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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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의 문체


최은영 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서양고전문학을 선호하는 나는 한국소설도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려면 베스트셀러 위주로 이미 입소문 난 책들을 먼저 살피게 된다. 최은영 작가는 수년 전부터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이미 주목받는 차세대 한국 현대소설가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책 소개를 보고는 읽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모두 단편집이었기 때문이다. 단편이 주는 의도적인 불친절함과 불가피한 아련함 (혹은 무책임함)보다는 복잡하고 장황하더라도 깊고 풍성함으로 긴 시간 푹 빠져들 수 있는 장편을 나는 사랑한다. 참고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고전문학은 한결같이 장편이다. 나는 책으로부터 여러 방 잽을 맞는 것보다 묵직한 어퍼컷 한 방을 기대한다. 그리고 벽돌책의 매력은 그것을 깨본 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2년 전 '밝은 밤'으로 최은영이 다시 회자되었을 땐 미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구해서 읽었다. 역시 단순한 이유였다. 장편이었기 때문이다. 읽고 나서 감동했다. 그리고 뜻밖이었다. 여느 한국소설처럼 기발하고 특별하고 신기한 사건이나 상황이 전제되지 않은, 어찌 보면 뻔한 인생을 써 내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뻔하지 않게 개별성에서 보편성을,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전문학에서 내가 느끼던 것과 비슷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짐했다. 최은영의 다음 작품이 나오면 그것이 단편집일지라도 꼭 읽어보겠노라고.


작년에 출간된 이 책은 일곱 편으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이미 모두 다른 지면에 실린 글들을 모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연작 소설도 아니고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진 단편 모음이다. 보통 단편집은 가장 먼저 소개되는 글이 대표작인 경우가 많다. 이 단편집도 그랬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는 작품은 첫 단편의 제목이자 이 책 전체의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 지망생 화자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이 작품은 늦깎이 대학원생일 때 만난 한 강사에 대한 기억과 그녀가 남긴 흔적들을 돌아보며 현재 자신의 위치를 객관화하여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 강사가 화자에겐 희미한 빛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고, 목적지가 어딘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녀처럼 그저 더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덧 과거 그녀의 위치에 와있는 '나'는 여전히 그 희미한 빛을 쫓아, 동시에 희미한 빛이 되어, 그녀를 종종 떠올리며 하루를 살아간다. 단편소설의 한계이자 그것의 고유한 매력을 아련함에서 찾는 나는 옛 기억의 회상, 그리움, 그리고 그것이 이루는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는 것을 글로써 써내는 데에 침착한 최은영의 문체가 적격이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 작품 '몫'과 다섯 번째 작품 '파종'에서도 글쓰기에 관련된 소재가 중요하게 활용된다. 한편 거의 모든 작품에서 크고 작게 다뤄지는 주제는 여성이 중심에 놓인 사회적 약자의 삶과 그 삶에 대한 연민, 그리고 그들을 짓밟고 이용해 먹는 자들을 포함한 사회 구조에 대한 고발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는 젊은 여자 강사를 대하는 학생들의 무례함을 잠시 언급하는 반면, '몫'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이야기의 흐름이 'A여자 대학교' 학생들에게 가해진 집단 폭력, 'B대학교 대학원'에서 일어난 교수 성희롱 사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편을 죽여야 했던 여자들과 그렇게 살인을 해야 아내가 살 수 있는 사회구조의 잔인함에 대한 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작품 '일 년'에서는 주로 남자들로 이루어진 정규직 사원들과 함께 일 하게 된 일 년 계약 인턴의 비참한 현실을, 네 번째 작품 '답신'에서는 가부장적 아버지의 폭력성과 미성년자 여자아이를 성 노리갯감으로 삼는 학교 선생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그 폭력에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현실을 폭로한다. 


'파종'에서는 이혼을 경험한 여자와 그녀의 딸이 살아가는 상처 입은 삶을 그리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에 개입하여 직접적인 도움이 되어주는 한 사람의 인생과 그가 죽고 남긴 흔적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남은 모녀에게 희망으로 앞날을 비추는 모습도 잔잔하게 보여준다. 


여섯 번째 작품 '이모에게'에서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받은 여자들의 상처와 더불어 자신을 돌봐주었던 이모의 육아와 훈육방침에 대한 화자의 해석이 실망, 애정 없음, 차가움에서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독립된 인생과 성숙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여자의 삶을 그려낸다. 


마지막 작품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집에서 길러져야 했던 한 여자의 기구한 인생을 소개하면서 두 딸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평생을 겉도는 그녀의 삶을 비추며 먹먹한 가슴으로 부끄러움에 대해 고찰하게 만든다.   


이런 주제들로 모아진 글이다 보니 아무래도 책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침울한 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둡지는 않다. '밝은 밤'에서 느꼈던 최은영이 가진 문체의 '밝음'이 낳은 효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제를 다루는 방법이 진부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작품을 읽어나가기가 어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한강 작가의 글이 깊고 무거워 읽기 부담되는 독자에게 최은영 작가의 글을 권하고 싶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나는 최은영 작가의 글에 좀 더 무게가 실리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진다. 여성이 중심에 놓인 글만이 아닌 다른 주제를 다루는 이야기도 도전해 보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말이다. 그러면서도 최은영 작가만이 가진 '밝음'의 문체가 멈추지 않고 고유하게 빛나기를 기대한다.


*최은영 읽기

1. 밝은 밤: https://rtmodel.tistory.com/1408

2.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https://rtmodel.tistory.com/1747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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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진화론과의 대화 - 성경과 진화론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에 대한 비평 내일을 위한 신학 시리즈 3
신국현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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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와 아직 사이의 요원한 대화


신국현 저, '유신진화론과의 대화'를 읽고


1. 후기에 앞서


먼저 이 리뷰는 세움북스 대표님의 리뷰 요청을 수락한 이후 기증된 책을 읽고 쓴 글임을 밝혀둡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제가 구매하지 않고 기증받은 책을 리뷰할 때에는 냉철한 비판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좀 더 고려해서 반영하곤 합니다. 감사하게도 이번엔 대표님께서 비판적인 시각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기에 저는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조금은 더 객관적이고 조금은 더 냉철하게 이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뷰는 어디까지나 저의 주관적인 입장이 반영된 글이라는 점을 숙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시대의 자식이고, 제 글은 제 안에 자리 잡은 세계관, 사상, 신앙 등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후기에 앞서 저의 소개를 간략하게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1996년 포항공대 생명과학과에 학부로 입학하여 졸업한 이후 2009년 같은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11년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끝내고 스탭사이언티스트를 거친 후 2022년 6월에 한국에 들어와 현재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실험생물학자입니다. 제가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연구했던 내용은 분자생물학, 세포생물학, 발생생물학, 마우스유전학, 혈액학 등이 기반이었고, 그 이후로도 저는 비슷한 영역에서 쉬지 않고 현장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과학자인 동시에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자 주님이시고 지금도 성령으로 믿는 자 안에서 내주, 인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지금도 매일 살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적인 복음에 갇혀 있다가 뒤늦게 복음의 공공성을 깨닫고 교회, 일터, 가정, 그 어느 곳에서도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 그리고 말과 이론이 아닌 삶 자체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려고 성령을 의지하며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2. 후기 
(1) 총평


