 타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갈 수 있을지 나는 솔직히 우려가 되었다. 홀수 꼭지를 읽고 다 이해하는 독자는 아마도 거의 없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 엘리트 지식인층에 속하지 않았을까. 그걸 다 이해하려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뿐 아니라 5대 장편들도 꿰고 있어야 하고,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계몽주의 등의 철학 및 사상들의 골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짝수 꼭지를 읽을 땐 장강명 특유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이 듬뿍 담긴 르포르타주식의 소설 맛을 만끽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손에 든 절반 이상의 독자들은 홀수 꼭지는 초반에나 읽다가 중반부터는 대충 읽거나 건너뛰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나도 도스토옙스키 관련 내용은 흥미롭게 읽고 감탄을 했지만, 철학과 사상, 특히 장강명 작가가 만들어낸 ‘사실-상상 복합체’ 개념을 풀어놓을 땐 자주 집중력을 잃어버렸고 읽었던 곳을 읽은 줄도 모르고 또 읽기도 했다. 책을 읽어 나갈 때 저자가 쓴 텍스트들이 나를 관통하지 않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 같은 느낌은 결코 유쾌하진 않은데, 이런 경험은 이 책을 완독 하기 위한 필수 코스이지 않나 싶다.&nbsp;<br>반면 짝수 꼭지는 정말 재밌다. 중간쯤 살짝 긴장이 풀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그러니까 범인 색출에 점점 가까이 갈수록 이 책은 페이지 터너가 되었다. 혼자 밥 먹으면서도 계속 페이지를 넘길 만큼. 장르를 따지자면 범죄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 이 소설은 긴장과 스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어떤 부분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눈앞에 그려지기도 했다. 장강명 작가의 필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nbsp;<br>반전도 있었다. 나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수상하다 싶었던 인물이 범인으로 드러나 그렇게 놀라진 않았지만 (나름 추리소설로 독서의 세계에 입문했다는 게 도움이 되었던 걸까),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설의 절정 부분에서 용의자를 체포할 때 이야기가 끝난 줄로 알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 부분에서 오히려 그게 연막이라는 걸 알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대충 짐작하고 읽어도 정말 끝까지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만큼 잘 쓰인 작품인 것이다.&nbsp;<br>홀수 꼭지가 없었다면, 그러니까 짝수 꼭지만으로 이 소설이 구성되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뭐 그래도 전체 이야기를 파악하는 덴 큰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랬다간 이 소설의 가치가 현격히 떨어진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소설의 절정과 결말까지 가는 빌드업이 약해진다는 것. 이 소설은 범인의 고백부터 시작하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정체가 드러난다. 회고록의 절반 이상은 주인공의 철학 및 사상을 설파하는 내용으로 이뤄지지만, 중간중간 단서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것들을 수집하는 재미와 그것으로 주인공의 정체를 추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쓰인 짝수 꼭지만으로 추리 과정을 거치는 것과 범인의 독백을 도움 받아 추리 과정을 거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외형적인 서사에서 안으로 서서히 좁혀가는 방식과 내면적인 독백에서 점점 자신의 정체를 밝혀가는 방식이 조화롭게 춤을 추며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입체적인 빌드업을 경험하며 나는 쫄깃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nbsp;<br>다른 하나는 이 작품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인데, 이 소설이 중후함을 주는 요인은 짝수 꼭지가 아니라 홀수 꼭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회고록은 얼마나 주인공이 비뚤어져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능을 충실히 담당하는 동시에 주인공이 그렇게 비뚤어진 이유에 대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주인공이 살인자가 된 것도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가지 않도록 만드는 역할도 담당한다. 사회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시스템의 문제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장강명 작가의 숨은 메시지가 홀수 꼭지에 많이 담겨 있다는 말도 된다.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우리나라의 ‘형사사법시스템’과 장강명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말하는, 이 시대 한국 사회가 깊이 내재하고 있는 두 가지 문제인 ‘불안’과 ‘공허’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인 문제점들을 정확히 짚고 공론장에 올리기 위해 전직 기자 장강명의 르포르타주식 글쓰기와 소설가 장강명의 허구적 상상력이 만나 쓰인 열매가 바로 이 작품 ‘재수사’의 정체성인 것이다.<br>그러므로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미래의 독자에게 조언을 한다면, 홀수 꼭지에서 난해한 부분이 나와서 이해가 안 가더라도 적어도 맥락만은 파악하겠다는 마음으로 절대 건너뛰지 말고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홀수 꼭지와 짝수 꼭지의 리듬과 화음이 이 소설의 중추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고 충분히 맛보며 작품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nbsp;<br>묵직한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장강명 작가가 이 정도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더 써주었으면 한다. 우리나라엔 그런 작품이 필요하다.<br>#은행나무&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982/34/cover150/k94283834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9823489</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일상 속 수도원 - [제네시 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11280</link><pubDate>Sat, 25 Jul 2026 18: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1128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474427&TPaperId=1741128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02/18/coveroff/899347442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474427&TPaperId=1741128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제네시 일기</a><br/>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11월<br/></td></tr></table><br/>일상 속 수도원<br>헨리 나우웬 저, '제네시 일기'를 읽고<br>이 책은 헨리 나우웬이 일곱 달 동안 머문 제네시 수도원에서 거의 매일 써나갔던 기록이다. 그는 1974년 6월부터 12월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제네시 수도원은 기도와 참회, 침묵과 노동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전 세계에 흩어진 약 85개의 가톨릭교회 소속 트라피스트 수도원 중 하나로써 미국 뉴욕주 북부 피파드에 위치한다.<br>수도원에 들어가기 전 헨리 나우웬은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성찰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지내기보다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기도에 관한 글을 쓰기에 바빠서 기도할 여유가 없었는지 모른다. 주님의 사랑보다 인간의 칭찬에 관심이 많았는지 모른다. 거룩한 언약에 기대어 자유를 누리기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기대에 얽매인 죄수 신세로 전락했는지 모른다." 그는 삶에서 뒤로 물러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쓴다. 영적으로 갈급한 상태임을 느꼈던 것 같다.&nbsp;<br>그러던 어느 날, 여행 도중 잠시 들린 켄터키 주에 위치한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우연찮게 존 유드 신부와 만나게 된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의 축복이었다. 헨리 나우웬은 존 유드로부터 동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뛰어난 통찰력과 따뜻한 마음을 갖춘 영혼의 안내자'로서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그 후 유럽에서 3년간 머물던 시기에 존 유드 신부가 제네시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렇잖아도 삶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탓에 그는 짧은 기간이라도 좋으니 존 유드 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단기수도사로 생활할 수 있는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존 유드 원장으로부터 예외적인 상황이지만 일곱 달 동안 수도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 헨리 나우웬에게는 예기치 못한 축복이었을 것이다.<br>일기 형식으로 쓰인 이 책을 다 읽는 데에는 약 1년이 걸렸다. 정작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다 합치면 10시간 정도 되겠지만, 한 번에 읽지 않고 책상 옆에 항상 놓아두고 일부러 조금씩 천천히 읽었다. 누군가의 일기를 단숨에 흡입해 버리는 건, 그것도 영성이 느껴지는 텍스트를 그런 식으로 대우한다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 나가며 밑줄을 그은 부분이 많았다. 헨리 나우웬의 수도원 경험담 정도의 내용이었다면 아마도 이 책은 그리 가치가 높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경험담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반에 걸친 근원적인 질문들을 다시 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솔직하게 답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시공을 초월하여 언젠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할 물음들을 하나씩 마음에 담다 보니, 어느새 내가 얼마나 육신에 치우친 삶을 살고 있었는지, 얼마나 가식적으로, 이중적으로, 위선적으로 살아왔는지를 정직하게 뒤돌아 볼 수 있었다. 시끄럽던 내 안의 소리들이 잠잠해지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가질 수 있었다. 회개하는 마음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다잡는 시간이 되었다. 동시에 이 책에는 헨리 나우웬이라는 영성가 역시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과정을 겪어나가는 모습이, 한 인간의 모습이 솔직 담백하게 담겨 있어 은근한 위로도 받을 수 있었다. 정도가 조금씩 다를 뿐 아마 진지한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nbsp;<br>읽고 한동안 멈춰야 했던 문장들을 추려보았다. 나의 반응도 짧게 덧붙인다.<br>1. "영적인 삶에 관한 책을 읽는 건 좋아하면서도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려 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gt;&gt;&gt; 헨리 나우웬이라는 위대한 영성가도 이런 질문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의외의 위로와 함께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다. 위선을 가장하여 영적이고 선한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nbsp;<br>2. "가장 신령해 보이는 행동들조차도 허영심에 오염될 가능성이 있음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gt;&gt;&gt; 역시 위선에 관련된 문장이다. 헨리 나우웬의 성찰이 예리하고 깊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성경구절도 생각이 났다. 두 주인을 섬기면서 마치 아닌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지혜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 세대가 두렵다는 생각도.<br>3. "육체노동은 환상을 벗겨낸다. 내 벌거벗은 실체와 무기력함, 유한성, 연약함 따위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흥미롭고, 신나며, 정신을 쏙 빼놓은 만한 활동들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따분한 단순작업은 무방비상태의 밑바닥을 공개해서 더 연약한 심령을 갖게 한다. 이 새로운 연약함이 두려움이나 분노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마음을 활짝 열도록 이끌어주길 소망하며 기도한다."&gt;&gt;&gt; 제네시 수도원에서 헨리 나우웬이 일곱 달 동안 실행했던 루틴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육체노동이었다. 그는 빵 만드는 작업과 암석을 채취하고 나르는 작업을 번갈아 가며 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글을 쓰고 상담하는 일로 언제나 바빴던 그가 노동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서툰 손으로 작업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낯설지만 반갑게 느껴졌다. 