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Youngwoong Kim님의 서재 (Youngwoong Kim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08 Jul 2026 11:31:44 +0900</lastBuildDate><image><title>Youngwoong Kim</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Youngwoong Kim</description></image><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과거와 현재 사이의 균열을 뚫고 - [나이트 트레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63261</link><pubDate>Mon, 29 Jun 2026 23: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632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5757&TPaperId=173632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51/99/coveroff/k71213575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5757&TPaperId=173632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이트 트레인</a><br/>문지혁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02월<br/></td></tr></table><br/>과거와 현재 사이의 균열을 뚫고<br>문지혁 저, ‘나이트 트레인‘을 읽고<br>“이게 뭔 호텔팩이고, 야간열차팩이지.”&nbsp;<br>빈으로 가는 야간열차 안, 일행 중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색안경 형이 내뱉은 이 불평 어린 한 마디가 이 소설의 외형을 잘 설명해 준다. 작품 속 주인공은 격일로 호텔이 아닌 야간열차 안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대학 시절 저렴 버전의 유럽 패키지여행을 회상한다. 소설 대부분은 그 여행 이야기다. 말하자면 액자식 구성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이유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화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기억과 망각의 고리를 통해 회상과 해석의 다리를 수시로 넘나들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은 해석이며, 사실과 해석 사이에 생긴 균열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한다. 특히 주인공의 과거 유럽 여행은 O라는 옛 여자친구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지우기 위해 출발했다는 점에서 첫사랑의 풋풋함을 이해하는 독자라면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그 균열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br>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외형은 유럽 여행이지만, 본질은 뭐랄까, ‘인생’이라고 나는 읽는다. 작품 속 주인공은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모르도르로 향하는 '반지의 제왕' 프로도처럼, O가 준 은반지를 버리기 위해 그 반지가 구매되었던 오스트리아 빈을 향한다. 마치 그곳에서만 반지가 파괴될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곳에 가야만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주인공은 그곳에 위치한 프라터 놀이공원의 대관람차를 반지를 버릴 구체적 장소로 정한다.&nbsp;<br>주인공을 마지막으로 태운 그날의 마지막 대관람차 안에서 주인공은 잘츠부르크에서 만났던 미국인 일행들의 사진 부탁을 들어주느라 정작 반지를 버리지 못한 채 다시 지상에 내려오고 만다. 유일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패배감으로 대관람차를 막 빠져나온 순간, 예상 밖에도 프라하까지 이동하던 야간열차에서 우연히 만났던 전수진과 재회하게 된다. 전수진은 주인공이 마치 돌고 도는 도르마무의 무한반복 속에서 허탈한 상태로 타자에 의해 강제로 빠져나오게 되었을 때 때마침 나타난 구원의 빛 같은 이미지로 등장한 듯했다.&nbsp;<br>그래서였는지 나는 내심 주인공의 유럽 여행이 O와의 정리를 넘어 전수진과의 새로운 시작이길 잠시 기대했던 것 같다. 거듭된 우연의 신비를 믿고 싶었던 탓이다. 전수진은 맥주를 함께 마시며 주인공의 자초지종을 다 들은 뒤 과거에 머무르지 말고 빠져나오라는 조언을 건네기도 하는데, 내 눈엔 그녀가 일종의 구원자 역할을 맡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인공 역시 전수진에게 마음이 있었고, 마지막 여행지인 파리의 에펠탑이 보이는 곳에서도 주인공 마음을 가득 채운 건 과거의 O가 아닌 현재의 전수진이었다. 그러나 전수진은 끝내 주인공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쓰고 나타나면 안 된다,라고 읽는다. E의 존재 때문이다). 대신 여행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주인공 옆에 있었던, 심지어 전수진을 본 것 같다고 말할 때 얼른 찾으러 가보라고 말했던, E와의 만남이 지속되는 계기가 된다. 알다시피 E는 현재 시점 주인공의 아내 은혜다.&nbsp;<br>작품 속 이야기의 심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을 둘러싼 세 여자의 서로 다른 의미가 중요해 보인다. 먼저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O는 과거, 전수진은 미래, 그리고 E는 현재다. 그리고 상징의 관점에서 보면, O는 후회와 여러 흔적들, 그래서 지우고 싶은 것들. 전수진은 이상, 그러나 발이 닿지 않는, 말하자면 붙잡을 수 없는 것들. 그리고 E는 일상과 행복, 항상 주위에 있으나 알아채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이다. 상처와 흔적을 지우고 과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나선 여행길에서 주인공은 탈출구 같은 방향을 보게 되지만, 그것은 주인공에게 맞지 않는 옷, 이루어질 수 없는 꿈, 잡을 수 없는 구름 같은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주인공은 자신의 여백을 채우고 있던 현재를 택하게 된다. 주인공의 실패한 듯한 유럽 여행이 결국 주인공의 성공적인 내적 성장 여정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O를 버리러 갔다가 E를 얻고 오는 여행으로.<br>때론 과거와의 단절이 필요하다. 과거에 사로잡힌 채 현재를 망가뜨리는 삶은 지옥일 수 있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를 구성하고 또 때론 구원하기도 한다. 우리의 정체성 역시 과거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과거의 일부를 도려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과거와의 성공적인 단절은 과거를 망각하는 것에 있지 않고 끌어안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의 이미지 (반지, 대관람차, 유럽 여행 순서, 옛 여자친구 이름 O)는 이러한 연속선상의 우리네 인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빈의 대관람차에서도, 니스의 해변에서도 결국 버리지 못한 채 가지고 있던 은반지 역시 우리의 현재가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과거를 도려낸 현재는 존재할 수 없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그러기에 치유의 유일한 방법은 단절이 아닌 화해다. 다시 말해 끌어안는 것이다. 모든 과정을 함께하고 이해해 주는 E의 존재는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구원이 된다. 알파벳 중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게 E라는 점에서 E는 특별히 빛나지 않지만 잔잔한 빛을 머금고 있는 우리의 일상,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원은 저 빛나고 높은 무대 위가 아닌 상대적으로 어두운 무대 아래에 실재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과거와의 화해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nbsp;<br>더불어 이 소설은 똑같아 보이는 원도 결코 똑같지 않다는 것을 함께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인생은 벗어날 수 없는 원일지도 모른다는 것. 한 원을 벗어나면 또 다른 원 안에 속하게 되는, 반복된 원의 탈출기와 정착기가 우리네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것. 원 밖의 인생은 다른 원 안의 인생일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여정 속에 우리가 알아채고 누려야 할 행복이 있다,라고 이 소설은 말해주는 게 아닐까. 비록 초기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실패감에 젖게 된다 하더라도, 성실히 그 길 위에 서 있으면 어쨌거나 구원의 서사가 드리워진다는 것. O를 삭제하기 위한 주인공의 실패한 여행이 E와의 행복한 미래를 안착시키는 성공적인 여정으로 재해석되듯,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도 의미를 지니기 마련이고, 종종 그것은 인생의 주축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예상치 못한 균열로부터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 그 의미는 실재하고 체험할 수 있는 행복의 실체라는 것.&nbsp;<br>문득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혹은 이미 끝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붙잡혀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정작 내 주위에 있는 소중한 의미들을 허투루 흘려보내거나 무감각한 상태로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내가 유일하게 살아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현재를 붙잡기 위해 나 역시 야간열차를 타야 할지도 모르겠다.&nbsp;<br>#현대문학&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문지혁 읽기1.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2. 고잉 홈: https://rtmodel.tistory.com/20463. 당신이 준 것: https://rtmodel.tistory.com/21124. 초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45. 중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96. 실전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927. 나이트 트레인: https://rtmodel.tistory.com/2204]]></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51/99/cover150/k71213575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519997</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깊은 강‘의 깊은 뜻을 헤아리다 - [깊은 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45726</link><pubDate>Sat, 20 Jun 2026 20: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4572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1609&TPaperId=173457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0/33/coveroff/893746160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1609&TPaperId=1734572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깊은 강</a><br/>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br/></td></tr></table><br/>'깊은 강'의 깊은 뜻을 헤아리다<br>엔도 슈샤쿠 저, ‘깊은 강‘을 다시 읽고<br>(0) 들어가며<br>재독의 유익 중 하나는 줄거리 파악에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세부사항은 기억이 안 나도 대략적인 흐름과 메시지를 이미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십분 활용하여 ‘깊은 강‘을 4년 만에 다시 읽었다. 덕분에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더불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와 잇닿아 있는 오쓰의 신앙, 즉 작가 엔도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변증 하려는 무언의 강박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초독 때와 달리 이번엔 좀 더 순수하게 문학적으로 이 작품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br>주요 등장인물은 다섯이다. 모두 저마다의 과거가 있다. 서로 다른 사연들을 가지고 그들은 지구상 유일한 장소, 인도 바라나시에 모이게 된다. 그리고 제각기 나름의 답을 얻게 된다. 설령 그것이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일종의 매듭 같은 걸 지을 수 있었다. 단순히 먼 이방 땅을 밟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상징하는 어떤 성스럽고 초월적인 의미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각 인물들의 서사와 그들이 얻은 답, 그리고 그 답을 선사한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의 의미에 대해 조금 끄적거려 볼까 한다.&nbsp;<br>(1) 이소베의 경우<br>첫 꼭지로 이소베를 위치시킨 건 엔도의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소베는 일본 남성의 전형적인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깊은 강'이 출간되기 전 엔도의 마지막 작품을 기다렸던 독자는 적지 않았을 테고, 그들 중 많은 일본 남성들은 이소베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말하자면 엔도는 일본 남성 원형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책을 시작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보편성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nbsp;<br>이 보편성이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소베의 아내가 병동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남긴 말에 대한 이소베의 반응과 그 이후의 여정에 공감을 얻기 위한 엔도의 수 읽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만약 이소베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면, 아무리 유언이라도 환생할 테니 꼭 자기를 찾아달라는 아내의 말 한마디 때문에 모든 걸 제쳐두고 확실치도 않은 편지 한 통에 의지하여 인도까지 가게 되는 한 남자의 무게를 독자들은 쉽게 놓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소베가 일본 남성의 원형적인 인물이었기에 그의 기이한 행동까지도 독자들이 기대감을 가지면서 끝까지 읽게 되지 않았나 싶다. 또한, 시대와 장소가 다른 독자인 나조차도 이소베의 심정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고, 심지어 바라나시의 허름한 골목에서 환생한 아내를 만나기를 내심 기대했던 걸 보면, 이소베가 상징하는 보편성은 비단 일본 남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아내와 일상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고 자책하며 과거 자신의 어리석음을 만회하고 싶어 하는 한 노년 남자의 애절한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nbsp;<br>"왜 엔도는 이소베에게 환생한 아내와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것이 이소베의 경우를 읽으며 물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엔도가 그리고자 했던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의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nbsp;<br>그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모든 인간, 즉 한 나라의 수상부터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 '수드라'에도 속하지 않는 카스트 밖의 존재들(아웃카스트)인 불가촉천민(몸에 닿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까지 모두 묵묵히 품는 장소로 그려진다. 또한 그곳은 죽은 자가 살아난다거나 환생한 사람을 만난다거나 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로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가 지극히 기적적인 상징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소베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죽은 아내가 환생했을지도 모를 한 소녀를 끝내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미쓰코와의 대화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 이소베는 아내가 이미 자기 안에 환생해 있다는 결론에 묵묵히 다다르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망각의 강에 떠내려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다는 건 곧 아내의 환생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 곧 환생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이소베에게 준 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것은 갠지스 강이 존재하지도 않을 어떤 관념적인 이상이나 신비로운 환상의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오감이 살아 움직이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은유이지 않나 싶다. 엔도가 바라보고 그리고 싶어 했던 '깊은 강'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br>(2) 기구치의 경우<br>젊었을 적 미얀마에 파병되어 태평양 전쟁을 치렀던 기구치. 한 전우의 헌신 덕에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게 전쟁은 총칼의 위협이 아닌 치열한 생존의 위협으로 기억된다. 미얀마의 기후와 풍토병, 그리고 먹을 것이 부재한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우의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기억은 잊히지 않고 아직도 그를 괴롭힌다. 기구치에게 인육을 건네며 죽어가는 그를 살렸던 쓰카다는 일상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내다가 어느 날 자신이 일부를 먹었던 전우의 가족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잖아도 전쟁 후 트라우마에 빠져 지내던 쓰카다를 붕괴시킨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결국 그는 병원에서 피를 토하며 죽게 된다.&nbsp;<br>기구치는 생명의 은인인 쓰카다에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주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청년 가스통을 만나게 되고 그가 바보스러울 정도로 헌신적으로 쓰카다를 포함한 여러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쓰카다는 죽기 전 가스통에게만은 말을 터놓았다. 자신이 전쟁 중 인육을 먹었다는 고백을 하자 가스통은 기겁하지도 정죄하지도 않은 채 안데스 산맥에서 발생했던 비행기 추락 사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던 한 사람이 자진해서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그래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며 희생했던 이야기였다. 덕분에 살아남아 구조된 이들이나 자신의 몸을 희생해 다른 사람들을 살렸던 자의 가족이나 모두 서로를 이해하며 인육을 먹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승화시킬 수 있었다. 쓰카다는 가스통의 이야기를 듣고 죄책감에서 해방받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nbsp;<br>가스통이 상징하는 건 지극히 낮고 추한 곳에 위치한 죄인에게까지 찾아오신 예수와 꼭 닮아 있다. 도스토옙스키 식으로 표현한다면 가스통은 유로지비일 수도 있겠다. 그 누구도 위로하지 못했고 술조차 몸을 상하게 할 뿐 도움이 되지 못했던 쓰카다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건 가스통이었다. 가스통에게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마치 고해성사하듯이, 솔직히 고백한 이후에 쓰카다는 구원을 얻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nbsp;<br>기구치는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목도했다. 그리고 인도 여행 중 가스통이 쓰카다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는 꿈을 꾼다. 기구치는 갠지스 강에서 비로소 가스통이 쓰카다에게 했던 행동의 의미를 다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이들을 품어 안는 갠지스 강은 가장 더러운 죄인마저 품는 자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친다.&nbsp;<br>(3) 누마다의 경우<br>죽을 수도 있었을 폐 질환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동화 작가 누마다. 