이 책을 다 읽어내기는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난이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쓰였습니다. 이 책이 읽기 어려웠던 이유는 읽는 내내 답답함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시대착오적인 표지그림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쓰인 '대화'라는 단어 때문에 저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책을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의 기대는 기대만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다행스러운 건 이 책에서 비신사적인 글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사적인 자세를 유지합니다. 저자의 훌륭한 인격을 대변하는 점이자 본받을 점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동등한 상대와 대화할 때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반은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머지 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교정하고 가르치려는 자세를 고수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저자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글은 마치 핍박받고 비난받았던 과거의 억울함을 풀고자 노력하는 글 같아 보였습니다. 제가 느낀 답답함과 불편함은 아마도 저자의 울분이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 그런진 잘 모르겠지만, 저자는 시종일관 스스로를 피해자의 위치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과거에 받았던 피해가 부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듯한 의도가 연민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스스로를 한 개인이 아닌 '정통 기독교'를 대변하고 성경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처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반복적으로 "성경은……", "성경에서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등의 문구를 사용합니다. 저자가 대화 상대로 가정하는 유신진화론이 야기하는 문제점들 (이 문제점들은 이미 숱하게 창조과학 진영의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논쟁했던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신진화론자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조차도 이 문제점들을 알고 있으며, 이것들이 해결될 수 있는 신학적 해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을 낱낱이 나열한 이후 저자의 입장이 그대로 담긴 것이라 생각되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 입장의 성경 해석을 덧붙일 때마다 말이지요. 마치 저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습니다. 여기서 비판할 가장 중요한 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대화하고 비판하는 상대가 유신진화론이라는 사실입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비판할 점들은 모두 표지에 다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은 내용이 아무런 반전 없이 표지와 일맥상통하는 책인 것입니다.


(2) 유신진화론


개인적으로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 마치 유신진화론이라는 분과 학문이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학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유신진화'라는 용어도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진화 중 유신진화도 있고 무신진화도 있을 것 같은 불필요한 추측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계에 불필요한 문제점들을 던져버리는 무책임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리고 창조과학자들과의 오랜 논쟁을 살펴봐도 충분히 알겠지만, 언제나 문제는 과학의 영역이 아닌 신학의 영역, 즉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이런 용어의 사용은 한국 기독교 안에 팽배한 잘못된 고정관념, 즉 과학과 신학이 마치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여기는 풍토를 더 견고히 하는 효과를 낼까 봐 우려가 됩니다. 또한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에는 창조라는 의미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자도 인정하듯 유신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습니다. 무신론자 혹은 유물론자와 전혀 다른 입장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화적 창조'라는 용어 사용을 저는 선호합니다. 이미 이것은 제가 과신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몇 년 전에 나왔던 얘기 중 하나입니다. 이런 얘기가 종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현상이 저는 여전히 기이하고 안타깝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여전히 근본주의자들과의 대화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것 같고, 요원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진화는 신을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지금도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일 뿐입니다. 몇 년간 우리를 괴롭혔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을 진화라는 현상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해마다 접종하는 독감 예방주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항생제도 먹히지 않는 슈퍼박테리아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든, 아직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믿든, 선택은 본인의 자유이지만,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지킬 수 있을지 저는 의문입니다. 저자는 책에서 진화를 거부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합니다. 저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고백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중력을 거부한다고 하는 것과 한치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를 저자의 용기라고 봐야 할지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저자는 아마도 ‘진화’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진화주의’, 그중에서도 ‘진화절대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즉, 단어 선택을 잘못하신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오해와 비난을 받지 않도록 용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저자의 불찰일 것입니다. 거부할 대상이나 비판할 대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대화라는 단어로 옷을 입혀 책을 쓰시다니요. 적어도 이 책은 감정에 호소하는 책이 아니라 지성에 호소하는 책인데 말입니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충분히 지성을 갖춘 분이라 저는 참 이상하기만 합니다. 물론 저자가 진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성경을 수호하고자, 정통 기독교를 유지하고자 하는 숭고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진화를 거부한다고 성경을 수호하고 정통 기독교를 유지할 수 있을지요. 나아가 이런 의문까지 듭니다. 진짜 저자가 수호하고 유지하려는 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 신앙인지, 그렇다면 저자의 신앙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권장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에 가깝습니다. 또한 과학이라 해놓고 과학계에 논문도 출간하지 못한 채 공식적인 인정도 못 받고 교회 안에서 세미나 형태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유사과학인 창조과학을 두둔하면서 창조과학이 반지성도 아니고 그저 비주류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주류, 비주류 문제가 아닙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과학계에서 목소리 큰 그룹이 힘을 가진다고 생각하시진 않겠지요? 얼마든지 과학적으로 실험이나 관찰 증거를 대고 논문으로 출간하면 창조과학도 정정당당한 하나의 과학으로 대우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과학이란 용어 자체부터가 모순이듯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랍니다. 그들의 설명 중엔 과학적 방법론이 불완전한 형태로 군데군데 사용되긴 하지만요.


성경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건 건강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언제나 은혜로운 책이자 아무런 모순이 느껴지지 않는 책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여 하나님과 비슷한 경지에 올랐거나, 성경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교회 목사님이 해주시는 말씀만 듣고 아무 생각 없이 주문 외우듯 성경을 읽는 사람. 저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은 제대로 읽게 되면 은혜롭다기보다는 상당히 불편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체적으로 모순되는 부분도 많고 배경 이해가 없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와 목회자의 성실한 공부와 연구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위치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저자도 이러한 신학자이자 목회자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유신진화론자들이 진화론적 개념을 도입하여 아무 문제없는 성경적 창조 개념을 무리하게 수정하고 난도질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유신진화론자들이 성경의 진술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창조 개념을 믿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요. 여기서 저자가 사용한 '성경의 진술대로’, ‘완전한 창조 개념’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성경 해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저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경적 창조 개념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지요. 저에겐 저자가 스스로 근본주의자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거나 다름없는 부분으로 보였습니다. 이 책은 그러므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믿는 근본주의 기독교 목사의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물인 것입니다. 


과학은 지속해서 발전해 나갑니다.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모르던 과학 지식을 현대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과학적 지식이 미천한 시대에 쓰인 성경이라 하더라도 그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약성경이 기록된 시기는 코페르니쿠스가 나타나기 훨씬 전이었지요. 천동설을 믿고 있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성경에는 그런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었을 겁니다). 저는 바로 여기가 신학이 시대의 발전을 막론하고 항상 필요한 지점이자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과학뿐 아니라 여러 지식적이고 문화적인 부분의 확장에 따른 성경 해석은 과학의 영역이 아닌 신학의 영역에서 이뤄져야 할 몫일 테니까요.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는 개념들과 관념들에 부합하면서도 여전히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을 수 있도록 해석을 연구하는 게 바로 신학자의 역할이겠지요.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여성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이 시대에 바울 서신은 물론 구약의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일 테니까요. 