그가 느꼈던 감각이 저 문장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nbsp;<br>4. "적잖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는 사이에 내 삶에서 침묵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었다. 침묵이 사라져 간 곳에 내면이 오염되었다는 감각이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어째서 자꾸 지저분하고, 찜찜하고, 불순한 느낌이 드는지 몰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침묵의 결핍이 주원인이라는 걸 또렷이 알 수 있었다."&gt;&gt;&gt; 침묵의 결핍이 지금 현대인의 삶에서 얼마나 부재했는지, 그러면서도 감히 거룩한 척, 믿음 좋은 척, 괜찮은 척하는 나의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불필요한 말과 생각들로 나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도 오염시켰던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nbsp;<br>5. "가난한 삶을 살려는 일정한 노력 없이 진실한 크리스천을 자부한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얘기다."&gt;&gt;&gt;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청빈해야 하느냐,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가난해야 하느냐, 하는 말들이 한때 유행이었다는 걸 기억한다. 그때에도 나는 그 무리에 동조하지 않았다. 가난한 삶을 살려는 일정한 노력은 정말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한다 해도 가난한 이들을 백 퍼센트 공감할 수 없겠지만, 내 입이 기름지고, 내 허리가 비갯덩어리로 출렁대면서 구제를 한다는 게 나로선, 특히 진실성 여부를 따지면,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br>6. "비가 아름답지 않나요? 어째서 다들 비를 피하려고만 할까요? 비에 푹 젖어야 할 순간에도 왜 햇살만을 원하는 걸까요? 자녀들이 은혜와 사랑에 푹 빠지길 하나님은 바라세요. 이처럼 다채로운 경로를 통해서 그분을 느끼고 점점 더 잘 알아갈 수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죠."&gt;&gt;&gt; 허를 찌르는 문장이다. 비를 맞아야 할 때 맞을 줄 아는 것. 비를 내리시는 분도, 햇살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 마치 햇살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것처럼 프레임을 씌우는 건 우리가 하나님을 박스 안에 가두는 행위와 같을 것이다. 우린 모든 것들로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원하고 편한 방식으로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br>7.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해 늘 거절당하고 고립된 느낌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는 이를 만난 사람에 빗대어 설명했다. 그런 이들에게는 상대방의 보살핌에 진정과 진심이 담겨 있다고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어진 사랑을 받아들이고 의혹과 불신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내면의 확신을 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gt;&gt;&gt; 그렇다.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들은 갑자기 한없는 사랑을 받게 될 때 의심하게 된다.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내면의 확신, 그것을 위한 믿음의 결단,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이신 예수 이름으로 의인으로 칭해졌다는 사실도 함께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후자로 연결되지 못하고 전자에만 머물면 자기 자신에게 갇힌 신세가 된다. 그건 믿음이 없는 것과 같다. 후자를 고백해야 한다. 가치 없던 자가 가치 있는 자로 옮겨졌다는 고백 말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고백 말이다.<br>8.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실수해도 매서운 비판을 당하지 않으며, 훌륭한 일을 해도 유난히 칭찬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고, 성공이나 실패와 상관없이 한 차원 높은 사랑을 받는 경험이 쌓이면서 자신은 물론이고 하나님과 무척 깊게 접촉할 수 있었다."&gt;&gt;&gt; 이게 공동체의 힘이지 않나 싶다. 이런 공동체가 우리의 교회 공동체이길 바라마지 않는다.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 믿음과 신뢰가 가는 공동체, 늘 새로워질 수 있는 공동체 말이다.<br>9. "일곱 달을 보낸 뒤에 내가 완전히 달라져서 훨씬 일관되고, 신령하며, 의로우며, 긍휼히 여기며, 온유하고, 유쾌하며, 이해의 폭이 넓은 인간이 되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다시 예전의 삶의 패턴으로 돌아가는 데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 기억은 단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관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앞장서서 인도해 준다. 온갖 충동과 환상, 비현실성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이 기억은 언제나 헛된 꿈을 몰아내고 정확한 방향을 가리켜 보인다."&gt;&gt;&gt; '맺는 글'에 적힌 문장들이다. 제네시 수도원 생활을 마친 지 반년 남짓한 시기에 쓴 글이다. 그의 솔직하고 정직한 문장들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일곱 달 수도원 생활로 인해 바뀐 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러나 그 기억은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가늠하는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준다는 것. 이 문장을 읽고 문득 우리도 굳이 수도원에 가지 않더라도 수도원 생활의 효과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스마트폰을 단 몇 시간만이라도 내려놓는 것, 단 하루라도 인터넷과 동영상으로부터 훌쩍 떠나 있는 것, 등등의 작은 실천이 그런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잠깐 멈춤의 시간들도 분명 우리의 현재와 미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나침반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nbsp;<br>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바빠지고 혼란스러워진 이 시대에 일상 속 수도원 생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헨리 나우웬이 제네시 수도원에서 이 일기를 썼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일상 속 수도원 생활 (온라인 디톡스 같은)로부터 우리만의 일기를 쓸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드는 이 시대의 급류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절제하면서 지켜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삶의 작은 습관의 변화가 침묵의 결핍을 채워주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지 않을까 싶다. 성 베네딕트가 말한 대로, 예배의식과 영적인 독서, 그리고 육체노동으로 바로 그 시간을 채워 넣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매일 십 분씩이라도 이러한 일상 속 수도원을 맛보고 그 시간을 지켜내기 위해 애쓸 수 있다면 말이다.&nbsp;<br>#포이에마&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02/18/cover150/899347442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021896</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인간 도스토옙스키 - [도스토예프스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07337</link><pubDate>Thu, 23 Jul 2026 12: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073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211650&TPaperId=174073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35/coveroff/895221165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211650&TPaperId=174073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도스토예프스키</a><br/>박영은 지음 / 살림 / 2009년 05월<br/></td></tr></table><br/>인간 도스토옙스키<br>박영은 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br>책을 다 읽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이 내 인생에 남긴 많은 흔적들에 대해 생각했다. 독서의 마무리로 감상문을 작성하는 습관이 큰 도움이 되었다. 기록을 훑어보니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던 시기는 2019년 3월이다. 지금이 2026년 7월이니 7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셈이다. 그동안 나는 한국어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작품은 거의 다 읽었고,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단편을 제외한 중장편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 독서모임과 함께 다시 읽었으며, 그 기록들을 독서모임과 같은 이름을 가진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내게 이 7년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였다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러시아 문학 전공, 그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 전공자가 아닌 순수한 독자로서는 아마도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축에 속하지 않나 싶다. 생각해 보면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한 번도 하기 힘든 도스토옙스키라는 거대한 산맥을 두 번이나 종주하다니 말이다. 나의 오십 년 인생에서도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고 나는 이를 영광으로 생각한다.&nbsp;<br>몇 달 전 페친 덕분에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망설임 없이 구입했지만 한동안 책장에서 대기하다가 어젯밤에 내 손에 들렸다. 박영은 교수가 재해석하여 쓴 ‘도스토옙스키 소개서’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한 책이었다. 손에 잡힐 만한 판형에 백 페이지 채 되지 않은 분량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의 작품을 하나 이상 읽어 보고 그에 대해 잘 알려진 정보들을 대충이라도 섭렵한 독자라면 별 어려움 없이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도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것들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제대로 만나볼 의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애피타이저 정도로 여기고 먼저 읽어 봐도 좋을 듯하다.&nbsp;<br>아쉽게도 저자의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재해석에서 나는 고유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내가 이미 이런저런 도스토옙스키 작품 이외의 2차 자료들도 섭렵한 탓일 테다. 각 작품에 대한 저자만의 해석이 간간이 적혀 있었지만 너무 짧기도 하고 모두 잘 알려진 것들이라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저자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 책의 의의를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아닌 인간 도스토옙스키를 조명하여 소개하는 거라고 책 서두에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의 삶을 그의 작품과 함께 다시 한번 훑어보는 시간은 내게 유익했다. 이런 책이 몇 권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양한 문체로, 다양한 관점으로 도스토옙스키를 조망하는 글들은 언제나 환영이다. 출간이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nbsp;<br>#살림#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1.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2. 백치: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3. 악령: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4. 미성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6.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7.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8. 분신: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9.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0. 노름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8. 상처받은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9. 악몽 같은 이야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20. 악어: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24. 백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29. 약한 마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40.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86741. 여주인: https://rtmodel.tistory.com/191742.