그는 투병 중일 때 아내가 사준 구관조에게 유일하게 모든 솔직한 말을 털어놓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가 실패할 확률이 큰 수술에서도 살아남았을 때 그 구관조가 갑자기 죽었다. 누마다는 구관조가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누마다가 인도를 찾은 것도 야생에서만 구할 수 있는 구관조를 한 마리 사서 자연으로 풀어주기 위해서였다.&nbsp;<br>누마다의 이야기는 갠지스 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누마다가 해방을 맛본 곳은 갠지스 강이 아닌 인도의 정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를 놓고 생각해 보면, 삶과 죽음의 양극을 모두 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주고 정결하게 해 주는 갠지스 강의 상징적인 의미와 맞닿아 있다. 비록 자기를 대신해서 죽었던 구관조와 같지는 아니지만 누마다는 자신이 구입한 새를 방생함으로써 은혜로 입었던 삶을 돌려준다. 말하자면 은혜를 흘려보낸 것이다. 'Pay it back'이 아닌 'Pay it forward'를 실천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미와 중첩된다. 죽음에서 삶으로, 그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전달되는 은혜의 선순환. 갠지스 강이 갖는 또 다른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nbsp;<br>(4) 미쓰코와 오쓰의 경우<br>나름 스스로를 깨어 있다고 자처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던 미쓰코. 동시에 그녀는 스스로를 깨어 있다고 여기며 미쓰코와 함께 무리를 짓던 이들을 절대 동지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쓰코는 그 어느 영역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고, 분열되어 있었으며, 그래서인지 늘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미쓰코의 내면은 공허했고 그녀의 눈은 냉소로 가득 차 있었다. 공부만 하는 학생들,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학생들을 고리타분한 바보라 여기던 그녀는 어느 날 무리들의 소개로 오쓰를 유혹하기에 이른다.&nbsp;<br>오쓰는 스스로도 원만한 인간관계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집안의 내력을 따른 가톨릭 신자였고, 내세울 것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착한 심성을 가졌으나 나약한 사람이었다. 미쓰코의 육체적 유혹에 넘어갔고, 얼마 후 미쓰코로부터 버림받은 후 그는 신부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오쓰와 미쓰코가 다니던 대학은 오쓰가 가게 된 프랑스의 수도원 관할이었다).<br>다른 남자와는 달리 오쓰는 미쓰코의 마음에 어떤 묘한 인상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고, 잘 나가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한 이후 신혼여행을 프랑스로 가서도 미쓰코는 홀로 그곳에서 신부가 되기 위한 여정을 밟고 있는 오쓰를 만나러 간다. 오쓰는 여전했다. 여전히 숙맥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에서도 여전히 어떤 경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 경계는 신앙의 유무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었다.&nbsp; 지극히 서양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류'의 신앙관, 그리고 그것에 대립되는 범신론(이라 쓰고 범재신론이라 읽는다)적인 자신의 신앙관 사이에 난 경계였다. 오쓰는 둘을 통일시킬 수 없었고, 그래서 고뇌하고 있었다. &nbsp;<br>허무와 냉소로 가득했던 미쓰코에게 오쓰는 자신의 삶이 껍데기만 남은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미쓰코의 삶이 껍데기의 삶이었다면, 오쓰의 삶은 정반대의 알맹이만 남은 삶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쓰코와 오쓰는 마치 외면과 내면이 분리된 인간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둘은 서로가 전혀 다른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부재한 모습이라는 사실도 본능적으로 알지 않았을까 싶다.&nbsp;<br>프랑스에서 신부가 되지 못한 채 오쓰는 인도의 바라나시로 떠밀려 왔고, 그곳에서도 가톨릭 성당이 아닌 힌두교 소속의 공동체와 생활하며 불가촉천민들이 갠지스 강에서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었으며, 돈이 되는 일도 아니었고, 심지어 오쓰가 꿈꾸던 일도 아니었다. 오쓰는 자신을 받아주는 유일한 공동체에서 머물렀을 뿐이고, 그 시간 그 공간(지금, 여기)에서 예수가 했음직한 행동들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nbsp;<br>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와 그들의 짐을 지고 함께 먹고 마시며 고통을 공유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숭고한 삶을 살고 있는 오쓰의 모습으로부터 미쓰코는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다 가진 것 같았으나 공허와 냉소만이 남아 있는 미쓰코, 다 잃은 것 같으나 어떤 충만함 속에 살고 있는 듯한 오쓰. 소설이라는 극단적 설정이 가미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쓰코는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내밀한 충만함을 오쓰의 삶으로부터 처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오쓰의 삶은 말하자면 사랑의 실천이었다. 한 사람에 대한 연민, 희생, 헌신. 그것은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이었다. 그리고 오쓰의 삶은 스스로 자신은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미쓰코의 삶의 정확한 여집합이었다. 미쓰코는 자신에게 부재했던 유일한 알맹이, 즉 '실천적인 사랑'을 인도의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에 와서야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nbsp;<br>(5) 마무리하며<br>엔도가 이 작품 속에서 그려낸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은;(1) 이소베의 경우를 통해, 이상과 환상의 공간이 아닌 오감이 살아 있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장소였다.&nbsp;(2) 기구치의 경우를 통해, 모든 사람을 품어 안으며 가장 더럽고 추한 죄인마저 끌어안는 자비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nbsp;(3) 누마다의 경우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흘려보내며 생명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거룩한 장소였다.&nbsp;(4) 미쓰코와 오쓰의 경우를 통해,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와 그들을 섬기는 실천적인 사랑을 행하는 장소였다.&nbsp;<br>그리고 이 작품을 두 번 읽은 나는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이 인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거하는 모든 현장으로 스며들고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엔도의 '깊은 강'에 대한 깊은 뜻을 이제야 조금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nbsp;<br>#민음사&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엔도 슈사쿠 읽기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6. 사해 부근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7707. 내가 버린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2064<br>* 엔도 슈사쿠 다시 읽기1.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2200<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0/33/cover150/893746160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03331</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문지방 실전 행복론 - [실전 한국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18909</link><pubDate>Fri, 05 Jun 2026 19: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31890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77432&TPaperId=1731890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77/54/coveroff/893747743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77432&TPaperId=1731890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실전 한국어</a><br/>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문지방&nbsp;실전&nbsp;행복론<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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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nbsp;저,&nbsp;'실전&nbsp;한국어'를&nbsp;읽고<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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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nbsp;한국어'에&nbsp;이어&nbsp;읽으려고&nbsp;했던&nbsp;'나이트&nbsp;트레인'보다&nbsp;조금&nbsp;더&nbsp;늦게&nbsp;출간된&nbsp;'실전&nbsp;한국어'에&nbsp;손이&nbsp;먼저&nbsp;간&nbsp;이유가&nbsp;뭘까&nbsp;궁금해하며&nbsp;첫&nbsp;페이지를&nbsp;열었다.&nbsp;나도&nbsp;모르게&nbsp;빠져서&nbsp;계속&nbsp;읽게&nbsp;되었다.&nbsp;문지혁&nbsp;작가의&nbsp;문체와&nbsp;'초급&nbsp;한국어'부터&nbsp;이어온&nbsp;한국어&nbsp;시리즈가&nbsp;가지고&nbsp;있는&nbsp;고유한&nbsp;매력&nbsp;때문일&nbsp;것이다.&nb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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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nbsp;실력은&nbsp;갖추고&nbsp;있지만&nbsp;어떤&nbsp;환경이&nbsp;잘&nbsp;맞지&nbsp;않아&nbsp;제대로&nbsp;가르치는&nbsp;자리에도&nbsp;서지&nbsp;못하고&nbsp;등단도&nbsp;하지&nbsp;못한&nbsp;채&nbsp;여전히&nbsp;경계(문지방)에서&nbsp;읽고&nbsp;쓰고&nbsp;가르치는&nbsp;일에&nbsp;진심으로&nbsp;살아가는&nbsp;작품&nbsp;속&nbsp;문지혁&nbsp;작가&nbsp;(현실&nbsp;속&nbsp;문지혁&nbsp;작가는&nbsp;다름)의&nbsp;이야기는&nbsp;뭐랄까&nbsp;어딘가&nbsp;측은지심을&nbsp;유발하면서도&nbsp;맥락이&nbsp;다르지만&nbsp;내&nbsp;삶과&nbsp;겹치는&nbsp;부분이&nbsp;많았다.&nbsp;한&nbsp;작가의&nbsp;작품을&nbsp;연이어&nbsp;읽게&nbsp;되는&nbsp;데에는&nbsp;어떤&nbsp;설명하지&nbsp;못하는&nbsp;이유가&nbsp;있게&nbsp;마련이다.&nbsp;어쩌면&nbsp;나는&nbsp;여러&nbsp;평행우주&nbsp;속에서&nbsp;이&nbsp;작품&nbsp;속&nbsp;문지혁&nbsp;작가일지도&nbsp;모른다는&nbsp;생각을&nbsp;했다.&nb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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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nbsp;책은&nbsp;결코&nbsp;실패한&nbsp;지식인의&nbsp;이야기가&nbsp;아니다.&nbsp;여전히&nbsp;준비&nbsp;중인,&nbsp;어쩌면&nbsp;그&nbsp;준비가&nbsp;일생일지도&nbsp;모르는&nbsp;한&nbsp;사람의&nbsp;인생&nbsp;드라마다,라고&nbsp;나는&nbsp;읽는다.&nbsp;그리고&nbsp;깊은&nbsp;정서적&nbsp;공감을&nbsp;느끼며&nbsp;초급,&nbsp;중급,&nbsp;실전에&nbsp;이르는&nbsp;이&nbsp;트릴로지를&nbsp;읽어낸&nbsp;것도&nbsp;아마&nbsp;나&nbsp;역시&nbsp;그&nbsp;인생의&nbsp;여러&nbsp;주인공&nbsp;중&nbsp;하나라는&nbsp;생각&nbsp;때문일&nbsp;것이다.&nbsp;미적대고&nbsp;정체된&nbsp;듯한&nbsp;기분,&nbsp;오랜&nbsp;견딤의&nbsp;순간들,&nbsp;원하는&nbsp;것들은&nbsp;오지&nbsp;않고&nbsp;원치&nbsp;않는&nbsp;것들만&nbsp;연이어&nbsp;발생하는&nbsp;일상들,&nbsp;그러나&nbsp;그&nbsp;가운데&nbsp;보석&nbsp;같이&nbsp;찬란하게&nbsp;빛나는&nbsp;행복이&nbsp;있다는&nbsp;것을&nbsp;이&nbsp;작품은&nbsp;궁극적으로&nbsp;말하고&nbsp;싶은&nbsp;게&nbsp;아닐까.&nbsp;그리고&nbsp;이&nbsp;메시지를&nbsp;위해&nbsp;꼭&nbsp;필요했던&nbsp;부분이&nbsp;나는&nbsp;가족&nbsp;이야기라고&nbsp;해석했다.&nb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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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nbsp;한국어'에서&nbsp;화자는&nbsp;싱글이었다.&nbsp;'중급&nbsp;한국어'에서는&nbsp;한&nbsp;여자의&nbsp;남편이자&nbsp;한&nbsp;아이의&nbsp;아빠였다.&nbsp;이번&nbsp;'실전&nbsp;한국어'에서는&nbsp;두&nbsp;아이의&nbsp;아빠로&nbsp;등장한다.&nbsp;이&nbsp;시리즈를&nbsp;단순한&nbsp;오토&nbsp;픽션이라고&nbsp;치부하는&nbsp;독자들은&nbsp;이러한&nbsp;화자의&nbsp;가족&nbsp;이야기가&nbsp;흔해&nbsp;빠진&nbsp;것으로&nbsp;여겨질지&nbsp;모른다.&nbsp;하지만&nbsp;내게는&nbsp;'정상'적인,&nbsp;혹은&nbsp;'평범한',&nbsp;혹은&nbsp;'평균'적인&nbsp;인간,&nbsp;즉&nbsp;보편성을&nbsp;띠어&nbsp;그&nbsp;어떤&nbsp;독자라도&nbsp;자신만의&nbsp;편향된&nbsp;안경만&nbsp;벗어놓는다면&nbsp;작품&nbsp;속&nbsp;화자의&nbsp;생각과&nbsp;감정에&nbsp;충분히&nbsp;공감할&nbsp;수&nbsp;있는&nbsp;소재이자,&nbsp;한국어&nbsp;시리즈에서&nbsp;절대&nbsp;빠지면&nbsp;안&nbsp;되는&nbsp;중심소재로&nbsp;보였다.&nbsp;한국어&nbsp;시리즈가&nbsp;말하고자&nbsp;하는&nbsp;건&nbsp;한국어&nbsp;수업이&nbsp;아니다.&nbsp;어쩌면&nbsp;행복론이다.&nbsp;이&nbsp;시리즈가&nbsp;향하는&nbsp;건&nbsp;행복으로&nbsp;해석할&nbsp;수&nbsp;있다고&nbsp;본다.&nbsp;일상&nbsp;속&nbsp;소소한&nbsp;행복,&nbsp;소소하지만&nbsp;확실한&nbsp;행복,&nbsp;소확행.&nbsp;메시지는&nbsp;진부하게&nbsp;느껴질&nbsp;수&nbsp;있지만,&nbsp;그것에&nbsp;다가가는&nbsp;방법은&nbsp;지극히&nbsp;인간적이고&nbsp;소시민적이다.&nbsp;그래서&nbsp;이&nbsp;책이&nbsp;내게는&nbsp;실전&nbsp;한국어라기보다는&nbsp;실전&nbsp;행복론이다.&nbsp;경계(문지방)에서&nbsp;우리가&nbsp;무심코&nbsp;흘려보내는&nbsp;소중한&nbsp;것들을&nbsp;포착하는&nbsp;작품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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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nbsp;건&nbsp;초급,&nbsp;중급에서도&nbsp;드문드문&nbsp;나타났지만&nbsp;자조적인&nbsp;뉘앙스가&nbsp;상대적으로&nbsp;강해서&nbsp;수면&nbsp;위로&nbsp;잘&nbsp;드러나지&nbsp;않았는데,&nbsp;이번&nbsp;실전에서&nbsp;제대로&nbsp;효과를&nbsp;발휘된&nbsp;요소가&nbsp;있다는&nbsp;점이다.&nbsp;바로&nbsp;유머다.&nbsp;이번&nbsp;작품을&nbsp;읽으면서&nbsp;열&nbsp;번&nbsp;가까이&nbsp;빵&nbsp;터져서&nbsp;혼자&nbsp;낄낄&nbsp;대며&nbsp;웃었다.&nbsp;사람은&nbsp;자상한&nbsp;것&nbsp;같으나&nbsp;결코&nbsp;어린&nbsp;자녀들에게는&nbsp;그&nbsp;모습을&nbsp;항상&nbsp;유지할&nbsp;수&nbsp;없는&nbsp;사십&nbsp;대&nbsp;아빠의&nbsp;전형적인&nbsp;모습도&nbsp;공감&nbsp;백배였지만,&nbsp;딸과&nbsp;나누는&nbsp;대화에서,&nbsp;딸의&nbsp;행동에&nbsp;반응하는&nbsp;아빠의&nbsp;모습에서&nbsp;나는&nbsp;뭉클한&nbsp;감동을&nbsp;느끼기도&nbsp;하면서,&nbsp;동시에&nbsp;웃겨서&nbsp;배꼽&nbsp;빠지는&nbsp;줄&nbsp;알았다.&nbsp;이건&nbsp;다소&nbsp;내가&nbsp;문지혁&nbsp;작가의&nbsp;글쓰기&nbsp;스타일에&nbsp;익숙해졌고&nbsp;그것을&nbsp;좋아하게&nbsp;되어버렸기&nbsp;때문일지도&nbsp;모르겠다는&nbsp;생각도&nbsp;하지만,&nbsp;이&nbsp;작품을&nbsp;천천히&nbsp;맨눈으로&nbsp;읽는&nbsp;사십&nbsp;대&nbsp;아빠&nbsp;독자라면&nbsp;누구라도&nbsp;공감할&nbsp;수&nbsp;있으리라&nbsp;생각한다.&nbsp;아무튼&nbsp;실전에서&nbsp;유머는&nbsp;대성공이다.&nbsp;나는&nbsp;역시&nbsp;실전&nbsp;스타일인가&nbsp;보다.&nbsp;ㅋㅋㅋ&nbsp;초급,&nbsp;중급,&nbsp;실전,&nbsp;그중에&nbsp;제일은&nbsp;실전이라.<br>
<br>
더&nbsp;많은&nbsp;얘기를&nbsp;하고&nbsp;싶으나&nbsp;스포가&nbsp;될까&nbsp;봐&nbsp;자제하기로&nbsp;한다.&nbsp;이&nbsp;글을&nbsp;읽는&nbsp;독자들은&nbsp;꼭&nbsp;문지혁&nbsp;작가의&nbsp;한국어&nbsp;시리즈를&nbsp;섭렵하면&nbsp;좋겠다.&nbsp;절대&nbsp;후회하지&nbsp;않을&nbsp;것이다.&nbsp;조건이&nbsp;있다.&nbsp;반드시&nbsp;차례대로&nbsp;읽을&nbsp;것.&nbsp;초급,&nbsp;중급,&nbsp;실전&nbsp;순으로.&nb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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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br>
#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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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문지혁&nbsp;읽기<br>
1.&nbsp;소설&nbsp;쓰고&nbsp;앉아&nbsp;있네:&nbsp;https://rtmodel.tistory.com/2031<br>
2.&nbsp;고잉&nbsp;홈:&nbsp;https://rtmodel.tistory.com/2046<br>
3.&nbsp;당신이&nbsp;준&nbsp;것:&nbsp;https://rtmodel.tistory.com/2112<br>
4.&nbsp;초급&nbsp;한국어:&nbsp;https://rtmodel.tistory.com/2134<br>
5.&nbsp;중급&nbsp;한국어:&nbsp;https://rtmodel.tistory.com/2139<br>