굳이 저 자신을 분류하자면, 저 역시 유신진화론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진화를 신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지금도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이기 때문에 저 역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사람이고, 과학으로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그럴 수조차 없을 것 같지만, 기원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 문제에 대해 진화가 내포하는 의미와 성경 해석과의 불일치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동시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영적인 사실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이러한 불일치를 풀어줄 수 있는 신학적 해석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반지성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유신진화론자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하는 유신진화론이라는 상대는 그 의미가 굉장히 모호합니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저자의 무분별한 용어 사용 때문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진화, 진화론, 진화주의, 이 세 가지 단어의 차이를 잘 모르거나 애써 무시하는 듯합니다. 저자가 책에서 유신진화론이라고 뭉뚱그려 비판하는 대상은 근본주의 기독교의 여집합 정도로 여겨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유신진화론은 진화절대주의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저자는 실제로 유신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을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법칙으로 믿고,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들을 한낱 신화나 설화로 치부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단순히 진화론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앞서 밝혔듯이 저 자신도 유신진화론자이지만 저는 진화론을 절대적인 법칙으로 보지 않습니다. 저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향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일까요? 특히 기원에 대해서는 진화라는 현상을 연구하는 진화론이 그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기원 문제는 진화라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고 나아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문제입니다. 존재에 대한 문제는 철학이나 신학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경도된 진화주의자 혹은 진화절대주의자들 중엔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믿고 행동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엔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들도 소수 존재하니까요. 그렇게 존재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일부의 치우친 부류를 저를 포함한 모든 유신진화론자들에게 대입하여 일반화시키며 비방하는 건 올바른 대화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정의한 유신진화론이 야기하는 여러 신학적, 논리적 문제점들은 유신진화론자들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 문제점들을 야기한 진화라는 현상을 눈 가리고 아웅 하듯 거부할 게 아니라 있는 건 있다고 인정하고 수용한 이후 기존의 성경 해석과 다른 여러 교리들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끊임없이 겸손한 자세로 연구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런 연구는 과학을 똑바로 이해한 신학자들의 역할이 클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러한 일을 감당해 줄 신학자가 등장하여 과학과 신학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해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자가 그런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3) 표지그림


표지그림은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숭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사람이 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저 그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폐기된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착오적인 그림인 것이지요. 이젠 다윈의 진화론을 아무도 저 그림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윈은 한 번도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원숭이와 사람 사이에 대를 거듭해서 올라가다 보면 공통조상이 존재할 거라고 예측했을 뿐입니다. 물론 증명한 것도 아니고 관찰한 것도 (증명 및 관찰 불가입니다. 엄청나게 긴 세월 간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었습니다. 다만, 본인이 관찰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가설을 세우고 부분적으로 증명을 했을 따름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불완전한 이론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낱 상상력으로 치부하는 건 과학이 어떤 학문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의 말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저자는 책 속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과학자로서 저는 모욕을 느꼈습니다). 


과학에서 하는 예측은 문학적 상상력과 다릅니다. 오히려 기존의 관찰과 실험 결과를 기반으로 할 수 있는 과학의 아름다운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수학을 사용해서 표현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뉴턴의 방정식 같은 수학공식이 아름답다고 표현하곤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예측은 틀릴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예측이 틀렸다고 해서 과학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 예측을 했던 과학자는 실망할 수 있겠지만 말이지요. 과학은 언제나 그랬듯이, 새롭게 얻은, 예측과 다른 관찰 혹은 실험 결과를 포함하여 새로운 예측을 하게 됩니다. 이런 반복은 종교나 사상과 무관한 가치중립적인 과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윈의 진화론도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원숭이와 사람의 공통조상을 본 적도 없고 증명한 적도 없지만, 여러 다른 관찰 결과들을 종합하여 미루어 예측해 보면 그 공통조상이 존재할 거라고 말하는 게 바로 과학인 것입니다. 결코 무신론을 지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거나 무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히 증명되지 않은 이론을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법칙인 것처럼 오도하여 모든 가치관과 세계관에 접목시킨다면 그것은 과학절대주의 혹은 과학지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불건전한 사상 혹은 철학으로 봐야 적절할 것입니다. 이건 이미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건강한 유신진화론자라면 기원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경계까지만 말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개인의 믿음이 반영된다면 확신에 차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학이 아닌 개인의 믿음이지요. 언급했다시피 새롭게 밝혀진 과학적 사실, 현상들에 반응하여 성경 해석을 수정해야 하는 건 과학자가 아닌 신학자의 몫입니다. 


표지그림이 바로 이런 현상의 단적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표지그림은 과학이 아닌 과학주의, 진화나 진화론이 아닌 진화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비판하는 건 좋습니다만, 이 그림 때문에 과학이나 진화, 혹은 진화론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이 책의 표지그림으로 선택한 의도가 궁금합니다. 저자나 출판사는 과연 무엇을 얻기 위해 이 그림을 선택했던 것일까요? 단지 공부 부족은 아니었을지 의문입니다. 대화라는 단어는 이런 면에서도 부적절하네요. 


(4) 대화


책 제목에 등장하는 '대화'라는 단어는 책 내용과 무관합니다. 대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책을 다 읽은 저에게 제목을 의뢰했다면, 저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의 유신진화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제안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무분별한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의 반복적 사용으로 실재하지도 않는 유령을 상대로 소송을 걸고 자기를 공격했다고 비방하고 더 이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친절한 말들로 비판 및 교정하려고 애쓰며 그 해결책으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대화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이유는 근본주의나 창조과학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으로 신사적으로 대우해 달라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5) 잘못된 지식으로 인한 모순