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https://rtmodel.tistory.com/193043.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by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https://rtmodel.tistory.com/199544.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by 김정아): https://rtmodel.tistory.com/217545. 도스토예프스키 (by 박영은): https://rtmodel.tistory.com/2217<br>*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1.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2. 분신: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4. 상처받은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5.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6.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7.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8. 노름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9. 백치: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0. 악령: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1. 미성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br>* 도스토옙스키 관련 저서1. 닮은 듯 다른 우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45514372.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1616751]]></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35/cover150/895221165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13579</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전업 소설가 하루키의 철학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05819</link><pubDate>Wed, 22 Jul 2026 15: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4058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757713&TPaperId=1740581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126/75/coveroff/8972757713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757713&TPaperId=174058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직업으로서의 소설가</a><br/>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04월<br/></td></tr></table><br/>전업 소설가 하루키의 철학<br>무라카미 하루키 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br>이 책을 읽기 전이라면 제목이 '소설가라는 직업'이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전자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일반론을 떠올리게 하지만, 후자는 하루키의 철학이 그대로 담긴, 요컨대 ‘전업 소설가’에 대한 하루키의 특수론 내지는 고유론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둘의 차이를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이 책을 집어든 것도 전자의 내용이리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 책은 하루키 냄새가 풀풀 나는 책이었다. 하루키라는 사람이 소설가가 되었던 과정(한 마디로 운명이라는 거다. 그 운명 이후 찾아온 운, 그 운 덕분에 생겨난 자기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은 소명의식으로 이어진다), 소설가로 수십 년을 지속하며 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이유, 그 비법(이라 할 것도 딱히 없지만)들이 편안하고 친절한 문장으로 쓰여있는 책이었다. 그러므로 막연히 소설가가 어떤 직업인지에 궁금하고 그에 대한 답을 원한다면, 혹은 하루키라는 특정 소설가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이 책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말을 달리하면, 이 책은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하루키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필독서가 될 수 있고, 어쩌다 한두 번 소설을 써본 자가 아니라 소설 쓰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여기고 그 고독한 길을 걸어가는 혹은 걸어갈 이들에게도 필독서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nbsp;<br>이 책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저자인 하루키는 인생 대부분에 대해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유보적이거나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사실 이런 입장은 그의 작품 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물들의 성향을 보면 우유부단하게 보일 정도로 특별히 강한 캐릭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고 거의 확신하는 소설가에 대한 철학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자기만의 길을 찾아내고 누가 뭐라고 해도 당당하게 그 길을 걸어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한 편으론 자기 계발서에서나 나옴직한 결론과 비슷해서 다소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론 소설가가 되고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것도 어떤 특별한 샛길이 있는 게 아니라 소명의식을 가지고 정직하고 성실한 자기 관리를 통해 묵묵히 고독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는 빛바랜 진리를 다시 빛나게 해 주어 소설가를 꿈꾸거나 이미 소설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감동과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이 두 가지를 모두 느꼈다.&nbsp;<br>읽고 나면 내가 뭘 읽었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워낙 필력이 좋아 하루키의 글은 술술 읽히는 마력이 있다. 특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식의 어투가 빈번하게 사용되는데, 이것은 그의 철학(신중한, 혹은 우유부단한, 혹은 포용적인)을 대변해 주면서도, 한 편으론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하는 결론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나는 읽기 전과 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았다. 결국 이 책은 전업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운명과 소명의식, 그리고 철저한 자기 관리로 이뤄진다는 말을 에둘러서 표현하기 위해 길게 늘어 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뒤로 갈수록 집중력을 잃어서 대충 읽기도 했다.&nbsp;<br>이런 생각을 했다. 하루키가 저렇게 자기만의 길,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대부분과 다른 길을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며 성공한 사람(한 마디로 비주류로서)이기 때문에 이런 책도 쓸 수 있었겠구나 하는. 그리고 그의 작품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결코 출간되지 못했을, 아니 써지지도 않았을 책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또한 이런 생각도 했다. 역시 작가는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타고나야 하는 거구나, 운명이구나 하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영원히 증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nbsp;<br>하루키의 독고다이식의 방법은 성공으로 열매를 맺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해도 하루키와 같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전업 작가로 살고 싶다 하더라도 생계유지가 안 되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재능을 가지고, 운명을 느꼈다 하더라도 입에 풀칠을 하지 못하거나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을 가지지 못하면 하릴없이 소설만 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루키가 하루키가 된 것은 재능과 운명과 소명의식과 자기 관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썼지만, 그것은 성공이라는 가시적인 열매 위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메시지를 일반화시킨다거나 맥락 없이 적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무리일 것이다.&nbsp;<br>#현대문학&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하루키 읽기1. 노르웨이의 숲: https://rtmodel.tistory.com/6552.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https://rtmodel.tistory.com/8203. 양을 쫓는 모험: https://rtmodel.tistory.com/1211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https://rtmodel.tistory.com/19135. 일인칭 단수: https://rtmodel.tistory.com/19576.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21637.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https://rtmodel.tistory.com/2216<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126/75/cover150/8972757713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1267538</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좋은 죽음을 위한 좋은 삶 -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lt;TV 책을 보다&gt; 선정 도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99974</link><pubDate>Sun, 19 Jul 2026 14: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9997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514799&TPaperId=1739997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996/40/coveroff/896051479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514799&TPaperId=1739997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TV 책을 보다> 선정 도서</a><br/>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05월<br/></td></tr></table><br/>좋은 죽음을 위한 좋은 삶<br>아툴 가완디 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br>나는 이율배반적이다. 나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을 대하는 입장이 다르다. 모순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나만 이런 건지. 혹시 당신도 그렇지 않은지. 나는 이런 이중성이 나의 한계인지, 인간의 한계인지도 궁금하다.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아마도 모든 죽음은 단 한 번밖에 없는데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죽을 뻔한 경험이 아닌, '죽었던' 경험. 이것은 인간의 영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nbsp;<br>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말은 곧 모든 죽음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의 한 번뿐인 죽음 앞에서 서툴 수밖에. 그렇다면 타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죽음에 대해 무지했고 나완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경솔하게도 죽음을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낭만화하고 있었다는 점도 솔직히 인정해야 했다. 이 책 덕분에 죽음이 조금은 더 형체를 갖추게 되었다. 사고로 인한 즉사가 아닌 모든 죽음은 의학적이고 생물학적인 부분, 즉 노화와 노쇠 과정(대부분은 고통을 동반한, 그리고 정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의학적 도움을 받으며)을 겪게 된 이후에 찾아온다는 진실을 더 이상 간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었다.&nbsp;<br>이 책은 여덟 꼭지의 소제목만 진지하게 읽어 봐도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기분과 함께 그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로 시작해서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으로 끝나는 책이라니. 저자는 의사다. 가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함께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여정에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보여주며 현대 의학이 어떻게 그 여정에 관여하고 있는지와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되짚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좋은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들로 독자를 공론장으로 초대한다. 