6.&nbsp;실전&nbsp;한국어:&nbsp;https://rtmodel.tistory.com/219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77/54/cover150/893747743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775413</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건조하지만 따뜻한 서정성, 그리고 환상 이미지의 효과적 활용 - [반딧불 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94379</link><pubDate>Sun, 24 May 2026 12: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9437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1294&TPaperId=1729437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4/59/coveroff/895460129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1294&TPaperId=1729437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반딧불 강</a><br/>미야모토 테루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04월<br/></td></tr></table><br/>건조하지만 따뜻한 서정성, 그리고 환상 이미지의 효과적 활용<br>미야모토 테루 저, '반딧불 강'을 읽고<br>'그냥 믿어주는 일'에서 저자가 썼듯이,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1977년, 세상에 먼저 선보여 다자이 오사무 상까지 받은 작품은 '흙탕물 강'이었다. 하지만 먼저 쓰기 시작했던 작품은 '반딧불 강'이었다. 1년 늦게 출간된 '반딧불 강'은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 두 작품은 미야모토 테루의 데뷔작인 동시에 이르게 찾아온 사회적 성공이었다.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그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만든 '환상의 빛' 역시 1979년 출간이었다. 일반적으로 후기작으로 갈수록 원숙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 많은 데 비해 미야모토 테루는 작가로서의 모든 것이 초기작에 집중된 듯하다. 작가로서 타고난 재능이 작품을 거듭할수록 점점 퇴색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독특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nbsp;<br>출간이 늦어졌을 뿐 '반딧불 강'이 저자가 소설가로서 쓰기 시작한 첫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소설의 완성도는 정말이지 탁월했다. 약 백 페이지 정도 되는 중편소설이지만 초반부터 툭툭치고 가는 거리낌 없는 문장들로부터 나는 대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선을 넘지 않는 건조한 단문들의 조합과 그것들이 그려내는 서정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 가운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서사까지 도저히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두 시간 채 되지 않아 완독 할 수 있었다.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분명 미야모토 테루가 가진 힘은 내겐 충분히 매력적이다.&nbsp;<br>'반딧불 강'에는 '흙탕물 강'과 비슷한 분위기가 흐른다. 하지만 나는 '반딧불 강'을 더 우위에 두고 싶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미야모토 테루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건조하지만 따뜻한 서정성'이 더 돋보인다는 것. 둘째, 미야모토 테루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을 '환상 이미지'가 영리하게 활용되었다는 것. 이 글은 이 두 가지를 풀는 식으로 정리해 볼까 한다.<br>먼저 '건조하지만 따뜻한 서정성'이라고 쓴 표현은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소설의 지향점 같은 것이다. 드러내놓고 따뜻한 이미지는 부담스럽고,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기만 한 이미지는 매력이 없다고 보는 나는 이 둘의 적절한 조합이 서정성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한 소설은 사람이 아니라 텍스트이기에, 건조함은 단문으로, 따뜻함은 등장인물의 간접적인 감정 표현으로 넌지시 보여주는 방식이 나는 조금 더 서정적인 소설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미야모토 테루는 이러한 기술을 탁월한 구사하는 소설가인 것이다.&nbsp;<br>'흙탕물 강'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뭐랄까, '반딧불 강'에서 나는 조금 더 진한 우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우수는 두 소설이 다루는 서로 다른 내용에 있기보다는 저자가 그 내용을 풀어나가는 형식에서 비롯된다고 느꼈다. 특히 자연에 대한 묘사가 더 풍성했는데, 그 묘사들과 조화롭게 흘러가는 인물들의 서사와 감정의 전개가 예사롭지 않았다. 작품 속 세 개의 소제목 중 두 개도 모두 계절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하나는 '눈', 다른 하나는 '벚꽃'. 마치 소설 속 이야기가 하나의 그림으로 각 소제목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은 '흙탕물 강'에서도 느꼈던 것처럼 두꺼운 유화가 아닌 여백이 풍성한 수채화였다. 후 불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려한 기억처럼 그렇게 이 작품은 내게 다가왔다.&nbsp;<br>두 번째 이유는 '환상 이미지'의 활용인데, '흙탕물 강'에서도 이 이미지는 '귀신잉어'라고 표현되는 거대한 잉어로 나타났다. 이것은 두 주인공 남자아이, 노부오와 기이치가 처음 만났던 날 둘을 엮어주는 다리가 되어주었고, 작품이 끝나는 장면에서도 나타나 둘의 원하지 않던 이별을 기념하는 기표가 되어주는 듯했다. 하지만 귀신잉어의 이미지는 작품에서 하나의 신기한 관찰 정도의 의미만 가질 뿐 그 이상의 무게를 가지진 않았다.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반면, '반딧불 강'에서 활용된 환상 이미지인 '반딧불'은 이 작품 속에서 어떤 기적 혹은 신적 이미지까지 연상시키는 신비로 그려지는데, 등장인물들의 내적 고민, 갈등, 슬픔들을 해소시켜 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어찌 보면 범신론을 믿는 지극히 일본적인 문화가 깃들어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 반딧불의 이미지 활용법은 아주 영리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일종의 해방과 탈출구의 이미지 혹은 위로와 치유의 이미지로 부각되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그것의 정점을 찍는 효과를 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nbsp;<br>매력적인 문체의 소유자 미야모토 테루의 작품을 다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책장엔 '환상의 빛'에 이은 서간체 소설 '금수'가 놓여 있다. 시간을 두고 아끼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바로 읽고 싶지만 이것까지 읽으면 금세 바닥이 날 테니까.<br>#문학동네&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미야모토 테루 읽기1. 환상의 빛: https://rtmodel.tistory.com/11692. 생의 실루엣: https://rtmodel.tistory.com/12413. 그냥 믿어주는 일: https://rtmodel.tistory.com/21764. 흙탕물 강: https://rtmodel.tistory.com/21855. 반딧불 강: https://rtmodel.tistory.com/2186]]></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4/59/cover150/895460129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45922</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한 편의 수채화 - [반딧불 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93039</link><pubDate>Sat, 23 May 2026 15: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9303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1294&TPaperId=172930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4/59/coveroff/895460129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1294&TPaperId=1729303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반딧불 강</a><br/>미야모토 테루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04월<br/></td></tr></table><br/>한 편의 수채화<br>미야모토 테루 저, '흙탕물 강'을 읽고<br>문체에 이끌려 계속 읽게 되는 작가의 작품을 읽다 보면 독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순수한 유희를 맛볼 수 있다. 어떤 작가의 사상이나 주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내가 원하는 특정 부분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내 의지의 관철, 혹은 기대의 충족에 머물고 만다. 반복되면 자칫 확증 편향의 일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내용(사상이나 주제)이 아닌 형식(문체)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적어도 이런 독서의 부작용은 피할 수 있으며, 그 덕분에 새로운 작품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처음 읽는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처럼 순수한 기대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따라오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nbsp;<br>'흙탕물 강'은 한 편의 수채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남긴 여운과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지만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특수성을 가지지만 보편성을 결코 잃지 않은 이야기. 그래서 독자들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나를 대입시켜 읽게 되는 이야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 유화처럼 강렬하고 두꺼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가 아닌, 수채화처럼 맑고 순수하여 물에 지워질까 조바심이 나는 이야기, 그래서 더욱더 아련하고 아끼고 싶어지는 이야기 말이다.&nbsp;<br>이 작품은 비가 오면 금방 흙탕물이 되고 마는 강 주위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 전쟁이 끝난 지 십 년이 지난 현재, 여전히 작품 속 아버지 세대는 전쟁의 후유증이 몸의 상흔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생존자들이다. 전쟁 때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녀도 낳고 생계도 겨우 유지하며 살아가는 서민들이다. 저자의 눈은 특별히 이들의 자녀에게로 향한다. 전쟁을 겪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을 보며 전쟁이 무엇인지 그것이 남긴 상처가 무엇인지 알아간다. 배우는 노래조차 전쟁 중 어른들이 부르던 노래일 정도로.&nbsp;<br>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선명하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우동 집 아들 노부오와 최근에 강 건너편으로 이사 온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 기이치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짧은 기간,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이 줄거리를 이룬다. 노부오는 몸이 약한 탓에 늘 집 안에서 창문으로 강을 내려다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기이치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어머니는 몸을 파는 일을 한다. 기이치에게는 긴꼬라는 이름의 두세 살 위의 누나도 있다. 둘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집도 땅 위에 지은 집이 아닌 물 위를 떠다니는 조그마한 배다. 전쟁의 상처는 서민들 일상의 바닥까지 침투하여 여전히 삶의 근간을 쥐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달리 설명하진 않지만, 기이치와 긴꼬, 그리고 매춘부로 살아가는 그들의 어머니는 전쟁 후 살아남은 서민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nbsp;<br>노부오의 눈에 어느 날 기이치가 눈에 들어온다. 여덟 살 정도 나이의 사내아이들이 그렇듯 둘은 금세 친해진다. 긴꼬도 알게 되고 그들의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노부오의 부모도 주위의 이웃들로부터 주워들은 모양인지 알고 있는 눈치다. 모두 쉬쉬 하는 분위기,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면 기이치와 긴꼬는 수치와 분노를 느끼는 듯한 장면들을 저자 미야모토 테루는 결코 직설적이지 않게 보여준다. 독자가 개입하여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그려주는 것이다.&nbsp;<br>이야기는 기이치의 집인 조그만 배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불법 체류 같은 이유였다. 얼마 전 노부오는 기이치의 어머니가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어렴풋이 보게 되고 감정과 사상의 혼란을 겪으면서 기이치와 긴꼬와의 관계도 소원해진 상태였다. 마침내 그들이 떠나는 날, 천천히 강을 따라 움직이는 기이치의 배집을 따라서 뛰어가며 노부오는 기이치를 부르고 기이치를 만나던 날 처음 함께 보았던 귀신잉어가 배를 따라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 한다. 그러나 배집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한 채 점점 더 멀리 사라져 갈 뿐이었다. 그리고 작품은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br>독자로서 읽어도 아름다운 소설이었지만, 작가로서 읽었을 때 더욱 내겐 배울 게 많은 작품이었다. 서정성과 묘사하는 기법들, 인물들 관계 설정과 그 사이에 흐르는 갈등 및 아픔을 과장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은 채 다루는 방식들을 하나씩 배울 수 있었다. 언젠가 완성할 '동수'에서도 꼭 활용해야 할 방법들일 것이다.<br>1977년 다자이 오사무 상을 받았던 이 작품에 이어 같은 책에 실린 1978년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던 '반딧불 강'도 마저 읽어야겠다. 이런 감성이 좋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br>#문학동네&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미야모토 테루 읽기1. 환상의 빛: https://rtmodel.tistory.com/11692. 생의 실루엣: https://rtmodel.tistory.com/12413. 그냥 믿어주는 일: https://rtmodel.tistory.com/21764. 흙탕물 강: https://rtmodel.tistory.com/2185]]></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4/59/cover150/895460129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45922</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인간 스토너 - [스토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85387</link><pubDate>Tue, 19 May 2026 10: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853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54992&TPaperId=172853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100/19/coveroff/8925554992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54992&TPaperId=172853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스토너</a><br/>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01월<br/></td></tr></table><br/>인간 스토너<br>존 윌리엄스 저, '스토너'를 다시 읽고<br>'스토너'를 처음 읽었을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묵직한 무언가에 한 대 맞은 것처럼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줄거리가 다 기억나지는 않아도 책이 남긴 잔상은 조용하고도 강렬했다. 그 이후 난 '스토너'를 지금까지 읽은 천 권이 넘는 책들 중 열 권 중에 항상 포함시켜 왔다. 재독에 앞서 무엇이 날 그렇게 만들었는지 스스로 물었다. 이번에도 나는 어떠한 논리적인 답도 할 수 없었다. 인생을 숙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막연한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nbsp;<br>7년 만에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놀랍게도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그때 그 심정으로 곧장 진입할 수 있었다. 아니, 조금은 더 깊은 바닥까지 스토너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었다. 마음이 더 아팠다. 쑤시듯이, 동시에 얼얼하게, 그리고 무감각해질 정도로. 재독을 마친 지금 내 모습은 초독을 마쳤을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채 결코 저항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살다 간 한 사람이 이번에도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nbsp;<br>재독의 여유는 줄거리에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아도 큼직한 것들은 이미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토너가 가난한 시골 농부 집안 출신이라는 것, 어쩌다 대학에 들어갔으나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 한 여자에게 눈이 멀어 사랑 아닌 사랑에 빠져 덥석 결혼을 해버렸다는 것, 그 결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으로 점철되었다는 것, 그 이유의 무게중심은 스토너가 아닌 아내에게 있었다는 것, 그것의 희생양으로 딸도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장애를 가진 동료 교수의 비뚤어진 집착과 분노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교수 생활 대부분을 껄끄러운 인간관계 속에서 지내야 했다는 것, 그리고 한 여자 강사와 사랑에 빠져 (이미 유부남이지만 처음으로 사랑을)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지만 한 편으론 납득이 될 만한 불륜 관계에 한동안 빠져 지내다가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암에 걸려 홀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까지, 중요한 이야기들은 7년이 지나도 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작품은 초독 때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중력처럼 나를 무겁게 아래로 아래로 심연까지 끌어내린 것일까.<br>정확한 답은 여전히 모른다. 아마도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성과 논리의 영역도 훌쩍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훅 하고 들어오는 게 어찌 '합리적'이기만 하겠는가. 나는 그저 스토너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와 비슷한 구석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놀라워하며 그에게 빙의되어 있었을 뿐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분열된 외로운 삶을 아스라이 살아가는 스토너의 고독이 마치 내 것인 것만 같았다.<br>스토너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사건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씩 짚어보면서 이 글을 풀어가겠다.<br>첫째, 가정 문제다. 사랑이 아닌 본능적인 이끌림이 낳은 비극이라고 하면 성급한 일반화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토너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된다. 이것만 보면 스토너의 불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내가 된 이디스의 정신병적인 내면세계가 두 사람의 결혼을 불행으로 이끈 주범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디스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쓴다. 이 표현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무난하고 순박한 시골 남자 스토너를 그녀가 어떻게 대했는지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아니, 이것부터 먼저 물어야 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 저자는 이디스에게 어떠한 병명도 붙이지 않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을 근거로 볼 때 정신분열 혹은 성격장애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중증으로. 그녀는 늘 공중에 부유하는 듯했다. 착륙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듯했다. 그녀의 다른 이름은 불안과 초조였다. 그러나 남편 스토너와 딸 그레이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녀와 싸우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조용히 선을 긋고, 같은 집에 살지만 함께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고 그녀의 말을 다 들어주고 따라주지만 껍데기뿐인 순종 혹은 복종으로 대했다. 그렇게 스토너의 가정은 겉으로 볼 땐 멀쩡했으나 속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붕괴되고 있었다. 이렇게 조용히 파국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말이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편과 딸이 너무 불쌍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디스에게도 연민이 느껴졌다.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른 상태에서, 마치 뭔가에 쓰인 것처럼, 모든 행동들을 ‘나름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이론적일 뿐이었지만) 실천에 옮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디스는 결국 악을 행한 사람이 되었지만 악한 의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말 못 할 상황들이 과연 스토너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nbsp;<br>둘째, 직장 문제다. 로맥스라는 지체장애인이자 동료 교수가 빌런으로 등장한다. 