저자는 진화의 가장 첫 부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변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변이 없이는 어떠한 진화론적 사건 (혹은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합니다. 변이가 생기기 위해서는 유전자가 존재해야 하고,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말은 이미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므로, 저자는 진화가 무에서 유, 혹은 무생물에서 생물을 견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저자는 진화론으로 생명의 기원 혹은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혹은 성경과 반대되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생물 진화의 시작점은 기존 생물이지 무생물이나 무가 아닙니다. 진화는 생물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하려 시도한 적도 없습니다. 그것을 시도한 것은 진화 혹은 진화 이론이 아닌 진화주의일 뿐입니다. 또한 진화가 마치 신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하는 우주적인 법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드는 무신론자들의 철학 혹은 사상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저자는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일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깔고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화는 기원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러려고 시도한 적도 없습니다. 저자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진지하게 싸우고 있는 꼴입니다. 이 점이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화는 관찰 가능한 현상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진화 이론은 그 현상과 현상 이면의 기작을 연구하고 설명하려는 학문인 반면, 진화주의는 과학이 아닐뿐더러 학문이라 할 수도 없는 무신론자들의 썰일 뿐입니다. 저자가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진화론이라는 개념은 진화 혹은 진화 이론 혹은 진화 과학이 아니라 진화주의라는 유령인 것입니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칭하는 유신진화론자는 유신진화론자라기보다는 유신진화주의자라고 혹은 유신진화절대주의자라고 해야 옳아 보입니다. 저는 유신진화론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신진화주의자는 아닙니다. 아마도 저 같은 유신진화론자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저자는 진화론이 무신론을 대변하는 것처럼 우연과 목적 없음을 통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법칙이자 기독교를 위협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처럼 말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자가 주야장천 대적하는 실체는 진화론이 아니라 진화절대주의인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이 아닌 철학이요 사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라는 과학을 배격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전적으로 저자의 잘못으로 보입니다. 즉시 수정하고 사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밝혀내거나 증명한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럴 수조차 없습니다. 다만 그 시공간 안에서의 최선의 합리적인 설명일 뿐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힌 사실들은 언제나 더 정확하고 더 완전한 것으로 수정 및 대체될 여지를 갖습니다. 정치에 영향받지 않고 과학이 신뢰를 받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이런 과학의 자정작용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게 아니라 최선은 언제나 갱신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진화론이라는 단어를 진화주의 혹은 진화우월주의나 진화절대주의라고 바꾼다면 책의 대부분에서 나는 잡음을 상당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자가 저지른 가장 큰 우는 철학이나 사상에 속하는 진화주의를 과학에 속하는 진화 혹은 진화 이론, 진화 과학으로 대치했다는 점, 그래서 엉뚱하게도 성경 혹은 기독교와 과학 사이의 거리를 더 좁히기는커녕 더 벌여놓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파생한 진화절대주의에 반대한다고 애초부터 밝히고 이 책을 썼더라면 저는 이 책을 읽지 마라고 하진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게 됐습니다. 다만 저자의 미흡함과 자가당착에 심심한 위로를 보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를 무신론이나 유물론 혹은 유신진화절대주의로부터 지켜내려고 하는 저자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그런 마음을 저자가 사용한 대화라는 단어가 무색해지지 않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학자이자 목사님이 되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6) 불편하고 제거하거나 수정해야 할 문장들


너무 많아 다 적을 수 없지만 열 문장만 골라보겠습니다.


(6)-1: 26페이지 하단 - 27페이지 상단
| 예를 들어, 진화와 과학을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하게 되면,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음이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거나,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다"라는 발언을 확정적으로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언들은 사실 굉장히 틀린 표현이다. 왜냐하면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과학을 신뢰하거나 심지어 실험 과학과 관련한 일들에 종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지적설계자들과 창조과학회에 속한 많은 이들도 과학자로서 연구와 실험에 참여하거나 과학을 가르치는 위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일반 과학 분야에서도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건전한 기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일반인들 역시 여전히 과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
 >>> 당연히 진화와 과학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진화는 과학적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과학을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진화는 지금도 무신론, 유신론을 떠나 누구나 관찰 가능한 생명 현상입니다. 이런 가치중립적인 자연 현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과연 과학을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자가 예로 든 지적설계자들과 창조과학자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속으로는 스스로 과학자로서 바라보는 과학적 사실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라보는 신앙의 불일치로 인한 괴리를 느낄 것입니다. 괴리를 느끼면서도 일에 종사할 수는 있겠지요. 저 역시 창조과학을 신봉할 때에는 그랬으니까요.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지적설계나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이론만으로 공식적인 학계에서 인정받는 논문을 내고 여러 학회에서 그 내용이 발표가 되어 무신론, 유신론을 떠나 냉철한 과학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여진다면 모를까요. 


(6)-2: 31페이지 상단
| 일부 유신진화론을 지지하는 성경 신학자들은 결국 신구약을 통틀어 중요하게 제시되는 아담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인정하더라도 애매한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
 >>> 그렇다면 저자가 속해 있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을 견지한 신학자들은 아담의 역사성과 의미에 대해 확고한 해석을 하고 있는가요?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지으십니다. 저는 이 문장에서 '흙'에 강세를 두지 않고 '지으십니다'에 강세를 두고 읽습니다.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신학적 메시지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흙이 아닌 모래로 지으셨다 하더라도 저의 믿음은 달리지진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 문장은 하나님의 즉각 창조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난 사람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린 모두가 엄마의 난자와 아빠의 정자가 합쳐진 단 하나의 줄기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하여 발생과정을 거쳐 세상에 태어나지 않나요? 발생생물학을 배우게 되면 마치 거기엔 신의 개입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적절한 시간과 공간에 적절한 신호가 주어져서 적절한 세포들이 분열하고 이동하고 분화하면서 점진적으로 사람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발생과정이 만드는 산물일까요? 아니면 이 글을 쓰는 저나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둘 중 하나를 택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발생과정을 주관하셔서 정확한 시공간에 정확한 세포의 탄생과 분열과 이동과 분화를 인도하셨다고 해석하는 게 과학도 신학도 놓치지 않는 바람직한 해석 아닐까요? 그러나 이런 것이 쉽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입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전성설이라는 과학도 아닌 유사과학이 사람들을 휘어잡고 있었으니까요. 전성설이란 엄마 배 속에서 수정란이 발생하여 사람이 되는 과정 없이 정자나 난자에 사람의 미니어처가 들어 있어서 크기만 커져 태어난다고 했던 말도 안 되는 이론이었답니다. 