동시에, 의사이자 한 사람, 이 두 정체성이 연합해 나가는 과정을 개인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독자는 자연스레 현대 의학을 대표하는 저자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치료, 간호, 보살핌을 받는 환자(대부분은 잠정적 환자)인 동시에 한 사람으로서 저자의 글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나의 이율배반적인 입장도 어찌 보면 이 두 정체성 사이의 괴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책 덕분에 그 선이 조금은 흐려진 듯한 기분이다. &nbsp;<br>언제부터 죽음을 의학의 실패 내지는 결함으로 이해하게 되었을까? 현대 의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얘기도 아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60세 남짓이었다. 지금은 80세를 넘겼다. 90세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늘어난 건 유년이나 청년시절이 아니라 노년이다. 게다가 노화는 예전보다 더 이른 나이에 시작되고 있다. 잘 먹고 잘 살게 되면서 생겨난, 지극히 아이러니한 부작용이다. 덕분에 죽음은 늦춰졌지만 죽어가는 기간은 늘어났다. 문제는 이렇게 늘어난 기간의 주인공으로 급부상하게 된 존재가 현대 의학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라는 참인 명제를 마치 거짓으로 뒤집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마치 어떻게 손만 잘 쓰면 죽는 시기를 원하는 만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것처럼 현대 의학은 죽음을 실험대 위에 올렸고 인간다움이라는 가치를 거세시켜 버렸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가족을 포함한 지인의 죽음을 단 몇 시간만이라도 연장시키려고 애쓰게 되었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인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거나 온전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누명 아닌 누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20세기말부터 시작되어, 특히 선진국에서는, 상식이 될 정도로 편만해진 기류다.&nbsp;<br>지금은 이런 기류를 비판적으로 보는 부류가 급속하게 많아졌다. 돈과 현대 의학의 결탁이 만들어낸 괴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조력사, 안락사라는 개념이 등장하여 법제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 분위기의 일환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간성이 소거된 의사의 관점이 아닌 인간다움을 간직한 인간의 관점을 되살리는 시도를 통해 좋은 죽음과 그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여정을 좋은 삶으로 마무리하는 것의 중요성을 짚어낸다.&nbsp;<br>저자는 단순한 생명 연장이 생의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밝힌다. 인간은 스스로가 혼자 설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지는 노년의 시기에도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이 보장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의학적으로 지켜낼 수 있는 건강 상의 안전이 결코 인간의 행복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도 충실하게 입증해 낸다. 인간은 단지 숨을 쉬고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어떤 대의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노쇠의 시기에 도둑처럼 찾아오는 무료함과 외로움과 무력감을 극복하는 해결책은 현대 의학이 풀 수 없는 영역임을 반박할 수 없게 밝혀낸다. 인간은 몸만 가진 게 아니라 마음과 영혼도 함께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은 후자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의학적인 의사 결정은 크게 실패를 했고 죽음이라는 주제를 피하느라 환자들에게 오히려 해를 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허를 찌르는 말이다.&nbsp;<br>그리고 저자는 하기 어려운 질문에 봉착하고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쓴다.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고치려 애써야 할 때는 언제이고, 그러지 말아야 할 때는 언제일까?"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어떤 전율을 느꼈다. 현대 의학을 대표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하기 힘든 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 책의 투명성과 객관성, 그리고 진정성을 반증하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의료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도 꼭 읽어야 하는 책임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nbsp;<br>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며 느낀 소회와 함께 앞에서 다뤘던 주제들을 몸소 체감한다. 나는 이 대목을 이 책의 꽃이라고 보는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의사라는 정체성과 한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서로 연합을 이루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이론과 실제의 연합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차가운 메스가 떠오르는 기계 같은 의술이 아닌 따뜻한 인간다움이 묻어나는, 그래서 사람 살리는 본래 목적에 충실한 의술의 중요성을 소리 없이 강하게 외치는 완벽한 마무리로 보였다. 그렇다. 저자가 쓴 대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br>현대 의학의 공급자와 수혜자(잠정적 수혜자 포함) 할 것 없이 이 책의 중심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강하게 울려 퍼질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사고로 인한 즉사가 아닌 한 누구나 노화와 노쇠를 겪으며 고통을 감내하며 몸과 마음이 체계적으로 하나둘씩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 책 뒤표지에 쓰인 문장이다. 수십 번 읽어도 여운이 남는다. 우리 모두가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nbsp;<br>꼭 읽어야만 하는 책이었다. 뒤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인 그믐을 통해 (특히 교모세포종 재발로 인해 두 번째 수술을 막 마치고 회복 중인 김새섬님과 남편인 장맥주님이 이끄시는 '웰다잉 오디세이 2026'을 통해) 알게 되고, 함께 읽게 되고, 함께 나누게 되어 더욱 기억에 남을 책이었다. 좋은 책은 나눠야 하는 법. 나는 어떻게든 이 책을 널리 알릴 생각이다. 나의 이 짧은 글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nbsp;<br>#부키#김영웅의책과일상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996/40/cover150/896051479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9964079</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뒷모습을 끌어안을 때까지 - [뒷모습]</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97122</link><pubDate>Fri, 17 Jul 2026 17: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9712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752274&TPaperId=173971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97/coveroff/8972752274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752274&TPaperId=1739712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뒷모습</a><br/>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09월<br/></td></tr></table><br/>뒷모습을 끌어안을 때까지<br>미셸 투르니에 저, '뒷모습'을 읽고<br>아주 가끔 뒷모습까지 보게 되는 사람이 있다. 뒷모습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혹은 미처 드러내지 못한 그 사람의 정직하고 순수한 모습, 그 사람의 여백, 그래서 더욱 은밀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나는 믿는다. 헤어진 이후 그 사람의 뒷모습을 좇는 건 바로 그 진실을 알고 싶어서다. 그 진실의 깊이와 풍성함을 간직하고 싶어서다.&nbsp;<br>아래는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의 일부다. 뒷모습에 관한 글이다.&nbsp;<br>| 뒷모습까지 도도한 사람이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가 먼저 다시 만나자고 하진 않을 사람이다. 앞모습은 도도했지만 뒷모습은 외로워 보이는 사람도 있다.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다. 혼자 보내기가 괜히 미안해지는 사람이다. 마음에 남아 기도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앞모습은 약해 보여도 뒷모습은 씩씩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만나서 얘기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헤어질 때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은근히 놓이는 사람이 그렇다. 앞모습도 뒷모습도 모두 측은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무너져가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꾸는 앞모습까지도 손을 놓아버린 사람이다. 무엇을 도와줘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만날 때면 말은 줄고 마음은 바빠진다. 그럼에도 상대의 애써 태연한 척하는 모습에 눈물이 날 것 같다. 결국엔 내 마음도 무너진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끌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볼 때면 나는 그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뒷모습을, 그의 모든 모습을 내 눈에, 내 마음에 정갈하게 담아두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다. |<br>내가 느끼는 나의 뒷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부끄러운 내 과거의 모습들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 흔적들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뒷모습은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아우른 그 사람의 역사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청산은 없고 누적만 존재하는 공간이 뒷모습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현재와 미래의 내 모습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이리라.&nbsp;<br>에두아르 부바가 찍은 사진에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붙인 글들의 모음집. 흑백사진이어도 좋다. 아니, 흑백사진이어서 더 좋다. 미셸 투르니에가 말하듯, 뒷모습은 참다운 비밀을 드러내고 있기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주체이기에. 생략, 은연중의 말, 빗대어하는 말, 암시의 세계이기에.&nbsp;<br>내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좀 더 많이 봐둬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더 넉넉한 마음과 더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들의 뒷모습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br>#현대문학&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97/cover150/8972752274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9725</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후회, 외로움, 그리고 다짐 - [에브리맨]</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96863</link><pubDate>Fri, 17 Jul 2026 13: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9686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8833&TPaperId=173968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72/26/coveroff/s3626364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8833&TPaperId=1739686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에브리맨</a><br/>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br/></td></tr></table><br/>후회, 외로움, 그리고 다짐<br>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다시 읽고<br>이 소설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래서 주인공만이 아닌 나의 죽음도, 우리 모두의 죽음도 될 수 있는, 지극히 흔해빠진 죽음.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숙명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일까.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해진다. 완벽한 영점이다. 그러므로 필립 로스는 옳았다. '에브리맨'이 죽음에서 시작하는 건 필연으로 보인다.<br>이번엔 6년 전 처음 읽을 때보다 더 천천히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씹으면서 읽었다. 