왜 저자는 이 빌런을 지체장애인으로 설정했는지 그의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로맥스와 스토너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명확하게 생겨버린 사건의 주인공 워커 역시 로맥스와 마찬가지로 지체장애인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저자는 분명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능력 미달이라 워커에게 불합격을 줄 수밖에 없었던 스토너가 마치 장애인을 함부로 대하고 차별한 것처럼 만들어버린 로맥스, 그리고 그 틈을 타 교활한 눈빛으로 다시 학위과정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워커, 내게 이 두 사람은 순수 악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이디스는 악의가 없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반면, 로맥스와 워커는 명징한 악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토너를 파괴시키기 위한 선명한 의도. 물론 이것은 스토너와 그의 친구 고든에게만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체장애라는 가시적인 특징으로 인해 상당 부분 가려졌다. 로맥스와 워커는 사적이고 악한 욕망을 위해 약자라는 위상을 십분 활용하여 무기로 사용하는 인간 말종이었던 것이다. 이를 열등감만으로 해석하기에는 아무래도 모자란 감이 있다. 악의라고, 악의였다고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약할 수는 있어도 악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nbsp;<br>셋째, 이성 문제다. 기본적으로 기혼자의 이성 문제는 사회적 윤리나 개인적 도덕으로 올바르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저자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너에게 불륜을 허락한 것을 보면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적어도 스토너를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스토너의 벼랑 끝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탈출구를 마련해 준 것 같은 인상도 받았다. 저자는 불륜의 원인을 스토너 부부 관계의 붕괴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스토너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었지만, 아내라고 할 사람이 없었고, 그 사람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딸과의 관계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외톨이였다. 저자는 이런 스토너를 두고 ‘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라고 쓴다. 마치 저자는 스토너의 불륜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수순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스토너는 불륜에서 처음으로 사랑다운 사랑을 느꼈다. 한 사람과의 진정성이 깃든 영혼의 소통을 하며 깊은 만족감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졌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이러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금지된 사랑 속에서나마 살아 있을 때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된 스토너를 지지하는 마음도 들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스토너에게 깊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아내 이디스는 남편의 불륜을 알고도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한다. 아마도 자신이 도량이 큰 사람인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거나 자기가 이룬 가정의 평판이 망가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이거나, 아니면 둘 다일 것 같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이디스는 스토너를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디스는 그 누구와도 사랑하는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정말 불쌍한 관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디스와 무관하게 스토너는 현명했던 캐서린 덕분으로 불륜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폭삭 늙어버린다.&nbsp;<br>이 책은 한 평범한 남자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붕괴되어 가루가 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과정 중에서도 그 남자는 나름대로의 소신으로 최선을 다했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성실했고 그 안에서 기쁨도 발견하고 누렸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사건들로 인해 그는 무너져갔다. 어찌 보면 스토너라는 인물에게 뭐라고 한 마디를 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독자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답답한 반응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운명을 거스를 수 있었을까? 저항해서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nbsp;<br>나는 스토너가 지혜로웠다고 믿게 된다. 아내 이디스라는 사람에게 과연 어떤 식으로 대할 수 있었단 말인가? 화를 내며 언쟁을 높였다면 과연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을까? 아닐 것이다. 문제는 더 커지기만 했을 것이다. 이는 로맥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이디스와 로맥스로부터 나는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소통의 단절 내지는 불가능성. 이디스와 로맥스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채 섬이 되어 살아가는 부류였다. 타자와의 소통에 불능한 사람으로 성장한 사람이었다. 이디스의 경우는 부모님의 부로, 로맥스의 경우는 자기가 이룬 명예와 권력으로 자기만의 견고한 세계를 철옹성처럼 수호하며 철저하게 방어적으로 (결국 타자에게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이에 반하여 스토너와 캐서린은 비록 불륜이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만남을 가졌지만,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 사람다운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런 부류는 언제나 세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저자는 넌지시 일깨워주는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며 어떤 불편함이 느껴지고 모순된 현실과 바라야 할 이상 사이의 괴리를 느끼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그대로 그려낸 한 편의 예술 작품이라 생각한다.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 문학의 힘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nbsp;<br>#RHK#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스토너 초독 감상문: https://rtmodel.tistory.com/812* 스토너 재독 감상문: https://rtmodel.tistory.com/2182]]></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100/19/cover150/892555499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1001915</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신 없는 선?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 나라? - [내가 떠난 이유, 내가 남은 이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80498</link><pubDate>Sat, 16 May 2026 20: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8049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7386&TPaperId=1728049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6/13/coveroff/k12213738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7386&TPaperId=1728049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내가 떠난 이유, 내가 남은 이유</a><br/>토니 캠폴로.바트 캠폴로 지음, 노종문 옮김 / 비아토르 / 2026년 03월<br/></td></tr></table><br/>신 없는 선?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 나라?<br>바트 캠폴로, 토니 캠폴로 공저, '내가 떠난 이유, 내가 남은 이유'를 읽고<br>신앙생활을 함께 하다 보면 떠나는 사람도 있고 남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기를 택한 사람은 떠나는 이에게 왜 떠나는지 묻고, 떠나기를 택한 사람은 남은 이에게 왜 남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런 일화를 한두 차례 이상 듣게 되면 자문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떠난 이는 자신이 왜 떠났는지를 묻게 되고, 남은 이는 자신이 왜 남았는지를 묻게 되지요. 문제는 이 질문이 양쪽 모두에게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계속 묻고 싶지요.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어느 선택이 선이고 악인지 말입니다. 글쎄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여전히 상대방을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것을 예수의 가르침 중 하나라고 인정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결론을 내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한 편으로는 진부한 논리 전개로도 읽힐 수 있지만,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이 책 속의 대화는 지금, 여기에서도,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또 충분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을 비방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책 속의 대화 자체가 소중하다는 다소 맥 빠지는 평가를 내리는 데에 그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분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뭔가가 아쉬웠습니다.&nbsp;<br>아쉬운 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nbsp;<br>우선 '남은 자'로 나오는 아버지 토니 캠폴로의 입장은 그동안 익숙히 봐 왔던 기독교 변증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근본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답니다. 저는 토니의 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가 예수의 신성(하나님다움)과 인성(인간다움)을 설명하며 둘은 다른 게 아니라 동일한 것이며 하나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인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라는 것을 풀어내는 부분, 그리고 성령의 열매가 사실은 인간다움의 자질들을 나타낸다고 하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감동까지 느꼈답니다. 그러나 나머지 변증들은 제가 바트였다고 가정해도 설득력이 크지 않아 보였습니다. 아마도 저 역시 복음주의 신학책들의 언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들의 연속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토니의 입장을 이해할 뿐 아니라 거부할 마음도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때 잠시 '떠난 자'였지만, 이제 다시 '남은 자'가 된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br>아들 바트 캠폴로의 입장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으로는 다 이해가 가진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남은 자' 측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신념이 작동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트가 복음주의자였다가 세속주의자, 영적인 자연주의자(표현도 근사하지 않나요?), 세속적 인본주의자로 입지를 바꾼 계기는 이 책에 따르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자전거 사고였습니다. 사고 후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되면서 그는 세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첫째,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결국 뇌 안에 있다는 것. 둘째,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일찍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셋째, 지금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라는 것, 즉 이번 생이 유일하다는 것, 다시 말해 내세는 없다는 것. 굉장히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이 매력적이긴 했지만, 왠지 저에게는 일종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아는 여러 지인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여 바트와 정반대의 길로 더욱 매진하고 있기도 하거든요. 바트는 또한 이런 변화가 자신의 의지적인 선택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땐 바트는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계기로 그동안 쌓아왔던 의심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의 뭉터기들이 한데 모여 세속적 인본주의의 길로 걷기를 선택한 것 같았습니다. 선택한 이후에 논리로 후속작업을 하며 빈틈을 채웠던 걸로 보였습니다. 또한 그가 거의 성경처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19세기 후반의 작가 로버트 잉거솔이라는 점 역시 그의 변증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바트의 선택이었겠지요.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의 글을 읽고 신봉하는 것처럼 돌변하는 것, 자기에게 일어난 상황들이 로버트 잉거솔의 책에 있는 논리로 다 설명이 되는 것 같이 느꼈던 것, 이런 걸 확증편향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 바트가 조금만 나중에 태어났다면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서 로버트 잉거솔 말고도 더 많은 지지자들을 만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렇게 되어도 그는 그걸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바트의 말들은 유려하게 보였지만 설득력은 모자란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는 말이지요.<br>두 사람의 차이를 비교 대조 하면서 토론 거리를 찾아내고 곱씹어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보다 저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신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가?"입니다. 두 질문은 겹치는 부분도 있겠네요. 책에서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사실 이 질문들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수만 번 생각해 봤던 질문이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nbsp;<br>이성적으로 조금 따지면서 대답을 해 보자면, 저 두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네요. 먼저 '선함'의 정의를 짚어야 하고, 다음으론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짚어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하위 질문에 대답이 갖춰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 하나하나가 모두 커다란 신학적인 주제들이라 저의 미천한 지식으로는 당연히 뭐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nbsp;<br>하지만 저의 일반론적인 입장은 신 없이도 인간이 보는 관점에서는 선하게 살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보는 관점에서는 선하게 살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할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이 모두 다 이해되지는 않잖아요. 선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고백하면서도 우리 눈에는 때때로 하나님이 선하게 느껴지지 않기도 하니까요. 이런 면에서 바트는 어쩌면 영리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마련해 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시켜 버리면 선하다는 것의 정의를 그저 인간들의 눈에 맞추면 되는 문제이니까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br>두 번째 질문에 대한 저의 입장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잖아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인데, 그 통치자를 믿지도 않고 없다고 하는 사람이 그곳에 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트의 경우는 사랑을 실천하면 마치 신 없이도 선을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br>제가 연재하는 글에 썼던 부분을 발췌해서 아래에 옮겨 봅니다.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br>| 율법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다.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자기를 쪼개어 산 제물로 드리지 않는, 내용이 없고 형식만 남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가증한 제사와 같다. 이는 종교생활에 다름 아니다. 반면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조건적일뿐더러 궁극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에 지속할 수 없고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고 유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발현되어야만 한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다르지 않은 마음가짐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어떤 존재일까. 이웃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신앙과 일상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br>그렇습니다. 바트가 믿는 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선 인간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바트는 인간의 악함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악함의 희생자들로부터 어찌 하나님이 존재하면 이럴 수 있냐고 따지기는 하지만, 인간이 힘을 합치면 마치 선을 행할 수 있고 사랑도 실천할 수 있는 것처럼 철저하게 인간의 힘을 믿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극명히 보았답니다. 구원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 구원은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것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답니다.&nbsp;<br>특히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문장은 도스토옙스키 후기 작품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다뤄져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랬고, '악령'의 스따브로긴과 표뜨르를 위시한 5인조가 그랬으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과 스메르쟈꼬프가 그랬지요.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신의 부재 속에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곧 혼돈과 파국으로 치닫는 것과 같다고요. 누군가는 혼돈을 자유로 착각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어떤 제한 속에서도 자유를 만끽하기도 하죠. 저는 인간은 후자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만드신 건 하나님이라고 믿고요.