(6)-3: 53페이지 하단
| 요컨대, 다윈의 진화론은 존재하는 다양한 생물 종의 발전 과정을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잘 정리해 놓은 이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윈의 상상력이라는 한계를 크게 벗어날 수 없으며, 그러하기에 여러 가지 모순되고 미흡한 점을 노출한다. |
 >>> 제가 후기에서 언급했듯이 과학자의 예측은 문학적 상상력과 다릅니다. 전자는 증거에 기반한 합리적인 추론이고, 후자는 아무런 근거 없는 주관적이고 논리에 맞지 않아도 되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윈이 후자로 종의 기원을 썼다면, 그 책의 명성이 지금까지 전해질 리가 없습니다. 다윈이 독재자이고 세상 모든 과학자들이 그를 추앙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요. 다윈의 진화론이 내포하는 예측들은 어떤 과학자도 인정할 합리적인 증거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예측은 예측이기에 당연히 시대적인 문제 때문에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과학적인 이론이나 논문도 완벽한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며 더 합리적이고 더 구체적이고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답니다. 그러나 이런 불완전함 혹은 미흡함 때문에 최선의 설명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반지성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6)-4: 92페이지 중간
| 보통 '창조과학'을 포털에 검색하면 '사이비 과학'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이때 '사이비'의 의미는 과학으로서 전혀 가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곧 주류가 아니라 아니라는 의미다. 이 시대 주류 과학은 진화론을 토대로 해야 했기 때문에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과학은 비주류, 즉 사이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진화론을 인정하는 측에서 정한 것이기 때문에 대중들은 창조과학을 반과학이나 비과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도 엄연히 자신들의 견해에 대하여 정밀하고 객관적인 과학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창조과학 분야를 연구하고 연구한 내용들을 게재 (publish)함에 있어서는 어느 분야보다도 훨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 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말을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재미있는 건 마지막 문장에 각주가 달렸는데, 자세히 보니 전 세계 과학자들이 내는 논문이 아니라 '한국창조과학회'의 사이트를 참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단락을 읽으며 애처롭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6)-5: 123페이지 하단
|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실제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 세상에 이루신 '역사'를 다룬 책이기에, 우리는 우주의 시작을 유일하게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 그 책을 단지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을 이유로 비유나 상징으로 전환해야 할 이유가 없다. |
 >>> 저자는 지속적으로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강요하고 그것만이 올바른 해석 방법이라 믿는 듯합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계속해서 발견되는 과학적 사실과 사회, 문화적 현상들을 계속 무시하면서 기존에 가졌던 성경 해석을 고수하는 것만이 성경을 대하는 바른 자세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6)-6: 56페이지 상단 & 127페이지 중간 & 131페이지 하단 & 144페이지 하단
| 인간과 하등한 생물들이 어느 한 부분에 가서는 공통 조상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 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들이었기에, 기독교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 | 진화론을 인간의 창조와 발전 과정에 직접적으로 적용했을 때, 인간의 특별성과 탁월성이 더하여지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원숭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으며, 더 나아가 인간이 무기물과도 존재론적으로 차이가 없기에, 우리는 그 존재론적 가치가 하락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 | 그러나 진화론자들에게 아담은 결코 그러한 완성된 수준에 도달한 인물이 아니었다. |
& | 인간이 가장 진화한 동물이라고 주장되고 있는 가운데, |
 >>> 저자는 인간이 가장 고등한 생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는 특별성과 탁월성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을 완성된 수준에 도달한 인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는 이런 문장이 전혀 적혀있지 않습니다. 모두 해석일 뿐이지요. 아마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과 창세기 1:27-28에 의거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에서는 인간이 가장 진화한 생물이라는 결론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가장 진보한 생물이라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등한 생물과 고등한 생물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인간이 우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동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을까요?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보호하고 섬기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월하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도 해석이 하나가 아닌 줄 압니다. 또한 인간이 진화의 최종 단계에 와 있는 생물이라는 생각은 틀렸습니다. 진화는 어마어마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시점에서 보면 모든 종, 모든 생물은 완전한 개체이기도 하지만, 거시적인 시점에서 보면 모든 생물은 여전히 진화 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물에는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그 다양성은 DNA의 변이로 생성되는 것이며,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환경에 따라 분포가 점진적으로 달라지게 되면서 진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주장하는 아담의 완전성은 생물학적으로 근거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며, 과학이 아닌 신학적 해석의 영역에 있다고 보입니다.


(6)-7: 142페이지 중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윈의 진화론'이 천문학과 지질학과 생물학을 아우르는 절대적인 법칙을 제공하고 있다는 세계관을 강요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불합리한 일일 수밖에 없다. |
 >>> 이 문장은 유신진화론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직전에 쓰인 것입니다. 앞서 후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저자는 유신진화론을 진화절대주의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 어떤 과학 이론도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뉴턴의 중력법칙도 거시 우주를 다룰 때에는 맞지 않다고 합니다. 하물며 생물의 진화를 연구하는 진화론이 절대적일 리가 있겠습니까. 저자의 오류는 유신진화론이 불확실하며 논리적 모순을 가지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말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해석하여 믿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과학 이론은 불완전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과학 이론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새로운 과학 현상과 이론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되게 성경 해석을 수정해 나가는 것만이 시대를 막론하고 영영히 남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믿는 방법이 아닐까요. 


(6)-8: 149페이지 중간 & 하단
|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화를 명확하게 증거할 만한 중간 단계의 화석이 발견된 적은 없다. |
& | 물론 진화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화석이 없는 것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화론자들이 화석을 워낙 신뢰하기 때문에 그것을 예로 들어 질문하는 것뿐이지, 실제로 우리가 궁금한 것은 현재 생물 종 안에 반드시 중간 단계의 종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화석에서도 발견된 적 없는 진화의 중간 상태의 생물 종이 실제 세계에 있을 리는 만무하다. |
 >>> 있습니다. 중간 단계의 화석. 지긋지긋한 주장이라 여기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중간이라는 말은 무한하기 때문에 잘 사용해야 합니다. 두 점이 생기면 중간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중간이 발견되면 미지의 중간이 또 생겨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화석에 의지하는 방법은 구시대적입니다. 이젠 분자생물학적인 기법이 동원되어 화석이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답니다. 이 책에는 안타깝게도 화석 얘기에 머물고 있군요. 더 안타까운 사실은 중간 단계의 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고리 종이 무엇인지 공부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6)-9: 211페이지 타이틀 & 223페이지 중간
| 유신진화론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부인한다. |
& | 당연히 우리는 유일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과 권위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단번에 (once for all)', '완전히 (perfectly)'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전혀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전까지 무의 개념이었던 세상에, 시간과 공간과 차원을 만드신 이가, '오직 그의 말씀만으로', '완전한' 창조를 이루셨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
 >>> 위에 옮긴 문장만 봐도 '완전한 창조'라는 저자가 옹호하는 성경 해석에 해당됩니다. 창세기 1-2장을 아무리 읽어 봐도 '완전한'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거든요. '단번에'라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모두 해석인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엄마 배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발생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람은 수정란에서 시작해서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놀랍도록 정교한 프로그램에 의해서 열 달 동안 엄마 배 속에서 사람의 형태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여기서도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만을 고집하고 있으며 그것만이 올바른 성경을 향한 자세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단번에 창조하는 방법만을 저자는 왜 강조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18세기 사람이라면 전성설을 옹호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완전하다는 단어의 정의도 모호합니다. 도대체 완전과 불완전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 역시 전적으로 해석에 달린 문제로 보입니다. 