이렇다 할 중심 서사가 부재하기에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줄거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필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여러 의미심장한 문장들을 발견하고 작가 노트에 옮길 수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이게 인생이구나 싶었다. 삶의 끝까지 다녀온 기분이었다.<br>그는 보석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보다 상대적으로 허약한 체질로 평생을 살았다. 때문에 여러 번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수술실에서는 나오지 못했다. 한창일 땐 유명 광고 회사의 아트 디렉터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세 번 결혼했고, 세 번 이혼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아들은 평생 그를 원망했다. 장례식에 와서도 아무런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분노를 삭이지 못한 듯 마지막 인사를 겨우 건넬 뿐이었다. 두 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 낸시는 끝까지 그를 사랑해 준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 모든 장례식을 준비한 사람도 낸시였다. 그는 어떻게 낸시 같은 아이가 자기 딸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운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그랬다. 낸시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가 그럴 만했기 때문이 아니라 낸시의 착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가 들어가 있는 관 뚜껑 위로 낸시가 흙을 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도 그가 살아 있을 때 그녀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이미 죽은 그에게는 소용없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 입을 빌려 자기에게 했던 말이었을 것이다.&nbsp;<br>그는 많은 성공한 미국인이 그렇듯 바람을 피웠다. 유독 여자의 육체에 약했다. 불륜이 가져온 불행은 그의 인생 전체에 깃들었다. 굳이 이해하려 들자면, 그가 일해서 번 많은 돈을 탓할 수도 있고, 형과는 다른 나름대로의 건강상 열등감이 허세로 잘못 표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의 불행은 그가 자초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몸과 마음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과정인 노년에 이르러 (내가 보기엔 너무 늦은 듯했지만)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던 가족을 해체한 장본인도 자기였고, 그 해체 때문에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자기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때 그가 사랑했던 사람도, 한때 그가 더 나은 삶이라고 믿었던 삶도 이미 모두 그를 등지거나 떠나간 상태였다. "너무 늦었어요!" 이 무시무시한 말은 그의 내적 상태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인해 도미노처럼 하나씩 무너져가는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낸 칠십 대 노인의 최후는 저 한 문장의 외침에 무너질 정도로 보잘것없었다.&nbsp;<br>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윤리적인 시선만으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주인공에게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하나둘씩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지 않은가. 그것이 불륜이 아니더라도. 그의 불륜을 잘못된 충동으로 확장시켜 이해한다면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늦었어요!"라는 말 앞에서 당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 돌이키고 싶은 과거가 있다. 이제 겨우 오십 대에 들어섰지만 칠십 대에 죽음 앞에 서 있던 그처럼 나도 후회하고 자책하고 원망하는 내 모습들을 기억한다. 어쩌면 이것들이 이 소설에 공감을 일으키는 주동력이 아니었을까. 죽음도 그렇지만, 죽음 앞에 섰을 때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상념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 '만약'을 생각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게 인간이 아닐까. 에브리맨, 모든 인간, 나,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br>또한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노년의 삶을 묘사하는 부분들에서도 나는 외통수로 느닷없이 닥쳐오는 외로움과 슬픔을 맛보았다.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라는 문장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해가 갈수록 노쇠해지시는 부모님을 뵐 때마다 체감하게 되는 노화와 노쇠. 나 역시 건강을 챙기느라 예전보다 많은 시간과 돈을 쓰게 된다. 모험은 줄고 유지 보수에 급급한 삶으로 전환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주인공이 그랬듯 나도 무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아이의 어릴 적 사진들을 괜스레 하나씩 클릭하며 몇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도, 예전에 끄적거렸던 일기 같은 글들을 들춰보는 것도 모두 그런 일련의 과정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필립 로스는, 비록 과도한 표현이지만, 노년은 전투라고, 아니 노년은 대학살이라고까지 말한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번뜩 들다가도 침묵하게 되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노년의 삶이 점점 늘어가는 이 시대와 나에게 닥친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지는 순간이었다.&nbsp;<br>저자가 주인공을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 죽게 만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불륜을 제외하면 주인공은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나 불륜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그가 자진해서 해체시켜 버린 가족 관계가 더 문제였다. 그가 마지막에 완벽한 고독 속에서 죽어갔던 이유는 그가 윤리적으로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랑과 희생과 헌신이 아닌 비행과 실수로 점철된 그의 중년의 삶이 그의 외로운 노년을 만든 주범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주인공을 이렇게 만들면서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충동과 그 충동 이후의 무책임한 행동들로 인해 죄책감에 짓눌리게 되고 외로움에 처하게 된다는 것. 이에 반하여, 다른 하나는 이 주인공을 거울삼아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을 더욱더 사랑하며 살도록 애쓰라는 것. 하지만 누가 모를까. 이 둘을 다 알면서도, 다시 말해 후자를 염원하면서도 전자에 머물게 되는 게 인간이지 않을까.&nbsp;<br>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노년의 삶이 조금은 더 아름다울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을 때 더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여러 욕망들에 휘둘리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만이 아니라 해야만 할 것들을 충실하게 해 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모든 사람이 이 다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것이 필립 로스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br>#문학동네&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읽고: https://rtmodel.tistory.com/1148*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다시 읽고: https://rtmodel.tistory.com/221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72/26/cover150/s3626364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722670</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좋은 설교의 본보기 - [모든 이야기의 시작 - 신화에서 계시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85651</link><pubDate>Sat, 11 Jul 2026 11: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8565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139513&TPaperId=1738565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00/97/coveroff/k2821395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139513&TPaperId=1738565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모든 이야기의 시작 - 신화에서 계시로</a><br/>정우조 지음 / 지우 / 2026년 06월<br/></td></tr></table><br/>좋은 설교의 본보기<br>정우조 저, '모든 이야기의 시작, 신화에서 계시로'를 읽고<br>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내가 창세기 관련 서적들을 섭렵했던 주된 이유는 창조기사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창조과학, 문자주의,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 성경 해석이 불편했고, 나는 그것의 대안적 해석을 갈망했다. 이제는 창세기 1-2장에 소개되는 창조 순서와 방법이 내가 아는 과학 상식에 어긋나거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고 해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나의 신앙에는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은 반지성적인 입장을 취하겠다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초지성적인 선택이다. 지성적으로 충분히 따져보았고, 또 앞으로도 따져볼 의향이 있지만,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전제로 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신앙과 과학은 서로 다른 영역의 언어이며, 과학으로 답할 수 없는 신앙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지혜로운 분별을 하겠다는 뜻이다).&nbsp;<br>창조기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나 문자적으로 믿으려는 시도도 모두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든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다고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게 된다. 비록 일부 진영에서는 여전히 반지성적인 개인 및 집단이 야기하는 심각한 부작용 (크게는 신앙을 잃어버리기도)이 발생하고 있지만 말이다.&nbsp;<br>지금도 창조에 관한 여러 의문점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다양한 해석들을 낳고 있다.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는 신비로 남겨질 것 같다. 반지성적인 진영을 의지적으로 택하는,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소수의 무리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진영에 속하게 되어버린 다수의 신앙인들이 자기들의 해석만이 옳고 다른 해석들은 모두 틀렸다고 우기지만 않는다면, 이런 다양한 해석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를 더욱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br>창세기 1-11장, 그러니까 12장부터 등장하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본문을 신학에서는 원 역사라고 부른다. 창조기사가 등장하는 창세기 1-2장,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3장,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소개되는 4장,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보여주는 5장,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가 소개되는 6장, 홍수 심판과 노아가 지은 방주 안의 생명이 살아남는 7장, 노아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는 8장, 무지개 언약이 등장하는 9장, 노아의 후손들이 온 세상으로 확산되는 10장, 바벨탑 사건이 소개되는 11장까지, 성경을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한 이들마저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유명한 이야기들이 바로 이 책이 다루는 주요 본문이다.&nbsp;<br>저자인 정우조 목사가 바라보는 성경의 원 역사의 주인공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이 세상을 인간이 반복해서 죄에 이끌린 나머지 폭력과 살인을 동원한 반역을 행하며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심판의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은혜와 구원의 계획을 이어 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먼저 다시 한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또 감사할 수 있었다. 저자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고 느껴졌다.&nbsp;<br>이 책은 어려운 신학책이 아니다. '바람직한 설교의 본보기'라고 할까. 