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으면서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요.&nbsp;<br>이런 면에서 바트는 인간을 너무 맹신하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니까요. 바트가 사역하는 세속주의 인본주의 채플에서 행해지는 이웃 사랑이 과연 얼마나 지속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변죽만 울리지는 않을지 염려도 됩니다.<br>토니와 바트의 합의점은 사랑입니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렇게 정리되고 있어요. 그러나 방법론에서 합의를 본다고 해서 합의가 될까요? 저는 의문이랍니다. 다행스럽게도 바트는 어떤 기적적인 일이 생겨 다시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주저하지 않겠다고 말해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이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토니 캠폴로의 마음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트를 무신론자가 아니라 여전히 유신론자 경계에 있는 불가지론자로 보게 됩니다. 그의 행보가 궁금해집니다.<br>#비아토르&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6/13/cover150/k12213738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361302</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장애인들의 교회 -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세상 보이는 하나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75874</link><pubDate>Thu, 14 May 2026 12: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7587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7654&TPaperId=1727587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6/82/coveroff/k38213765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7654&TPaperId=1727587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세상 보이는 하나님</a><br/>양진철 지음 / 선율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장애인들의 교회<br>양진철 저,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세상 보이는 하나님'을 읽고<br>탁, 탁탁, 탁, 탁탁탁… 땅을 두드리는 소리다. 흰지팡이가 내는 구별된 소리. 우리나라에는 주일 아침마다 분주한 주차 안내 대신 이 소리로 가득해지는 교회가 있다. 시각장애인이 전체의 약 칠십 퍼센트를 차지하는 교회, 주일날 지휘자도 지휘봉도 없는 찬양대가 그 어떤 찬양대보다 아름다운 화음으로 찬양하는 교회,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보이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교회. 이곳은 1981년 시각장애인의 복음화를 위해 세워진 애능중앙교회다.<br>이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양진철 목사다. 그가 처음부터 목사였던 건 아니다. 그 역시 한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자 탕자였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인 어려움을 어린 시절부터 겪었다. 가정폭력과 부모님의 이혼만 해도 충분히 버겁게 느껴지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파괴된 가정환경 속에서 선천적 발달장애를 가진 채 태어난 남동생을 거의 혼자서 돌보아야 했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되자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큰맘 먹고 병원에 가서 황반변성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오른쪽 눈은 이미 실명이었고, 왼쪽 눈도 진행 중이라 했다. 앞이 캄캄했다. 이미 충분히 불행했고, 그래도 그 삶을 꾸역꾸역 버티려고 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떨어졌던 것이다. 차마 나는 공감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아마 마지막 안간힘마저도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지 않았을까. 육체적인 눈도 정신적인 눈도 모두 닫히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생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nbsp;<br>스스로 생을 끊는 결단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저자는 살아냈다. 버티고 버텼다. 책에 따르면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불교에 의지했다고 한다. 백팔 배는 수도 없이 했고, 장장 아홉 시간이나 걸리는 삼천 배를 하기도 했다. 불교학생회 임원이었고, 고등학생 땐 동국대학교 총장상도 받았으며, 불교재단 스님 장학금도 받았다. 그는 반야심경을 외워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nbsp;<br>대학생이 되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이 주어졌다. 친구들 덕분에 CCC 수련회에도 참석하게 되었고, 급기야 시각장애인 교회라고 알려진 애능중앙교회로 인도받게 된다. 그는 애능중앙교회에서 처음 예배 하던 날의 소회를 평생 잊지 못할 날이라고 쓴다. 운명을 믿지 않아도 운명적인 일은 벌어지는 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계획 혹은 섭리라고 읽는다. 그랬을 것이다. 청년 양진철이 애능중앙교회로 인도받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 내지는 운명으로 치부할 수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계획, 섭리라는 표현 없이는 설명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저자는 교회의 품에 안겨 한 가족이 되어 자라나게 된다. 그러다가 신학을 공부하게 되고 목사까지 된 것이다. 그는 2025년 12월부터 이 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실로 애능중앙교회는 양진철 목사의 어머니였다.&nbsp;<br>애능중앙교회에는 수많은 양진철이 있다. 몸과 마음이 무너져 앞길이 막힌 것 같았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길로 인도받게 된 이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다. 한 감각이 소실되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그 다른 감각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영적인 눈도 포함한다는 걸 애능중앙교회의 많은 양진철들은 증거 하는 것 같다. 비시각장애인들은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보지 못하는데 반하여, 이들 시각장애인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도 보이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차피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어쩌면 육신의 눈은 하나님을 마주할 때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폭풍 같은 환란 속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이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세상 속에서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 이들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어떨지 나는 생각만 해도 은혜가 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이 따위 멀쩡한 두 눈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nbsp;<br>이 책은 양진철 목사의 성장과정과 함께 애능중앙교회의 소개만 담고 있진 않다. 시각장애인들을 향한 목소리, 시각장애인들을 향한 비시각장애인들의 시각에 대한 목소리들도 담고 있다. 그는 말한다. 시각장애인에게 잘해주려는 마음이 오히려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 되고 말 때가 많다고. 그러므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역의 첫 단추는 잘해주려는 마음 이전에 시각장애인과 눈높이를 맞추는 거라고. 그것은 시각장애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묻고 대화하는 거라고. 또한 그들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는 거라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평생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마치 격이 낮은 존재인 것처럼 여기는 낙인찍기는 시각장애인들의 가슴에 평생 주홍 글씨는 새기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주위에 시각장애인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이 글 읽는 독자들은 이런 점들을 꼭 염두에 두면 좋겠다.<br>저자는 교회공동체에 대한 비전도 제시한다. 교회는 ‘인정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하는’ 곳이어야 하고, ‘인정받는’ 곳이 아니라 ‘사랑받는’ 곳이어야 한다고. 지체의 허물을 판단하기 전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 허물에 손가락질하기 전에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덧붙여 산상수훈을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돈이 많은 사람이 복이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이들이 복이 있는 공동체, 권력 있는 사람이 복이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애통하는 이들이 복 있는 공동체, 인맥이 빵빵하고 학벌 좋은 사람이 복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이 복 있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라고. 한 자도 거부할 수 없는 아멘의 말들이다.<br>저자는 여전히 공부 중이다.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목회와 설교/예전’ 파트에서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할 수 있는 성찬식을 위한 ‘보는 성찬의 예식서’를 기획 중이다. 정말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나도 눈가리개를 하고 성찬식에 참여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시각장애인들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타자를 향한 공감을 하나님 나라의 공의로 여겨왔던 내게 장애인은 그 타자에 구체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나에게 다시 영점을 재조정하게 해 주었다.&nbsp;<br>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은 약 이십오만 명이고, 복음화율은 약 일 퍼센트 정도에 그친다고 한다. 애능중앙교회와 양진철 목사와 수많은 양진철들의 존재 자체가 감사하다. 두 눈을 뜨고도 하나님을 잘 보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워진다.&nbsp;<br>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런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라 생각한다. 강추한다.<br>#선율#김영웅의책과일상&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6/82/cover150/k38213765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368242</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아련함의 깊이 - [그냥 믿어주는 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70018</link><pubDate>Mon, 11 May 2026 12: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7001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832328&TPaperId=1727001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452/85/coveroff/k81283232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832328&TPaperId=1727001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냥 믿어주는 일</a><br/>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04월<br/></td></tr></table><br/>아련함의&nbsp;깊이<br>
<br>
미야모토&nbsp;테루&nbsp;저,&nbsp;'그냥&nbsp;믿어주는&nbsp;일'을&nbsp;읽고<br>
<br>
'환상의&nbsp;빛'을&nbsp;읽고&nbsp;한동안&nbsp;먹먹했던&nbsp;그&nbsp;순간을&nbsp;잊지&nbsp;못한다.&nbsp;사랑하는&nbsp;사람의&nbsp;뒷모습과&nbsp;해석되지&nbsp;않는&nbsp;뒷모습이&nbsp;같을&nbsp;수도&nbsp;있다는&nbsp;것을&nbsp;처음으로&nbsp;생각하게&nbsp;했던&nbsp;작품이었다.&nbsp;짧은&nbsp;중편소설이었지만&nbsp;단편소설이&nbsp;미처&nbsp;주지&nbsp;못하는&nbsp;완성감과&nbsp;무게감,&nbsp;그리고&nbsp;장편소설이&nbsp;해내지&nbsp;못하는&nbsp;압축감이&nbsp;묘하게&nbsp;어우러져&nbsp;잔상을&nbsp;오래&nbsp;남기는&nbsp;작품이기도&nbsp;했다.&nbsp;작품&nbsp;하나로&nbsp;작가가&nbsp;좋아지는&nbsp;일은&nbsp;가슴&nbsp;설레는&nbsp;일이다.&nbsp;전작을&nbsp;읽고&nbsp;싶어질&nbsp;정도라면&nbsp;더욱더.<br>
<br>
5년&nbsp;전&nbsp;이&nbsp;무렵&nbsp;'생의&nbsp;실루엣'이라는&nbsp;에세이집이&nbsp;출간되었다.&nbsp;나는&nbsp;미국에&nbsp;있었음에도&nbsp;불구하고&nbsp;즉각&nbsp;구매하여&nbsp;읽지&nbsp;않을&nbsp;수&nbsp;없었다.&nbsp;소설가&nbsp;혹은&nbsp;시인이&nbsp;쓴&nbsp;에세이는&nbsp;나에겐&nbsp;반드시&nbsp;읽어야&nbsp;하는&nbsp;최상위&nbsp;목록에&nbsp;오른다.&nbsp;언제나&nbsp;읽을&nbsp;것들이&nbsp;밀려&nbsp;있지만&nbsp;자발적으로&nbsp;새치기를&nbsp;허용하는&nbsp;몇&nbsp;안&nbsp;되는&nbsp;예외에&nbsp;해당된다.&nbsp;에세에서는&nbsp;소설이나&nbsp;시에서&nbsp;듣지&nbsp;못한&nbsp;작가의&nbsp;직접적인&nbsp;목소리를&nbsp;들을&nbsp;수&nbsp;있기&nbsp;때문이다.&nbsp;작가를&nbsp;알&nbsp;수&nbsp;있고&nbsp;알게&nbsp;되기&nbsp;때문이다.&nbsp;좋아하면&nbsp;알고&nbsp;싶어지는&nbsp;마음&nbsp;같은&nbsp;거랄까.<br>
<br>
'생의&nbsp;실루엣'이&nbsp;일본에서&nbsp;2014년에,&nbsp;'그냥&nbsp;믿어주는&nbsp;일'은&nbsp;1983년에&nbsp;출간되었다는&nbsp;사실을&nbsp;이번에&nbsp;알게&nbsp;되었다.&nbsp;두&nbsp;에세이집&nbsp;사이에는&nbsp;약&nbsp;30년이란&nbsp;세월이&nbsp;존재한다.&nbsp;1947년생인&nbsp;미야모토&nbsp;테루는,&nbsp;그러니까&nbsp;36세&nbsp;때&nbsp;'그냥&nbsp;믿어주는&nbsp;일'을,&nbsp;67세에&nbsp;'생의&nbsp;실루엣'을&nbsp;출간한&nbsp;것이다.&nbsp;작가에게&nbsp;30년은&nbsp;300년이&nbsp;될&nbsp;수도&nbsp;있는&nbsp;세월이기에&nbsp;상대적으로&nbsp;여물지&nbsp;않은&nbsp;미야모토&nbsp;테루의&nbsp;문장들을&nbsp;읽게&nbsp;될&nbsp;것&nbsp;같아&nbsp;나는&nbsp;이&nbsp;책을&nbsp;바로&nbsp;읽을지&nbsp;말지&nbsp;잠시&nbsp;망설였다.&nbsp;기우였다.&nbsp;살짝&nbsp;제목에&nbsp;낚인&nbsp;면도&nbsp;없진&nbsp;않지만,&nbsp;내가&nbsp;알고&nbsp;느꼈던&nbsp;그의&nbsp;문장들은&nbsp;여기에도&nbsp;그대로&nbsp;담겨&nbsp;있었다.&nbsp;<br>
<br>
흔하고&nbsp;사사로워&nbsp;보이는&nbsp;것들로&nbsp;직조한&nbsp;그의&nbsp;문장들은&nbsp;결코&nbsp;흔하지도&nbsp;사사로워&nbsp;보이지도&nbsp;않는다.&nbsp;내가&nbsp;느낀&nbsp;미야모토&nbsp;테루의&nbsp;문장들은&nbsp;정갈하면서도&nbsp;우아하다.&nbsp;사실&nbsp;나는&nbsp;'환상의&nbsp;빛‘을&nbsp;읽고&nbsp;난&nbsp;직후에는&nbsp;그가&nbsp;여성인&nbsp;줄&nbsp;알&nbsp;정도였다.&nbsp;물론&nbsp;나의&nbsp;선입견&nbsp;혹은&nbsp;고정관념의&nbsp;산물이겠지만,&nbsp;내가&nbsp;알던&nbsp;남성의&nbsp;문체라고&nbsp;할&nbsp;수&nbsp;없을&nbsp;만큼이었다.&nbsp;출판사의&nbsp;책&nbsp;소개에서처럼&nbsp;서정성을&nbsp;품고&nbsp;있다고도&nbsp;표현할&nbsp;수&nbsp;있을&nbsp;것이다.&nbsp;<br>
<br>
이&nbsp;책은&nbsp;미야모토&nbsp;테루가&nbsp;서른&nbsp;중반에&nbsp;자기&nbsp;인생을&nbsp;돌아보며&nbsp;쓴&nbsp;회고록&nbsp;같은&nbsp;역할도&nbsp;한다.&nbsp;소설가의&nbsp;길을&nbsp;걷기&nbsp;전의&nbsp;인생&nbsp;(어린&nbsp;시절&nbsp;이야기,&nbsp;어머니와&nbsp;아버지&nbsp;이야기&nbsp;등),&nbsp;결코&nbsp;합리적이라&nbsp;할&nbsp;수&nbsp;없을&nbsp;무모한&nbsp;선택으로,&nbsp;마치&nbsp;운명을&nbsp;받아들이듯,&nbsp;소설가의&nbsp;길로&nbsp;접어들었던&nbsp;사연,&nbsp;그리고&nbsp;꽤&nbsp;이른&nbsp;나이에&nbsp;성공적인&nbsp;데뷔를&nbsp;하게&nbsp;된&nbsp;사연까지,&nbsp;길다면&nbsp;길고&nbsp;짧다면&nbsp;짧은&nbsp;인생이&nbsp;담겨&nbsp;있다.&nbsp;보통&nbsp;인생을&nbsp;관조하면서&nbsp;본인만의&nbsp;어떤&nbsp;철학이랄까&nbsp;지혜랄까&nbsp;하는&nbsp;것들을&nbsp;문장&nbsp;속에&nbsp;담아내어&nbsp;독자들에게&nbsp;울림을&nbsp;주게&nbsp;되는&nbsp;건&nbsp;작가가&nbsp;지긋이&nbsp;나이&nbsp;든&nbsp;경우가&nbsp;많은데,&nbsp;놀랍게도&nbsp;미야모토&nbsp;테루는&nbsp;서른&nbsp;중반인데도&nbsp;불구하고&nbsp;마치&nbsp;적어도&nbsp;오륙십은&nbsp;된&nbsp;사람이&nbsp;쓴&nbsp;것&nbsp;같은&nbsp;문장을&nbsp;구사한다.&nbsp;이&nbsp;사실&nbsp;하나만으로도&nbsp;그의&nbsp;문체와&nbsp;문장의&nbsp;깊이를&nbsp;짐작할&nbsp;수&nbsp;있으리라&nbsp;생각한다.<br>
<br>
그는&nbsp;소설가로&nbsp;살기&nbsp;시작한&nbsp;지&nbsp;얼마&nbsp;되지도&nbsp;않아&nbsp;일본에서&nbsp;작가로서&nbsp;가장&nbsp;영예로운&nbsp;상을&nbsp;받았다.&nbsp;1977년에&nbsp;‘흙탕물&nbsp;강’으로&nbsp;다자이&nbsp;오사무&nbsp;상을,&nbsp;이듬해인&nbsp;1978년에&nbsp;먼저&nbsp;쓰기&nbsp;시작했던&nbsp;‘반딧불&nbsp;강’으로&nbsp;아쿠타가와&nbsp;상이었다.&nbsp;그의&nbsp;불우했고&nbsp;가난했던&nbsp;어린&nbsp;시절과&nbsp;약한&nbsp;몸으로&nbsp;병치례를&nbsp;하며&nbsp;살아왔던&nbsp;그의&nbsp;인생에&nbsp;빛이&nbsp;비치는&nbsp;순간이었다.&nbsp;이&nbsp;책이&nbsp;1983년에&nbsp;출간되었으니&nbsp;그가&nbsp;소설가로서&nbsp;사회적&nbsp;명성을&nbsp;얻은&nbsp;지&nbsp;얼마&nbsp;되지&nbsp;않았을&nbsp;무렵이라&nbsp;그런지&nbsp;두&nbsp;개의&nbsp;상을&nbsp;받기까지와&nbsp;받고&nbsp;난&nbsp;이후의&nbsp;이야기들도&nbsp;여러&nbsp;번&nbsp;중복되어&nbsp;기술되어&nbsp;있다.&nbsp;그러나&nbsp;그런&nbsp;에피소드들에&nbsp;천착하지&nbsp;않는다.&nbsp;그는&nbsp;인생의&nbsp;중심을&nbsp;꿰뚫는&nbsp;듯한&nbsp;시선으로&nbsp;그의&nbsp;과거와&nbsp;현재를&nbsp;음미하며&nbsp;관조하고&nbsp;독자로&nbsp;하여금&nbsp;운명을&nbsp;생각하게&nbsp;하는&nbsp;동시에&nbsp;자신의&nbsp;인생을&nbsp;반추하게&nbsp;한다.&nbsp;평범한&nbsp;일상을&nbsp;조곤조곤&nbsp;이야기하는&nbsp;것&nbsp;같으나&nbsp;읽고&nbsp;나면&nbsp;무언가&nbsp;아련함이&nbsp;남고&nbsp;책을&nbsp;덮고&nbsp;잠시&nbsp;멈춰&nbsp;생각에&nbsp;잠기게&nbsp;하는&nbsp;문장들을&nbsp;구사하면서&nbsp;말이다.&nb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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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탕물&nbsp;강’과&nbsp;’반딧불&nbsp;강’을&nbsp;주문했다.&nbsp;아무래도&nbsp;읽어보지&nbsp;않으면&nbsp;안&nbsp;될&nbsp;것&nbsp;같은,&nbsp;중요한&nbsp;무언가를&nbsp;놓치고&nbsp;말겠다는&nbsp;어떤&nbsp;절박함이&nbsp;느껴졌기&nbsp;때문이다.&nbsp;내&nbsp;나이&nbsp;이제&nbsp;오십이&nbsp;다&nbsp;되었는데&nbsp;서른&nbsp;중반의&nbsp;미야모토&nbsp;테루의&nbsp;깊이도&nbsp;가지지&nbsp;못한&nbsp;것&nbsp;같은&nbsp;내&nbsp;모습이&nbsp;부끄러운&nbsp;밤이다.&nbsp;나도&nbsp;아련함의&nbsp;깊이를&nbsp;체득하고&nbsp;싶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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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시케의숲<br>
#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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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미야모토&nbsp;테루&nbsp;읽기<br>