(6)-10: 284페이지 중간
| 부디 다양한 견해들을 성경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가운데, 각자가 가진 신앙 양심에 의존하여 가장 성경적인 결론을 선택하기 바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과학이나 이성보다 위에 있는 성경의 진술, 하나님의 진술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주장과 사유들은 침묵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은 과학이나 문학, 혹은 철학에 있지 않다. 우리의 모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은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부디 이 책이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기보다는 성경적 창조론자들과 유신진화론자들 간의 '건전한 대화'의 교두보가 되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진화론 문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찢어지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가운데 하나가 되어 갈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
 >>>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성경의 진술', '하나님의 진술', '성경'은 문자주의적 해석을 말하는 듯합니다. 과학은 한 번도 성경 해석에 도전장을 내민 적이 없습니다. 과학만능주의자들이나 그런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과학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학문이라 믿습니다. 과학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계획을 더 깊고 풍성히 깨닫게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을 하리라 저는 믿습니다. 성경과 과학 중 과학을 버려야 성경을 수호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분법으로 나누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풍토가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이 책이 '건전한 대화'의 교두보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책 덕분에 근본주의 기독교 혹은 창조과학을 저는 더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말한 대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서로를 잘 알아야겠지요. 먼저 배우고 경청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과학에서 늘 회자되던 이야기를 정리해서 이 책에 사용한 것만 봐도,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의 무분별한 사용만 보더라도 저자에게서 그런 자세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부디 진화를 사실로 인정하고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해서 믿을 수 있는 신학적 해석을 더 연구하는 신학자로 거듭나길 소원합니다. 미국에 바이오로고스라는 단체가 있고 한국에는 과신대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과신대에서 제공하는 다수의 유익한 강의들과 책들과 정보들이 많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하나씩 배워나가는 방법이 그 시작으로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창조과학에 물들어 있다가 그것의 한계를 보고 회심한 여러 신학자와 과학자들의 얘기도 들어보시길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그렇게 해서 요원하기만 했던 대화가 부디 가능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국 교회의 건강한 미래도 어쩌면 이런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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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사람들 1 열린책들 세계문학 12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윤우섭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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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의 시작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상처받은 사람들‘을 다시 읽고

물리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분량이 만만치 않다. 단편, 중편, 장편을 나누는 기준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지난 작품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이 짧은 장편이라고 할 때, 이 작품 '상처받은 사람들'은 긴 장편에 속한다. 분량이 두 배 가량이고, 도스토옙스키 초중기 작품 중 가장 길다 (열린책들 버전으로 600 페이지가 넘는다). 일견 벽돌을 떠올리게 하는 후기작인 5대 장편을 읽어내기 위한 중간단계, 혹은 연습용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은 후기로 접어들수록 분량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도스토옙스키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제목 정도는 들어봤음직한 작품들이 모두 후기작에 속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도스토옙스키의 진면목은 단편보다는 장편에서 도드라진다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도 그렇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보고 싶어 한두 작품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당연하다는 듯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고른다. 모두 후기작품들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출간순으로 읽어나가는 독자가 있다면, 혹은 중기작품도 읽어보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나는 이 작품을 절대 놓치지 마라고 권하고 싶다. 물리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중기작을 대표한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재독 하면서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다. 물리적인 면은 이미 얘기했으니 내용적인 면에서 왜 그러한지 아래에 조금 더 적어보겠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분량이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출간 순으로 볼 때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주인공뿐만이 아닌 여러 다른 등장인물들에 대한 설정 및 묘사가 본격적으로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캐릭터와 서사를 가진다. 그 결과 서사의 축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축만이 아닌, 비록 규모는 작더라도,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두세 개의 축이 한 작품 안에 공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조금 더 복잡하고 조금 더 방대한 이야기 숲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물리적인 분량을 제외하고 내가 이 작품을 도스토옙스키의 공식적인 첫 장편소설이라고 분류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서사의 축들은 도스토옙스키의 타고난 통찰력 덕분에 한층 더 깊어진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가 창조해 낸 인물들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그들의 숨겨진 심리까지도 발려내고 독자들로부터 경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게다가 도스토옙스키만의 고유한 주사현미경은 주인공만 집중하지 않고 여러 인물들의 심리까지도 들여다보기 때문에 독자의 경탄은 다중적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과 뭔가 다르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다중성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분신’은 주인공 골랴드낀에 대한 서사의 축과 그의 심리 분석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이에 반하여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의 경우는 아저씨 예고르와 식객 포마, 이 두 인물에 대한 서사와 분석이 대립되며 펼쳐진다. 분량이 증가함에 따라 인물 구도가 복잡해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이 작품 ‘상처받은 사람들’ 역시 이 흐름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주인공인 알료샤와 나따샤는 물론 화자인 바냐, 얄료샤의 아버지인 발꼬프스키 공작, 나따샤의 아버지인 이흐메네프, 바냐의 친구이자 정보원인 마슬로보예프, 그리고 공작의 숨겨진 딸이자 학대받는 상황에서 태어나고 자라 고아가 되어버린 넬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의 축이 혼재하고, 그들의 캐릭터가 꽤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것들이 위에서 언급한 다중성의 실체일 것이다. 

초독 때에도 느꼈지만, 이번에도 나는 발꼬프스키 공작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떠올렸다. 표도르의 파렴치함과 거침없는 부도덕함, 그리고 탐욕스러움과 방탕함은 약 20년 전에 쓰인 이 작품 ‘상처받은 사람들’ 속 발꼬프스키 공작의 모습으로 이미 형상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발꼬프스키는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전신인 셈이다. 그런데 비록 추잡한 캐릭터지만, 발꼬프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표도르가 살해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살해되지는 않는다. 살해는커녕 그 어떤 위협도 받지 않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데, 그가 이렇게 활개를 칠 수 있었던 이유가 나는 이 작품 속에 스메르쟈꼬프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악의 화신이 등장하지 않는 얌전한 소설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흥미롭게도, 남을 해치는 악인과 그 악인이 저지르는 살인은 후기작에 등장하는 단골소재 중 하나다. 도스토옙스키는 초기작에서는 정신병원에 보내는 정도로 문제적인 인물들을 처리했다면, 후기작에서는 그들에게 죽음을 부여하거나 (자살) 남을 죽이게 만드는 (살인) 역할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중기 대표작이라고 평가하는 이 작품은 이러한 도스토옙스키 변화의 중간단계를 볼 수 있는 의의도 가진다. 자살도 살인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죽음이라는 소재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고, 그 죽음은 마치 발꼬프스키 공작을 간접적인 살인자라고 비난이라도 하려는 듯한 형태로 넬리와 넬리 엄마와 넬리 할아버지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강자는 끝까지 강자로 남고, 약자도 끝까지 약자로 남는다는 메시지로도 이 작품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작품을 읽다가 전세 역전을 기대했건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해당될진대 유독 죽음은 약자에게만 불어닥친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 작품은 '바냐'라는 이름의 한 작가가 일인칭 화자로 등장한다. 작품 속에서 그는 현실 속 도스토옙스키와 동일하게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출간하고 화려한 데뷔를 했으며 생계형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경험이 그대로 담겨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냐는 도스토옙스키의 자서전적 분신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는 사건에 직접 개입하기도 하고, 이미 다 지난 일들을 종합하여 회고록 형식으로 들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바냐는 화자일 뿐 주인공은 따로 있다. 알료샤와 나따샤가 바로 그들이다. 나는 이 작품을 재독 하면서 특별히 이 두 주인공의 캐릭터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내가 이 작품을 중기 대표작이라고 평가하는 두 번째 이유와 관련이 깊다. 