충분히 신학적 함의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충분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쓰여 있다. 회개라는 이름으로 성도의 죄책감을 자극하지도 않고, 은혜라는 이름으로 감정팔이에 머물지도 않으며,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남발하는, 의외로 많은 한국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준비 안 된 설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신학자들만의 놀이터에서 논의되는 논쟁적인 이야기들까지 가져와 소개하기도 하지만 결코 하나의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적절한 선을 유지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을 풀어주는 성경교사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nbsp;<br>며칠에 걸쳐 설교를 듣듯 천천히 읽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은 저자의 시선으로 다시 숙지할 수 있었고, 잊었거나 처음 듣는 내용들은 읽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여러 곳에 체크 표시를 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해석 하나만 소개하자면 '네피림'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nbsp;<br>네피림은 창세기 6장에 소개되는 신비하게까지 느껴지는 존재인데, 4절은 개역개정으로 이렇게 되어 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저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네피림은 고대의 신화적 존재라기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의 괴물 같다고, 지금도 존재하는 '세상의 지배계층'을 가리킬 수 있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셋의 후손들을 '신앙인'으로 치환한다면 네피림은 그 둘의 혼합이라고. 또한 이는 단순히 신자와 불신자 간의 결혼 문제에 비추어보는 정도의 주제가 아니라 경건한 신자를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게 될 때 일어나는 비극이라고,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가인의 자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매우 세속적이고 탐욕에 물든 이들이 있다고, 그들이 바로 현실 세계의 네피림이라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어쩌면 더 악하고 폭력적이며 음란한, 위선과 가식으로 자신을 점철한 존재들이라고.&nbsp;<br>네피림을 현재로 소환하는 저자의 해석을 읽으며 나는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고, 여러 번 읽으며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창세기 6장에 소개되는 네피림의 역사적 존재 여부를 파헤치거나 그들의 기원에 관련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정체를 밝히는 식으로의 접근이 아닌, 우리에게 쓰인 건 아니지만 우리를 위해 쓰였다는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의 본보기를 본 것 같아 마음에 감동이 되었다.&nbsp;<br>5-6절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 지면에 있는 모든 생명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저자의 네피림에 대한 해석 덕분에 이 구절이 내겐 더 큰 은혜로 다가왔다. 네피림으로 살고 있었을지 모르는 나를 돌아보게 했고,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오늘도 거듭나기를 소망했다. 이런 예기치 못한 경험은 좋은 설교의 힘일 것이다.&nbsp;<br>이 책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한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미리 읽어야 할 책은 없다. 성경과 함께 하루에 한두 꼭지씩 묵상하며 또 공부하며 읽어나가길 추천한다. 보다 깊고 풍성한 신앙으로 이끌어 줄 좋은 책이다.&nbsp;<br>#지우#김영웅의책과일상&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00/97/cover150/k2821395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009737</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과거와 현재 사이의 균열을 뚫고 - [나이트 트레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63261</link><pubDate>Mon, 29 Jun 2026 23: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632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5757&TPaperId=173632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51/99/coveroff/k71213575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5757&TPaperId=173632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이트 트레인</a><br/>문지혁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02월<br/></td></tr></table><br/>과거와 현재 사이의 균열을 뚫고<br>문지혁 저, ‘나이트 트레인‘을 읽고<br>“이게 뭔 호텔팩이고, 야간열차팩이지.”&nbsp;<br>빈으로 가는 야간열차 안, 일행 중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색안경 형이 내뱉은 이 불평 어린 한 마디가 이 소설의 외형을 잘 설명해 준다. 작품 속 주인공은 격일로 호텔이 아닌 야간열차 안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대학 시절 저렴 버전의 유럽 패키지여행을 회상한다. 소설 대부분은 그 여행 이야기다. 말하자면 액자식 구성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이유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화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기억과 망각의 고리를 통해 회상과 해석의 다리를 수시로 넘나들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은 해석이며, 사실과 해석 사이에 생긴 균열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한다. 특히 주인공의 과거 유럽 여행은 O라는 옛 여자친구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지우기 위해 출발했다는 점에서 첫사랑의 풋풋함을 이해하는 독자라면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그 균열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br>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외형은 유럽 여행이지만, 본질은 뭐랄까, ‘인생’이라고 나는 읽는다. 작품 속 주인공은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모르도르로 향하는 '반지의 제왕' 프로도처럼, O가 준 은반지를 버리기 위해 그 반지가 구매되었던 오스트리아 빈을 향한다. 마치 그곳에서만 반지가 파괴될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곳에 가야만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주인공은 그곳에 위치한 프라터 놀이공원의 대관람차를 반지를 버릴 구체적 장소로 정한다.&nbsp;<br>주인공을 마지막으로 태운 그날의 마지막 대관람차 안에서 주인공은 잘츠부르크에서 만났던 미국인 일행들의 사진 부탁을 들어주느라 정작 반지를 버리지 못한 채 다시 지상에 내려오고 만다. 유일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패배감으로 대관람차를 막 빠져나온 순간, 예상 밖에도 프라하까지 이동하던 야간열차에서 우연히 만났던 전수진과 재회하게 된다. 전수진은 주인공이 마치 돌고 도는 도르마무의 무한반복 속에서 허탈한 상태로 타자에 의해 강제로 빠져나오게 되었을 때 때마침 나타난 구원의 빛 같은 이미지로 등장한 듯했다.&nbsp;<br>그래서였는지 나는 내심 주인공의 유럽 여행이 O와의 정리를 넘어 전수진과의 새로운 시작이길 잠시 기대했던 것 같다. 거듭된 우연의 신비를 믿고 싶었던 탓이다. 전수진은 맥주를 함께 마시며 주인공의 자초지종을 다 들은 뒤 과거에 머무르지 말고 빠져나오라는 조언을 건네기도 하는데, 내 눈엔 그녀가 일종의 구원자 역할을 맡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인공 역시 전수진에게 마음이 있었고, 마지막 여행지인 파리의 에펠탑이 보이는 곳에서도 주인공 마음을 가득 채운 건 과거의 O가 아닌 현재의 전수진이었다. 그러나 전수진은 끝내 주인공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쓰고 나타나면 안 된다,라고 읽는다. E의 존재 때문이다). 대신 여행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주인공 옆에 있었던, 심지어 전수진을 본 것 같다고 말할 때 얼른 찾으러 가보라고 말했던, E와의 만남이 지속되는 계기가 된다. 알다시피 E는 현재 시점 주인공의 아내 은혜다.&nbsp;<br>작품 속 이야기의 심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을 둘러싼 세 여자의 서로 다른 의미가 중요해 보인다. 먼저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O는 과거, 전수진은 미래, 그리고 E는 현재다. 그리고 상징의 관점에서 보면, O는 후회와 여러 흔적들, 그래서 지우고 싶은 것들. 전수진은 이상, 그러나 발이 닿지 않는, 말하자면 붙잡을 수 없는 것들. 그리고 E는 일상과 행복, 항상 주위에 있으나 알아채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이다. 상처와 흔적을 지우고 과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나선 여행길에서 주인공은 탈출구 같은 방향을 보게 되지만, 그것은 주인공에게 맞지 않는 옷, 이루어질 수 없는 꿈, 잡을 수 없는 구름 같은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주인공은 자신의 여백을 채우고 있던 현재를 택하게 된다. 주인공의 실패한 듯한 유럽 여행이 결국 주인공의 성공적인 내적 성장 여정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O를 버리러 갔다가 E를 얻고 오는 여행으로.<br>때론 과거와의 단절이 필요하다. 과거에 사로잡힌 채 현재를 망가뜨리는 삶은 지옥일 수 있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를 구성하고 또 때론 구원하기도 한다. 우리의 정체성 역시 과거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과거의 일부를 도려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과거와의 성공적인 단절은 과거를 망각하는 것에 있지 않고 끌어안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의 이미지 (반지, 대관람차, 유럽 여행 순서, 옛 여자친구 이름 O)는 이러한 연속선상의 우리네 인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빈의 대관람차에서도, 니스의 해변에서도 결국 버리지 못한 채 가지고 있던 은반지 역시 우리의 현재가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과거를 도려낸 현재는 존재할 수 없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그러기에 치유의 유일한 방법은 단절이 아닌 화해다. 다시 말해 끌어안는 것이다. 모든 과정을 함께하고 이해해 주는 E의 존재는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구원이 된다. 알파벳 중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게 E라는 점에서 E는 특별히 빛나지 않지만 잔잔한 빛을 머금고 있는 우리의 일상,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원은 저 빛나고 높은 무대 위가 아닌 상대적으로 어두운 무대 아래에 실재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과거와의 화해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nbsp;<br>더불어 이 소설은 똑같아 보이는 원도 결코 똑같지 않다는 것을 함께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인생은 벗어날 수 없는 원일지도 모른다는 것. 한 원을 벗어나면 또 다른 원 안에 속하게 되는, 반복된 원의 탈출기와 정착기가 우리네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것. 원 밖의 인생은 다른 원 안의 인생일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여정 속에 우리가 알아채고 누려야 할 행복이 있다,라고 이 소설은 말해주는 게 아닐까. 비록 초기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실패감에 젖게 된다 하더라도, 성실히 그 길 위에 서 있으면 어쨌거나 구원의 서사가 드리워진다는 것. O를 삭제하기 위한 주인공의 실패한 여행이 E와의 행복한 미래를 안착시키는 성공적인 여정으로 재해석되듯,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도 의미를 지니기 마련이고, 종종 그것은 인생의 주축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예상치 못한 균열로부터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 그 의미는 실재하고 체험할 수 있는 행복의 실체라는 것.&nbsp;<br>문득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혹은 이미 끝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붙잡혀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정작 내 주위에 있는 소중한 의미들을 허투루 흘려보내거나 무감각한 상태로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내가 유일하게 살아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현재를 붙잡기 위해 나 역시 야간열차를 타야 할지도 모르겠다.&nbsp;<br>#현대문학&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문지혁 읽기1.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2. 고잉 홈: https://rtmodel.tistory.com/20463. 당신이 준 것: https://rtmodel.tistory.com/21124. 초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45. 중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96. 실전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927. 