1.&nbsp;환상의&nbsp;빛:&nbsp;https://rtmodel.tistory.com/1169<br>
2.&nbsp;생의&nbsp;실루엣:&nbsp;https://rtmodel.tistory.com/1241<br>
3.&nbsp;그냥&nbsp;믿어주는&nbsp;일:&nbsp;https://rtmodel.tistory.com/2176]]></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452/85/cover150/k81283232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4528526</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 전도사 -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67193</link><pubDate>Sat, 09 May 2026 23: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6719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6423307&TPaperId=172671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71/coveroff/894642330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6423307&TPaperId=1726719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a><br/>김정아 지음 / 샘터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 전도사<br>김정아 저,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를 읽고<br>‘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 출간 수개월 전 보도된 한 신문기사를 기억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독자, 아니 덕후로서 내게 그 신문기사는 충격, 아니 경이로 다가왔다. 한 사람이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모두 완역하다니! 그것도 10년이나 걸려서! 입이 벌어졌다. 잠시 가짜 뉴스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잠시 후 사실인 걸 확인하고 한동안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nbsp;<br>이미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은 여러 출판사 버전이 존재한다. 번역가는 제2의 저자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한 사람의 목소리로 통일성이 부여된 김정아 박사의 번역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또한 4대 장편은 각각 독립된 작품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철학과 신학, 경험과 깨달음이 출간 순으로 깊고 풍성해지면서 발전해 나간다는 점, 그리고 앞의 작품이 뒤의 작품의 배경이 되고 영감을 부여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10년간 4대 장편을 출간 순으로, 그것도 출판사의 다른 제안을 거절하면서까지, 도스토옙스키가 걸어간 그 새벽에 오롯이 녹아들어 번역을 감행하고 완성해 냈다는 것은 감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전문 번역가 혹은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한 과업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김정아 박사는 진짜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구나! 나보다 백 배 천 배 찐 덕후구나!&nbsp;<br>김정아 박사는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출신이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추천사를 흔쾌히 써주셨던 로쟈, 이현우 서평가의 동창이기도 하다. 박사 학위는 시카고 어바나 샴페인에서 ‘죄와 벌‘에 관한 논문으로 받았다. 귀국하여 강사로 활동하다가, 놀랍게도, 패션계 CEO가 된다. 그녀는 지금도 이 어울릴 법하지 않은 두 정체성을 모두 온전히 소화하고 있다. 아니,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니 적어도 세 정체성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화려하고 독특하며 아주 드문 경력을 보유하고 있는 번역가인 셈이다.&nbsp;<br>그러나 내가 마음 깊이 존경을 담아 감동한 건 그녀의 경력이 아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갔고,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와 고통을 극복해 가며, 돈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변치 않는 마음으로 그의 글을 읽고 번역했으며, 마침내 4대 장편을 완역하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경이롭다는 표현 말고 달리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nbsp;<br>이 책은 그 10년의 기록이다. 제목은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라고 되어 있지만, 이 책은 일기를 넘어선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사랑 고백으로 읽었다.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사랑은 더욱 깊이 느껴졌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그가 남긴 글을 사랑하는 것이다. 김정아 박사는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서 도스토옙스키가 사용한 단어 하나하나를 우리말로 옮기며 그의 의도를 왜곡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것이 그녀만이 할 수 있었던 도스토옙스키 사랑 방법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가장 성실하고 충실한 번역은 '원문의 숨결은 해치지 않으면서, 언어의 깊이는 끝까지 따라가는 번역'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이 과업을 달성했다.<br>인생은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방향이 결정되기도 하고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 김정아 박사 역시 4대 장편 번역 의뢰를 지만지 출판사 대표로부터 제안받게 되면서 이 과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에피소드와 김정아 박사가 처음엔 단칼에 거절했다가 승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이 책에 잘 쓰여 있다. 또한 4대 장편을 번역하기 이전, 그러니까 그녀가 IMF 어려운 시절에 미국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소화할 때 겪었던 이야기들, 어떻게 패션계 CEO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번역을 모두 마치고 독자들의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대한 소회에 대해서도 잘 소개되어 있다. 러시아에서도 관심을 기울일 만큼 이 번역 작업은 역사적인 기록이기에 도스토옙스키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이 에피소드들은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한다.&nbsp;<br>또한 4대 장편을 번역하면서 각 작품과 함께했던 나날들에 대한 소회와 수십 번 읽었을지도 모를 그 본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도스토옙스키를 더욱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이야기들은 한 작가를 사랑하여 인생을 바쳐 번역한 한 사람의 치열한 인생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nbsp;<br>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이미 읽어본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의미가 있다. 각 작품에 대한 짤막한 해제라고 할 수 있을 법한 글이 제법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은 단지 번역가의 개인적인 일기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부분적 해설서를 겸비하고 있는 것이다.&nbsp;<br>출간된 직후 구입해서 하루 만에 다 읽었다.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며 김정아 박사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nbsp;<br>#샘터&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1.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2. 백치: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3. 악령: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4. 미성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6.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7.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8. 분신: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9.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0. 노름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8. 상처받은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9. 악몽 같은 이야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20. 악어: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24. 백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29. 약한 마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40.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86741. 여주인: https://rtmodel.tistory.com/191742.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https://rtmodel.tistory.com/193043.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by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https://rtmodel.tistory.com/199544.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by 김정아): https://rtmodel.tistory.com/2175<br>*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1.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2. 분신: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4. 상처받은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5.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6.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7.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8. 노름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9. 백치: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0. 악령: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1. 미성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1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br>* 도스토옙스키 관련 저서1. 닮은 듯 다른 우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45514372.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1616751]]></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71/cover150/894642330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707133</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모든 독자, 모든 작가의 필독서 - [빌리 서머스 1~2 세트 - 전2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63193</link><pubDate>Thu, 07 May 2026 19: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6319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839287&TPaperId=172631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143/34/coveroff/k11283928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839287&TPaperId=1726319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빌리 서머스 1~2 세트 - 전2권</a><br/>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09월<br/></td></tr></table><br/>모든 독자, 모든 작가의 필독서<br>스티븐 킹 저, ‘빌리 서머스’를 읽고<br>글쓰기를 시작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는 책, 그중 누군가에겐 글쓰기 교본으로 자리 잡게 되는 책, 만약 글쓰기 책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아마도 가장 많은 표를 받게 될 것 같은 책, 출간된 지 26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글쓰기 책 탑 쓰리 (누군가에겐 부동의 넘버 원) 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책, 바로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다.&nbsp;<br>1947년생, 올해 79세를 맞이한 스티븐 킹은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린다. 한국에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공포소설의 거장 정도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은 열 편이 훌쩍 넘을 정도로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니, 이것도 스티븐 킹이었어?"라면서 놀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를테면, '쇼생크 탈출', '미저리', '그린 마일', '스탠 바이 미', '돌로레스 클레이븐' 등이다. 대부분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아마도 현대소설 작가로 스티븐 킹만큼 문학적 성공과 사회적 성공을 모두 거둔 사례는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다. 읽기와 쓰기에 관심 있는 한 사람으로서 스티븐 킹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건 행운이다.<br>고전문학을 좋아하는 내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게 되면 어떨지 궁금했다. 그의 숱한 작품들 중 여러 권을 도서관에서 훑어보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진지하게 완독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첫 작품으로 '빌리 서머스'를 고른 건 우연한 기회에 전혀 상관없는 다른 세 사람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던 탓이다. 연휴 마지막날 집어 들었지만 이틀 만에 다 읽어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빨려 들어가며 읽었다는 말이다. 동시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읽었다는 사실을 꼭 언급해야 한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나 장면들을 처리해 가는 방식, 긴 내러티브를 지루하지 않게 빌드업해 가는 방식, 그런 서사를 끌고 가면서도 인물 내면을 독자들이 공감하고 느낄 수 있도록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을 선보이는 방식까지, 글 쓰는 사람 눈에는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글쓰기 교본의 예문 혹은 실전 편으로 보일 만큼 탁월한 작품이었다. 독자로서 읽어도, 작가로서 읽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작품이라 자부한다.<br>빌리 서머스는 청부살인업자다. 저격수다. 암살자다. 킬러다. 그러니까 어둠 속에서 일하는 존재다. 작품 안에서도 그의 본업에서 완벽한 기술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그로부터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고 그의 내면의 고뇌와 따뜻한 가슴에 공감을 하게 될 것이고, 어느덧 그의 편에 서서 그를 응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돈벌이 방식이 그를 정의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nbsp;<br>입고 손이 근질근질하지만, 이 작품 역시 아무래도 현대소설이라 스토리 스포일러는 치명타일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진 않겠다. 서사와 묘사, 둘 다 탁월하면서도 감동까지 주고, 동시에 글쓰기에 관심 있는 독자들, 작가들에게 훌륭한 소설 쓰기의 실례를 보여준 스티븐 킹에게 박수를 보낸다. 아… 앨리스의 결말이 진짜 결말이었다면… 잔상이 오래 남을 것 같다.<br>#황금가지#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143/34/cover150/k11283928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1433443</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머뭇거림은 믿음으로, 믿음은 확신으로 - [백지 앞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55022</link><pubDate>Sun, 03 May 2026 12: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5502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137654&TPaperId=172550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7/0/coveroff/k73213765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137654&TPaperId=1725502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백지 앞에서</a><br/>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04월<br/></td></tr></table><br/>머뭇거림은 믿음으로, 믿음은 확신으로<br>최은영 저, '백지 앞에서'를 읽고<br>신간을 구매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주로 작가에 대한 신뢰, 출판사에 대한 신뢰, 그리고 책의 제목, 이렇게 세 가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최은영의 여섯 번째 책이자 첫 번째 산문집 '백지 앞에서'는 이 셋을 모두 충족시켰다.&nbsp;<br>마흔을 넘길 무렵 나는 다시 독서의 세계로 들어왔다. 매일 온라인 서점을 들락거리며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 그리고 신간을 훑어보곤 했다. 그즈음이었다. '쇼코의 미소'와 '내게 무해한 사람'이 2년의 시간차를 두고 출간되었다. 최은영이라는 낯선 이름이었다. 문학을 막 다시 읽기 시작했던 시기였고 단편집보다는 호흡이 긴 장편을 선호하는 나는 두 책을 보관함에만 두고 장바구니에 담진 않았다. 2021년이 되어 '밝은 밤'이 출간되었을 땐 미국인데도 불구하고 곧장 구매해서 읽었다. 내겐 이름을 기억해 둘 만한 한국 작가가 나왔다는 강한 인상을 준 작품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출간되었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단편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밝은 밤' 때문에 생겨난 최은영 작가에 대한 신뢰로 인해 바로 구매해서 읽었다. 아무래도 호흡이 짧은 단편들이 모인 책이어서 장편이 주는 충만한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최은영 작가의 문체와 사상 정도를 파악하기엔 충분했고, 나는 최은영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다.&nbsp;<br>일주일 전 즈음이었을 것이다. 신간을 훑어보는 습관을 따라 무심코 온라인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이 책의 예약 판매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특히나 소설이 아닌 산문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읽게 되면 나는 최은영 작가의 장편, 단편, 산문, 이렇게 세 가지 다른 유형의 글을 모두 섭렵하게 되는 것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일부러 읽지 않았다. 신뢰하는 책을 읽기 전의 자세는 철저한 조사가 아닌 신비여야 한다는 게 나만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 책을 순수하게 만날 수 있으니까.<br>제목이 가진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백지 앞에서'라니. 읽고 쓰는 일이 일상이 된 사람에게 이 문구는 골수를 찔러 쪼갤 정도로 깊고 아프게 다가가리라 생각한다. 내게도 그랬다. 