첫 번째 이유가 양적인 측면을 말한다면 두 번째 이유는 질적인 측면에 대해서다. 도스토옙스키는 인물 설정과 묘사에 있어서, 특히 알료샤와 나따샤의 관계를 선악의 대립 혹은 단순한 연인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을 도스토옙스키의 이전 작품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로 만들어 선보인다.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에서 예고르와 포마의 대립 구도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했다. 나는 예고르를 백치 (유로지비)의 원형으로 보았고, 포마를 골랴드낀의 변주로 해석했다. 그러나 알료샤와 나따샤의 관계는 독특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재독 하면서 내 눈에 띈 구도는 선악이나 남녀의 이분법이 아닌 각각 천진난만함과 성숙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알료샤는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 혹은 순수함을 대변하는 인물로, 나따샤는 아이와 반대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어른의 성숙함 혹은 어른스러움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를 배우자로 믿고 함께 할 만한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알료샤에게는 성숙함이, 나따샤에게는 천진난만함이 부재한 것처럼 보였다. 둘은 서로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처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그들이 고백하는 사랑은 동경이라고 해야 할 그 어떤 감정에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서로에게서 서로에게 없는 여집합을 발견하고 추앙하는 마음이 들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 부부가 되기에는 함께 지난한 일상을 헤쳐나갈 동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알료샤는 나따샤와 함께 있을 때면 지루함을 느낀다고 나오며, 나따샤 역시 알료샤와 함께 있을 땐 알료샤의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고는 그 결핍을 자기가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마음 아파한다. 어쩌면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작품 마지막 페이지에 나따샤가 언급하듯 한 여름밤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서로가 스스로 깨닫게 되는 과정이 이 작품의 중심 서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록 이 작품이 물리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 본격적인 장편소설로 형태를 갖추는 시초라는 의의를 갖지만, 후기작품과 비교할 때 아무래도 엉성하고 석연찮은 부분이 눈에 띈다. 먼저는 화자 바냐의 존재감이다. 작품을 이루는 여러 서사의 축에 모두 관여하는 위치에 놓인 주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은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바냐는 작품 초반부터 나따샤와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적임자로 등장한다. 나따샤가 바냐가 아닌 알료샤를 택하고 바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들은 솔직히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나로서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냐는 성인군자인가, 하는 의문을 좀처럼 제거할 수 없었다. 만약 이 작품의 후속작이 존재했다면 그가 나따샤의 남편으로 등장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여기에도 도스토옙스키의 숨은 의도가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냐는 가난한 청년이었고 관직과 상관없는 생계형 작가였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자서전적 분신인 바냐로부터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그에게 생계형 작가의 현실적 삶을 그대로 투영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아쉬운 부분은 도스토옙스키가 발꼬프스키 공작에게 고삐를 좀 더 풀었으면 좋았겠다는 점이다. 빌런이 빌런다워야 영화나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 법이고, 어둠이 더 어두워야 한 줄기 빛의 존재와 의미가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흡한 점들마저도 나는 좋기만 하다. 이렇게 출간순으로 도스토옙스키 전작을 읽어나가는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초독 때 몰랐던 여러 부분들을 재독 하면서 알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가진 불완전함이야말로 이 작품이 중기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가장 중요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어느 부분에서는 상처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여전히 꿈꾼다. 자기 객관화를 끊임없이 지향하고 어른다운 성숙함을 보이면서도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을 소유하고 있는 자. 눈이 깊으면서도 탁하지 않고 맑은 자. 곧 나따샤와 알료샤로 분리되지 않고 둘이 한 몸으로 이루어진 인격체가 되어가길 소망한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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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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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삶 - 타인의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는 독서의 즐거움
C. S. 루이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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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힘 그리고 읽고 쓰는 삶


C. S. 루이스 저, '책 읽는 삶'을 읽고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의 이 책은 루이스의 여러 저작으로부터 독서에 관련된 문장들을 선별하여 엮은 것이다. 루이스의 작품을 두루 섭렵한 독자라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제목이나 프롤로그 격의 '엮은이의 글'을 읽으면 곧장 이 책이 읽고 싶어질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루이스를 꽤 읽은 나로선 사실 정독할 만한 책은 아니었다. 조금은 낚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낚여보는 것도 괜찮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꽤 유쾌한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길에서 며칠간 십여 분 정도씩 읽어나가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책이었다. 


루이스가 책, 특히 문학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에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꼭 알고 넘어가면 좋은 것은 이 책의 제목 '책 읽는 삶'은 루이스가 실제로 살았던 삶이라는 사실이다. 조금 더 자세히 묘사하자면 '책 읽고 쓰는 삶'이라 할 수 있을 테고, 이를 좀 더 일반화시키면 '읽고 쓰는 삶'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정말 24시간 활자의 바다에서 산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범상치 않은 저작들의 출처를 그가 타고난 작가라는 이유에서만 찾는 것은 무례한 처사다. 그가 읽기와 쓰기에 들였던 시간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문학에 대해, 독서에 대해, 독서모임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이 내겐 낯설지 않고 반가웠다. 나는 루이스의 변증서보다 소설을 좋아한다. 아마 루이스 역시 그러지 않았을까, 혹은 독자가 그러길 원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에게 있어 책과 글이란 상상력이 전제된 열매였다. 상상력은 곧 책과 글의 생명력과도 같았다. 루이스는 어린아이에게 신화를 읽히고 동화를 읽혀서 거인과 용과 난쟁이와 괴물로 인해 무서움을 느끼도록 허락하는 편이 강도나 도둑이나 강간범이나 살인자로 인해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또한 허구가 현실을 능가하고, 허구가 현실보다 우월할 수 있으며, 허구 덕분에 현실을 등지는 게 아니라 허구 덕분에 오히려 현실을 더욱 견뎌내고 극복하며 살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루이스가 현실주의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다. 루이스가 말했듯 나도 인간은 오히려 허구가 전제된 문학을 통해 현실을 더욱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학의 힘을 믿는다. 문학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지식 전달 위주로 쓰인 비문학보다 흥미를 전제로 하고 상상력과 허구로 옷을 입고 그 안에서 깊은 통찰을 깨닫게 해 주는 문학을 내가 더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루이스 발톱의 때도 되지 못하겠지만, 루이스와 이런 부분에서 같은 방향이라서, 이 또한 다행이라 생각한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15.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https://rtmodel.tistory.com/1658

16. 인간 폐지: https://rtmodel.tistory.com/1662

17. 책 읽는 삶: https://rtmodel.tistory.com/1742


#두란노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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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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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대단한 선택


클레어 키건 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클레어 키건의 문장들은 일견 건조하게 느껴진다. 따로 떼어내서 보면 실제로 그래 보인다. 그러나 그 문장들이 한데 모여 단락을 이루고, 그 단락들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되면 놀랍게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한다. 태연하고 무심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니 누구보다 섬세하고 애정 어린 사람의 손길임을 문득 깨달았을 때와 같은 느낌일까. 그러므로 건조하게 느껴진 건 선입견으로 가득한 내 첫인상의 극히 일면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애정 없음일 뿐 저자의 애정 없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려한 수사 없이도 이야기를 충분히 이끌고 갈 수 있는 저자의 저력이라 이해하는 편이 옳다는 생각이다. 또한 중첩되는 문장도 불필요한 문장도 찾아볼 수 없이 모든 문장이 유기적으로 짜인, 지극히 경제적이고 효율이 극대화된 글이 바로 키건의 글이 아닌가 한다. 신형철이 말한 '정확한' 글쓰기의 실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키건의 작품엔 노트에 옮겨두고픈 명문도 많다. 무엇보다 압축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의 힘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아, 살면서 동시대에 이런 작가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리라.