나이트 트레인: https://rtmodel.tistory.com/2204]]></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51/99/cover150/k71213575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519997</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깊은 강‘의 깊은 뜻을 헤아리다 - [깊은 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45726</link><pubDate>Sat, 20 Jun 2026 20: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4572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1609&TPaperId=173457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0/33/coveroff/893746160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1609&TPaperId=1734572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깊은 강</a><br/>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br/></td></tr></table><br/>'깊은 강'의 깊은 뜻을 헤아리다<br>엔도 슈샤쿠 저, ‘깊은 강‘을 다시 읽고<br>(0) 들어가며<br>재독의 유익 중 하나는 줄거리 파악에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세부사항은 기억이 안 나도 대략적인 흐름과 메시지를 이미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십분 활용하여 ‘깊은 강‘을 4년 만에 다시 읽었다. 덕분에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더불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와 잇닿아 있는 오쓰의 신앙, 즉 작가 엔도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변증 하려는 무언의 강박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초독 때와 달리 이번엔 좀 더 순수하게 문학적으로 이 작품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br>주요 등장인물은 다섯이다. 모두 저마다의 과거가 있다. 서로 다른 사연들을 가지고 그들은 지구상 유일한 장소, 인도 바라나시에 모이게 된다. 그리고 제각기 나름의 답을 얻게 된다. 설령 그것이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일종의 매듭 같은 걸 지을 수 있었다. 단순히 먼 이방 땅을 밟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상징하는 어떤 성스럽고 초월적인 의미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각 인물들의 서사와 그들이 얻은 답, 그리고 그 답을 선사한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의 의미에 대해 조금 끄적거려 볼까 한다.&nbsp;<br>(1) 이소베의 경우<br>첫 꼭지로 이소베를 위치시킨 건 엔도의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소베는 일본 남성의 전형적인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깊은 강'이 출간되기 전 엔도의 마지막 작품을 기다렸던 독자는 적지 않았을 테고, 그들 중 많은 일본 남성들은 이소베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말하자면 엔도는 일본 남성 원형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책을 시작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보편성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nbsp;<br>이 보편성이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소베의 아내가 병동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남긴 말에 대한 이소베의 반응과 그 이후의 여정에 공감을 얻기 위한 엔도의 수 읽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만약 이소베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면, 아무리 유언이라도 환생할 테니 꼭 자기를 찾아달라는 아내의 말 한마디 때문에 모든 걸 제쳐두고 확실치도 않은 편지 한 통에 의지하여 인도까지 가게 되는 한 남자의 무게를 독자들은 쉽게 놓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소베가 일본 남성의 원형적인 인물이었기에 그의 기이한 행동까지도 독자들이 기대감을 가지면서 끝까지 읽게 되지 않았나 싶다. 또한, 시대와 장소가 다른 독자인 나조차도 이소베의 심정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고, 심지어 바라나시의 허름한 골목에서 환생한 아내를 만나기를 내심 기대했던 걸 보면, 이소베가 상징하는 보편성은 비단 일본 남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아내와 일상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고 자책하며 과거 자신의 어리석음을 만회하고 싶어 하는 한 노년 남자의 애절한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nbsp;<br>"왜 엔도는 이소베에게 환생한 아내와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것이 이소베의 경우를 읽으며 물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엔도가 그리고자 했던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의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nbsp;<br>그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모든 인간, 즉 한 나라의 수상부터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 '수드라'에도 속하지 않는 카스트 밖의 존재들(아웃카스트)인 불가촉천민(몸에 닿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까지 모두 묵묵히 품는 장소로 그려진다. 또한 그곳은 죽은 자가 살아난다거나 환생한 사람을 만난다거나 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로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가 지극히 기적적인 상징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소베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죽은 아내가 환생했을지도 모를 한 소녀를 끝내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미쓰코와의 대화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 이소베는 아내가 이미 자기 안에 환생해 있다는 결론에 묵묵히 다다르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망각의 강에 떠내려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다는 건 곧 아내의 환생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 곧 환생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이소베에게 준 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것은 갠지스 강이 존재하지도 않을 어떤 관념적인 이상이나 신비로운 환상의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오감이 살아 움직이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은유이지 않나 싶다. 엔도가 바라보고 그리고 싶어 했던 '깊은 강'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br>(2) 기구치의 경우<br>젊었을 적 미얀마에 파병되어 태평양 전쟁을 치렀던 기구치. 한 전우의 헌신 덕에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게 전쟁은 총칼의 위협이 아닌 치열한 생존의 위협으로 기억된다. 미얀마의 기후와 풍토병, 그리고 먹을 것이 부재한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우의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기억은 잊히지 않고 아직도 그를 괴롭힌다. 기구치에게 인육을 건네며 죽어가는 그를 살렸던 쓰카다는 일상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내다가 어느 날 자신이 일부를 먹었던 전우의 가족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잖아도 전쟁 후 트라우마에 빠져 지내던 쓰카다를 붕괴시킨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결국 그는 병원에서 피를 토하며 죽게 된다.&nbsp;<br>기구치는 생명의 은인인 쓰카다에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주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청년 가스통을 만나게 되고 그가 바보스러울 정도로 헌신적으로 쓰카다를 포함한 여러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쓰카다는 죽기 전 가스통에게만은 말을 터놓았다. 자신이 전쟁 중 인육을 먹었다는 고백을 하자 가스통은 기겁하지도 정죄하지도 않은 채 안데스 산맥에서 발생했던 비행기 추락 사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던 한 사람이 자진해서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그래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며 희생했던 이야기였다. 덕분에 살아남아 구조된 이들이나 자신의 몸을 희생해 다른 사람들을 살렸던 자의 가족이나 모두 서로를 이해하며 인육을 먹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승화시킬 수 있었다. 쓰카다는 가스통의 이야기를 듣고 죄책감에서 해방받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nbsp;<br>가스통이 상징하는 건 지극히 낮고 추한 곳에 위치한 죄인에게까지 찾아오신 예수와 꼭 닮아 있다. 도스토옙스키 식으로 표현한다면 가스통은 유로지비일 수도 있겠다. 그 누구도 위로하지 못했고 술조차 몸을 상하게 할 뿐 도움이 되지 못했던 쓰카다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건 가스통이었다. 가스통에게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마치 고해성사하듯이, 솔직히 고백한 이후에 쓰카다는 구원을 얻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nbsp;<br>기구치는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목도했다. 그리고 인도 여행 중 가스통이 쓰카다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는 꿈을 꾼다. 기구치는 갠지스 강에서 비로소 가스통이 쓰카다에게 했던 행동의 의미를 다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이들을 품어 안는 갠지스 강은 가장 더러운 죄인마저 품는 자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친다.&nbsp;<br>(3) 누마다의 경우<br>죽을 수도 있었을 폐 질환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동화 작가 누마다. 그는 투병 중일 때 아내가 사준 구관조에게 유일하게 모든 솔직한 말을 털어놓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가 실패할 확률이 큰 수술에서도 살아남았을 때 그 구관조가 갑자기 죽었다. 누마다는 구관조가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누마다가 인도를 찾은 것도 야생에서만 구할 수 있는 구관조를 한 마리 사서 자연으로 풀어주기 위해서였다.&nbsp;<br>누마다의 이야기는 갠지스 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누마다가 해방을 맛본 곳은 갠지스 강이 아닌 인도의 정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를 놓고 생각해 보면, 삶과 죽음의 양극을 모두 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주고 정결하게 해 주는 갠지스 강의 상징적인 의미와 맞닿아 있다. 비록 자기를 대신해서 죽었던 구관조와 같지는 아니지만 누마다는 자신이 구입한 새를 방생함으로써 은혜로 입었던 삶을 돌려준다. 말하자면 은혜를 흘려보낸 것이다. 'Pay it back'이 아닌 'Pay it forward'를 실천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미와 중첩된다. 죽음에서 삶으로, 그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전달되는 은혜의 선순환. 갠지스 강이 갖는 또 다른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nbsp;<br>(4) 미쓰코와 오쓰의 경우<br>나름 스스로를 깨어 있다고 자처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던 미쓰코. 동시에 그녀는 스스로를 깨어 있다고 여기며 미쓰코와 함께 무리를 짓던 이들을 절대 동지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쓰코는 그 어느 영역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고, 분열되어 있었으며, 그래서인지 늘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미쓰코의 내면은 공허했고 그녀의 눈은 냉소로 가득 차 있었다. 공부만 하는 학생들,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학생들을 고리타분한 바보라 여기던 그녀는 어느 날 무리들의 소개로 오쓰를 유혹하기에 이른다.&nbsp;<br>오쓰는 스스로도 원만한 인간관계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집안의 내력을 따른 가톨릭 신자였고, 내세울 것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착한 심성을 가졌으나 나약한 사람이었다. 미쓰코의 육체적 유혹에 넘어갔고, 얼마 후 미쓰코로부터 버림받은 후 그는 신부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오쓰와 미쓰코가 다니던 대학은 오쓰가 가게 된 프랑스의 수도원 관할이었다).<br>다른 남자와는 달리 오쓰는 미쓰코의 마음에 어떤 묘한 인상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고, 잘 나가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한 이후 신혼여행을 프랑스로 가서도 미쓰코는 홀로 그곳에서 신부가 되기 위한 여정을 밟고 있는 오쓰를 만나러 간다. 오쓰는 여전했다. 여전히 숙맥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에서도 여전히 어떤 경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 경계는 신앙의 유무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었다.