백지 앞에서 언제나 무력해지는 내 모습, 동시에 그 자리를 결코 피할 수 없다고 여기는 내 모습, 결국 그 자리 앞에 정직하게 섰을 때 생겨나는 또 해낼 거라는 작은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성취될 거라는 조용한 확신을 얻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최은영 작가도 이런 마음으로 제목을 정한 게 아닌가 싶었다. 머뭇거림만이 아닌, 머뭇거림에서 믿음으로, 믿음에서 확신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자신의 삶을 통해 그려 내 보이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nbsp;<br>하루 만에 책을 다 읽고 내 추측이 얼추 들어맞았다는 걸 알았다. 언제나 소설 뒤에 숨어 있는 최은영 작가가 이번 산문집에서는 앞으로 나와 목소리를 낸다. 필터를 제거한 채 처음 들려주는 진성으로 그렇게 성큼 최은영 작가는 독자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며 다가간다. 마치 잘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nbsp;<br>내게도 그랬다. 특히 최은영 작가가 학창 시절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나는 텍스트로 미처 전달하지 못하는 90년대 상황을 직접 겪은 사람이라 그런지 조금은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84년생인 최은영 작가는 나와 7년 차이가 난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그녀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것이다. 그 시대 학교 안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선생들의 훈계는 너무나도 쉽게 폭력으로 발현되었고, 그 폭력은 당연한 일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선생들로부터의 구타에, 그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고, 그것은 폭력의 암묵적인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근간이었다. 나는 내 눈으로 한 선생이 한 학생을 말 그대로 개 패듯이 구석에 몰아넣고 패는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 너무도 강렬했던 나머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개 패듯이 맞는 개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중학생의 눈에 잘못된 사회구조적 문제가 잘 보일 리 만무했겠지만, 왜 나는 그때 겁에 질린 채 그 광경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건지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최은영 작가 역시 이런 비슷한 학창 시절을 보냈던 듯했다. 그리고 정도는 크게 다르겠지만, 피해자 위치에 놓인 적도 있는 것 같아 그 부분을 읽을 땐 마음이 아팠다.&nbsp;<br>이 책은 여러 꼭지로 이뤄져 있다. 공통적으로 흐르는 기운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마치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하는 듯한 모습까지 그려질 정도로 최은영 작가는 자신의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상태로 어린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 그 오래된 상처가 어른이 된 이후까지 남아 영향을 미쳤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작가가 되어 글을 쓰게 되면서 그 억눌린 자아와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고, 마침내 그 모습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고 담담히 고백하는 장면에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또한 글쓰기의 힘은 필연적으로 치유로 나타난다는,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또 한 번 확인할 수도 있었다.&nbsp;<br>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는 법. 그녀의 마음뿐 아니라 몸도 어려움을 겪었다. 대표적으로는 최근에 수술까지 했던 갑상선암이다. 목디스크에 위경련까지 겪어냈던 최은영 작가. 거기에 이혼이라는 과정까지 넘어서야 했다. 와장창 무너지는 듯한 기분에 그녀의 우울함이 내게도 전염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백한다. 소설 쓰는 일은 인생의 숨구멍이었고, 소설을 썼기 때문에 힘든 상황들을 버틸 수 있었다고. 그리고 소설을 쓰는 것은 인생을 걸 만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최은영 작가의 인생에 글쓰기가 있어서, 그것이 구원의 통로가 되어주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하는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어서. 그녀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 겪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가 닿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br>나는 이 책을 통해 최은영의 글을 읽은 게 아니라 최은영을 읽었다고 느낀다. 두 번은 쓸 수 없는, 가슴 저 깊숙한 이야기들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써 내려간 글은 곧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고 따라 할 수도 없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면의 어려움을 극복해 낸, 그리고 계속 극복해 갈, 최은영 작가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움츠릴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현재의 최은영만이 아닌 과거의 최은영에게도.<br>더 써주길 바란다고 덧붙이고 싶다. 스스로 작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최은영 작가에게 계속 써주길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의 아픔과 상처, 이어진 치유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선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최은영 작가가 그중 하나라고 믿는다.&nbsp;<br>#문학동네&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최은영 읽기1. 밝은 밤: https://rtmodel.tistory.com/14082.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https://rtmodel.tistory.com/17473. 백지 앞에서: https://rtmodel.tistory.com/217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7/0/cover150/k73213765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370049</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경계 위에 서서 그것을 끌어안는 삶 - [경계를 살다 - 문턱 경험에 대한 묵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51960</link><pubDate>Fri, 01 May 2026 10: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519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137065&TPaperId=172519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74/10/coveroff/k532137065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137065&TPaperId=172519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경계를 살다 - 문턱 경험에 대한 묵상</a><br/>에스더 드발 지음, 이민희 옮김 / 비아토르 / 2026년 04월<br/></td></tr></table><br/>경계 위에 서서 그것을 끌어안는 삶<br>에스더 드발 저, '경계를 살다'를 읽고<br>켈트 세계에서 하루는 떠오르는 태양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가는 그 경계의 순간을 기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반복되지만 결코 똑같지 않은 하루를 감사함으로 맞이하는 의식이다.&nbsp;<br>어릴 적부터 박명의 순간을 동경했다. 해뜨기 전이나 해 진 후 빛으로 밝은 상태는 언제나 신비로 다가왔다.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와 있는 빛, 이미 사라졌으나 아직 남아 있는 빛의 시간. 경계가 있는 풍광을 머릿속에 그리거나, ‘문턱은 거룩한 곳‘이라는 말을 묵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였다. 경계는 지금도 내겐 신비로 다가온다.<br>잉글랜드와 웨일즈 사이의 접경지에서 쓰인 이 책은 비단 지리적인 문턱만이 아닌 여러 은유적인 문턱들을 얘기한다. 그 문턱은 건너가기만 하면 되는, 혹은 빨리 건너버려야 할 장애물의 이미지가 아니다. 저자는 그 문턱/경계에 초점을 맞추고 그 위에 산다는 것과 넘어서는 것을 이미지와 상징의 차원에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글이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성과 논리가 가 닿을 수 없는 신비에 이 글은 더욱 근접해 있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감히 사용하기에 이 책은 전혀 모자람이 없다. 오히려 깊이를 맛보게 한다.<br>저자는 문턱을 넘어 낯선 것을 향해 건너가는 일은 하느님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차이와 신비, 그리고 타자성이 드러나는 길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문턱에서 멈출 줄 아는 태도는 곧 쉽게 점유하려 하지 않는 자세를 뜻하며 타자의 눈으로 볼 줄 아는 자세를 익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하느님을 중심에 두면서도 낯선 이에게 집중하는 삶을 따랐다고 한다. 하느님에게서 사람을,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삶,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타자에게 다가가고, 타자를 알기 위해 하느님과 관계 맺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내린다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하지만 경계에 뿌리를 내린다면 양쪽에 동시에 열려 있을 수 있다.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nbsp;<br>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성의 시대다. 양극화 현상으로 세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뭉쳐야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경계에 서 있는 건 어정쩡한 회색지대에 머무는 우유부단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문턱/경계는 그런 회색지대를 말하는 게 아니다. 회색지대는 양극을 모두 부정하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세력을 뜻한다면, 문턱/경계는 양쪽에 심겨 있어 모두 존중하며 끌어안는 이미지로 그려지기 때문이다.&nbsp;<br>문턱/경계에서 해야 할 일은 경청하고 배우는 일이다. 저자는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차이는 위험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것. 둘째, 불확실성 속에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머무르도록 준비할 것. 셋째, 모호함을 기뻐하고 기꺼이 끌어안을 것. 이 모든 단계는 확실성이 주는 안락함을 내려놓는 과정이며 불확실성 자체가 오히려 선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말까지 잊지 않는다. 경계에 선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가장 겸손하면서도 가장 치열하고 가장 전복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nbsp;<br>불확실성 속에 사는 것과 불안정하게 사는 것이 다르다는 말에 나는 반가운 마음에 밑줄을 그었다. 평소 내 생각과 공명했기 때문이다. 뿌리를 바른 곳에 단단히 내리고 있다면 불확실할 수는 있어도 불안정할 수는 없다. 나의 뿌리가 확실하다면 불확실성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고, 전복될 수도 있을 불확실성 가운데에서도 안정함을 누리며 전진할 수 있으며, 모호함 가운데에서도 그것이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면서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다.&nbsp;<br>마지막으로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삶에서 문턱이 연속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이 문턱들은 삶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하나하나를 용기와 섬세함으로 마주하며 살아내야 한다고. 이 책을 통해 우리들 내면의 풍경 속에서 경계 지대를 찾아보고 거기에 머물러 보라고.&nbsp;<br>확실성의 신화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장애물처럼 여기고 있었던 문턱/경계들을 시간을 내어 하나둘 떠올려보자. 박명처럼 중첩되는 순간들이 가진 신비와 그 고유한 의미를 놓치고 있진 않았는지 눈을 감고 성찰해 보자. 어쩌면 거기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경계를 인지하고 그 위에 서서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br>#비아토르&nbsp;#김영웅의책과일상]]></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74/10/cover150/k53213706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741050</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어쩌다 매일 읽고 쓰고 달리게 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36683</link><pubDate>Fri, 24 Apr 2026 21: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3668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28336&TPaperId=1723668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2/5/coveroff/8970128336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28336&TPaperId=1723668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a><br/>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01월<br/></td></tr></table><br/>어쩌다 매일 읽고 쓰고 달리게 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br>무라카미 하루키 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br>매일 하는 일이 있다. 읽고 쓰고 운동하기. 약 십 년 전부터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내겐 일종의 구원의 통로였다. 인생에서 아주 잠깐 잘 나가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일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다. 실패를 몰랐다. 책을 읽느니 차라리 논문을 읽었다. 글을 쓰느니 논문의 초고를 쓰거나 발표 자료를 준비했다. 집중력이나 지속력이 아닌 오직 재미를 위해 운동을 했다. 당연히 삶의 균형은 없었다.&nbsp; 있을 수가 없었다. 일에 치우친 삶을 성공자의 그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목표는 피라미드 상층부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철저한 성공지향적인 가치관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런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내 인생의 최고로 낮은 점에 이르렀다.&nbsp;<br>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읽고 쓰고 운동하기, 이 세 가지를 내 삶에 아무런 면역 거부 반응 없이 자연스레 장착시키게 된 건 오로지 내가 그 당시 깊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고 구원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절박했다. 에고가 붕괴된 내면은 취약한 상태다. 무언가가 깃들기 쉽다. 그 시기에 누구를 만나게 되는지, 무엇을 하게 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현저하게 달라지곤 한다. 다행히 나에겐 은인과의 만남이 있었다. 생애 첫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난 바로 그날이었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다. 언제나 진정한 구원은 외부에서 오는 법이다. 그 만남을 시작으로 나는 다시 책을 읽게 되었다.&nbsp;<br>중학생 이후 독서다운 독서는 처음이었다. 읽고만 있을 수 없었다. 쏟아내야 할 곳이 필요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던 신앙도 그 시기를 겪으며 안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고, 어린 아들과 둘이 미국에서 외나무다리 같은 삶을 살아내야 했던 시기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글쓰기밖에 없었다. 원래 운동을 좋아했던 나도, 커리어가 정점을 향해 가는 시기에 처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당시엔 운동하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몸은 망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것도 모른 채 나를 더 혹사시켰다. 그러다가 경미한 뇌경색 증상으로 한 번 쓰러지기도 했고, 두통과 편두통 때문에 매일 진통제를 달고 살았으며, 높은 혈압을 잡기 위해 혈압약을 먹기 시작했다. 키 180인 나는 몸무게 93킬로그램까지 찍었다.&nbsp;<br>읽고 쓰기 시작하면서 잃었던 신앙도 다시 방향을 찾아갔다. 다시 운동도 하기 시작했다. 두통도 편두통도 가끔 불청객처럼 찾아오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 4년째인 2026년 4월 현재, 나는 몸무게 85킬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세 달째 달리기를 지속하고 있다. 읽고 쓰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나는 매일 읽고 쓰고 달린다. 누군가가 나에게 "Who are you?"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매일 읽고 쓰고 달리는 사람이라고. 부디 이 대답을 오래도록 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br>지인이 이 책을 선물해 주었다. 하루키 책은 우선순위에서 미뤄두었기에 그리 반갑진 않았지만 '달리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하루키처럼 나도 쓸 수 있다면 영광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물 받자마자 이틀 만에 읽어버렸다. 이 책은 에세이를 빙자한 회고록이다. 단 인생이라는 두루뭉술한 주제가 아닌, 달리기라는 비교적 구체적이고 명확한 주제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정리한 산문이라 할 수 있겠다.&nbsp;<br>이 책에 따르면 그는 소설가로 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매일 10킬로미터를 수십 년간 달리고 있다. 이른 아침에 달리기를 마치고 점심 먹기 전까지 글을 쓴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해 오전 중에 일을 모두 마친다. 오후에는 휴식을 취한다. 독서도 하고 산책도 하고 소소한 인간관계도 한다. 그는 이 단순한 삶을 매일 반복한다. 1949년생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현재 77세다. 그는 지금도 매일 달린다. 그리고 매일 쓴다. 이 두 가지 동사가 그의 정체성을 이룬다. 그는 러너이자 작가이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회고록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정체성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밝힌 책이라 하겠다.&nbsp;<br>매년 마라톤 풀코스를 뛰고 철인삼종경기에 출전하는 하루키 할아버지를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동시에 다작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책을 출간하며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하루키 할아버지도 떠올려 본다.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만으로 나는 괜스레 흥분이 되고 묘한 기쁨을 느낀다. 아마도 무언가를 묵묵히 꾸준하게 하는 고집스러운 사람의 조용한 승리가 내겐 전율을 가져다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를 보며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가 작가이기만 해서는 실망하는 면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러너였다. 지금도 러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실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나로부터 영원한 실망 거부권을 획득해 버린 것이다.<br>책에는 달리기 이야기만 나오진 않는다. 소설가에게 필요한 자질을 세 가지로 요약하는 부분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재능, 집중력, 그리고 지속력이 바로 그것이다. 