그래서일까. ’맡겨진 소녀’에 이어 나는 책장에 일 년 넘게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책들도 무시하고 최근에 책장에 꽂힌, 작년 출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 책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어젯밤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읽고 있었다. 


‘맡겨진 소녀’가 사소한 일상의 조각을 한 폭의 감성적인 수채화로 담아냈다면,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제목과 달리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들을 다룬다. 내용 면에서 나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떠올렸다. 모두 수치스럽고 가슴 아픈 인간 역사의 단면을 중심 소재로 삼아 작가의 상상력을 입혀 소설화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뤘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그리고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18-20세기 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합세하여 ‘타락한 여성들’이라는 명분으로 미혼모를 포함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층 여성들을 집단 수용하여 강제 노동시키고 학대했던 ‘막달레나 세탁소’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공교롭게도 수녀원이었다. 성스러워야 할 장소는 인권유린의 현장이 되었다. 수녀들은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그들을 학대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흔적도 기록도 없이 어머니를 잃어야 했다. 아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죄'라는 명목을 들이대어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죄와 판단은 더 큰 죄악이 되었다. 한 사람을 보호하고 교화시키려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살인한 결과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지울 수 없는 피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은 빌 펄롱, 때는 그 어느 겨울보다 추웠던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빌 펄롱은 석탄을 보관하고 배달한다. 한파가 몰아쳐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그래봤자 아내와 다섯 딸로 이뤄진 한 가족의 끼니를 거르지 않고, 또 큰 빚을 지지 않을 정도로 삶을 겨우 지탱해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에겐 여유로운 것이 없었다. 하지만 부족한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매일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며 그는 요즈음 뭔지 모를 공허를 느낀다. 


빌의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빌은 뒤늦게 어머니에게 자신이 미처 물어보지 못한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빌은 미혼모의 아들이다. 비록 어머니는 하녀 신세로 살아가는 저소득층에 속했고, 아버지는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지만, 빌은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 기억을 평생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를 끝까지 보호해 주고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살 수 있게 해 준 미시즈 윌슨을 은인으로 여긴다. 미시즈 윌슨은 빌의 어머니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을 때에도 그녀를 내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그건 은혜였다. 특히 가족들 모두가 그녀를 버렸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빌은 그렇게 자라고 결혼도 해서 딸을 다섯이나 낳았다. 


하지만 빌은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흔적도 없이, 아무런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이, 어디론가 이슬처럼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빌의 어머니도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아일랜드 정부의 손아귀에 잡혀 수녀원의 탈을 쓴 막달레나 세탁소에 수용되어 학대를 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시즈 윌슨은 조용히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어쩌면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일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단한 선택이었지만, 결코 큰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사소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시즈 윌슨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빌의 어머니도 빌도 비극적인 운명에 놓이지 않을 수 있었다. 미시즈 윌슨의 선택이 그녀 자신에겐 사소했을지 모르지만, 빌의 어머니와 빌에게는 인생 전체였다. 


빌이 느끼는 공허가 어쩌면 부채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석탄 배달을 하러 수녀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소녀를 보고 난 이후 그것은 눈덩이처럼 커졌을 것이다. 석탄 창고에 갇혀 밤새 추위에 떨다가 빌에게 우연찮게 발견된 그 소녀는 학대받는 아이였다. 막달레나 세탁소에 잡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였다. 그리고 그 소녀는 평행우주 속 빌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 빌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정도면 살 만하다고 여기며 감사하게 살고 있었지만, 그 소녀를 본 순간 자신의 평안한 삶이 결코 평안해선 안 되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던 듯하다. 빌은 크리스마스의 즐거움도 잊은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가 몰래 수녀원을 다시 찾아 그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사소하지만 대단한,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동네 주민들을 마주친다. 빌은 잠시 자신의 행동이 맞는 것인지 갈등하고 망설이기도 한다. 앞으로의 일들이 그려져 염려되기도 한다. 하지만 꿋꿋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희열을 느낀다. 공허가 사라짐을 느낀다. 비로소 은혜로 비롯된 삶의 향방을 발견한 것이었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두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의 합작이었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민들의 암묵적 묵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빌은 몰랐지만, 그의 아내 아일린은 동네 주민들처럼 수녀원의 은밀한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딸 다섯이 그곳의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로 만족해했다. 그들은 그들 사정이고, 내 딸은 내 소관이라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일린은 빌을 제외한 많은 주민들을 대표하는 이름이지 않을까, 하고 나는 해석해 본다. 작품에는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빌이 그 소녀와 함께 집에 들어섰을 때 아일린의 표정과 반응이 궁금하다. 그리고 조용히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빌일 수 있는지, 혹시 아일린이나 동네 주민에 머물고 있진 않은지.


불의를 묵인하는 건 사소하다. 정의를 지키기 위한 작은 선택을 하는 것 또한 사소하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대단한 일이다. 큰 파급효과를 낸다. 불의를 묵인한 자는 불의 앞에서 눈을 돌리고 정의 앞에서도 눈을 돌리게 된다. 눈을 둘 데가 없어 그저 허공이나 바닥만 쳐다보게 된다. 방어적이고 사적이게 된다. 하지만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작은 선택을 한 자는 불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더라도 타자를 살려내는 일에 몸을 던진다. 그것이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상관없다. 살리는 일이면 된다.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이라도 좋다. 살릴 수 있다. 나의 사소한 선택은 대단한 선택이 될 수 있다. 


클레어 키건의 두 작품을 내리읽으며 그녀의 문장들 속에서 사흘을 보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글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된다. 문학의 힘을 다시금 믿게 된다. 


책을 다 읽고 책 앞부분에 적힌 헌사와 그 뒤에 따라오는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을 발췌한 몇 문장도 다시 읽었다. 읽히지 않았던 것들이 읽혔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깨달아졌다. 행간이 이해가 되고 왜 그 글이 거기에 쓰여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왜 크리스마스 시즌인지, 왜 그해 12월엔 까마귀의 달이 되어야만 했는지도 덩달아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클레어 키건 읽기

1. 맡겨진 소녀: https://rtmodel.tistory.com/1740

2. 이토록 사소한 것들: https://rtmodel.tistory.com/1741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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