&nbsp; 지극히 서양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류'의 신앙관, 그리고 그것에 대립되는 범신론(이라 쓰고 범재신론이라 읽는다)적인 자신의 신앙관 사이에 난 경계였다. 오쓰는 둘을 통일시킬 수 없었고, 그래서 고뇌하고 있었다. &nbsp;<br>허무와 냉소로 가득했던 미쓰코에게 오쓰는 자신의 삶이 껍데기만 남은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미쓰코의 삶이 껍데기의 삶이었다면, 오쓰의 삶은 정반대의 알맹이만 남은 삶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쓰코와 오쓰는 마치 외면과 내면이 분리된 인간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둘은 서로가 전혀 다른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부재한 모습이라는 사실도 본능적으로 알지 않았을까 싶다.&nbsp;<br>프랑스에서 신부가 되지 못한 채 오쓰는 인도의 바라나시로 떠밀려 왔고, 그곳에서도 가톨릭 성당이 아닌 힌두교 소속의 공동체와 생활하며 불가촉천민들이 갠지스 강에서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었으며, 돈이 되는 일도 아니었고, 심지어 오쓰가 꿈꾸던 일도 아니었다. 오쓰는 자신을 받아주는 유일한 공동체에서 머물렀을 뿐이고, 그 시간 그 공간(지금, 여기)에서 예수가 했음직한 행동들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nbsp;<br>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와 그들의 짐을 지고 함께 먹고 마시며 고통을 공유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숭고한 삶을 살고 있는 오쓰의 모습으로부터 미쓰코는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다 가진 것 같았으나 공허와 냉소만이 남아 있는 미쓰코, 다 잃은 것 같으나 어떤 충만함 속에 살고 있는 듯한 오쓰. 소설이라는 극단적 설정이 가미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쓰코는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내밀한 충만함을 오쓰의 삶으로부터 처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오쓰의 삶은 말하자면 사랑의 실천이었다. 한 사람에 대한 연민, 희생, 헌신. 그것은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이었다. 그리고 오쓰의 삶은 스스로 자신은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미쓰코의 삶의 정확한 여집합이었다. 미쓰코는 자신에게 부재했던 유일한 알맹이, 즉 '실천적인 사랑'을 인도의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에 와서야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nbsp;<br>(5) 마무리하며<br>엔도가 이 작품 속에서 그려낸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은;(1) 이소베의 경우를 통해, 이상과 환상의 공간이 아닌 오감이 살아 있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장소였다.&nbsp;(2) 기구치의 경우를 통해, 모든 사람을 품어 안으며 가장 더럽고 추한 죄인마저 끌어안는 자비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nbsp;(3) 누마다의 경우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흘려보내며 생명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거룩한 장소였다.&nbsp;(4) 미쓰코와 오쓰의 경우를 통해,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와 그들을 섬기는 실천적인 사랑을 행하는 장소였다.&nbsp;<br>그리고 이 작품을 두 번 읽은 나는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이 인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거하는 모든 현장으로 스며들고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엔도의 '깊은 강'에 대한 깊은 뜻을 이제야 조금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nbsp;<br>#민음사&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엔도 슈사쿠 읽기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6. 사해 부근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7707. 내가 버린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2064<br>* 엔도 슈사쿠 다시 읽기1.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2200<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0/33/cover150/893746160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03331</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문지방 실전 행복론 - [실전 한국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18909</link><pubDate>Fri, 05 Jun 2026 19: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1890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77432&TPaperId=1731890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77/54/coveroff/893747743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77432&TPaperId=1731890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실전 한국어</a><br/>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문지방&nbsp;실전&nbsp;행복론<br>
<br>
문지혁&nbsp;저,&nbsp;'실전&nbsp;한국어'를&nbsp;읽고<br>
<br>
'중급&nbsp;한국어'에&nbsp;이어&nbsp;읽으려고&nbsp;했던&nbsp;'나이트&nbsp;트레인'보다&nbsp;조금&nbsp;더&nbsp;늦게&nbsp;출간된&nbsp;'실전&nbsp;한국어'에&nbsp;손이&nbsp;먼저&nbsp;간&nbsp;이유가&nbsp;뭘까&nbsp;궁금해하며&nbsp;첫&nbsp;페이지를&nbsp;열었다.&nbsp;나도&nbsp;모르게&nbsp;빠져서&nbsp;계속&nbsp;읽게&nbsp;되었다.&nbsp;문지혁&nbsp;작가의&nbsp;문체와&nbsp;'초급&nbsp;한국어'부터&nbsp;이어온&nbsp;한국어&nbsp;시리즈가&nbsp;가지고&nbsp;있는&nbsp;고유한&nbsp;매력&nbsp;때문일&nbsp;것이다.&nbsp;<br>
<br>
충분히&nbsp;실력은&nbsp;갖추고&nbsp;있지만&nbsp;어떤&nbsp;환경이&nbsp;잘&nbsp;맞지&nbsp;않아&nbsp;제대로&nbsp;가르치는&nbsp;자리에도&nbsp;서지&nbsp;못하고&nbsp;등단도&nbsp;하지&nbsp;못한&nbsp;채&nbsp;여전히&nbsp;경계(문지방)에서&nbsp;읽고&nbsp;쓰고&nbsp;가르치는&nbsp;일에&nbsp;진심으로&nbsp;살아가는&nbsp;작품&nbsp;속&nbsp;문지혁&nbsp;작가&nbsp;(현실&nbsp;속&nbsp;문지혁&nbsp;작가는&nbsp;다름)의&nbsp;이야기는&nbsp;뭐랄까&nbsp;어딘가&nbsp;측은지심을&nbsp;유발하면서도&nbsp;맥락이&nbsp;다르지만&nbsp;내&nbsp;삶과&nbsp;겹치는&nbsp;부분이&nbsp;많았다.&nbsp;한&nbsp;작가의&nbsp;작품을&nbsp;연이어&nbsp;읽게&nbsp;되는&nbsp;데에는&nbsp;어떤&nbsp;설명하지&nbsp;못하는&nbsp;이유가&nbsp;있게&nbsp;마련이다.&nbsp;어쩌면&nbsp;나는&nbsp;여러&nbsp;평행우주&nbsp;속에서&nbsp;이&nbsp;작품&nbsp;속&nbsp;문지혁&nbsp;작가일지도&nbsp;모른다는&nbsp;생각을&nbsp;했다.&nbsp;<br>
<br>
이&nbsp;책은&nbsp;결코&nbsp;실패한&nbsp;지식인의&nbsp;이야기가&nbsp;아니다.&nbsp;여전히&nbsp;준비&nbsp;중인,&nbsp;어쩌면&nbsp;그&nbsp;준비가&nbsp;일생일지도&nbsp;모르는&nbsp;한&nbsp;사람의&nbsp;인생&nbsp;드라마다,라고&nbsp;나는&nbsp;읽는다.&nbsp;그리고&nbsp;깊은&nbsp;정서적&nbsp;공감을&nbsp;느끼며&nbsp;초급,&nbsp;중급,&nbsp;실전에&nbsp;이르는&nbsp;이&nbsp;트릴로지를&nbsp;읽어낸&nbsp;것도&nbsp;아마&nbsp;나&nbsp;역시&nbsp;그&nbsp;인생의&nbsp;여러&nbsp;주인공&nbsp;중&nbsp;하나라는&nbsp;생각&nbsp;때문일&nbsp;것이다.&nbsp;미적대고&nbsp;정체된&nbsp;듯한&nbsp;기분,&nbsp;오랜&nbsp;견딤의&nbsp;순간들,&nbsp;원하는&nbsp;것들은&nbsp;오지&nbsp;않고&nbsp;원치&nbsp;않는&nbsp;것들만&nbsp;연이어&nbsp;발생하는&nbsp;일상들,&nbsp;그러나&nbsp;그&nbsp;가운데&nbsp;보석&nbsp;같이&nbsp;찬란하게&nbsp;빛나는&nbsp;행복이&nbsp;있다는&nbsp;것을&nbsp;이&nbsp;작품은&nbsp;궁극적으로&nbsp;말하고&nbsp;싶은&nbsp;게&nbsp;아닐까.&nbsp;그리고&nbsp;이&nbsp;메시지를&nbsp;위해&nbsp;꼭&nbsp;필요했던&nbsp;부분이&nbsp;나는&nbsp;가족&nbsp;이야기라고&nbsp;해석했다.&nbsp;<br>
<br>
'초급&nbsp;한국어'에서&nbsp;화자는&nbsp;싱글이었다.&nbsp;'중급&nbsp;한국어'에서는&nbsp;한&nbsp;여자의&nbsp;남편이자&nbsp;한&nbsp;아이의&nbsp;아빠였다.&nbsp;이번&nbsp;'실전&nbsp;한국어'에서는&nbsp;두&nbsp;아이의&nbsp;아빠로&nbsp;등장한다.&nbsp;이&nbsp;시리즈를&nbsp;단순한&nbsp;오토&nbsp;픽션이라고&nbsp;치부하는&nbsp;독자들은&nbsp;이러한&nbsp;화자의&nbsp;가족&nbsp;이야기가&nbsp;흔해&nbsp;빠진&nbsp;것으로&nbsp;여겨질지&nbsp;모른다.&nbsp;하지만&nbsp;내게는&nbsp;'정상'적인,&nbsp;혹은&nbsp;'평범한',&nbsp;혹은&nbsp;'평균'적인&nbsp;인간,&nbsp;즉&nbsp;보편성을&nbsp;띠어&nbsp;그&nbsp;어떤&nbsp;독자라도&nbsp;자신만의&nbsp;편향된&nbsp;안경만&nbsp;벗어놓는다면&nbsp;작품&nbsp;속&nbsp;화자의&nbsp;생각과&nbsp;감정에&nbsp;충분히&nbsp;공감할&nbsp;수&nbsp;있는&nbsp;소재이자,&nbsp;한국어&nbsp;시리즈에서&nbsp;절대&nbsp;빠지면&nbsp;안&nbsp;되는&nbsp;중심소재로&nbsp;보였다.&nbsp;한국어&nbsp;시리즈가&nbsp;말하고자&nbsp;하는&nbsp;건&nbsp;한국어&nbsp;수업이&nbsp;아니다.&nbsp;어쩌면&nbsp;행복론이다.&nbsp;이&nbsp;시리즈가&nbsp;향하는&nbsp;건&nbsp;행복으로&nbsp;해석할&nbsp;수&nbsp;있다고&nbsp;본다.&nbsp;일상&nbsp;속&nbsp;소소한&nbsp;행복,&nbsp;소소하지만&nbsp;확실한&nbsp;행복,&nbsp;소확행.&nbsp;메시지는&nbsp;진부하게&nbsp;느껴질&nbsp;수&nbsp;있지만,&nbsp;그것에&nbsp;다가가는&nbsp;방법은&nbsp;지극히&nbsp;인간적이고&nbsp;소시민적이다.&nbsp;그래서&nbsp;이&nbsp;책이&nbsp;내게는&nbsp;실전&nbsp;한국어라기보다는&nbsp;실전&nbsp;행복론이다.&nbsp;경계(문지방)에서&nbsp;우리가&nbsp;무심코&nbsp;흘려보내는&nbsp;소중한&nbsp;것들을&nbsp;포착하는&nbsp;작품이다.<br>
<br>
놀라운&nbsp;건&nbsp;초급,&nbsp;중급에서도&nbsp;드문드문&nbsp;나타났지만&nbsp;자조적인&nbsp;뉘앙스가&nbsp;상대적으로&nbsp;강해서&nbsp;수면&nbsp;위로&nbsp;잘&nbsp;드러나지&nbsp;않았는데,&nbsp;이번&nbsp;실전에서&nbsp;제대로&nbsp;효과를&nbsp;발휘된&nbsp;요소가&nbsp;있다는&nbsp;점이다.&nbsp;바로&nbsp;유머다.&nbsp;이번&nbsp;작품을&nbsp;읽으면서&nbsp;열&nbsp;번&nbsp;가까이&nbsp;빵&nbsp;터져서&nbsp;혼자&nbsp;낄낄&nbsp;대며&nbsp;웃었다.&nbsp;사람은&nbsp;자상한&nbsp;것&nbsp;같으나&nbsp;결코&nbsp;어린&nbsp;자녀들에게는&nbsp;그&nbsp;모습을&nbsp;항상&nbsp;유지할&nbsp;수&nbsp;없는&nbsp;사십&nbsp;대&nbsp;아빠의&nbsp;전형적인&nbsp;모습도&nbsp;공감&nbsp;백배였지만,&nbsp;딸과&nbsp;나누는&nbsp;대화에서,&nbsp;딸의&nbsp;행동에&nbsp;반응하는&nbsp;아빠의&nbsp;모습에서&nbsp;나는&nbsp;뭉클한&nbsp;감동을&nbsp;느끼기도&nbsp;하면서,&nbsp;동시에&nbsp;웃겨서&nbsp;배꼽&nbsp;빠지는&nbsp;줄&nbsp;알았다.&nbsp;이건&nbsp;다소&nbsp;내가&nbsp;문지혁&nbsp;작가의&nbsp;글쓰기&nbsp;스타일에&nbsp;익숙해졌고&nbsp;그것을&nbsp;좋아하게&nbsp;되어버렸기&nbsp;때문일지도&nbsp;모르겠다는&nbsp;생각도&nbsp;하지만,&nbsp;이&nbsp;작품을&nbsp;천천히&nbsp;맨눈으로&nbsp;읽는&nbsp;사십&nbsp;대&nbsp;아빠&nbsp;독자라면&nbsp;누구라도&nbsp;공감할&nbsp;수&nbsp;있으리라&nbsp;생각한다.&nbsp;아무튼&nbsp;실전에서&nbsp;유머는&nbsp;대성공이다.&nbsp;나는&nbsp;역시&nbsp;실전&nbsp;스타일인가&nbsp;보다.&nbsp;ㅋㅋㅋ&nbsp;초급,&nbsp;중급,&nbsp;실전,&nbsp;그중에&nbsp;제일은&nbsp;실전이라.<br>
<br>
더&nbsp;많은&nbsp;얘기를&nbsp;하고&nbsp;싶으나&nbsp;스포가&nbsp;될까&nbsp;봐&nbsp;자제하기로&nbsp;한다.&nbsp;이&nbsp;글을&nbsp;읽는&nbsp;독자들은&nbsp;꼭&nbsp;문지혁&nbsp;작가의&nbsp;한국어&nbsp;시리즈를&nbsp;섭렵하면&nbsp;좋겠다.&nbsp;절대&nbsp;후회하지&nbsp;않을&nbsp;것이다.&nbsp;조건이&nbsp;있다.&nbsp;반드시&nbsp;차례대로&nbsp;읽을&nbsp;것.&nbsp;초급,&nbsp;중급,&nbsp;실전&nbsp;순으로.&nbsp;<br>
<br>
#민음사<br>
#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br>
*&nbsp;문지혁&nbsp;읽기<br>
1.&nbsp;소설&nbsp;쓰고&nbsp;앉아&nbsp;있네:&nbsp;https://rtmodel.tistory.com/2031<br>
2.&nbsp;고잉&nbsp;홈:&nbsp;https://rtmodel.tistory.com/2046<br>
3.&nbsp;당신이&nbsp;준&nbsp;것:&nbsp;https://rtmodel.tistory.com/2112<br>
4.&nbsp;초급&nbsp;한국어:&nbsp;https://rtmodel.tistory.com/2134<br>
5.&nbsp;중급&nbsp;한국어:&nbsp;https://rtmodel.tistory.com/2139<br>
6.&nbsp;실전&nbsp;한국어:&nbsp;https://rtmodel.tistory.com/219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77/54/cover150/893747743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775413</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