재능은 선천적인 것이지만, 집중력과 지속력은 후천적이어서 본인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다. 재능까지 타고난 하루키는 집중력과 지속력도 타고난 사람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달린다. 나는 이 점이 인상 깊었다. 매일 달리면서 집중력과 지속력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것이다. 후천적인 이 두 능력은 게으름이 잦아들면 금세 퇴화해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지독한 성실함. 그 고집.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자에게 바칠 것은 존경 밖에 없으리라.<br>이제 세 달째 달리는 초보 러너인 나는 수십 년간 매일 달려온 하루키의 코딱지만큼도 못하겠지만, 나는 감히 그를 나의 선배라고 스승이라고 여길 생각이다. 읽고 쓰고 달리는 자로서 말이다.&nbsp;<br>#문학사상#김영웅의책과일상&nbsp;<br>* 하루키 읽기1. 노르웨이의 숲: https://rtmodel.tistory.com/6552.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https://rtmodel.tistory.com/8203. 양을 쫓는 모험: https://rtmodel.tistory.com/1211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https://rtmodel.tistory.com/19135. 일인칭 단수: https://rtmodel.tistory.com/19576.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216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2/5/cover150/8970128336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20589</link></image></item><item><author>Youngwoong Kim</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안정과 모험, 일상과 예술, 죽은 삶과 살아있는 삶 - [달과 6펜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14563</link><pubDate>Mon, 13 Apr 2026 19: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7068101/1721456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386&TPaperId=172145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77/coveroff/s692639624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386&TPaperId=1721456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달과 6펜스</a><br/>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06월<br/></td></tr></table><br/>안정과 모험, 일상과 예술, 죽은 삶과 살아있는 삶<br>서머싯 몸 저, '달과 6펜스'를 읽고<br>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으나 끝내 제목은 설명되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해설을 일부러 읽지 않고 유추를 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영어 단어 'lunatic'이었다.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정신 나간' 혹은 '미친'을 뜻한다. 나는 '광기 어린'이라고 읽었다.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달’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광기를 부추긴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늑대인간이 짐승으로 변하는 시간은 보름달이 뜬 밤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하이드가 악행을 저지르는 밤거리 위에도 달이 떠 있었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모해 가는 공간적 배경 역시 도심의 밤거리와 차가운 달빛이었다. 문학적으로 달빛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기를 발현시키는 어둡고 은밀한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nbsp;<br>이러한 착상을 '달과 6펜스'에 적용시켜도 말이 된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을 '광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스트릭랜드가 아내와 두 자녀, 안정된 직장, 집, 재산까지 모두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니 그려야만 했기 때문에, 파리로 떠났던 날 밤하늘에도 보름달이 떠있지 않았을까 싶다. 스트릭랜드의 떠남은 이성과 합리로는, 나아가 윤리나 도덕으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 나는 이를 광기 말고 달리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달은 이 작품 속에서 직접적인 배경이나 소재로 등장하진 않지만, 마치 늑대인간이나 하이드나 조커를 발현시킨 것처럼 스트릭랜드 안에서 잠자고 있던, 그렇다고 개성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도 모자란, 광기 어린 그 무엇을 깨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만들었던 것이다.&nbsp;<br>이러한 패턴은 비단 스트릭랜드에게서만 발견되지는 않는다. 작품 속에서 상황과 원인은 다르지만 평소와 전혀 다른 삶으로의 전환을 이행해 버리는 인물이 세 명 더 등장한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나의 상상 속에서는 이들이 갑작스러운 삶의 전환을 이행하던 날에도 보름달이 떠 있었을 것만 같다.&nbsp;<br>먼저 블란치 스트로브의 경우다. 이 여인은 처음엔 더크 스트로브의 아내로 등장한다. 하지만 어느 날 남편의 간곡한 부탁으로 죽기 직전의 찰스 스트릭랜드를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간병하게 되는데, 그 기간에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남편도 집도 재산도 모두 버리고 스트릭랜드를 따라나서겠다고 선언한다. 남편도, 화자도, 심지어 스트릭랜드조차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도대체 왜 그녀는 그런 결단을 내렸던 것일까. 스트릭랜드에게 비친 달빛의 힘이 블란치 스트로브에게까지 미쳤던 것일까. 정황적인 추론으로는 육체적 관능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부정적이고 불쾌감을 주는 외로운 독고다이 캐릭터인데 저자인 서머싯 몸은 그를 남성적인 육체를 가진 인물로 그려놓았다. 아마도 블란치는 간병 중 찰스에게 모성애와 함께 본능적인 관능이 깨어남을 느끼고 남편으로부터 얻지 못했던 쾌락을 향유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듯하다. 이에 대한 화자의 해석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 그녀는 다정하면서도 성마르고, 생각이 깊으면서도 분별이 없던 복잡한 여자였지만 이제는 딴사람이 되어 버렸다. 바커스 신의 무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욕망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녀가 그런 비상식적인 결단을 내린 건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은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 함구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스트릭랜드로부터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무엇을 얻지 못했던 듯했다.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으며, 입과 식도가 타버려 극심한 고통을 받다가 병원에서 죽음에 이른다. 아, 그녀의 죽음은 또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nbsp;<br>두 번째 인물은 책의 후반부에 잠시 소개되는 아브라함이라는 유능한 의사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실력을 가진 천재 외과의였다. 그에겐 모든 게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휴가차 배를 타고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했을 때 그는 어떤 계시와 같은 순간을 맞이한다. 에피파니였을까. 모든 게 돌연 새롭게 보이고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나머지 인생을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었다. 그는 그 순간 이후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만 것이었다. 실제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천재적인 능력에 힘입어 남은 인생을 부와 명예와 권력을 거머쥐고 살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어쩌다가 이런 기구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 아니, 그에게 선택권이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단순한 충동에 휩쓸렸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에게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삶은 무언가 압도적인 힘에 의해 이끌려 오게 된 외나무다리가 아니었을까. 이를 광기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과연 설명할 수 있을까.<br>나머지 인물은 찰스 스트릭랜드가 마지막 숨을 쉬었던 타히티에서 끝까지 그의 곁에 머물며 그를 도왔던 아내 ‘아타’이다. 비록 중간에 티아레가 중개인으로 역할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아타는 타히티에 와서도 여전히 독고다이 캐릭터로 살아가는 스트릭랜드의 아내가 되어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그를 도우며 살기로 작정한다.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다. 그녀 혼자만의 결정이었다. 앞에서 소개했던 블란치가 스트릭랜드를 따라나섰던 이유와는 다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타는 스트릭랜드의 모든 것을 수발했고 아이까지 낳았으며 나중에 문둥병으로 죽어가는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 결연한 여인이었다. 무엇이 그녀에게 이런 삶을 선택하게 했던 것일까. 아니, 이번에도 이 질문은 틀린 질문일 것이다. 그녀에게도 어떤 운명 같은 순간이 닥쳐왔고 그저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무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이런 갑작스러운 삶의 전환을 광기라는 표현을 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br>찰스 스트릭랜드, 블란치 스트로브, 아브라함, 그리고 아타, 이렇게 네 인물은 이 작품 속에서 일생일대의 운명 같은 삶의 전환을 맞이했고, 비록 끝은 다르지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 없이 마지막까지 후회 없이 그렇게 살았다. 한동안 내 머릿속은 이들의 패턴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바빴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솔직히 내 작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어떤 근거를 대며 설명하려 해 보아도 근사치에 머물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감이 가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현실에서는 충분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엔 이런 일이 의외로 많이 일어나지 않는가. 나는 다시 겸손해진다. 세상엔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겸허히 인정하게 된다. 그것의 시작이 광기이든 무엇이든 상관은 없다. 광기라고 해석하는 것조차 하나의 이성적인 접근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다.&nbsp;<br>그렇다면 이번엔 제목에서 '달'을 제외한 나머지 ‘6펜스’에 대한 해석을 해 볼 차례다. 작품을 다 읽고 달의 의미를 유추했더니 그와 대조적인 이미지로써 6펜스가 자연스레 해석되었다. 6펜스는 돈이다. 달이 안정적인 삶 혹은 일상에서 사람을 끄집어내는 원인으로 작용했다면, 6펜스는 그와 반대되는 힘일 것이다. 달이 원심력이라면 6펜스는 구심력으로 작용했을 거라는 말이다. 즉 안정적인 삶 안에 가둬두려는 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앞에서 언급한 네 인물은 모두 6펜스의 삶으로부터 달의 이끌림으로 인해 일생일대의 대전환을 이뤄낸 사람들이다. 원의 바깥으로 궤도 이탈을 이뤄낸 소수의 사람들인 것이다.&nbsp;<br>6펜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다수다. 그들은 주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대의 조류이기도 하고, 그 시대의 얼굴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세속에 따라 살아가는,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그것이 추구하는 방향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그 안에서 안정과 만족을 얻으며 살아가는 무리들인 것이다.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익명성에 의지하여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살아간다.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네 인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6펜스의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화자처럼 나름대로의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달의 삶과 6펜스의 삶 양쪽 모두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부류도 존재할 테지만 말이다.&nbsp;<br>문제는 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바로 옆에 존재하는 6펜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문자적으로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행운을 거머쥐는 자가 되기도 하며, 기회주의자처럼 눈치를 보다가 자신의 이익에 위해 더욱더 견고한 6펜스의 삶을 살아가는 자로 강성해지기도 한다.&nbsp;<br>먼저 스트릭랜드의 첫 아내의 경우다. 그녀는 전적으로 피해자로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모든 걸 버리고 떠나면서 편지 한 장 달랑 남겼는데, 그 편지에는 왜 떠나는지에 대한 이유는 적혀 있지도 않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만 적혀 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갑자기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로서 느꼈을 그 황당함이 적이 공감이 간다. 그리고 남편이 떠난 이유가 어떤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라는 말에 남편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반응 역시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그녀는 남편이 달의 삶을 사는 사람인 줄 진짜 몰랐던 것일까. 부부인데도 남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속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래놓고도 안정적인 부부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일까. 스트릭랜드의 인격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는 위선과 거짓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아마도 스트릭랜드는 6펜스의 삶에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깊숙이 빠져 살아가는 아내와 대화조차 되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었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달의 삶을 사는 사람과 6펜스의 삶을 사는 사람 사이의 소통이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하는 물음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br>그다음으로는 블란치 스트로브의 남편 더크 스트로브의 경우다. 그 역시 스트릭랜드 부인의 데칼코마니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떠난 아내 때문에 불행을 겪게 되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은 없었지만 스트릭랜드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매우 드문 사람이었다. 그는 체면도 자존심도 내던지고 광대짓을 기꺼이 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선한 인물이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스트릭랜드를 온마음 다해 도운 것밖에는 없다. 스트릭랜드를 일견에 싫어한 아내를 간신히 설득해서 아픈 스트릭랜드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자고 했던 사람도 더크 스트로브였다. 그런데도 그는 친구도 잃고 아내도 잃는 신세가 되고야 만다. 저자는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인생은 익살극의 소란스러운 대사로 가득 찬 비극과 같았다." 그래서일까. 익살극을 펼치며 그의 너그러움 성품을 발휘해도 그의 삶은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더크 스트로브를 보며 나는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 역시 이런 말을 덧붙인다. 허를 찌른다. "그처럼 허다한 모순을 안겨주고선 이 사내로 하여금 당혹스럽고 냉엄한 세상에 맞서게 한 거 보면, 조물주의 장난도 잔인하기만 하다." 전적으로 동의가 되는 문장이지 않을 수 없다. 뭐라고 분석할 수조차 없는 이 인물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기로 한다.&nbsp;<br>마지막으로는 알렉 카마이클이라는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알렉산드리아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그로 예정되어 있던 여러 자리는 아브라함에 밀려 언제나 2등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알렉 카마이클의 것이 되었다. 그는 대여섯 개 병원에서 정식 의사직을 가지고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다. 화자의 친구이기도 한 그는 화자에게도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 모든 게 아브라함 덕분이라고. 하지만 그가 아브라함에게는 인격이 없었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화자뿐 아니라 나 역시 반기를 들 수밖에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인격이 없었던 게 아니라 6펜스의 삶이 주는 최고의 복을 넙죽 받아들이는 이해타산적인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질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찾아 용기 있게 떠난 사람이었다. 알렉 카마이클은 6펜스의 세상에서는 아브라함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이 정착한 달의 삶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외계인에 불과했다. 그래서일까. 알렉 카마이클의 삶에서 공허함이 느껴지는 이유는.<br>인간의 삶을 달의 삶과 6펜스의 삶, 이런 식으로 둘로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분법이 아니라 방향으로 해석하면 생각해 볼 만한 거리가 많은 것 같다. 6펜스의 삶이 인간의 모든 삶인 것처럼 믿고 그 안에서 경쟁하고 피라미드 상층부를 차지하려 애쓰며 안정과 만족을 얻으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광기라는 강한 어감의 단어를 사용할 만큼 인간 내면에 깃들어 있는, 다시 말해 6펜스의 삶에 반대되는 가치를 지향하며 언제나 저 너머를 궁금해하고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안정과 만족이 아닌 인간다운 그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내 삶은 어느 쪽을 향하고 있을까. 나는 잘 정돈된 행복만을 얻으면 된다고 여기고 있을까. 물질적인 만족과 기쁨이면 만사가 괜찮다고 여기고 있을까. 나는 안정을 원할까, 모험을 원할까. 내 삶은 너무도 안정적이어서 죽은 것 같은 삶일까, 불안정하고 불확실하지만 언제나 길 위에서 오늘을 살아내는 살아있는 삶일까.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은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극단으로 보여준 이 소설을 통해 우린 우리의 현재 삶의 방향을 성찰하고 미래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바라기는 6펜스의 삶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달의 삶을 잊지 않고 항상 추구하며 살아내려고 애쓰는 삶이 되면 좋겠다. 가능할 런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br>#민음사&nbsp;#김영웅의책과일상&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3/77/cover150/s692639624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7763</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